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리그 최고의 1루수였던 이승엽은 최근 몇 년간 지명타자로 활약하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알렉스 김)
KBO리그 최고의 1루수였던 이승엽은 최근 몇 년간 지명타자로 활약하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알렉스 김)

[엠스플뉴스]

“가서 치고, 와서 앉아.”

무엇이든 시초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1973년 야구 역사상 최초의 지명타자로 타석에 나선 뉴욕 양키스 타자 론 블롬버그는 이 생소한 역할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코치나 감독이라고 형편이 다르지 않았다. 해줄 조언이라고는 그저 ‘가서 치고, 와서 앉으라’는 당연한 말밖에 없었다. 이 말을 듣고 나간 블롬버그는 역사적인 지명타자 첫 타석에서 밀어내기 볼넷을 얻어냈다. 공교롭게도 코치의 조언과는 달리 공을 치지도, 와서 앉지도 못한 셈이다.

지명타자가 낯설기는 한국야구 타자들도 마찬가지. 한국야구 최초의 지명타자는 1973년 7월 20일 열린 제10회 실업야구 올스타전에서 한일은행의 김응룡과 육군의 박해종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야구계는 백전노장 강타자인 김응룡과 떠오르는 신예 박해종의 홈런포 대결을 기대했지만, 이날 두 선수는 도합 9타수 1안타에 그치며 말 그대로 ‘가서 치고, 와서 앉았’다.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지명타자라는 새 제도를 활용하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아주 재빠르게 찾아냈다. 지명타자 제도 도입 원년인 1973년에 100경기 이상 지명타자로 출전한 선수는 총 8명(프랭크 로빈슨, 토니 올리바, 올랜도 세페다, 토미 데이비스, 알렉스 존슨, 데론 존슨, 게이츠 브라운, 짐 레이 하트). 하나같이 공격력은 쓸 만하지만, 나이가 들고 수비력이 떨어진 선수들이다.

실제 이들 중 프랭크 로빈슨, 토미 데이비스, 토니 올리바, 올란도 세페다는 1973년 이후 거의 수비수로 출전한 기록을 찾을 수 없으며, 나머지 선수들도 수비 이닝이 가파르게 줄어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전성기가 지난 노장들이 타자로서 팀에 공헌하면서 선수 생활을 연장하게 하는 용도로 지명타자 제도를 활용한 셈이다.

이런 경향은 아주 오랫동안 유지됐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아메리칸리그 팀의 절반 이상이 한 시즌 100경기 이상 같은 선수를 지명타자로 기용했다. 1991년에는 무려 11명의 선수가 100경기 이상 지명타자로 출전하기도 했다. 당시 아메리칸리그 팀 수는 14팀이었다. ‘전문 지명타자의 시대’였다.

한국야구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39세의 감독 겸 선수 백인천은 MBC 청룡 지명타자로 출전해 4할대 타율을 기록했다. 그외에도 OB 김우열(33세), 해태 김봉연(30세) 등 당시로서는 노장 축에 드는 선수들이 지명타자 슬롯을 채웠다. 1984년에는 골든글러브에 ‘지명타자’ 부문이 신설됐다. 이로서 프로야구 팬들은 매년 시상식 때마다 시즌 내내 글러브와는 별 인연이 없던 선수가 황금장갑을 들고 멋쩍게 웃는 광경을 보게 됐다.

지명타자를 활용하는 새로운 방법

이호준은 대표적인 전문 지명타자로 통한다(사진=엠스플뉴스 알렉스 김)
이호준은 대표적인 전문 지명타자로 통한다(사진=엠스플뉴스 알렉스 김)

하지만 최근 들어 트렌드가 변하고 있다. 2012년 메이저리그에서 연 100경기 이상 지명타자로 출전한 선수는 단 2명에 불과했다. 2013년과 2014년에도 각각 4명의 선수만이 100경기 이상 ‘전문 지명타자’로 나섰다. 이 수는 2015년 잠시 7명으로 늘어났지만, 올 시즌에는 다시 5명으로 숫자가 줄어들 전망이다(빅터 마르티네스, 데이비드 오티즈, 켄드리스 모랄레스, 앨버트 푸홀스, 넬슨 크루즈). 이 중 마르티네스, 오티즈, 푸홀스, 크루즈는 30대 후반~40대로 선수 생활의 황혼기가 가까운 선수들이다.

KBO리그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2015시즌 연 100경기 이상 지명타자로 선발출전한 선수는 단 3명(최준석, 이승엽, 이호준)밖에 없었다. 이에 10개 구단 중 7개 구단이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후보를 배출하지 못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올 시즌도 9월 18일까지 100경기 이상 지명타자 출전한 선수는 2명(이승엽, 이호준)에 불과하다. 나지완(97경기), 박용택(95경기)을 포함해도 ‘전문 지명타자’로 간주할 수 있는 선수는 4명 뿐이다.

2016시즌 구단별 지명타자 선발기용 횟수

두산

에반스 61(45.2%), 김재환 18, 최주환 18, 국해성 17, 홍성흔 9, 민병헌 4, 오재일 3, 양의지 2, 박건우 2, 박세혁 1

NC

이호준 104(81.8%), 테임즈 11, 박석민 6, 모창민 3, 조평호 1, 조영훈 1, 박민우 1

넥센

윤석민 39(29.3%), 채태인 35, 이택근 19, 고종욱 12, 김민성 12, 대니돈 11, 서건창 4, 김하성 1

LG

박용택 95(70.8%), 서상우 22, 정주현 9, 이병규 3, 정성훈 3, 히메네스 2

KIA

나지완 97(72.9%), 김주찬 17, 김주형 5, 이범호 5, 필 4, 오준혁 2, 이홍구 1, 백용환 1, 황대인 1

SK

정의윤 47(34%), 최승준 24, 김동엽 23, 최정민 10, 이재원 10, 이명기 4, 김성현 4, 박재상 3, 고메즈 3, 박승욱 2, 임석진 2, 최정 1, 김기현 1, 유서준 1, 박정권 1, 최정용 1, 나주환 1

한화

김태균 78(59%), 로사리오 51, 송광민 2, 이종환 1

삼성

이승엽 125(95%), 박한이 4, 최형우 1, 구자욱 1

롯데

최준석 83(63.3%), 오승택 18, 김상호 9, 강민호 8, 김문호 8, 손아섭 2, 황재균 1, 박헌도 1, 정훈 1

kt

이진영 76(57.5%), 유한준 16, 윤요섭 7, 김상현 6, 김동명 5, 유민상 5, 박경수 4, 전민수 3, 이대형 3, 김민혁 3, 오정복 1, 박기혁 1, 문상철 1, 김선민 1

박용택의 지명타자 기용은 넓은 잠실 외야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선택이다(사진=엠스플뉴스 알렉스 김)
박용택의 지명타자 기용은 넓은 잠실 외야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선택이다(사진=엠스플뉴스 알렉스 김)

사정이 이렇게 된 건, 구단들이 지명타자 제도를 활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상당수의 구단들은 더 이상 지명타자 자리를 노장 스타의 생명 연장이나 수비가 안 되는 반쪽 선수에게 할애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여러 선수를 로테이션으로 기용하면서 휴식을 주는 용도로 활용한다. 가벼운 부상으로 수비가 어려운 선수의 공격력을 활용하고, 상대팀에 맞춰 가장 효율적인 라인업을 가동하는데 지명타자 자리를 이용한다.

“우리 팀에서 지명타자는 돌아가며 하는 자리입니다.” 넥센 염경엽 감독의 말이다. “넥센 감독을 맡은 첫 시즌부터 이렇게 해 왔어요. 144경기 장기 레이스에서는 선수들의 체력 안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방망이만 가능한 반쪽 선수가 지명타자 자리를 독점하면, 다른 선수가 지치게 되잖아요. 만약 그런 선수가 팀에 있다면, 필요에 따라서 라인업에서 빼고 다른 선수를 지명타자로 기용할 겁니다.”

실제 넥센은 새로운 지명타자 활용법을 가장 잘 실행하고 있는 팀이다. 2014년 넥센은 10개 팀 중 최다인 총 12명의 선수를 지명타자로 기용했다. 2015년에는 총 13명의 선수가 돌아가며 선발 지명타자로 나섰다. 올해는 총 8명이 1차례 이상씩 지명타자로 출전했다. 가장 지명타자 출전이 많은 윤석민은 39경기로 전체 경기수의 29.3%만을 점유했다. 10개 팀 대표 지명타자 중 가장 적은 경기수다.

윤석민이 지명타자로 나서는 날엔, 대니돈이 1루를 보고 김민성이 3루를 본다. 채태인이 지명타자인 날은 윤석민이 1루를 보고 대니돈은 외야로 나간다. 최근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고종욱이 지명타자일 때는 대니돈-임병욱-이택근으로 외야를 짜고 윤석민 1루-김민성 3루를 가동한다. 김하성이나 서건창이 지명타자인 날은 백업 김지수가 선발 내야수로 나서는 날이다. 이렇게 지명타자를 중심으로 로테이션이 이뤄지기 때문에, 매 경기 라인업이 조금씩 달라진다. 올해 넥센은 총 82종류의 라인업을 사용해, 김성근 감독이 이끄는 한화(79종류)보다도 라인업 변동이 많았다.

눈에 띄는 건, 올해는 철저하게 평균 이상의 공격력을 갖춘 주전 멤버에게만 지명타자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의 경우 박헌도(4경기), 서동욱(4경기), 이성열(3경기), 임병욱(2경기) 홍성갑(1경기) 등 이른바 ‘백업’에 해당하는 선수들도 지명타자로 선발 출전했다. 올해는 백업 멤버의 지명타자 출전이 완전히 사라졌다. 포수 박동원, 중견수 임병욱 등 공격보다는 수비에 초점이 맞춰진 선수들을 지명타자로 쓰지 않은 것도 눈에 띈다. 지명타자 활용법이 예년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됐다고 볼 수 있다. “수비가 장점인 선수를 굳이 타격만 하는 자리에 넣을 이유가 없죠. 정 휴식이 필요하면 아예 벤치에 앉게 하는 편이 낫습니다.” 넥센 관계자의 말이다.

반면 총 17명이 지명타자로 기용된 SK와 14명을 기용한 kt는 공격과는 거리가 먼 대체 선수들에게도 종종 지명타자 기회를 부여했다. 공교롭게도 SK는 지명타자 OPS 8위(0.827), kt는 9위(0.812)로 지명타자 공격력 면에서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물론 SK와 kt보다 지명타자 자리에서 더 나쁜 OPS(0.759)를 기록한 넥센이 있긴 하지만, 대신 넥센은 팀OPS 0.815로 두산-NC 다음으로 강한 공격력을 과시하고 있다. 거칠게 요약하면, 넥센 선발 라인업에서 지명타자만 빼고 나머지 타자들은 다들 잘 치고 있다는 얘기다. 지명타자를 적절히 활용해 주전 선수들에 휴식을 준 효과가 팀 전체 공격력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줄어드는 전문 지명타자의 입지

젊은 선수로는 흔치 않은 전문 지명타자 나지완(사진=엠스플뉴스 알렉스 김)
젊은 선수로는 흔치 않은 전문 지명타자 나지완(사진=엠스플뉴스 알렉스 김)

넥센과 두산처럼 지명타자 자리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팀이 늘어나면서, ‘전문 지명타자’의 직업적 전망은 인공지능에 위협받는 야구 기자만큼이나 어두워져가는 추세다. 올 시즌 전문 지명타자로 분류할 만한 선수는 4명 정도로 전체 경기수의 70% 이상을 점유한 이승엽과 이호준, 박용택과 나지완 정도가 해당된다. 이 중 나지완을 제외한 세 선수는 젊은 후배들을 압도하는 공격력과 ‘대체불가’의 팀내 영향력, 상징성을 지녔다는 공통점이 있다. 붙박이 지명타자를 기용해서 생기는 손해를 만회하고도 남을 만큼 이점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전문 지명타자로 기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전문 지명타자가 타격에서 더 이상 경쟁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됐을 때 생긴다. 수비와 주루가 가능한 선수는 타격이 잠시 부진해도 팀에 기여할 방법이 여러 가지다. 타격만 가능한 선수는 그렇지가 못하다. 두산 홍성흔과 LG 이병규(9번)가 대표적이다. 한때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독식했던 홍성흔은 올 시즌 선발 지명타자로 9경기에 출전하는데 그쳤다. 큰 이병규는 2년 연속 부진으로 올해는 아예 1군 출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있다.

NC 이호준은 시즌 중반 슬럼프에 빠지자 전략적인 차원에서 잠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당시 김경문 감독은 “무더위가 한창인데 주전 선수들에게 휴식이 필요하다”며 이호준이 빠진 지명타자 자리를 활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시즌 초반 붙박이 지명타자였던 롯데 최준석은 6월 이후 극심한 타격 부진에 빠지면서 출전 기회를 완전히 잃었다. 전문 지명타자는 언제든 팀에서 ‘계륵’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 입지가 불안한 존재다. 올 시즌 놀라운 활약에도 불구하고, 몇몇 구단이 예비 FA 나지완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구단들은 점점 지명타자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그에 반비례해 전문 지명타자로 활약하는 선수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올 시즌 유일하게 500타석 이상 지명타자로 출전한 이승엽은 내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이호준은 벌써 마흔 살이며, 박용택도 서른 일곱 살로 앞으로 뛸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장이다. 몇 년 뒤 이 선수들이 현역에서 은퇴한 뒤에는, 전문 지명타자는 일부 팀에서만 사용하는 희귀한 존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전문 지명타자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다.

통계출처=스탯티즈(www.statiz.co.kr)

배지헌 기자 jhpae117@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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