-축구 문외한이 프리미어리그 감독 되는 미국 드라마 ‘테드 라소’, 실제로도 가능할까

-안드레 비야르-보아스, 그레고리오 만사노 등 비선수 출신 감독 성공 사례

-선수 능력과 감독 능력은 별개…감독은 소통 능력과 관리자 능력 필수

-한국 여자배구 4강 이끈 비선출 감독 라바리니…감독에게 요구되는 역할이 변화하고 있다

환호하는 라바리니 감독(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환호하는 라바리니 감독(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엠스플뉴스]

2020년 에미상 20개 부문 후보에 오른 미국 드라마 ‘테드 라소’는 축구(soccer) 관련 경력이 전혀 없지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1부팀 감독이 된 미식축구(football) 지도자 이야기다.

코미디언 제이슨 서디키스가 맡은 주인공 테드 라소는 오프사이드와 승강제 시스템도 모를 정도로 축구 문외한이지만 특유의 낙천적인 태도와 인간적 매력,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언더독 정신으로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인물이다. 드라마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주인공 테드가 대학 미식축구 팀에서 성공을 거둔 지도 방식을 고스란히 적용해 영국 축구팀에서도 성공을 거두는 과정이다.


테드는 선수들과의 인간적인 교류로 신뢰를 얻고, 제멋대로인 사고뭉치 선수도 자기편으로 만든다. 잠재력은 있지만 치명적 결함이 있는 선수의 능력을 끌어내고, 선수단에 동기를 부여해 끈끈한 원 팀으로 만든다. 처음에는 테드를 인정하지 않았던 구단 직원, 선수, 팬들도 결국엔 테드에게 동화돼 하나가 된다. 심지어 팀을 망가뜨려 전남편에게 복수할 목적으로 테드를 영입한 새 구단주 레베카마저도.

선수에게 필요한 능력과 감독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별개

축구 문외한 테드 라소가 영국 축구 프리미어리그 감독을 맡아 벌어지는 이야기, 테드 라소.
축구 문외한 테드 라소가 영국 축구 프리미어리그 감독을 맡아 벌어지는 이야기, 테드 라소.

온갖 과장과 비현실적인 요소로 가득하긴 하지만, 드라마는 테드 라소가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감독으로서 인정받는 과정을 꽤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물론 현실에서 테드처럼 풋볼과 사커의 차이도 모르는 사람이 감독이 되는 건 너무 심한 농담이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선수 경력이 일천한 사람이 감독으로 성공한 사례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특히 유럽이나 남미 축구에선 비선수 출신으로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감독을 종종 볼 수 있다. 바로 떠오르는 사례는 안드레 비야르-보아스다. 선수보다는 축구팬 출신에 더 가까운 보아스는 16살 때 FC 포르트 감독 바비 롭슨과의 인연이 계기가 돼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만 17세 나이에 스코틀랜드에서 UEFA C급 지도자 자격증을 따낸 그는 2000년 만 23세 나이로 버진아일랜드 국가대표팀의 기술위원장 겸 감독을 맡아 2002 월드컵 북중미 예선을 지휘했다.

그레고리오 만사노도 학창시절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지도자가 된 사례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만사노는 고교 교사로 일하다 학교 축구클럽을 지도하며 축구계에 복귀, 프리메라리가에서 주목받는 감독이 됐다. 은행원으로 일하며 틈틈이 아마추어 선수로 뛰던 마우리시오 사리, 비선출 최초로 브라질 축구 대표팀을 우승으로 이끈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도 있다.

축구를 제대로 해보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축구 감독을 맡아서 세계적인 선수들을 데리고 경기할 수 있는 것일까. 이는 선수에게 필요한 능력과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능력이 서로 별개이기 때문이다. 성공한 선수라야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오랜 고정관념은 점차 힘을 잃어가는 추세다. 만약 선수로서의 경험이 지도자로서의 역량과 직결된다면, 스타 출신 대부분이 감독으로 성공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감독보다 수십, 수백 배 많은 돈을 받는 요즘 스타 선수들에게 선수들을 휘어잡는 선수 출신 감독의 카리스마는 옛날 방식이다. 선수 출신이라야 선수 마음을 잘 이해한다는 것도 편견이다. 선수 시절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하지만, 감독들의 현역 시절과 요즘 선수들은 운동 환경도 다르고 세대도 사고방식도 전혀 다르다. ‘라떼’ 경험만 갖고 젊은 선수들을 쉽게 판단했다간 실패는 필연이다. 또 스타 출신이라고 자신이 현역 시절 몸으로 했던 플레이의 원리를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 몸으로 움직이는 것과 남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건 전혀 다른 영역이다.

물론 선수 시절의 경험과 명성, 든든한 배경이 있다면 감독직을 수행하는 데 유리한 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요소다. 감독에겐 감독에게 요구되는 전문적인 ‘기술’이 있다. 선수들과 관계를 잘 형성하고, 선수들이 각자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돕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필수다. 다양한 개성과 목표와 능력을 지닌 선수들을 하나로 아우르며 잘 관리하는 관리자 역할도 중요하다.

팀의 능력을 극대화해 경기에서 승리하려면 이론적으로 해박하고 전술적인 역량도 뛰어나야 한다. 이런 커뮤니케이션+관리+전술 능력은 선수 시절 잘했다고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 노력하고 공부하고 경험을 쌓으며 준비하는 과정을 거쳐야 감독에게 필요한 능력을 얻을 수 있다.

‘배구 해 본 적도 없는’ 라바리니는 어떻게 성공한 배구 감독이 됐나

선수들에게 작전을 설명하는 라바리니(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선수들에게 작전을 설명하는 라바리니(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을 올림픽 4강으로 이끈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은 선수와 지도자의 자격이 전혀 별개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라바리니는 배구 선수 출신이 아니다. 프로 레벨은 물론 아마추어나 유소년 레벨에서조차 선수 경험이 전혀 없다. 그 스스로 “한 번도 배구를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날고 기는 슈퍼스타 출신 배구 감독들과는 출발점부터가 다르다.

대신 라바리니는 아주 젊을 때부터 지도자의 길에 뜻을 두고 준비했다. 16세에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이탈리아 클럽팀과 청소년 여자대표팀, 독일 여자대표팀 등을 두루 거쳤다. 이탈리아 청소년 대표팀 코치로 2003년과 2007년도 유럽청소년선수권대회 금메달을 땄고, 2017년부터는 브라질 벨로호리존테의 미나스테니스 클럽에서 감독을 맡았다. 그는 “배구라는 운동 자체를 좋아하기보다 감독으로서 팀을 이끌고, 선수들을 관리하고, 큰 꿈을 향해 나가는 일을 좋아한다”고 했다.

각종 영상과 사진 속 라바리니의 모습을 보면 드라마 주인공 테드 라소가 떠오른다. 라바리니가 김연경와 ‘셀카’를 찍다 군소리를 듣는 모습이 담긴 영상엔 선수들과 격의없이 소통하는 그의 장점이 잘 드러난다. 라바리니는 선수들과 농담을 주고받고, 마치 팬인 것처럼 응원한다. 한일전에서 승리한 뒤 코트에 뛰어들어 선수들과 함께 환호하는 모습은 배구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팀을 하나로 묶는 ‘펩 토크’에도 능하다. 터키전 승리 후 언론 인터뷰에서 라바리니는 “선수들에게 항상 ‘내가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선수들이 스스로 가능성을 연 것 같아 고맙다”고 했다. 영화 ‘애니 기븐 선데이’에 나오는 미식축구 감독 알 파치노가 부럽지 않다.

축구 문외한인 테드 라소와 달리 라바리니는 배구 지식과 이론에도 해박하다. 여자배구 최고 명문 터키 바키프방크 소속인 세자르 에르난데스 수석코치와 엔지니어 출신 안드레아 비아시올리 전력분석관이 라바리니를 돕는다. 여자배구 대표팀은 올림픽 준비부터 터키전 승리까지 일련의 과정에서 치밀한 분석과 판단력, 정확한 전술로 난관을 뛰어넘었다. 쌍둥이 자매가 빠진 자리엔 국가대표 경험 없는 선수들을 과감하게 발탁했다.

일본전 5세트에선 날카로운 분석을 바탕으로 한 수비 전술로 상대 공격을 차단했다. 신체조건이 우월한 터키전에선 서브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춰 승리를 가져왔다. 이 경기에선 5세트에 교체 투입된 박은진의 강력한 서브가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지식과 경험에 소통 능력까지 감독에게 필요한 능력을 고루 갖춘 라바리니에게 배구를 직접 해본 경험의 유무는 중요한 게 아니다.

비선수 출신의 지도력이 선수 출신보다 낫다거나, 선수 출신 지도자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의미로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선수 출신에겐 비선출이 죽었다 깨어나도 따라잡을 수 없는 장점이 많다. 명선수 출신이 지도 능력을 발휘해 명지도자가 된 사례도 적지 않다. 선수 은퇴 후 열심히 노력해 좋은 지도자가 된 수많은 예를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의 스포츠 지도자에게 과거와는 다른 종류의 능력이 요구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초엘리트 선수들이 활약하는 NBA 무대에서도 최근 절반 이상의 팀에서 무명선수 출신 감독이 사령탑을 맡고 있다. 미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선 마이너리그 선수 경험조차 없는 감독도 등장했다. 한국프로야구에서도 최근엔 선수 시절 크게 빛을 보지 못한 감독 가운데 성공 사례가 나오고 있다. 선수로서 성공했던 인물이 감독으로서도 성공하려면 더 치열한 고민과 노력, 그리고 준비가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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