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회 롯데 자이언츠 감독, 첫 스프링캠프에서 자율과 소통의 야구 선보여

-선수 언급은 극도로 신중…“우린 하위권 팀, 기존 구성에 안주해선 안 된다”

-장훈 선생의 말 한마디에 180도 바뀐 야구 인생…“지도자의 한 마디가 어떤 영향 줄지 항상 고민”

-“시즌 치르면서 위기 오겠지만…이런 야구, 한 번쯤 해보고 싶었습니다”

허문회 롯데 신임 감독(사진=엠스플뉴스)
허문회 롯데 신임 감독(사진=엠스플뉴스)

[엠스플뉴스]

장훈 선생의 말 한마디, 그것 때문에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허문회 롯데 자이언츠 신임 감독은 ‘말 한마디’의 무게를 아는 지도자다. 선수를 평가하는 데 누구보다 신중하다. 마치 누렁소, 검은 소가 들을까 염려하는 농부처럼 말을 아낀다. 팀 내 경쟁에서 누가 앞서가는지, 어떤 선수가 잘하는지, 선수의 장단점은 무엇인지 허 감독은 섣불리 말하지 않는다.


“롯데는 작년 하위권 팀…기존 구성에 안주할 수 없다”

타격 훈련을 지켜보는 허문회 감독(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타격 훈련을 지켜보는 허문회 감독(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호주 애들레이드 롯데 스프링캠프를 방문했을 때도 허문회 감독은 여전했다. 미디어가 스프링캠프를 취재하면 으레 감독에게 물어보는 것들이 있다. 허 감독에게도 선발투수진과 불펜 구성에 관해, 1루와 외야 포지션 경쟁에 관해, 새 외국인 선수의 기량에 대해 이리저리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듣기는 쉽지 않았다.

선발투수진 구성에 대해 허 감독은 “일단 외국인 선수 두 명은 포함되고, 그 외엔 계속 경쟁을 붙이고 있다”고만 밝혔다. 마무리투수에 대해선 “김원중이 확정된 건 아니다. 여러 후보 중에서 잘하는 선수로 결정할 것”이라 했다. 구체적인 후보가 누군지는 언급을 꺼렸다.

전준우의 포지션에 대해서도 허 감독은 “아직 1루에 와야 한다, 좌익수로 써야 한다 정해진 것은 없다”고 했고 외국인 선수들에 대해선 “생각한 것보다 선수들이 잘 적응하고 괜찮은 것 같다”는 정도로만 얘기했다. ‘외부 영입 선수는 당연히 주전으로 쓰는 것 아닌가’란 질문에도 허 감독은 “아직은 전부 백지 상태”라고 선을 그었다.

허 감독이 이처럼 말 한 마디에도 신중한 데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허 감독은 “우리 팀은 작년 상위권이 아닌 하위권을 한 팀”이라며 “하위 팀인 만큼 기존 구성에 안주할 수 없다”고 이유를 밝혔다.

가장 잘하는 선수, 컨디션 좋은 선수를 스타팅 멤버로 쓰려고 합니다. 이겨야 하니까요. 상위권 팀은 어느 정도 주전 선수를 정해놓고 시작할 수 있지만, 우리는 하위권 팀이었으니까 경쟁체제로 가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허 감독의 말이다.

일부 감독들은 머릿속으로 구상을 다 끝내놓고, 끝까지 선수들의 분발을 유도하기 위해 ‘무한경쟁’을 외치기도 한다. 하지만 허 감독은 “그건 아니다”라고 고개를 저었다.

“시즌 초반까지는 선수들에게 시간을 줄 필요가 있습니다. 뭐가 자기한테 잘 맞는지, 어떤 역할을 잘할 수 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허 감독은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다’는 자신의 말이 진심이라고 강조했다.

“선수가 소외감 느끼게 해선 안 돼…선수가 납득할 수 있어야”

허문회 감독은 지도자의 말 한마디가 선수의 운명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그 자신이 지도자의 한 마디 때문에 선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경험을 했다.

때는 1994년. 허 감독은 당시 2차 지명 1라운드 지명을 받고 LG에 입단(해태가 권리 양도)한 주목받는 신인이었다. 마침 주전 1루수 김상훈이 해태로 건너간 상황이라, 대학 시절 국가대표 강타자로 이름을 날린 허문회가 주전 1루수 자릴 꿰찰 거란 예상이 많았다. 반면 2차 6라운드 지명으로 입단한 서용빈을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둘의 운명은 일본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서 완전히 바뀌었다. 당시 LG 캠프를 방문한 일본야구의 전설 장훈이 허문회보다 서용빈의 타격을 훨씬 높게 평가한 것이다. “훌륭한 선수”라는 대선배의 극찬에 자신감을 얻은 서용빈은 이후 LG의 간판타자로 도약했다. 반면 구단과 코칭스태프의 관심에서 밀려난 허문회는 대타 요원으로 프로 생활을 이어갔다.

허 감독은 당시 경험에 대해 “처음 장훈 선배 말씀을 들었을 때 좀 힘들었던 건 사실”이라며 “우리의 우상 아닌가.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대선수가 한마디했을 때 어린 선수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걸 그 때 깨달았다”고 했다.

장훈의 한 마디는 선수 허문회에게는 치명타였지만, 은퇴 이후 지도자 허문회의 성공에는 큰 보탬이 됐다. 허 감독은 그 때 일이 지도자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됐다. 지도자가 된 뒤 항상 말 한마디가 어떤 영향을 줄지 고민했고, 더 말조심하려고 했다그 덕분에 내가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허 감독은 “선수 시절 경험으로 볼 때, 선수가 소외감을 느끼게 해선 안 된다”고 했다. 감독이 포지션 경쟁 중인 A 선수에 대해 한마디를 하면, 미디어의 관심은 A 선수를 향해 집중된다. B 선수는 자연히 관심에서 멀어진다. 의도와는 별개로 특정 선수가 주목받고 다른 선수는 소외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감독의 한 마디는 선수를 공평하게 대해야 할 코치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기 마련이잖아요.” 허 감독의 말이다. “베스트 라인업에 들지 못한 선수도 납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페이스 메이커가 있어야, 기존에 잘하는 선수들도 더 열심히 하는 동기가 되겠죠.”

“롯데 선수들, 내 방향성 조금씩 이해하는 것 같아 기쁘다”

훌리오 프랑코 잔류군 총괄과 대화하는 허문회 감독(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훌리오 프랑코 잔류군 총괄과 대화하는 허문회 감독(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지도자의 말 한마디 뿐이 아니다. 허문회 감독은 멘탈, 동기부여, 열정, 자신감, 분위기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가 야구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안다.

스탯 좋고 몸값 비싼 선수를 데려오는 건 구단의 몫이다. 볼의 회전수를 높이고 타구 속도를 빠르게 하는 건 코치들의 몫이다. 체지방을 줄이고 근육량을 늘리는 건 트레이닝 파트가 맡는다. 그럼 감독의 역할은? “한 명 한 명이 ‘개인 사업자’인 선수들이 더 좋은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허 감독이 생각하는 감독의 몫이다.

허 감독은 스프링캠프에서 매일 훈련 시작할 때마다 전체 미팅을 가진다. 감독이 추구하는 방향성을 코치, 선수들과 공유하는 시간이다. 허 감독은 롯데 선수들에게 남의 눈치를 보지 말라고 강조한다. 남이 아닌 자신을 위해 야구하라고 독려한다. 여기엔 감독, 코치, 구단, 언론은 물론 팬들의 비난도 포함된다.

우리 선수들이 외부에서 많은 압박을 받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외부가 아닌 ‘나’에 중점을 두고 훈련했으면 합니다. 지난해 성적 부진으로 잔뜩 위축되고, 프로 선수로서 자존감에 상처를 입은 롯데 선수들이 자신감을 갖고 마음껏 자기 기량을 펼치길 바라는 게 허 감독의 마음이다.

남이 아닌 ‘나’를 위해 야구하는 선수는, 남이 시켜서가 아니라 필요한 운동을 자발적으로 찾아서 한다. 롯데 스프링캠프에서 팀 훈련 시간은 3시간 안팎으로 길지 않다. 무의미한 반복과 장시간 훈련보다는 공 하나를 치더라도 집중하고, 선수 스스로 느끼는 걸 중시한다. 감독과 코치가 끌고 가는 주입식이 아닌 “선수가 좋은 피드백을 받아서 응용할 수 있게 하는 훈련”을 추구한다.

그 외엔 전부 선수 개인에게 주어진 시간이다. 어떻게 활용할지는 자유다. 허 감독은 팀 훈련 이외의 시간에 선수들이 무엇을 하는지 일체 보고받거나 간섭하지 않는다.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눈치 보지 말고 휴식하면 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율이다.

베테랑 전준우는 “개인 시간이 많아지니까 할 게 많다. 훈련시간이 길 때보다 오히려 몸은 더 힘들다”고 했다. 저연차 선수들은 새벽 6시 반에 오전 루틴조 훈련에 참가하고, 오후에는 개인 시간을 활용해 웨이트 트레이닝에 열을 올린다. 햄버거와 건강식 중에 건강식을 선택한다.

허 감독은 “선수들이 제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가는 게 보인다”고 했다. “감독이 왜 이런 연습을 하고 계획을 짰는지, 선수들도 조금씩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선수들 사이에 전파가 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허 감독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시즌 치르면서 위기 올 것…그래서 미리 시스템 만들고 준비하는 것”

자율, 멘탈과 함께 지도자 허문회의 또 하나 대표 콘텐츠는 바로 ‘소통’이다. 함께 일하는 코칭스태프와 소통, 선수단과의 소통은 물론 구단과도 원활하게 소통해야 감독으로서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롯데는 지난겨울 현실 스토브리그의 주역이었다. 성민규 단장이 주도한 롯데의 행보에 이목이 쏠렸고, 찬사가 쏟아졌다. 단장의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감독의 시간이 왔다. 주어진 선수단을 갖고 결과를 내야 하는 현장 감독으로선 부담이 될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허 감독은 “구단과 현장 간에 분업이 잘 이뤄졌다”며 스토브리그 기간 좋은 전력을 만들어준 구단에 공을 돌렸다.

“아마도 10개 구단 중에서 구단과 현장 분업화가 이렇게 잘 이뤄진 건 올겨울 롯데가 처음이 아닐까요. 제가 구단에 ‘FA 선수 누가 좋습니다’ 말은 할 수 있지만, 영입할 돈을 내지는 못하잖아요. 그런 것 갖고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습니다. 구단은 구단대로 가고자 하는 방향이 있고, 저도 생각하는 방향이 있습니다. 다행히 제가 원하는 방향을 얘기했을 때, 구단에서도 움직여 줬어요. 구단과 역할 분담이 잘 이뤄진 덕분에, 시즌을 구상하는 데 머리 아플 일이 없었습니다.” 허 감독의 말이다.

허 감독은 미팅 시간마다 선수들에게 ‘약속’을 한다. 지도자가 이랬다저랬다 하면 선수들이 믿음을 갖기 어렵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방향으로 간다고 했다가, 잘 안되면 말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어요. 지금도 롯데가 좋은 방향으로 가는 것 같지만, 성적이 나쁘면 금방 원래대로 돌아갈 거란 시선이 있다는 걸 압니다. 허 감독의 말이다.

감독과 선수 사이에 믿음만큼 중요한 게 없다. 미팅 시간을 통해 허 감독은 소신을 바꾸지 않겠다고, 초심을 지키겠다고, 지금 롯데가 가고 있는 올바른 방향을 흔들림 없이 계속 추구하겠다고 확신을 전한다. 허 감독은 “제 마음을 지키기 위해 선수들에게 약속하는 것”이라 했다.

롯데 감독 자리는 ‘독이 든 성배’다. 좋은 성적을 내면 영웅이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비난과 욕설을 감수해야 한다. 기대만큼 성적이 나지 않고, 여론의 화살이 쏟아질 때도 꿋꿋이 지금의 방향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허 감독은 “다 예상하고 있다”고 했다. “시즌을 치르면서 위기가 올 수도 있다는 걸 잘 압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시스템을 만들고, 준비하고 있는 겁니다.” 허 감독은 “이런 야구를 한 번쯤 해보고 싶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결과가 잘 될지 안 될지는 하늘에 맡기고, 이렇게 야구해보고 싶었어요. 우리 선수들도 다 야구 후배이지 않습니까. 나중에 후배들이 지도자가 되더라도 이런 방향으로 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으니까요.

배지헌 기자 jhpae117@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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