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C 박영수 골키퍼 코칭 강사 “나도 처음엔 이회택 선배처럼 전방에서 골 넣고 싶었지”

-1978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 우승 주역 박영수 “그 대회 준결승전은 ‘트라우마’로 남았어”

-“페널티킥 실축한 북한 친구 뒷모습이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아시아 골키퍼 코칭 시스템 발전에 도움 되고 싶어”

-“기회가 된다면 북한 골키퍼 코치, 아이들도 가르치고 싶다”

1978년 한국 청소년 축구 대표팀의 골문을 지킨 박영수(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1978년 한국 청소년 축구 대표팀의 골문을 지킨 박영수(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방화동]

1978년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열린 제19회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 준결승 한국과 북한의 경기. 한국은 골문을 지킨 박영수의 선방으로 페널티킥 접전 끝 6-5로 이겼다. 기세가 오른 한국은 이라크와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AFC(아시아축구연맹) 박영수 골키퍼 코칭 강사의 지인들은 이 경기가 그의 인생을 바꿨다고 말한다. 무명이던 박 강사가 스타덤에 올랐고 향후엔 A 대표팀에 데뷔한 까닭이다.

그러나 박 강사는 그 경기를 기억하고 싶지 않다. 페널티킥을 놓친 선수의 뒷모습이 잊히지 않은 까닭이다. 엠스플뉴스가 아시아 30개국을 돌아다니며 골키퍼 코칭 지도 중인 박 강사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고교 2학년에서야 실전 데뷔한 박영수, 그 뒤론 승승장구였다

1976년을 시작으로 남북대결은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였다(사진=KFA)
1976년을 시작으로 남북대결은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였다(사진=KFA)

강사께선 한국 유일 AFC 골키퍼 코칭 강사로 활동 중입니다. 아시아 30개국을 돌아다니며 골키퍼를 육성 중이죠. 축구와 인연은 어떻게 맺게 됐습니까.

우리 땐 축구가 국기(國技)였어요. 1970년대 한국 축구 대표팀의 골문을 지킨 이세연, 역대 최고 스트라이커로 꼽히는 이회택 선배의 전성기를 보며 볼을 찼습니다. 방과 후 친구들과 공 차고 노는 게 일상이었죠(웃음). 제가 어릴 땐 놀 거리가 많지 않았어요. 축구는 다 함께 즐길 수 있는 최고의 놀이였습니다.

하나의 놀이로 축구를 즐겼던 거군요. 축구를 정식으로 시작한 건 언제였습니까.

막연하게 축구 선수를 꿈꿨어요. 태극마크를 달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선수들을 보며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축구부에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학교에서 ‘운동 좀 한다’는 아이들이 모인 곳이니까. 전 운동신경이 눈에 띄게 좋은 학생이 아니었어요. 중학교 2학년이 돼서야 테스트를 받고 축구부에 들어갔죠.

강사께선 한국 ‘골키퍼들의 스승’으로 불립니다. 처음부터 골문을 지켰습니까.

이회택 선배처럼 전방에서 골 넣고 팀을 승리로 이끄는 스트라이커가 되고 싶었어요(웃음).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되나. 왜소한 체격에 운동신경도 좋지 않은 아이가 무슨 수로 전방을 책임져요(웃음). 처음엔 왼쪽 풀백으로 뛰었어요. 이마저도 얼마 못 가 자리를 빼앗겼습니다. 그만큼 특출 난 선수가 아니었어요. 그러던 중 우연찮은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어떤 기회였습니까.

소년체전 첫 경기를 이틀 앞두고 팀 내 유일한 골키퍼가 발을 다쳤어요. 대회에 출전하지 못하는 큰 부상이었죠. 후보 골키퍼는 개인 사정으로 팀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누군가는 골문을 지켜야 하잖아요. 감독께서 후보 필드 플레이어를 유심히 보다가 저를 지목했죠. ‘네가 장갑 껴야겠다’는 말과 함께(웃음). 그때부터 골문을 지켰습니다.

공격수를 꿈꾸며 축구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아쉬운 건 없었습니까.

현실을 냉정하게 봤어요. 필드엔 제가 낄 자리가 없었습니다. 감독께서도 ‘앞으로도 골키퍼를 쭉 하는 게 축구 선수로 성장하는 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죠. 우리 땐 감독께서 말씀하시는 건 정답이었어요.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했고. 축구 선수의 꿈을 이룰 마지막 기회란 생각으로 죽어라 훈련했습니다(웃음).

감독께선 태극마크를 달고 골문을 지킨 바 있습니다.

뛰어난 반사 신경은 없었지만 누구보다 성실히 훈련했어요. 골키퍼 자리에서도 밀리면 정말 끝이기 때문에 배수진(背水陳)을 친 거죠(웃음). 그렇게 훈련에 매진하고 고교 2학년 때 첫 출전 기회를 잡았습니다.

소년체전에선 골문을 지키지 못한 겁니까.

감독께서 팀을 떠나있던 후보 골키퍼에게 연락했어요. 그 친구가 돌아오면서 이른 데뷔 기회를 놓쳤죠(웃음). 팀엔 다행스러운 일이었어요. 장갑을 껴본 적 없는 초보 골키퍼가 골문을 지켰으면 큰 점수 차로 졌을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한테도 잘된 일이었어요. 그때 골문을 지켰다가 골키퍼 자리에서도 밀려났으면 일찌감치 축구를 그만두지 않았을까 싶어요.

오랜 준비 끝 나선 공식전은 어땠습니까.

용문고와 경기였어요. 감독께선 시합 전날 ‘선발 출전할 것’이란 얘기를 해줬죠. 그날 긴장이 극에 달해서 잠을 못 잤어요(웃음). 무슨 생각으로 경기장에 들어가서 경기했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기억이 안 난다?

잠을 못 자고 경기장에 들어서 무실점으로 경기를 마친 것만 기억납니다. 인생에서 가장 긴장한 순간이 아니었나 싶어요.

긴장이 극에 달하면 실수가 나오지 않습니까.

주심의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면 마법처럼 경기만 보여요. 눈에 보이는 건 선수들뿐이죠. 머릿속은 ‘상대의 슛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골키퍼는 몸이 먼저 반응해요. 상대가 10m 이내에서 슈팅을 시도하면 평균 시속 60km의 속도로 공이 날아듭니다. 초당 16.9m를 날아가는 거죠. 골키퍼가 생각하고 움직이면 막을 수 없어요.

골키퍼는 반복된 훈련으로 몸이 먼저 반응한다는 거군요.

골키퍼가 슈팅을 막는 과정을 지각-인지-판단-행동 4단계로 나눠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상대가 슈팅을 시도한다->볼이 날아온다->골문 오른쪽 상단 구석이다->몸을 날린다’가 되는 거죠. 이게 이론입니다. ‘실전은 다르다’는 말 많이 하잖아요. 골키퍼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복된 훈련으로 실전에선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거예요. 전문 용어로는 ‘무의식 반사’라고 하죠.

극도의 긴장 상태로 그라운드에 들어서 무실점으로 경기를 마칠 수 있었던 건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쉼 없이 훈련한 덕분이군요.

훈련의 성과가 빛을 봤죠(웃음). 이후론 탄탄대로였습니다. 고교 3학년 땐 청소년 대표팀에 선발됐어요. 1년 전 공식전에 처음 출전한 선수가 태극마크를 단 거죠. 실업팀 선수가 된 후엔 A 대표팀에도 데뷔했어요. 우리 땐 국가대표팀을 화랑(1군)과 충무(2군) 2개 팀으로 나누어 운영했습니다. 충무를 거친 후 화랑에서도 골문을 지켰어요.

“나를 스타로 만들어준 경기, 뒤돌아 멍하니 서 있던 친구를 잊지 못한다”

자신의 이름을 알린 경기가 트라우마로 남아있다는 박영수(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자신의 이름을 알린 경기가 트라우마로 남아있다는 박영수(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감독께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대회가 있습니다. 1978년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열린 제19회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입니다.

할 말이 많은 대회죠(웃음). 이 대회 이야기 전에 바로 직전인 1976년 태국 방콕 대회를 알 필요가 있어요. 한국은 그 대회 준결승에서 북한에 0-1로 졌습니다. 각급 대표팀을 통틀어 남과 북이 축구 대결을 벌인 건 이 경기가 처음이었어요. 그리고 2년 뒤 대회 준결승에서 다시 만난 겁니다. 그땐 북한 축구 대표팀이 잘 나갔어요.

성적이 좋았습니까.

북한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에서 이탈리아를 1-0으로 꺾는 이변을 연출하며 8강에 올랐습니다. 월드컵 본선 첫 출전에서 아시아 최초 8강이란 역사를 썼죠. 기세가 대단했습니다. 반면 한국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이후 1986년 멕시코 대회까지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어요.

당시엔 북한 축구가 한국에 앞서 있었군요.

그런 북한을 무조건 이겨야 했습니다. 전년도 대회 준결승에서 패한 까닭에 무조건 설욕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쉽게 말해 한-일전보다 더 치열하게 준비했고 교육받았습니다. 일본전은 지면 야단맞는 것으로 끝났어요. 그런데 1978년 대회 북한전은 그 이상이었죠. 감독부터 선수까지 모두가 ‘패배는 죽음’이란 각오로 그라운드에 들어섰어요.

한국은 페널티킥 접전(6-5) 끝 승전고를 울렸습니다. 강사께서 북한 마지막 키커의 슛을 막아내며 한국의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양 팀 다 얼마나 치열하게 붙었는지 페널티킥에서도 다섯 명의 키커가 모두 득점에 성공했습니다. 승부는 여섯 번째 키커에서 갈렸죠. 한국은 이태호가 득점에 성공했고 북한 키커는 제게 막혔습니다. 매우 중요한 경기에서 승리해 다행이었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어요. 참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솔직히 그 당시 느낀 감정을 말할게요. 북한전 내내 ‘지금 동족 간에 뭐 하는 걸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 국가대항전 경기인데 서로 말이 통해요. 한국과 북한 모두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교육을 받고 그라운드에 들어섰지만, 선수들끼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어느 지역 출신이고 나이는 얼마인지 물어보면서 ‘한 민족’이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죠. 전 이 경기 마지막 순간이 지금까지 트라우마로 남아있어요.

트라우마요?

페널티킥을 실축한 북한 선수 이름이 나봉기예요. 그 친구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 생생합니다. 몸을 돌려 머리를 계속 긁적였습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우리 선수들과 치열하게 부딪치고 대화를 나눴던 친구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경기로 스타가 돼서 좋지 않으냐’고 해요. 그런데 전 그 경기를 생각하기 싫습니다.

아.

지금도 복잡하거든요. 20살도 안 된 선수들이 무슨 잘못을 해서 목숨 걸고 경기를 치러야 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감성이 풍부한 때이니 그런 생각이 더 강했죠. 언론에선 그 당시 한국과 북한이 경기하면 ‘죽일 듯이 싸운다’고 표현했지만 글쎄요. 승부의 세계엔 양보가 없지만 양 팀 선수들은 누구보다 가까워질 수 있는 친구였습니다. 언젠가 나봉기 그 친구를 꼭 한 번 만나고 싶어요.

어떤 얘기를 하고 싶습니까.

그냥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어요(웃음). 오랜만에 동네 친구를 만난 것처럼 근황도 물어볼 겁니다. 그리고 ‘그때 내가 네 뒷모습을 잊지 못한다’고 나 때문에 고생한 건 없었는지 묻고 싶어요. 그런 날이 오길 바랍니다.

1978년 한국 청소년 축구 대표팀은 제19회 아시아 청소년 축구 대회에서 이라크와 공동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후의 선수 생활은 어땠습니까.

성인 대표팀에서 1년 정도 뛰고 내리막길을 걸었습니다(웃음). 유공 코끼리 축구단 3년 차 시절 무릎을 심하게 다치면서 조용히 선수 생활을 마감했죠. 개인적으로 기억하기 싫은 1978년 청소년 대회를 빼면 이렇다 할 임팩트를 남기지 못했습니다.

무릎은 왜 다친 겁니까.

과도한 훈련이 원인이었어요. 성인이 된 후에도 신체조건의 열세를 메우기 위해 남들보다 2배 이상의 훈련량을 가져갔습니다. 그런 와중에 무릎을 다치면서 회복하기 힘든 상태에 이르렀죠. 골키퍼가 무릎을 쓰기 힘든 데 별수 있나요(웃음). 1989년 조용히 축구화를 벗었습니다.

“아시아 골키퍼 코칭 시스템 발전에 도움이 되고 싶어”

AFC 박영수 골키퍼 코칭 강사는 지금도 영어 공부를 하루도 빼 먹지 않는다(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AFC 박영수 골키퍼 코칭 강사는 지금도 영어 공부를 하루도 빼 먹지 않는다(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은퇴 후 곧바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겁니까.

처음엔 지도자의 길로 들어설 생각이 없었어요. 축구를 잊고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고 싶었죠. 하지만, 평생 축구만 해온 사람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남들보다 전문성을 갖춘 게 축구뿐이잖아요. 지도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죠.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떤 문제요?

골키퍼를 전문적으로 가르칠 환경이 너무 열악한 겁니다. 1990년대엔 지금처럼 골키퍼 전문 코치가 흔치 않았어요. 지금도 골키퍼 전문 코치가 없는 초·중·고 축구부가 많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축구에서 유일하게 손을 사용하는 특수 포지션을 제대로 가르쳐보자는 생각으로 밤낮없이 생활했죠.

골키퍼를 전문적으로 가르칠 환경이 열악한 까닭에 공부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힘들었죠. 처음엔 네덜란드의 유명한 골키퍼 강사 프랭스 호크의 비디오테이프와 책으로 공부했어요. 이후엔 우리 선수들에 맞는 훈련 방법을 연구하고, 선수들을 분석했죠. 그렇게 2년을 준비한 뒤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KFA 전임지도자에 도전해 남녀 대표팀 골키퍼를 지도했고요.

보통 축구 지도자를 꿈꾸는 사람은 ‘프로축구단 감독’을 목표로 합니다. 더 나아가선 국가대표 감독을 꿈꾸죠. 강사께선 감독을 꿈꾼 적은 없습니까.

특별히 감독을 꿈꾸진 않았어요. 학생선수부터 성인 선수까지 많은 선수를 제대로 가르쳐보고 싶다는 생각만 했죠. 누군가 질문했을 때 명확한 답을 줄 수 있는 지도자를 꿈꿨어요. 개인적으로 골키퍼 포지션 공부를 멈추지 않은 건 이 때문이죠.

강사께서 AFC 강사로 나서게 된 건 언제부터입니까.

2006년부터 KFA 전임지도자와 AFC 강사 두 가지를 함께 했어요. 한국뿐 아니라 골키퍼를 꿈꾸는 이들에게 제대로 된 가르침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컸죠.

강사께선 영어 공부를 마흔 살 때 시작해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는 수준까지 올라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영어를 알아야 골키퍼 관련 지식을 늘릴 수 있어요. 말이 통해야 국외 감독, 골키퍼 코치, 강사 등과 토론을 하죠(웃음). 마흔 살 이전까진 영어를 한 마디도 못 했어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공부를 시작했죠. 매일 듣고 쓰고 말하기를 반복한 거 같아요. 공부하면서 느끼는 건 뻔한 얘기지만 꾸준함이 아주 중요한 것 같습니다.

꾸준함이요?

지금도 영어 공부를 하는데 공부하기 싫은 날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날에도 책상에 앉아 1시간이라도 책을 들여다보는 게 실력향상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요. 꾸준히 하다 보면 외국인과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날이 오죠. 국외에 나가면 강사들과 큰 문제 없이 대화를 나눠요. 특별한 비법은 없지만 꾸준히 공부한 결과죠.

강사는 효과적인 골키퍼 교육은 법을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강사께선 7편의 논문과 2권의 책도 썼죠. 축구가 좋아서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겁니까, 아니면 골키퍼란 포지션에 빠져서 이와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는 겁니까.

골키퍼를 좋아서 시작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어요(웃음). 모두가 공격수 하고 싶지 않을까. 우연히 장갑을 낀 게 보잘것없던 내 축구 인생을 바꿨어요. 축구도 사랑하지만, 골키퍼 포지션에 대한 애정이 더 큰 것 같습니다. 후배들이 좋은 교육을 받고 성장해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지금 가지고 계신 꿈은 무엇입니까.

아시아 골키퍼 코칭 시스템이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제가 직접 태국이나 베트남 등을 방문해 골키퍼 코치,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제가 쓴 책을 통해서도 골키퍼 코칭에 도움을 줄 수 있죠. 그리고 북한에 있는 골키퍼 코치, 아이들도 가르치고 싶어요.

북한의 골키퍼 코칭 시스템 발전에 도움을 주고 싶다?

제가 골키퍼 코칭 관련 책을 두 권 썼어요. 이걸 태국이나 베트남 등에 주려면 번역을 해야 합니다. 번거로워요(웃음). 북한은 번역이 필요 없잖아. 왕래만 가능하다면 출·퇴근도 가능할 겁니다. 골키퍼란 포지션에 애정 있는 아이들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습니다.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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