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권도인의 기품과 정직을 보여줬던 공익 제보자는 문체부와 KADA의 외면 속에 태권도계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부정수급으로 감사 대상인 KADA 직원은 문체부 표창을 받는 대한민국 스포츠계

태권도(사진=엠스플뉴스)
태권도(사진=엠스플뉴스)

[엠스플뉴스]

“아이들이 쓰러지고 있어요. 이대로 두면 아이들이 크게 다칠 겁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2016년 1월이었다. 당시 엠스플뉴스 취재진과 만난 서울체고 태권도부 J 코치는 눈물이 가득한 표정으로 “제발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J 코치가 취재진에 들려준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태권도부 다른 코치가 학생선수들에게 금지약물 ‘라식스’를 주고, 심지어는 학부모까지 나서 학생선수들에게 이뇨제를 제공했다는 증언이었다. 취재 결과 J 코치의 증언은 사실이었다.

취재 중 학생선수들의 반성문과 학교 관계자들의 양심선언이 잇따랐다. 시종일관 방관과 축소로 일관하던 서울체고도 학생선수들이 코치와 학부모로부터 금지약물을 받았음을 인정했다.

라식스는 WADA(세계반도핑기구)가 금지약물로 지정한 이뇨제다. 단기간 살을 빼는 덴 유용하지만, 부작용이 심해 선수들의 복용 자체를 금지하는 약물이다. J 코치가 취재진에게 ‘도와달라’고 호소한 것도 라식스를 먹고서 훈련 중 쓰러지거나 생리불순에 시달린 서울체고 학생선수가 한 둘이 아닌 까닭이었다.

체중감량에 어려움을 겪는 태권도 꿈나무들에게 코치, 학부모가 ‘약물 브로커’로 나서 금지약물을 제공했다는 건 그래서 경악할 일이었다.

서울체고 학생선수들이 J 코치에게 제출했던 반성문. 이 반성문엔 ‘언제 어떻게 누가 금지약물을 제공했는지’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필적 전문가는 '누군가의 지시로 써진 글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울체고 측은 '전부 강압에 의해 조작된 글'이라고 반박했고, KADA는 이 증거를 외면했다. 한 달 뒤 서울체고는 학생선수들이 코치, 학부모로부터 금지약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사진=엠스플뉴스)
서울체고 학생선수들이 J 코치에게 제출했던 반성문. 이 반성문엔 ‘언제 어떻게 누가 금지약물을 제공했는지’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필적 전문가는 '누군가의 지시로 써진 글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울체고 측은 '전부 강압에 의해 조작된 글'이라고 반박했고, KADA는 이 증거를 외면했다. 한 달 뒤 서울체고는 학생선수들이 코치, 학부모로부터 금지약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사진=엠스플뉴스)

하지만, 당시 취재진이 더 경악한 건 한국 도핑방지를 책임지는 KADA(한국도핑방지위원회)와 KADA의 관리·감독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였다.

J 코치는 “아이들의 금지약물 복용을 막고자 백방으로 도움을 청했다”며 “KADA에도 서울체고 태권도부의 도핑을 막아달라고 알렸다”고 털어놨다.

KADA는 국내 유일의 도핑검사 기관이다. 도핑 교육·홍보도 담당한다. 여기다 KADA는 징계권까지 있다. 참고로 KADA가 대외적으로 밝히는 비전은 ‘약물로부터 선수를 보호하는 것’이다. J 코치가 번지수를 제대로 찾아갔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J 코치는 허탕만 쳤다. KADA는 움직이지 않았다. 엠스플뉴스 취재가 들어가자 그제야 서울체고를 찾았지만, 형식적인 도핑 교육만 하고 돌아왔을 뿐이다. 당시 KADA 관계자는 “우리에겐 조사권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사법기관식의 조사가 요구되는 일이 아니었다. 구체적 증거가 충분했던 만큼 이 증거가 사실인지, 아닌지만 따지면 될 일이었다. KADA 홈페이지에도 자신들의 역할을 ‘도핑방지 연구·조사’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KADA는 요지부동이었다.

이 탓에 학생선수들에게 금지약물을 제공한 그 어느 누구도 징계는 고사하고, 반성조차 요구받지 않았다.

문체부가 이 사건을 모를 리 없었다. 서울체고 금지약물 복용건은 태권도계에선 핫이슈였다. ‘러시아 도핑 스캔들’로 세계 체육계가 금지약물과의 전쟁을 선포한 터라, 이 문제는 더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엠스플뉴스 취재진도 이 문제와 관련해 문체부 담당 공무원과 여러 번 통화했다.

KADA 담당 문체부 사무관의 답변은 늘 똑같았다. “자세히 알아보겠다. 무슨 일인지 파악해보겠다”는 것이었다.

KADA는 문체부의 관리·감독을 받는 기관이다. 문체부가 KADA를 통해 제대로 사실을 파악했다면 아마추어 체육계에 만연한 금지약물 복용을 하루라도 빨리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체부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체육계 인사들은 하나같이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문체부 퇴직 공무원들이 낙하산으로 가는 곳이 KADA다. 역대 KADA 사무총장 전부가 문체부 출신이다. 도핑 관련 업무와 전혀 무관했던 사람들이다. 자기 조직에 있던 사람이 KADA 요직에 있는데, 문체부 사람들이 얼마나 KADA를 관리·감독할 수 있겠나.”

‘문체부 마피아’가 괜히 생긴 말이 아니다. 덕분에 KADA는 2007년 설립 이후 2017년까지 단 한 번도 문체부 감사를 받지 않았다.

KADA와 문체부의 방관과 책임회피 속에 결국 J 코치만 다쳤다. J 코치는 ‘공익 제보를 했다’는 이유로 서울체고를 나와야 했다. 다른 학교 지도자로 가려 했으나, 거기도 가지 못했다. 동료 태권인인은 ‘J가 태권도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며 고갤 숙였다.

최근 문체부가 나랏돈을 부정하게 타냈다는 의심을 받는 KADA 직원에게 표창장을 수여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지난해 한국에서 열린 세계도핑방지기구(WADA) 이사회와 집행위원회에서 KADA 직원이 문체부 지원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는 게 표창 이유다.

문체부는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KADA 직원들이 국제대회에서 조직적으로 부정한 방식으로 수당을 챙겼다는 의혹과 관련해 “감사를 진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감사는 없었다. 대신 KADA에 표창장을 보내줬다.

지난해 12월 문체부는 ‘스포츠 적폐청산위원회’를 만들었다. 문체부 산하기관에서 차출된 이들이 조사관으로 활동 중이다. 역설적이게도 '문체부야말로 한국스포츠계의 적폐 중의 적폐'라는 게 많은 체육인의 생각이다. 문체부가 개혁되지 않는 한, 금지약물을 먹고서 힘없이 쓰러지는 아이들의 호소는 계속 될 것이다.

전수은 기자 gurajeny@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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