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축구 선수들이 당하는 ‘불공정 계약’의 실태를 보여준 인천-백승원 이면계약 사건. 의식 있는 축구인들은 "이면계약 사건을 계기로 선수 편에서 선수 권익을 추구하는 프로축구선수협회의 중요성이 확인됐다"고 말한다.

프로축구선수협회 김훈기 사무국장과 백승원이 포즈를 취했다(사진=엠스플뉴스)
프로축구선수협회 김훈기 사무국장과 백승원이 포즈를 취했다(사진=엠스플뉴스)

[엠스플뉴스]

인천 유나이티드와 백승원의 ‘이면계약’은 프로축구선수협회(이하 선수협)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 사건이다. 선수협은 '구단 횡포에 맞서 싸우는 선수들의 뒤에서 든든한 후원군 역할'을 했다.

백승원은 프로 입단 때부터 불합리한 대우를 받았다. 원래 백승원이 받기로 한 계약금은 9,000만 원이었다. 그러나 백승원을 담당한 스카우트가 해고되면서 구두계약은 없던 일이 됐고, 계약금은 9,000만 원에서 1,400만 원으로 쪼그라들었다.

부당한 일이었지만, 프로 선수 생활을 하려면 구단이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선수 편을 들어야 할 에이전트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철저한 '을'인 선수 혼자서는 사인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결국 백승원은 인천과 계약금 1,400만 원에 연봉 3,600만 원의 5년 계약을 맺고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두번, 세번 속은 백승원. 선수협 도움으로 구단에 문제제기

불공정 계약의 피해자였던 백승원은 선수협의 도움으로 용기를 얻어 목소리를 냈다(사진=엠스플뉴스 김다빈 기자)
불공정 계약의 피해자였던 백승원은 선수협의 도움으로 용기를 얻어 목소리를 냈다(사진=엠스플뉴스 김다빈 기자)

문제는 입단 뒤에도 계속됐다. 백승원은 2015년부터 2019년까지 5년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프로축구에서 A급이 아닌 선수들에게 계약 기간은 큰 의미가 없다.

한 축구인은 “3년이나 5년 계약을 해도 연봉이 보장되는 게 아니다. 해마다 협상을 다시 해야 하고, 연봉이 계속 깎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구단이 계약 해지를 목적으로 임대 제도를 악용하는 꼼수를 부릴 때도 많다”고 폭로했다.

인천 유나이티드가 대표적이다. 인천은 2015시즌이 끝난 뒤 백승원을 K리그 챌린지 충주 험멜로 임대하려 했다. 선수 입장에선 원치 않는 이적이었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백승원은 충주 선수단에 합류해 팀 훈련을 소화했다. 그러다 무릎 부상을 당했고, 임대가 무산되면서 다시 인천으로 돌아왔다.

인천은 이번엔 백승원을 K3 김포 시민축구단으로 임대하려 했다. K3는 K리그 챌린지보다 더 하위에 속하는 리그다. 여기서 선수가 받을 수 있는 돈은 경기 승리수당 50만 원이 전부다. K리그 클래식 선수에게 K3에 가서 뛰라는 건 누가 봐도 부당한 요구였다. 더구나 백승원은 무릎 부상으로 다음 시즌 정상 출전이 힘든 상태였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인천은 다친 백승원에게 ‘김포에서 80% 이상 경기 출전’을 요구했다. ‘80% 이상 출전하지 못하면 인천과 계약이 해지된다’는 조항을 임대 합의서에 넣었다. 무릎을 다친 백승원이 지키기 힘든 조항이었다. 임대의 목적이 사실상 '계약해지'였다는 걸 잘 보여준 대목이기도 하다. 당시 조00 스카우트 팀장은 백승원에게 ‘합의서는 의미 없다. 80% 이상 출전하지 않아도 복귀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말을 믿고 백승원은 김포로 가서 뛰었다. 부상을 딛고 연 70% 이상 많은 경기에 출전하는 투지를 발휘했다. 그러나 2016시즌이 끝난 뒤 백승원의 집에는 ‘계약해지’를 알리는 통보문이 도착했다. 발신인은 인천 유나이티드.

이전까지 대부분의 선수는 이렇게 부당한 일을 당해도 침묵해야 했다. 분노를 속으로 삭이고 구단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계약을 해지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백승원은 달랐다. 선수협의 도움을 받아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할 뜻을 내비쳤다.

구단도 '80% 이상 출전’ 조항에 문제가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결국 인천은 백승원에게 ‘김포로 1년간 더 임대를 가라’고 제재의했다. 그리고 문제의 80% 출전 조항을 삭제한 새 합의서를 들고 왔다. 대신 ‘감독과 코칭스태프의 요청이 있으면 인천에 복귀할 수 있다’는 조항을 추가했다.

인천 스카우트 팀장은 이번에도 ‘인천 복귀를 책임지겠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두 번 뒤통수를 맞았던 백승원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이에 구단 복귀를 약속받기 위해 정식 합의서와 별개의 ‘이면 합의’를 할 수밖에 없었단 게 선수 측의 주장이다.

백승원이 스카우트 팀장과 맺은 이면 합의 계약서엔 1) 2017시즌 종료 후 100% 복귀 보장 2) 복귀 대가로 백승원의 연봉 30%를 스카우트 팀장에게 지급 3) 팀 복귀가 불가능할 경우 남은 계약 기간 2년 치 연봉을 백승원에게 지급한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하지만 1년 뒤에도 인천 복귀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선수 정기등록 기간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서도 인천은 복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자 백승원은 선수협과 함께 3월 5일 인천 구단과 조00 스카우트 팀장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 관련 법률 지원은 물론 축구팬들에게 알리는 역할까지 모두 선수협이 책임지고 도왔다.

소송으로부터 한 달여가 지난 4월 18일, 인천은 조00 스카우트 팀장을 조용히 해고했다. 스카우트 팀장 ‘개인 일탈’로 ‘꼬리 자르기’를 했단 논란을 샀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구단의 부당한 대우에 대해 합당한 보상을 받고, 불공정 계약 실태를 알리는 게 이번 싸움의 진짜 목표이기 때문이다.

선수협 “제2, 제3의 백승원 나오지 않게 도울 것”

지금도 백승원처럼 부당한 대우를 받은 선수가 많다. 선수협은 이들의 든든한 지원자가 될 예정이다(사진=엠스플뉴스 김다빈 기자)
지금도 백승원처럼 부당한 대우를 받은 선수가 많다. 선수협은 이들의 든든한 지원자가 될 예정이다(사진=엠스플뉴스 김다빈 기자)

선수협은 이번 사건이 백승원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백승원처럼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하소연할 곳이 없어 숨죽이는 선수, 조용히 축구계를 떠난 선수가 한둘이 아니란 지적이다. 구단은 선수를 소모품으로 여긴다. 한국프로축구연맹도 '철저히 구단 편'이란 지적을 받아왔다.

선수협 관계자는 “고쳐야 할 불합리한 제도와 조항이 많다”고 했다. 선수 의사와 관계없이 이뤄지는 임대 제도가 그 가운데 하나다.

프로축구에서 구단이 선수 임대를 결정하면, 선수는 군말 없이 따라야 하는 구조다. K리그 선수를 K3로 보내는 임대라도 수용해야 한다. 한 축구인은 “임대를 거부한 선수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한 지방구단 선수는 임대를 거부했다가 경기에 참여하지 못하고 매일 운동장을 도는 ‘벌’을 받았다”고 전했다.

축구 선수협 박지훈 변호사(사진 왼쪽부터)와 김훈기 사무국장. 박 변호사는 '스포츠 인권 변호사'로 유명하다. 김 국장은 그 자신이 축구선수로, 지금의 선수협을 만든 이다(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축구 선수협 박지훈 변호사(사진 왼쪽부터)와 김훈기 사무국장. 박 변호사는 '스포츠 인권 변호사'로 유명하다. 김 국장은 그 자신이 축구선수로, 지금의 선수협을 만든 이다(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선수 계약 기간이 보장되지 않는 문제도 해결해야 할 부분이다. 선수협 관계자는 “3년 계약이면 3년간의 연봉과 계약 기간이 보장받아야 한다. 받기로 약속한 건 당연히 받아야 한다. 최소한의 보장받아야 할 권리를 보호해 달라는 게 선수들의 요구”라고 했다.

축구선수가 구단과 싸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축구인은 “축구계는 학연 지연으로 촘촘하게 얽혀있다. 입단 테스트도 받아야 하고, 군 복무도 해야 하고, 나중에 지도자라도 하려면 절대 눈 밖에 나선 안 된다”고 했다.

선수협 관계자는 “모 선수는 구단과 마찰 중에 지인 결혼식에 갔다가 구단 관계자와 마주쳤다. 한 시간 동안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몰래 나와서 집에 돌아왔다고 한다. 그만큼 축구계에서 구단에 맞서는 건 두렵고 부담이 되는 일”이라고 전했다.

이런 가운데 백승원은 용기를 내어 구단의 부당한 횡포를 고발했고, 소송까지 제기했다. 백승원은 “친구 하나는 나와 같은 상황에서 최저연봉을 받고 조용히 계약 해지하는 쪽을 택했다. 축구계에서 계속 머물려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나는 축구계를 떠날 각오를 했고, 그래서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만일 백승원이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그리고 선수협이 없었다면 백승원이 당한 불공정한 일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조용히 묻혔을 것이다. 그러나 백승원의 용기와 선수협의 지원으로 축구계의 불공정 계약 문제가 세상에 알려졌다. 선수들이 겪는 피해를 많은 축구팬이 알게 됐다. 그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성과다.

선수협은 앞으로도 부당한 처우를 받고 권리를 침해당한 선수들의 편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할 예정이다. 또한 선수에게 불리한 각종 규약과 제도를 점진적으로 고쳐 나가는 데 역할을 할 참이다. 그러려면 백승원처럼 부당한 일에 침묵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는 선수가 계속 나와야 한다. 그게 제 2의, 제 3의 백승원을 막는 길이다.

배지헌 기자 jhpae117@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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