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는 축구와 육상, 권투뿐인 줄 알았던 소년, ‘키 크다’는 이유로 농구공을 잡았다

-“연·고대 제안 뿌리치고 한양대 선택한 이유? 1학년 때부터 많은 시간 뛰고 싶었다 ”

-“이상민, 조성원, 조니 맥도웰 등은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였어”

-“경기 후 웨이트 트레이닝을 빼먹지 않은 게 꾸준한 경기력의 비결이었어”

-“코트 위에선 은퇴 시즌 제외하고 한 번도 웃지 않았다”

한국 농구 레전드로 불리는 전주 KCC 이지스 추승균 전 감독(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한국 농구 레전드로 불리는 전주 KCC 이지스 추승균 전 감독(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용인]

소리 없이 강한 남자

농구계는 전주 KCC 이지스 프랜차이즈 스타 추승균 전 감독을 이렇게 부른다.

1997-1998시즌 프로농구 선수로 데뷔한 추 감독은 은퇴를 선언한 2011-2012시즌까지 많은 기록을 남겼다.

추 감독은 KBL(한국프로농구) 통산 738경기에서 뛰며 1만 19득점(역대 3위), 1천715리바운드(15위), 2천66어시스트(8위), 552스틸(13위)을 기록했다. 챔피언 결정전 우승 경험은 무려 5회다. 챔피언 결정전 MVP 1회(2008-2009), 자유투상 6회, 최우수 수비상 2회, 수비 5걸 7회 등 상복도 넘쳤다.

태극마크를 달고선 1998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은메달,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 획득에 일조했다.

은퇴 후인 2012-2013시즌부턴 KCC 코치 생활을 시작해 2015년 2월 감독대행으로 지휘봉을 잡았다. 2015-2016시즌부턴 정식 감독으로 팀을 이끌었다. 첫해 정규리그 우승을 일군 추 감독은 2017-2018시즌엔 팀을 4강 플레이오프에 올려놨다.

엠스플뉴스는 2018년 11월 15일 KCC 지휘봉을 내려놓고 새 출발을 알린 추 감독을 만났다. 지금부터 프로농구 선수를 꿈꾸는 학생선수를 가르치는 추 감독의 농구 인생으로 들어가 보자.

키가 커서 잡은 농구공, KBL 레전드의 시작을 알리다

대전 현대 걸리버스 시절 추승균(사진 오른쪽)(사진=KBL)
대전 현대 걸리버스 시절 추승균(사진 오른쪽)(사진=KBL)

감독께선 한국 농구 레전드로 불립니다. 어릴 적부터 농구를 좋아한 겁니까.

초등학교 4학년 올라갈 때 반에서 키가 가장 컸습니다.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키가 커서 시작한 거죠(웃음). 처음엔 농구가 뭔지 몰랐어요. 친구들과 뛰어노는 건 좋아했지만 운동을 특별히 좋아한 것도 아니었죠. 한국 스포츠는 축구와 육상, 권투가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챙겨보시는 게 축구와 권투, 육상이었거든요.

키가 크다는 이유로 농구를 시작한 거군요.

농구선수가 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죠(웃음). 농구를 시작한 1년은 코트를 밟지 못했어요. 드리블, 패스, 슛 등 기본기를 갈고닦는 데 주력했죠. 일과가 똑같은 까닭에 매우 힘들었습니다. 지루했고요.

운동에 흥미가 없는 상태에서 농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만둘 생각은 안 했습니까.

기본기 훈련하면서 선배들 경기 뛰는 거 보는 데 재밌었어요. 1980년 중반엔 고향인 부산에서 농구 대회도 많이 했습니다. 잘하는 선수들 보면서 꿈을 키운 거죠. 언젠가 저 코트 위에서 중심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거 같아요. 경기에 뛰기 위해선 기본기를 잘 다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훈련에만 매진했습니다.

감독께선 KBL 최고의 스몰포워드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학생선수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는지 궁금합니다.

항상 나를 객관적으로 평가했어요. 저는 냉정하게 재능이 있는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슛 감각을 타고나거나 점프가 높지 않았어요. 경쟁자보다 많은 땀을 흘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죠. 초심을 잃지 않고 농구에만 집중하던 중 실력이 확 좋아진다고 느낀 때가 있었어요.

그게 언제입니까.

매일 태극마크를 달고 코트를 누비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갈 때 헛된 꿈이 아니겠다란 걸 느꼈죠. 코트에서 내가 생각한 대로 플레이가 되는 거예요. 농구가 더 재밌었죠. 하지만,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더 압박했어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더 땀 흘려야 태극마크를 달 수 있다고 생각했죠.

감독께선 학생선수 시절부터 많은 땀을 흘렸습니다. 그 결과 농구계로부터 대형 유망주로 인정받았어요. 그런 감독께서 연·고대나 중앙대가 아닌 한양대로 진학한 이유가 있습니까.

고교 시절 최고의 선수로 불렸죠(웃음). 선배들이 농담으로 이런 얘길 해요. ‘그 시절에 랭킹 1~3위 안에 안 들어본 프로농구 선수가 어디 있느냐’고. 대학 진학을 앞두고 연·고대와 중앙대 등에서 오라고 한 게 사실이에요. 부모님께서도 최고로 불리는 대학 진학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전 생각이 달랐어요.

생각이 달랐다?

최고로 불리는 선수가 즐비한 대학에서 몇 분이나 뛸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매일 새벽, 오전, 오후, 야간 훈련을 한다고 경기당 평균 10분은 뛸까 수백 번 고민했죠. 1학년 때부터 경기에 뛰고 싶었어요. 그래야 더 큰 선수로 성장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한양대로 진학한 건 이 때문이에요. 결정을 내리고 한동안 밥을 못 먹었습니다.

밥이요?

어머니께선 ‘무조건 연·고대를 가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 말을 듣지 않고 한양대에 입학 원서를 낸 거죠. 두 달 동안 밥을 안 해주셨습니다(웃음). 하지만, 후회는 없었어요.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많은 시간을 뛰었습니다. 최고로 불리는 선수들과 경쟁하면서 큰 성장을 이룰 수 있었죠. 일찍부터 농구계에 이름을 알리기도 했고요.

농구 명문대로 진학하지 않은 걸 후회한 적은 없습니까.

2학년 올라갈 때 후회한 적이 있어요. 내가 아무리 잘해도 매 경기 패배하니까 열 받더라고(웃음). 선·후배들과 똘똘 뭉쳐 죽을힘을 다했지만 한계가 있었어요. 당시 한국 농구 최고의 팀으로 군림한 연세대전에선 큰 격차를 느꼈습니다. 베스트 5는 물론 식스맨까지 약점을 찾기 힘든 팀이었죠.

감독께선 대학 4년 내내 주전으로 뛴 1997년 대전 현대 다이넷에 입단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현대란 팀을 참 좋아했어요. 다른 팀에서도 제안이 있었지만 큰 고민하지 않았죠. 한양대 진학에 이어 아주 좋은 선택이었어요. 현대에서 최고의 선수들을 만나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겼죠.

패배에 익숙했던 추승균, 프로에선 달랐다

추승균, 이상민, 조성원과 함께 현대 왕조를 구축하는 데 앞장선 조니 맥도웰(사진 오른쪽)(사진=KBL)
추승균, 이상민, 조성원과 함께 현대 왕조를 구축하는 데 앞장선 조니 맥도웰(사진 오른쪽)(사진=KBL)

농구계가 KBL 역대 최고의 팀으로 꼽는 게 1997-1998시즌부터 정규리그 3연패, 챔피언 결정전 2연패에 성공한 대전 현대 다이넷입니다.

하루하루 배우는 게 많았습니다. 우선 프로에 오니 외국인 선수가 있었어요. 공격 욕심을 줄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느꼈죠. 그때부터 팀의 궂은일을 도맡았던 거 같아요. 공격보다 수비와 리바운드 등에 힘을 실었죠. 이상민, 조성원, 조니 맥도웰, 제이 웹(1997-1998), 재키 존스(1998-1999) 등 당대 최고의 선수가 즐비했기 때문에 튀려고 하면 안 됐어요(웃음).

‘이(이상민)-조(조성원)-추(추승균) 트리오’는 지금도 역대 최고의 콤비로 불립니다.

눈빛만 봐도 통했죠(웃음). 공을 잡으면 어떻게 공격이 전개될지 보였어요. 공간을 찾아 뛰면 (이)상민이 형의 패스가 들어왔죠. 중요한 순간엔 (조)성원이 형이 승부를 결정지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고요. 어느 팀과 만나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당시 패한 경기를 분석하면 상대가 잘했다기보다 우리가 못한 경기가 많았어요.

현대는 1997-1998시즌부터 2시즌 연속 통합우승에 성공했습니다. 당시 최대 라이벌이 2시즌 연속 챔피언 결정전에서 만난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였습니다.

기아는 완성된 팀이었습니다. 1997-1998시즌엔 허 재 형을 중심으로 강동희, 김영만, 김유택 등 내로라하는 선배가 중심이었죠. 우린 떠오르는 별이었어요(웃음). 두려울 게 없었죠. 기아 선수들의 기량과 경험이 대단했지만 마지막까지 물러서지 않은 덕분에 2시즌 연속 승전고를 울릴 수 있었어요.

당시 현대 왕조의 중심엔 맥도웰이 있었습니다. 맥도웰은 KBL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꼽힙니다. 맥도웰은 어느 정도 실력이었습니까.

처음엔 주목받은 선수가 아니었어요. 1997-1998시즌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 19순위(전체 20순위)로 현대의 지명 받았습니다. 시즌 개막을 앞둔 연습경기에서도 불안했어요. 일본에서 연습경기를 하는 데 개인플레이가 너무 심한 겁니다. 골밑에 수비 4명이 붙는데 패스를 안 해요. 선수들과 ‘큰일 났다’고 했죠. 맥도웰과 많은 대화를 했지만 확신이 서질 않았어요.

맥도웰의 진가가 발휘된 건 언제부터입니까.

1997-1998시즌 시범경기부터였어요. 상대팀들이 맥도웰을 못 막는 거야. 요즘 말로 하면 사기였어요. 맥도웰이 공 잡고 한 번 밀면 다 날아갔습니다(웃음). 시간이 지나면서 맥도웰이 힘만 좋은 게 아니란 것도 알게 됐죠. 머리가 아주 좋았어요.

머리가 좋았다?

맥도웰은 팀 동료들의 장점을 정확히 파악했어요. 상민이 형이 2:2 플레이에 능하다는 걸 알고 코트 안팎에서 대화를 많이 했습니다. 공 많이 달라는 거지(웃음). 저돌적인 돌파와 3점슛에 능했던 성원이 형도 잘 살렸어요. 제이 웹, 재키 존스와 호흡도 훌륭했죠. 맥도웰이 골밑을 든든히 지켜주면서 정규리그 3연패와 챔피언 결정전 2연패를 일굴 수 있었어요.

현대는 1999-2000시즌 정규리그 우승 이후 ‘토털 농구’를 시도했습니다. 이때 양희승, 전희철 코치(서울 SK 나이츠)와 한솥밥을 먹었어요. 이 당시 농구는 과거와 어떻게 달랐습니까.

(조)성원이 형이 1999-2000시즌을 마치고 창원 LG 세이커스로 떠났습니다. 그 자리를 장신 슈터인 (양)희승이가 대체했죠. 1번(포인트 가드)부터 5번(센터)까지 키가 컸어요. 어떤 선수든 볼을 잡으면 높이의 우위를 활용한 공격을 시도했죠. 외곽에서 기회가 생기면 과감하게 슛을 던졌고요. 예전과 다른 스타일의 농구를 보였습니다. 아쉽게도 정상의 자리에 서진 못 했지만.

KCC는 2002-2003시즌을 앞두고 당대 최고의 파워 포워드 전희철 코치를 영입하며 큰 기대를 모았습니다. 하지만, 외국인 선수 영입 실패 등이 겹치며 리그 9위로 시즌을 마쳤습니다.

희승이와 뛸 땐 포지션이 겹치지 않았어요. 희승이가 슈팅 가드로 뛰면서 시너지 효과를 냈죠. 하지만, 희철이 형과 뛸 땐 달랐습니다. 희철이 형은 본래 파워 포워드였지만 장신 외국인 선수가 득실한 상황에선 스몰 포워드로 뛰어야 했어요. 저랑 포지션이 겹친 거죠. 대화를 많이 하면서 문제를 풀어가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2002-2003시즌엔 외국인 선수들의 활약도 아쉬웠고요.

부활한 이-조-추 트리오, 통산 세 번째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합작하다

세 번의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합작한 이상민(사진 맨 왼쪽부터), 조성원, 추승균(사진=KBL)
세 번의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합작한 이상민(사진 맨 왼쪽부터), 조성원, 추승균(사진=KBL)

2002-2003시즌 플레이오프에 오르지 못하면서 2003-2004시즌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 1순위 획득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2002-2003시즌 저조한 성적이 찰스 민렌드와 인연을 맺게 해줬죠(웃음). KBL 역대 외국인 선수 중에 가장 머리가 좋은 선수일 거예요. 민렌드는 약사 자격증을 소지한 선수였습니다. 농구 선수로 시즌에 임한 뒤 휴식기엔 약사로 살았어요. 차원이 다른 선수였죠. 자유투로만 20점을 넣는 선수였습니다.

자유투로만 20점을 넣는다?

상대의 반칙을 얻어내는 데 아주 능했습니다. 농구를 아주 쉽게 했죠. 상대는 알면서도 속을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수비력도 뛰어났습니다. 힘들이지 않고 공만 쏙 빼내는 수비가 일품이었죠. 다만 키(195cm)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큰 선수를 막는 데 버거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민렌드를 중심으로 부활을 알린 KCC는 조성원이 복귀하면서 우승에 한 발 다가갔습니다.

시즌 중반 성원이 형이 돌아왔죠. 희철이 형과 트레이드 한 겁니다. 솔직히 의아했어요. 성원이 형이 KCC로 오기 전 서울 SK 나이츠에서 많은 시간을 못 뛰었습니다. 무릎이 매우 안 좋았어요. SK전에서 성원이 형을 만나면 ‘이제 은퇴할 때가 됐다’면서 무릎을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KCC로 복귀하고 아주 잘하는 거예요.

무릎이 안 좋았던 게 아니었습니까.

무릎이 안 좋았던 건 사실입니다. 직접 보고 만져보기까지 했어요. 말로 설명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우린 ‘KCC 유니폼이 딱 맞는 것’이라고 결론을 냈어요. 성원이 형도 복귀하고 ‘희한하게 무릎이 안 아프다’고 했습니다(웃음). 신기하죠.

그 시즌 KCC는 1998-1999시즌 이후 처음 챔피언 결정전 정상에 올랐습니다.

당시 지휘봉을 잡은 신선우 감독께서 승부를 걸었죠. 무스타파 호프를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에 내주고 R.F 바셋을 데리고 왔어요. 2004년 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KCC에 지명된 신인선수 양동근을 현대모비스로 향하게 한 트레이드죠.

KCC는 원주 TG 삼보(원주 DB 프로미의 전신)와의 챔피언 결정전에서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 4승 3패로 정상에 올랐습니다. 감독께서 이상민, 조성원과 함께 일군 세 번째 챔피언 결정전 우승이었습니다.

성원이 형과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 일군 우승이었습니다. 패기 넘친 신인 선수에서 경험 있는 이로 성장하기도 했고요. 감회가 남달랐죠. 그런데 그때의 우승은 주전 선수들이 잘해서 일군 건 아니었어요. (정)재근이 형이나 (최)민규, (표)명일, (정)훈종이 등 식스맨이 아주 잘했습니다. 짧은 시간 코트에 나와 공·수에서 큰 힘이 됐죠.

감독님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2003-2004시즌 챔피언 결정전에선 개인 기량이 뛰어난 외국인 선수 앤트완 홀을 막았습니다.

솔직히 외국인 선수를 막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외국인 선수를 막으려면 평소보다 힘을 더 써야 했죠. 경기가 끝나면 등 뒤가 아팠어요. 힘을 많이 쓰니까. 그래서 한 가지 습관이 있었습니다.

어떤?

항상 경기가 끝나면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어요. 경기 후 조금이라도 땀을 더 흘려야 다음날 덜 피곤했습니다. 몸도 안 아팠고요. 원정 경기 후 호텔 주변에 헬스장이 없으면 팔굽혀펴기라도 했습니다. 프로에서 경험을 쌓으며 터득한 노하우죠(웃음). 돋보이진 않았지만 팀이 다시 한 번 챔피언 자리에 오르는 데 도움이 돼 아주 기뻤습니다.

이-조-추 트리오는 3차례의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합작했습니다. 하지만, 감독께선 늘 조연이었어요. ‘소리 없이 강한 남자’란 별명도 이 때문에 생겨났죠. 2003-2004시즌 챔피언 결정전 MVP 역시 이상민 감독의 몫이었습니다. 팀의 궂은일을 도맡으며 우승에 앞장선 선수로서 아쉬운 감정은 없었습니까.

솔직히 아쉬운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죠. 나도 사람인데(웃음). 이렇게까지 열심히 했는데 아무도 주목을 안 한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요. 하지만, 잠시뿐이었습니다. 상민이 형과 성원이 형은 가족처럼 가까웠어요. 진심으로 MVP 받은 걸 축하해주고 다시 한 번 챔피언 결정전 정상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뿐이었습니다.

KCC는 이듬해 TG와 다시 한 번 챔피언 결정전에서 만났습니다. 2004-2005시즌엔 아쉽게 챔피언 등극엔 실패했어요. KCC는 2승 4패로 2004-2005시즌 챔피언 결정전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땐 키 차이가 매우 컸어요(웃음). TG엔 자밀 왓킨스란 정통 센터와 파워 포워드로 뛸 수 있는 아비 스토스에 김주성까지 있었죠. 1, 2차전을 패하고 3, 4차전을 내리 이겼지만 쉽지 않았어요. 우린 갈수록 체력이 떨어지면서 높이에 우위가 있는 상대에 승기를 내줄 수밖에 없었죠.

농구계는 당시 민렌드와 KCC의 외국인 선수로 뛴 제로드 워드를 추억합니다. 워드는 고교 시절 미국 최고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네이스미스상을 받은 바 있습니다. 고교 시절 이 상을 받은 선수로는 알론조 모닝, 크리스 웨버, 고(故) 코비 브라이언트, 르브론 제임스 등이 있죠. 워드는 어떤 선수였습니까.

뭐라 해야 할까(웃음). 머리가 아픈 선수였죠. 농구를 잘하긴 했어요. 그 시즌 안양 SBS 스타즈(안양 KGC 인삼공사의 전신) 돌풍에 앞장선 단테 존스를 가로막은 게 워드였습니다. 4강 플레이오프에서 우리가 SBS를 3승 1패로 따돌렸죠. 운동 능력과 외곽슛은 뛰어났지만 골밑이 아쉬웠어요. TG를 넘어서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죠.

“상민이 형 떠난 2007년, 농구 인생 가장 큰 충격이었죠”

2007-2008시즌을 앞두고 서울 삼성 썬더스로 둥지를 옮긴 이상민(사진 오른쪽)(사진=KBL)
2007-2008시즌을 앞두고 서울 삼성 썬더스로 둥지를 옮긴 이상민(사진 오른쪽)(사진=KBL)

2004-2005시즌 챔피언 결정전 준우승 이후 KCC는 재정비의 시간을 갖습니다. 2007-2008시즌을 앞두고선 농구계를 충격에 빠뜨린 이적이 있었어요. KCC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이상민이 서울 삼성 썬더스로 둥지를 옮겼습니다. FA(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취득한 서장훈을 영입하며 보호선수를 지정하는 과정에서 이상민을 뺀 거죠. 삼성은 큰 고민 없이 이상민을 선택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죠.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안 좋아요. 충격이 너무 컸습니다. (서)장훈이가 KCC로 온 이유는 하나였어요. 더 많은 연봉을 제시한 구단이 있었지만 상민이 형과 뛰고 싶어서 KCC행을 선택했습니다. 상민이 형이 가장 힘들었겠지만, 장훈이 역시 마음이 안 좋았을 거예요. 이후 많은 게 바뀌었습니다.

바뀌었다?

허 재 전 감독께서 추구하는 색깔을 입히기 시작했죠. 이전까진 가드와 포워드 등이 볼을 잡고 앞선에서 플레이하는 게 많았습니다. 상민이 형이 떠나면서 센터를 중심으로 한 확률 높은 공격 시도가 늘었어요. 2008-2009시즌을 앞두고 (하)승진이가 합류하면서 팀 색깔이 확실히 자릴 잡았죠.

2008-2009시즌 감독께선 통산 네 번째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출발은 불안했어요. 장훈이와 승진이가 공존에 실패했습니다. 결국 장훈이가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로 이적했죠. 그때 팀 순위가 9위까지 떨어졌습니다. 시즌 개막 전 농구계가 뽑은 우승 후보 0순위였는데 부진을 면치 못했죠. 그때 분위기가 바뀐 계기가 있었어요.

어떤?

허 감독께서 선수들을 체육관으로 불러 모았어요.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선수들에게 물었죠. 제가 당시 주장이었습니다. 감독께 ‘물 흘러가듯 지켜봤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팀에 승진이나 (강)병현이처럼 어린 선수가 많기 때문에 다그치는 것보다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게 좋을 것으로 판단한 거죠. 그 팀 미팅 후 칼 미첼이 새 외국인 선수로 합류하면서 분위기가 확 바뀌었습니다.

KCC는 3위로 챔피언 결정전에 올라 리그 4위 삼성과 챔피언 결정전에서 만났습니다. 정규리그 3위와 4위가 챔피언 결정전에서 대결을 벌인 건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2시즌 연속 상민이 형과 플레이오프에서 만났습니다. 2007-2008시즌엔 4강 플레이오프에서 만나 3패를 기록했어요. 상민이 형의 맹활약을 막지 못했죠(웃음). 2008-2009시즌 챔피언 결정전에선 달랐습니다. 전년도 패배를 무조건 갚겠다는 생각으로 죽을힘을 다했죠. 그 결과 4승 3패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수 있었습니다.

감독께선 2008-2009시즌 챔피언 결정전 MVP에 선정됐습니다. 선수 시절 다섯 차례 챔피언 결정전 우승 가운데 챔피언 결정전 MVP에 오른 건 이때가 유일합니다.

챔피언 결정전 MVP보다 자부심을 느끼는 게 있습니다. 그해 제 나이가 34살이었어요. 정규리그 54경기를 다 뛰고 6강 플레이오프부터 챔피언 결정전까지 17경기를 더 소화했습니다. 6강 플레이오프부터 챔피언 결정전까지 마지막 경기에서 승부가 결정 난 까닭에 매우 힘들었지만 포기하지 않았죠(웃음). 어느 때보다 힘들었던 만큼 달콤한 우승으로 기억합니다.

구단에서 먼저 제의한 은퇴, 큰 고민 없이 유니폼을 벗다

KBL 레전드 추승균(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KBL 레전드 추승균(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현역 시절 챔피언 결정전 우승은 2008-2009시즌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감독께선 2010-2011시즌 우승 반지 하나를 더 추가했습니다.

주연으로 뛴 시즌은 아니었습니다. 플레이오프에선 무릎 인대가 파열되면서 힘이 되지 못했어요. 후배들에게 너무 미안했죠. 하지만, 의미가 있었습니다. 벤치에서 선수 겸 코치로 활약했어요. 코치처럼 일어나 소리치고 격려하길 반복했죠. 이때 지도자 수업을 제대로 받은 것 같아요(웃음). 후배들이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은 덕분에 개인 통산 다섯 번째 챔피언 결정전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습니다.

감독께선 한 시즌을 더 뛴 뒤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은퇴 기자 회견을 연 2012년 3월 15일을 기억합니까.

솔직히 더 뛰고 싶었어요. 더 뛸 수 있는 체력과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단에서 시즌을 마치고 은퇴 의사를 물었어요. 내 은퇴 여부에 따라서 선수 구성이 달라질 것이라고 했죠. 고민해보니 더 뛰는 게 의미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현역 연장의 의미가 없었다?

아무리 못해도 20~30분은 뛰고 싶었어요.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순 있겠지만 5~10분 뛰는 날이 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럴 바엔 유니폼을 벗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감독께서 선수 추승균을 평가해줄 수 있습니까.

복 받은 선수죠. 수많은 프로농구 선수가 우승 경험 없이 은퇴합니다. 전 무려 다섯 번이나 챔피언 자리에 올랐어요. 그것도 주축 선수로 뛰면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게 네 번입니다. 선수 추승균을 만난다면 격려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격려해준다?

농구만 바라보며 쉼 없이 내달렸습니다. 아픈 날이 많았지만 꾹 참고 코트 위에서 온 힘을 다했죠. 먹고 싶은 건 눈으로 보기만 하고 몸에 좋은 음식만 먹었습니다. 고생이 많았죠(웃음).

그렇게 농구만 생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자존심이죠. 농구공을 잡았을 때만큼은 늘 진지했어요. 휴식을 취할 때도 농구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했죠. 제가 역대 최고의 선수는 아닐지 모르지만 농구에 대한 열정만큼은 최고라고 자부해요. 이런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한순간도 대충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 유학 계획했던 추승균, 구단의 부탁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다

전주 KCC 이지스 추승균 전 감독(사진=KBL)
전주 KCC 이지스 추승균 전 감독(사진=KBL)

은퇴 후 곧바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애초 계획은 미국 유학이었습니다. 선진 농구를 보면서 2년 동안 공부할 계획이었어요. 하지만, 구단은 팀에 남아 코치를 맡아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허 재 감독께서도 옆에서 보좌해줄 것을 원한다고 했죠. KCC는 농구 인생을 함께한 구단입니다. 외면할 수 없었어요.

쉴 틈 없이 내달렸습니다. 잠시 농구계를 떠나 휴식을 취할 생각은 안 했습니까.

농구계에서 잊히고 싶지 않았습니다.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농구계를 떠나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는 걸 봤어요. 미국에서 공부한 뒤 코치 생활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면 팀에 남는 게 가장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은퇴 후인 2012-2013시즌부터 양복을 입고 코트에 섰습니다. 유니폼을 입고 코트에 섰을 때와 느낌이 달랐습니까.

똑같이 코트에 들어서는 데 느낌은 완전히 달라요. 선수 땐 내 컨디션만 신경 썼습니다. 양복을 입은 후엔 선수단의 컨디션을 챙겨야 했죠. 내 몸은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웃음). 감독과 선수단의 원활한 소통에도 힘썼죠. 몸보다 정신적으로 힘들었습니다.

2015년 2월엔 허 재 감독이 사퇴하면서 감독대행으로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2014-2015시즌을 마친 뒤엔 정식 감독으로 KCC를 이끌었습니다.

감독은 코치와 또 달랐습니다. 팀의 수장은 코치진, 선수단뿐 아니라 구단 수뇌부와도 끊임없이 소통해야 해요. 결과에 대한 책임도 감독의 몫이죠. 처음 지휘봉을 잡았을 땐 ‘형님 리더십’과 ‘옵션이 많은 농구’를 꿈꿨어요. 선수들과 격의 없이 대화하고 공·수 양면에서 많은 전술을 가진 감독이죠. 하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게 가장 힘들었습니까.

지도자가 꿈꾸는 농구와 선수단 구성이란 현실의 균형을 맞춰야 했습니다. 고 안드레 에밋을 뽑은 건 이 때문이었어요. 당시 KCC엔 김태술, 전태풍, 김효범, 하승진 등 이름값 높은 선수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나이었죠. 뛰어난 기량을 갖춘 선수들이지만 저무는 해인 걸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평균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린 선수는 없었죠.

정식 감독 데뷔 시즌 정규리그 우승과 챔피언 결정전 준우승을 달성했습니다.

에밋이 득점을 도맡아주면서 정규리그에서 정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듬해엔 몸이 더 좋았는데 시즌을 코앞에 두고 치른 연습경기에서 부상을 당했어요. 전태풍, 하승진까지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면서 완전히 무너졌죠. 농구 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시즌 중 하나예요. 최하위(10위)를 기록했으니까.

2017-2018시즌엔 4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습니다.

2017-2018시즌 정규리그 최종전 서울 SK 나이츠전이 매우 아쉬워요. 그때 우리가 이겼으면 4강 플레이오프 직행 티켓을 따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경기에서 패하며 분위기가 확 가라앉았어요.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와 6강 플레이오프에선 5차전 접전을 벌였죠. 4강 플레이오프에 올랐지만 체력이 떨어진 상태였어요. 결국 1승 3패로 2017-2018시즌을 마쳤죠.

2017-2018시즌을 마치고 구단과 2년 재계약에 사인했습니다. 하지만, 2018-2019시즌 초반 지휘봉을 내려놨어요. 정규리그 6승 8패를 기록 중이던 2018년 11월 15일 팀을 떠났습니다.

팀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어요. 지휘봉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죠. 두 달 동안 너무 힘들었습니다. 내 농구를 절반도 보여주지 못한 채 물러났다는 아쉬움이 컸어요. 이후 지도자를 하면서 무엇을 잘했고 잘못했는지 돌아봤습니다.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 것 같아요.

“모든 선수가 농구를 대할 때만큼은 진지했으면”

경기도 용인에서 학생선수들을 가르치고 있는 추승균 감독(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경기도 용인에서 학생선수들을 가르치고 있는 추승균 감독(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지난해 12월부터 새로운 일을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많이 쉬었죠(웃음). 프로농구 선수를 꿈꾸는 학생선수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주말을 활용해 학생선수들의 성장을 돕고 있죠. 시합에서 활용할 드리블과 스텝, 슈팅 등을 가르칩니다. 확실히 학생선수들이 성장 속도가 빨라요.

성장 속도가 빠르다?

프로농구 선수들은 습관을 고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완성된 선수들인 까닭에 잘못된 버릇을 고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죠. 반면 학생선수들은 이른 시일 내 바뀔 수 있어요. 무언가를 가르치면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게 보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긴 하지만요.

어떤 게 아쉽습니까.

예전보다 학생선수들의 피지컬이 매우 좋아졌습니다. 제가 농구 할 때와 비교하기 힘들 만큼 신체조건이 훌륭하죠. 문제는 기본기입니다. 미국 프로농구(NBA)를 접하는 게 쉬워지면서 많은 학생선수가 세계적인 선수들의 화려한 플레이를 따라 하려고 해요. 세계 최정상급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고 배우는 건 좋습니다. 다만 기본기를 갖추고 화려한 걸 추구해야 하는데 그게 아닌 거죠.

기본기 없이 NBA 선수들의 플레이를 따라 하려고 한다는 말입니까.

많은 학생선수가 화려한 드리블 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제 자리에선 NBA 선수 못지않은 드리블 실력을 자랑하죠. 하지만, 드리블하며 달릴 줄 아는 선수는 드물어요. 기본기 부족을 지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공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기 전에 화려한 것부터 쫓으면서 농구의 기본인 속공 드리블이 안 돼요. 제 자리에서만 개인기가 가능한 거죠.

기본기를 확실하게 갖추고 기술을 습득하라는 말이군요.

관중들의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플레이 좋습니다. 개인 기량이 뛰어난 선수가 나와야 농구팬이 늘어날 수 있어요. 다만 기본기를 확실히 다지고 기술을 습득해야 실전에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드리블뿐만이 아니에요. 슛, 패스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농구를 처음 배울 때 슛 자세를 바로잡지 않으면 매우 힘들 수 있어요.

선수 때나 지금이나 농구 열정은 변함없습니다.

지금도 농구가 아주 재밌어요. 학생선수들은 발전하는 게 눈에 잘 보이기 때문에 더 즐겁죠. 학생선수들에게 가장 가르쳐주고 싶은 건 농구의 재미예요. 기본기를 습득하는 과정이 힘들지만, 이 고비만 넘으면 농구의 진짜 재미를 알 수 있습니다. 제 선수 생활이 대표적인 예죠. 화려하진 않지만 탄탄한 기본기를 무기로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했습니다(웃음). 학생선수들이 농구에 푹 빠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한국 농구의 미래를 짊어질 학생선수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프로농구 선수를 꿈꾼다면 모든 걸 걸고 도전했으면 좋겠어요. ‘이거 아니면 다른 거 해야지’가 아니라 ‘농구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후회 없이 부딪쳤으면 해요. 농구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집니다. 특히나 프로는 냉혹한 승부의 세계예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전 선수로 뛴 마지막 시즌을 빼고 코트 위에서 웃어 본 적이 없어요.

웃은 적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웃으면서 즐겁게 경기하라’고 하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프로는 코트를 찾은 관중에게 승리를 선물해야 합니다. 코트 안에선 웃을 수가 없었어요. 내 팀을 목청껏 응원하는 팬들에게 승리를 선물하기 위해선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습니다. 재밌게 농구 하면서 승리를 쟁취한다? 전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경기가 후 팬과 함께 웃기 위해선 웃을 여유는 없어요. 팬들 역시 코트 위에서 모든 걸 쏟아붓는 선수가 보고 싶을 겁니다.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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