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성 컬링 해설위원, 1998년부터 17년 동안 태극마크 놓지 않았던 한국 컬링의 ‘산증인’

-“동아리 활동으로 선택한 컬링, 태극마크를 달고서 올림픽 출전 꿈 꾸기 시작했다”

-“‘빗자루’ 떠올리는 브룸 들고 지하철 타면 ‘청소하러 가느냐’는 소리 들었죠”

-“후배들이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은메달을 목에 건 이후 컬링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2019-2020 코리아 컬링리그 최고의 스타 송유진, 어떤 선수인지 물어보는 분 끊이질 않아”

MBC스포츠플러스 신미성 컬링 해설위원(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MBC스포츠플러스 신미성 컬링 해설위원(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여의도]

한국 여자 컬링의 산증인

컬링계는 MBC스포츠플러스 신미성 해설위원을 이렇게 부른다. 신 위원이 1998년부터 17년 동안 한국 여자 컬링 대표팀으로 활약한 까닭이다.

신 위원은 ‘컬링의 불모지’로 불린 한국의 첫 올림픽 출전을 이끌었다.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에 출전해 컬링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은퇴 후엔 한양초등학교 코치와 개인 사업(요식업)을 하며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선 MBC 컬링 해설위원을 맡아 은메달 획득의 순간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지난해 12월부턴 2019-2020 코리아 컬링리그 해설을 책임지고 있다.

신 위원의 삶엔 한국 컬링의 역사가 담겨있다.

“‘구슬치기’ ‘땅따먹기’와 비슷했던 컬링,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에 나선 한국 여자 컬링 대표팀이 브룸을 치켜세우며 기뻐하는 모습(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에 나선 한국 여자 컬링 대표팀이 브룸을 치켜세우며 기뻐하는 모습(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위원께선 한국 컬링의 1세대로 불립니다. 컬링이 낯선 시절 어떻게 첫 인연을 맺게 된 겁니까.

학창 시절엔 컬링이 뭔지 몰랐습니다(웃음). 성신여대 신입생 시절인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처음 컬링을 접했죠. 컬링이 처음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때입니다.

한국 컬링이 처음 올림픽 무대에 도전한 건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입니다. 1998년이면 컬링 중계를 접하기 힘들었을 때가 아닙니까.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일본팀의 경기를 봤어요. 처음엔 ‘이게 뭐지’란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계속 보니까 어릴 때 친구들과 하던 ‘구슬치기’ 땅따먹기‘ 놀이와 비슷한 겁니다. 그러면서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죠.

원래 동계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습니까.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습니다. 학교 대표로 육상 대회에 나간 적이 있었죠. 특별히 동계 종목을 좋아한 건 아니었어요. 스케이트를 따로 배운 적도 없었고요. 아버지께 논에서 배운 게 전부였습니다. 학창 시절엔 취미로 운동을 즐기면서 학업에 집중한 학생이었어요. 어릴 적 꿈도 체육 교사였죠.

그런 학생이 1998년 나가노 동계 올림픽에서 컬링을 접하고 컬링계로 입문했습니다. 당시 컬링을 접하는 게 어렵지 않았습니까.

컬링이 내 운명이란 생각을 해요. 성신여대에 컬링 동아리가 있었습니다(웃음). 1994년 컬링이 한국에 들어온 이후 학교에서 동아리를 운영했어요. 친구들과 고민하지 않고 컬링 동아리에 들어갔습니다. 같은 해 10월엔 태극마크까지 달았죠.

호기심으로 시작해 단기간에 태극마크까지 달았습니다. 컬링 중계를 처음 접한 순간부터 태극마크를 꿈꾼 겁니까.

처음엔 취미로 했습니다. 컬링이 대중적인 인지도가 있는 종목이 아니었던 까닭에 연합 동아리로 운영했습니다. 컬링을 배우고 싶어 하는 여러 학교 친구들이 모였죠. 또 우리가 여자 대학교잖아요. 남학생들과 함께 배우는 게 색다르고 재밌었죠. 다른 동아리처럼 뒤풀이도 있어서 신나게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컬링이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입니다. 힘든 점은 없었습니까.

지금처럼 빙상장이 많지 않았습니다. 컬링전용경기장은 하나도 없었죠. 컬링이 힘이 없는 시절이다 보니 대관 시간이 불규칙했습니다. 새벽이나 늦은 밤, 주말 아침 시간대에 몰아서 하지 않으면 훈련을 할 수 없었죠. 대관비는 물론이고 장빗값을 충당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고요.

장빗값이요?

컬링은 컬링화를 신습니다. ‘빗자루’를 떠올리는 브룸도 사야 하죠. 브룸은 가격이 나갈수록 튼튼하고 가볍습니다. 브룸에 붙어있는 패드는 값이 싸지만 소모성이라서 갈아줘야 해요. 조그마한 천 쪼가리가 약 4만 원 정도 했습니다.

그건 1년에 몇 번 바꿉니까.

국외 선수들은 1경기 하고 바꿉니다(웃음). 우린 대표선발전처럼 중요한 시합에 나갈 때만 매 경기 교체했죠. 패드가 스위핑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안 바꿀 수가 없어요. 적잖은 비용을 지불하고 하는 컬링인 만큼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우연히 접한 컬링, 태극마크를 달고 올림픽을 꿈꾸게 하다

한국 컬링 1세대 신미성 해설위원(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한국 컬링 1세대 신미성 해설위원(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동아리에서 취미로 컬링을 했습니다. 언제부터 운동선수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겁니까.

1998년 10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1위를 했습니다. 우리 학교에서만 네 팀이 출전했는데 깜짝 놀랐죠. 내가 속한 ‘성신여대 D’ 팀이 내로라하는 선배들을 따돌리고 태극마크를 달 것이란 걸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태극마크를 달고 컬링에 더 깊이 빠져들었어요.

태극마크를 달고 달라진 점이 있습니까.

광운대학교 스케이트장에서만 훈련하다가 국외로 전지훈련을 나갔습니다. 그곳에서 외국인 코치에게 기본자세와 기술 등을 전수 받았죠.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습니다. 안 그래도 재밌는 컬링에 더 깊이 빠진 거죠.

보통은 국가대표 선수를 꿈꾸며 운동을 시작합니다.

특이하고 운이 좋은 사례죠(웃음). 처음 컬링을 시작했을 땐 태극마크는 꿈도 못 꿨어요. 우리보다 오랜 경력을 자랑하는 선배가 많았습니다. 친구들끼리 ‘우리가 무슨 국가대표야’란 얘길 많이 했죠. 우리가 동기들로 이뤄진 팀이고 조직력이 좋다 보니까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 것 같아요.

1998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1위를 했습니다. 그 당시 컬링 수준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2020년의 중학교 수준으로 봅니다. 더 떨어질 수도 있어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을 수 없는 환경이었죠. 지원도 부족했습니다. 국제대회에 나가면 식비와 숙박비만 나왔어요. 훈련비는 개별적으로 해결했습니다. 한편으론 그 시기를 잘 버텨낸 까닭에 17년 동안 태극마크를 달지 않았나 싶어요.

한국 여자 컬링의 산증인입니다. 한국이 본격적으로 올림픽을 바라보기 시작한 건 언제입니까.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 전까진 매우 힘들었어요. 올림픽에 나가려면 국제대회 포인트가 필요합니다. 세계선수권과 같은 대회에서 메달을 따내야 큰 점수를 얻을 수 있죠. 우린 2001년 ‘아시아태평양 컬링선수권대회’에서 정상에 오르며 처음 국제대회 출전 기회를 잡았습니다.

국제대회 도전까지 4년이 걸렸습니다. 첫 대회는 어땠습니까.

2002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대회였는데 모두 패했습니다. 당시엔 많이 떨렸고 세계와의 격차도 컸죠. 하지만, 그런 경험이 쌓이면서 자신감이 붙었어요. 세계적인 선수들과 기량을 겨루면서 그들의 경기 준비 과정과 운영 능력 등을 배웠죠. 환경과 지원이 열악했지만 성장하는 게 느껴졌어요. 그렇게 컬링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갔습니다.

‘성장하는 게 눈에 보였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젠 올림픽에 나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은 건 언제입니까.

2012년 캐나다 세계선수권입니다. 처음으로 세계선수권 준결승에 진출했어요. 우리가 예선을 1위로 통과했습니다. 예선전이 끝나고 친구들과 ‘우승하겠다’는 얘길 했었죠. 하지만, 경험이 부족했습니다. 긴장감이 극에 달했고 부담이 컸어요. 대회를 마치고 실망을 많이 했지만, ‘올림픽’에 출전하는 게 헛된 꿈이 아니란 걸 확인했죠.

2012년 캐나다 세계선수권 이후 마침내 올림픽 진출의 꿈을 이루게 됩니다.

팀원들에게 아주 고마워 한 시기입니다. 내가 임신과 출산으로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을 앞두고 잠시 팀을 떠났습니다. 중심을 잡아줘야 하는데 제 역할에 충실할 수 없었죠. 하지만, 팀원들이 긴장하지 않고 제 기량을 발휘해준 까닭에 올림픽 출전의 꿈을 이뤘습니다. 국제대회에서 포인트를 쌓고, 마지막 국가대표 선발전까지 완벽히 치른 선수들이 자랑스러웠죠.

꿈에 그리던 첫 올림픽 출전입니다. 준비 과정은 어땠습니까.

훈련량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긴 시간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강한 체력을 만드는 데 집중했습니다. 강인한 체력이 뒷받침돼야 마지막까지 높은 샷 성공률을 유지할 수 있거든요. 체력 소모가 큰 스위핑을 완벽히 수행하기 위해서도 강인한 몸이 필수였죠.

첫 올림픽 출전인 만큼 지원도 예년과 달랐을 것 같습니다.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 직전까지 전지훈련을 했어요. 대회 개막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까지 스코틀랜드에서 구슬땀을 흘렸죠.

마침내 밟은 러시아 땅 “올림픽이란 대회가 주는 부담이 상상 이상이었다”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에 출전한 신미성 해설위원(사진 맨 오른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에 출전한 신미성 해설위원(사진 맨 오른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위원께선 1998년부터 컬링을 시작했습니다. 많은 고비를 넘어서며 올림픽 출전의 꿈을 이뤘어요. 처음 소치 땅을 밟았을 때의 감정이 남달랐을 거 같습니다.

머릿속에 ‘드디어 왔구나’란 생각이 들었어요. 재밌는 게 있습니다. 처음엔 올림픽 출전만 하면 행복할 줄 알았어요. 우린 첫 올림픽 출전이란 목표만을 바라보며 쉼 없이 내달렸죠. 하지만, 막상 소치 땅을 밟으니까 욕심이 생겼어요. 예선 상위 4팀이 출전하는 플레이오프를 바라봤죠.

새로운 목표를 메달권 진입으로 잡았습니다. 성적에 대한 부담은 없었습니까.

매우 컸죠(웃음). 휴식을 취하는 날에도 제대로 못 쉬었습니다.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한데 마음이 불편했어요. 마인드 컨트롤에 최대한 신경 썼죠. 팀원들과 최대한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마음의 짐을 줄이려고 했습니다.

2014년 2월 11일 ‘숙명의 라이벌’ 일본과 올림픽 첫 경기를 치렀습니다.

몸에 마이크를 부착하고 수많은 관중 앞에 딱 서니 엄청나게 떨렸습니다. 첫 샷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안 나요. 첫 상대가 일본인 까닭에 ‘이 경기만큼은 무조건 잡는다’는 생각만 했죠. 다행히 시간이 흐를수록 경기에만 몰입하면서, 올림픽 첫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컬스데이’가 탄생한 게 바로 그 경기입니다. 당시만 해도 컬링은 인기 종목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전만 중계방송이 예정돼 있었던 이유죠. 하지만, 한국이 일본을 12-7로 이기면서 중계방송 일정이 바뀌었습니다. 한국의 전 경기를 생중계하기로 한 거죠.

당시엔 그런 변화와 관심을 느낄 겨를이 없었어요. 대회가 끝날 때까지 다음 경기만 생각했죠. 한국에 도착해서 느꼈습니다. 수많은 취재진이 우릴 기다렸어요. 다음 라운드 진출에 실패했지만, 큰 관심을 보내주셔서 매우 감사했습니다.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 이후 ‘컬링의 인지도 많이 올라갔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까.

올림픽 전엔 브룸을 가지고 지하철을 타면 ‘어디 청소하러 다니냐’는 질문을 받았어요. ‘컬링 선수입니다’라고 하면 ‘그게 뭐예요’란 답변이 돌아왔죠. 하지만, 소치 대회 이후부터 ‘컬링 알아요’라고 하는 분들이 생겼습니다.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을 마친 뒤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2014년 3월에 열린 세계선수권 이후 은퇴했죠. 더 뛰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어요. 좋은 후배들도 많이 나와서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굳혔죠. 시원섭섭했습니다.

무엇이 가장 아쉬웠습니까.

올림픽 시상대에 서지 못한 거죠. 올림픽을 바라보고 운동했습니다. 처음엔 출전을 목표로 땀을 흘렸지만, 막상 올림픽에 출전하니 욕심이 생겼죠. 학창 시절부터 운동을 시작한 후배들을 보면서 ‘좀 더 일찍 컬링을 접했으면 더 좋은 선수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란 생각도 했어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컬링을 시작했으니까.

‘17년’ 컬링 국가대표 생활 마무리, 제2의 삶을 시작하다

MBC스포츠플러스 신미성 해설위원(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MBC스포츠플러스 신미성 해설위원(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2014년 3월 은퇴 후엔 어떻게 지냈습니까.

2년 동안은 육아에만 집중했습니다. 둘째를 임신하면서 가정에 충실했죠. 이후엔 대한장애인컬링협회에서 사무국장과 전무이사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한양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죠.

컬링 지도자로 제2의 삶의 시작을 알린 거군요.

컬링 선수를 꿈꾸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건 아닙니다. 적성을 찾기 위해 시작하는 학생선수가 많죠. 쉽게 말해 동아리예요(웃음). 이게 어렵습니다.

어떤 부분이 가장 어렵습니까.

선수 땐 감독과 코치께서 시키는 걸 하면 끝났습니다. 하지만, 지도자는 다르죠. 아이들이 컬링에 재미를 붙일 수 있도록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해요. 준비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가장 힘든 건...

예.

초등학생들이다 보니 훈련에 집중시키는 게 어려워요. 아이들끼리 대화하고 뛰노는 시간이 많죠(웃음).

해결책을 찾았습니까.

팀을 나눠 경기를 진행합니다(웃음). 게임을 할 때만큼은 진지하거든요. 문제는 기본기 훈련을 제대로 거치지 않고 경기만 할 때 생깁니다. 컬링은 시작이 가장 중요해요. 딜리버리 자세가 안 잡히면 컬링의 재미를 알기 어렵습니다. 라인이 제대로 안 잡힌 상태에서 투구하면 스톤이 뜻대로 가지 않거든요.

고민이 클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기본기 훈련을 매우 지루하게 느낍니다. 하지만, 기본기를 갖추지 않으면 실력 향상을 꾀하기 어려워요. 성적이 나지 않죠. 처음엔 기본자세를 확실히 잡아주려고 합니다. 이후 실전 경기와 병행하면 재미가 붙을 수 있어요. 또 아이스 상태가 좋은 컬링 경기장을 선택하는 게 중요합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학생선수들을 위한 컬링경기장은 없습니다. 초등생들은 힘이 부족해요. 투구했을 때 스톤이 중간을 넘지 못 하는 일이 많죠. 그런 일이 반복되면 재미를 붙이기 어렵습니다. 아이들이 컬링의 매력을 알고 꾸준히 할 수 있도록 좋은 컬링경기장을 대관해야죠.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컬링이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컬링 선수를 꿈꾸는 학생선수는 늘어나고 있습니까.

2018년 평창 대회 이후 선수 모집이 빨리 끝나긴 했어요. 하지만, 이후엔 큰 변화가 없습니다. 학교 코치들이 ‘신입 선수 모집이 가장 힘들다’는 얘길 자주 해요. 컬링을 대중에게 지속적해서 노출하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스웨덴(세계랭킹 1위) 캐나다(3위) 등은 어떤 식으로 선수를 육성하고 있습니까.

학교에서 컬링을 배웁니다. 특별활동 수업에 컬링이 있어요. 누구든지 컬링을 접하고, 재능 있는 학생은 선수의 길을 걷는 거죠.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메달을 목에 건 후배들, 아주 자랑스럽다”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목에 건 '팀 킴' 경북체육회 선수들(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목에 건 '팀 킴' 경북체육회 선수들(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선 컬링 해설위원으로 활약했습니다.

올림픽을 앞두고 MBC에서 연락이 왔어요. 처음엔 고민이 많았습니다. 해설위원은 컬링을 쉽게 설명하고 재미를 더할 수 있는 말솜씨가 필요해요. 생방송이다 보니 실수에 대한 두려움도 컸죠. 방송을 통해 컬링의 매력을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결론을 냈습니다. ‘한번 도전해 보자’고.

2014년엔 선수로 올림픽을 뛰었습니다. 4년 뒤 올림픽은 어떤 기억으로 남았습니까.

대중들과 똑같아요. 우리 선수들이 상상 이상의 성적을 낸 대회죠. 은메달을 목에 건 여자뿐 아니라 남자와 믹스더블 대표팀도 가능성을 보여줬어요.

한국 여자 컬링 대표팀 얘길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팀 킴’ 경북체육회가 컬링의 인지도를 확 끌어올렸습니다. 2018년 평창 올림픽 전까진 컬링을 소개하면 ‘비인기 종목’이라고 얘기했어요. 하지만, 이 대회 이후부턴 당당히 ‘인기 종목’이라고 말합니다. 후배들이 자랑스럽고 고맙습니다.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이전 ‘팀 킴’의 성적을 예상했습니까.

‘메달은 딸 수 있겠다’고 봤어요. 경북체육회가 올림픽 개막 한 달 앞두고 열린 캐나디언 오픈에서 3위를 차지했습니다. 2017년 10월 핀란드 대회와 11월 아시아태평양 컬링선수권대회에선 정상에 올랐어요. 무엇보다 한국에서 열린 첫 동계 올림픽이었습니다. 선수들이 긴장하지 않고 제 기량을 발휘하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예상했습니다.

위원께선 한국 컬링의 1세대입니다. 후배들이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한국 컬링이 이 정도까지 성장했구나’란 생각이 들었죠. 이젠 컬링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국민 영미’를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주시죠. 후배들이 컬링이란 종목을 대중들에게 확실히 각인시켰어요. 그 덕분에 2019년 12월 코리아 컬링리그를 시작할 수 있었죠. 대중들이 컬링을 몰랐다면 어려웠을 거예요.

2019-2020 코리아 컬링리그에선 이 대회를 독점 중계하는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으로 활약 중입니다. 리그 일정의 3분의 1을 지났는데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한국에서 석 달 동안 컬링 리그전이 열린다는 게 신기합니다. 컬링 발전에 아주 큰 힘이 될 거예요. 선수들이 참여할 수 있는 대회는 한정적입니다. 전국동계체육대회처럼 1주일 내로 끝나는 대회가 전부죠. 리그전은 경기 감각을 꾸준히 유지하면서 실력 향상을 꾀할 수 있어요. 컬링이 대중에게 한층 더 다가갈 기회고요.

두 번째로 컬링 해설을 맡고 있습니다. 특별히 신경 쓰는 게 있습니까.

똑같이 어렵습니다(웃음). 이번 대회도 처음엔 녹화 중계인 줄 알았어요. 알고 보니 생방송인 거지.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큽니다. 캐스터를 포함한 많은 분이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힘들었을 것 같아요. 해설을 통해 이루고 싶은 건 하나입니다. 많은 분께 컬링의 매력을 알리고 싶어요. 노력해야죠.

2019-2020 코리아 컬링리그 해설을 맡으면서 ‘한국 컬링이 크게 발전했다’고 느끼는 때가 있습니까.

내가 선수로 뛰던 시절과 확실히 다릅니다. 늦어도 중학교 때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선수가 많아요. 딜리버리 자세와 같은 기본기가 매우 안정적입니다. 국제대회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경기력을 보이고요. 보고 있으면 뿌듯합니다(웃음).

“많은 분이 송유진이 어떤 선수인지 물어본다”

믹스더블 경북체육회 B 송유진(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믹스더블 경북체육회 B 송유진(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2019-2020 코리아 컬링리그에서 눈여겨보는 선수가 있습니까.

당연히 (송)유진이죠(웃음). 처음엔 이 대회가 대중들에게 알려지는 데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봤습니다. 하지만, 유진이가 첫 경기를 치르고 난 후 컬링리그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었어요. 크리스마스이브엔 유진이가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했죠. 예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믹스더블 경북체육회 B 송유진에 관한 관심은 지금도 뜨겁습니다.

가까운 분이 부산에 계시는 데 연락이 왔어요. ‘송유진이 누구야’라고 물으셨죠. 한편으론 걱정도 됩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유진이는 태극마크를 달 실력이 있는 선수예요. 첫 경기에선 현재 한국 믹스더블 대표팀으로 활약 중인 경북체육회 A를 8-5로 이겼죠. 이후 2경기에서도 승전고를 울렸습니다. 하지만, 컬링 실력으로 대중의 눈을 사로잡은 게 아니에요. 외모가 더 부각된 게 사실입니다. 어린 선수인 까닭에 흔들리진 않을까 걱정했어요.

걱정했다?

유진이는 멘탈이 아주 강한 선수입니다. 인기에 신경 쓰지 않고 성적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얘길 하더라고요. 실제로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 출전을 바라보면서 훈련에만 열중한다고 합니다. 개인 인터뷰 요청도 본인이 거절한다고 해요. 선배로서 특별히 조언할 게 없을 정도로 좋은 선수입니다.

손흥민(축구), 류현진(야구)처럼 각 종목 스타가 미치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합니다. 송유진을 향한 관심을 컬링계 전체로 이어갈 방법이 있습니까.

2019-2020 코리아 컬링리그 믹스더블에서 우승하면 됩니다(웃음). 유진이의 말대로 실력으로 자신이 최고라는 걸 증명하면 더 큰 관심을 받을 수 있어요. 컬링을 알리는 데도 큰 도움이 되죠. 운동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실력입니다. 지금처럼 나아간다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2019-2020 코리아 컬링리그가 일주일간의 휴식기를 마치고 1월 20일 재계합니다.

유진이뿐 아니라 대회에 참가하는 모든 선수가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많은 팀이 2022년 베이징 올림픽 출전을 꿈꿉니다. 누구든지 할 수 있어요. 아직 다음 올림픽에서 누가 태극마크를 달지 모릅니다.

우연히 시작한 컬링으로 올림픽 무대를 밟았습니다. 이후엔 후배 양성에 힘쓰고, 개인 사업과 해설위원까지 맡고 있습니다. 제2의 삶에서 꼭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입니까.

뼛속까지 컬링인입니다. 지금보다 뛰어난 후배들이 등장할 수 있도록 힘쓰고 싶어요. 컬링을 알리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을 거고요.

지도자로 다시 한번 태극마크를 달고 올림픽 무대에 설 수 있습니다.

지금은 ‘욕심’이라고 생각해요.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웃음). 가정을 돌봐야 하고, 사업을 챙겨야 하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해설도 준비해야 하고요. 당장은 주어진 일에 온 힘을 다하면서 한국 컬링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어요. 2019-2020 코리아 컬링리그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웃음).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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