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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전설’ 유명우 “장정구는 ‘넘지 못할 산’…맞대결 안 한 게 천만다행이죠” [엠스플 레전드]

  • 기사입력 2020.03.25 12:01:05   |   최종수정 2020.03.25 14: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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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복싱의 전설, 유명우 버팔로 프로모션 대표이사

-홍수환 4전 5기 보고 복싱계 입문…“처음부터 세계 챔피언 목표”

-17차 연속 타이틀 방어 성공…이오카에 당한 1패 계기로 초심 되찾아

-사업가로 성공한 뒤 다시 복싱계 복귀 “후배들에 미안해…세계 챔피언 꼭 키워낼 것”

 

한국 프로복싱의 전설 유명우(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한국 프로복싱의 전설 유명우(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엠스플뉴스]

 

한국 복싱의 전설 유명우는 ‘행복한 복서’다. 

 

그의 전성기인 1980년대, 복싱은 헝그리 스포츠의 대명사였다. 가진 것 없고 배고픈 이들이 맨주먹으로 성공을 꿈꾸며 도전하는 종목이란 인식이 강했다. 유명우는 달랐다.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아서’ 복싱을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 어린 나이에 세계 챔피언을 목표로 당돌하게 도전했다. 특유의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소나기 같은 펀치를 앞세워 챔피언의 꿈을 이뤘다. 

 

정상에 오른 뒤에도 유명우는 유혹에 빠지거나 초심을 잃지 않았다. 돈이나 성공이 아닌 복싱을 향한 열정이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프로통산 전적 39전 38승 1패. 17차 연속 방어 성공. 처음 링에 오른 날부터 마지막 내려올 때까지 유명우의 복싱 사랑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복서로 성공한 이들 중에는 은퇴 이후 사업 실패, 가정사로 몰락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그러나 유명우는 은퇴 후에도 성공 가도를 달렸다. 사업에서도 성공을 거뒀고, 두 자녀의 아버지로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고 있다. 유명우가 진정 ‘행복한 복서’인 이유다.

 

유명우의 다음 목표는 무너진 한국 프로복싱 재건이다. 이를 위해 프로모터 업체 ‘버팔로프로모션’을 직접 차렸다. 복싱 유망주를 발굴해서 다시 세계 챔피언을 키워내고, 복싱의 인기를 되찾는 게 유명우의 새로운 꿈이다. 엠스플뉴스는 ‘행복한 복서’ 유명우와 만나 전성기 한국 프로복싱의 추억과 앞으로의 과제를 들어봤다.

 

“중학교 1학년 때 복싱 입문…’세계 챔피언 되겠다’ 큰 소리 뻥뻥”

 

유명우의 현역 시절. 유명우의 현역 시절.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전 세계 모든 스포츠가 멈춘 상황입니다. 복싱계도 예외는 아닐 것 같은데, 어떤가요.

 

영향이 있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리 체육관도 일주일 동안 문을 닫았습니다. 1주가 아니라 몇 주씩 문을 닫는 곳도 있어요.


당분간 대회를 열기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잡혀 있던 경기는 다 취소됐어요. 어차피 지금은 경기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봐선 5월도 무리일 것 같아요. 6월이나 돼야 할까. 선수들 건강 문제도 있지만, 관중 동원도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새로 열리는 경기가 없어서 그런지, 요즘 스포츠 팬들은 옛 레전드 선수들의 현역 시절 활약상이 담긴 영상을 보면서 아쉬움을 달랜다고 합니다. 사실 모든 스포츠 경기가 중단된 지금만큼 레전드 선수들의 전성기를 돌아보기에 좋은 시기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복싱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그때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을 거에요. 당시 복싱 인기가 정말 좋았어요. ‘박치기’로 유명한 김일 선수 아시죠? 그분의 활약으로 레슬링이 한창 전성기였는데, 복싱도 그에 못지  않게 높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외국 선수들 경기 위성중계도 자주 해줬어요. 어릴 적 무하마드 알리, 조지 포먼 같은 절대 강자들의 경기를 보면서 자랐습니다. 물론 제가 복싱 선수의 꿈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따로 있습니다.

 

말씀해 주시죠.

 

1977년도에 홍수환 선수의 ‘4전 5기’를 본 게 결정적이었어요. 그걸 보고서 ‘아, 내가 할 운동은 저거다. 나도 저렇게 챔피언이 돼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때가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막 올라갈 때였습니다. 


당시 복싱선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헝그리 정신’이란 말이 항상 등장합니다. 가난과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복싱에 입문해, 피나는 노력 끝에 성공한다는 스토리가 클리셰로 굳어졌는데요. 대표님의 경우엔 어땠나요.

 

물론 그런 선수들도 있었죠. 워낙 살기 힘든 시대였잖아요. 지방에서 올라와서 중국집 배달 일을 하면서 맨주먹으로 일어서려고 노력하는 선수들이 분명 있었습니다. 그 시절 복싱하는 사람의 거의 8, 90% 정도는 형편이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해요. 다만 저는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부모님도 다 계시고, 비록 풍족할 정도까진 아니어도 따뜻한 밥 먹으면서 운동할 수 있었거든요. 먹고 살기 위해서 한다기보다는, 제가 좋아서 시작한 복싱이었어요.

 

복싱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매력적이었나요. 

 

멋있잖아요. 복싱은 정말 남자다운 운동입니다. 일대일로 주먹만 갖고 승부하고, 쓰러진 사람은 공격하지 않아요. 팔꿈치 가격도 안 되고, 머리로 들이받는 것도 안되죠. 멋지지 않습니까.

 

‘복서’하면 왠지 동네에서 주먹깨나 썼을 것 같은 편견도 있습니다.

 

전 동네에서 싸우고 다니진 않았어요(웃음). 그보단 여러 가지 운동을 두루 잘하는 편이었습니다. 특히 축구, 야구를 잘했어요. 하지만 신체조건 때문에 그런 종목에서 선수를 하긴 어렵겠더군요. 그때는 몸이 지금보다도 더 왜소했거든요. 어느 정도였느냐면, 복싱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1학년 입학식이 끝난 뒤 곧장 체육관에 찾아갔어요. 문을 열고 딱 들어갔더니, 거기 관장님이 저더러 그러더군요.

 

뭐라고 하던가요.

 

‘꼬마야, 누구 찾으러 왔니?’하지 뭡니까. 체육관에서 운동하던 형들, 아저씨들은 막 킥킥대면서 웃고. 그럴 만도 한 게, 저처럼 꼬맹이가 혼자 체육관에 찾아오는 게 흔한 일이 아니었던 거지. 그래서 내가 그랬죠. ‘세계 챔피언 되려고 왔습니다.’ 내 딴엔 기죽지 않으려고 당돌하게 말하긴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얘기죠.

 

처음부터 ‘세계 챔피언’을 목표로 했던 겁니까.

 

맞아요. 애초부터 나는 세계 챔피언이 되겠다는 목표를 갖고 시작했어요. 어린 마음에 세계 챔피언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무모하게 도전했죠. ‘세계 챔피언’하면 멋있으니까, 나도 멋진 챔피언이 되겠단 생각으로 시작했는데……그게 결국엔 이뤄지더군요.

 

권투하는 걸 부모님이 반대하진 않으셨나요.

 

제가 6남매 중에서 막내예요. 처음엔 부모님 몰래 했어요. 비싼 체육관 회비도 용돈 저금한 거 모아서 내고. 물론 계속 부모님 모르게 할 순 없었죠.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집에 올 때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워낙 하고 싶어 하니까, 부모님도 계속해보라고 허락하셨어요. 설마 제가 직업으로 권투를 하게 될 줄은 모르셨던 거죠. 

 

롤모델로 삼은 복서는 누구였나요.

 

국내에선 홍수환 선배님이 롤모델이었고, 외국 선수 중에선 슈가 레이 레너드를 좋아했어요. 예술이잖아요. 보면서 영향을 많이 받았죠. 레너드를 보면서 복싱이 힘만 갖고 하는 게 아니란 걸 알았어요. 그 당시 레너드 선수가 자기보다 더 힘세고 체격 좋은 선수들을 때려눕힐 때 보면, 힘으로 맞서는 게 아니라 순간순간 재치있게 기술이나 작전으로 상대하더군요. 상대의 힘을 역이용해서 누르는 걸 보고 나도 저렇게 해야겠다 생각했죠. 물론 따라 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 영향인지 복싱 스타일도 전형적인 ‘인파이터’였습니다. 

 

어차피 전 키가 작고 체구가 왜소해서, 상대 안쪽으로 파고들어 공략해야 돼요. 한방에 펀치로 상대를 제압할 수 없으니까, 여러방 연타로 상대를 힘들게 하고 진을 빼놓은 뒤 끝내는 스타일이었어요. ‘소나기 펀치’란 말도 그래서 나왔죠. 강펀치가 없으니까 연타로 가야 된다는 생각으로, 손을 빠르게 내는 훈련을 많이 했습니다.


지구력이 굉장히 뛰어난 복서로도 유명했습니다. ‘유명우는 절대 지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는 데요. 

 

사실 저도 똑같이 힘들었어요(웃음). 사람인데 맞으면 당연히 아프고 힘들죠. 제대로 맞으면 번쩍거리고 별도 보이고, 배를 맞으면 창자가 꼬이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어찌나 아픈지 링에서 내려오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많았어요. 그런데 제가 아프면 상대도 마찬가지로 똑같이 아프잖아요. 결국엔 힘들어도 참고, 아파도 참는 선수가 이기는 것 아닐까요. 


복싱 선수로 성공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긴 건 언제부터였습니까.

 

글쎄요. 사실 어릴 적엔 다들 저더러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진짜 제가 잘하는 줄 알았어요. 형들 딴에는 어린 동생이 귀여우니까 그렇게 칭찬해준 거죠. 그래서 내가 정말 잘하는 줄 알고 아마추어 경기에 나갔는데, 안 되더군요. 나만큼 하는 선수, 그 이상 잘하는 선수가 수두룩했어요. 당시 중고교 복싱 선수가 워낙 많았고 선수층이 두터웠거든요. 우물 안 개구리였던 거죠. 그때 정신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운동해선 안 되겠다, 정말 더 열심히 해야겠다 결심을 한 거죠. 

 

그날 이후 달라졌나요.

 

훈련도 열심히 하고, 문화체육관이나 장충에서 열리는 경기도 현장에 가서 직접 보면서 연구했어요. 특히 다른 선수들이 레프트로 배를 가격하는 걸 보고서 깨달은 바가 있었죠. 내 몸에 맞게끔 나만의 펀치를 개발했습니다. 아무리 얼굴을 때려도 쓰러지지 않는 선수가, 배를 쳤더니 쓰더지더군요. 복서들은 주먹이 날아오는 걸 눈으로 보잖아요. 웬만한 펀치는 보고 맞으면 견딜 수 있어요. 정말 강펀치가 아니면 안 쓰러지거든. 그런데 배는 맞으면 못 견뎌요. 그걸 알고선 어릴 때부터 배를 공략하는 걸 집중적으로 연습했죠. 

 

“프로에서 패배는 딱 한 번…그 1패 계기로 초심 되찾아”

 

일본 선수 이오카 히로키와 챔피언 타이틀 매치 포스터. 일본 선수 이오카 히로키와 챔피언 타이틀 매치 포스터.


프로 38전 37승에 빛나는 화려한 경력과 달리 아마추어 시절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아마추어에선 잘 못 했죠(웃음). 아마추어는 프로와 달리 엄격합니다. 머리를 숙이지도 못하게 하고,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아요. 당시 최경량급이 45kg이었는데, 제 체격이 워낙 왜소하다 보니 많은 경기에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아마추어 경기에선 딱 한 번 이겨봤어요(1승 3패). 해보니 ‘이건 아니다’란 생각이 들더군요. 아마추어는 나랑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만 18살에 일찌감치 프로로 데뷔했죠.

 

결국 빠른 프로 전향이 ‘신의 한 수’가 됐습니다.

 

맞아요, 프로를 일찍 간 게 정말 잘한 선택이었습니다.

 

프로 데뷔전 기억하시나요.

 

제 데뷔전이 김득구와 김강민의 라이트급 동양타이틀전 오프닝 경기였어요. 그래도 아마추어에서 몇 번 경기를 해봤잖아요. 그런데 막상 프로 데뷔전 하려고 링에 올라갔더니……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더군요. 

 

되게 긴장하셨나 보네요(웃음).

 

10라운드 끝나고 나니까 제가 이겼대요. 난 어떻게 했는지 생각도 안 나는데(웃음). 이겼다니까 기분은 좋은데, 게임 내용이 어땠는지 세컨드에서 뭘 지시했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상대 선수 인상이 굉장히 무서웠다는 것만 생각납니다(웃음). 


그날 승리 이후로 연전연승을 거듭했습니다. 마침내 1984년 12월엔 에드윈 이노센시오를 누르고 동양 챔피언에 등극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상대는 세계 챔피언 조이 올리보가 아닌, WBA(세계복싱협회) 랭킹 4위 손오공 선수였습니다. 

 

사실 조이 올리보와 세계 타이틀 매치가 잡힌 상황이었어요. 저는 세계랭킹이 있으니까(WBA 7위) 도전할 자격이 됐고, 그쪽 매니저와 우리 매니저 간에 얘기해서 경기하기로 계약서까지 다 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권투위원회에서 우리 경기를 못 하게 하지 뭡니까.

 

어떤 이유를 대던가요.

 

제가 무명이고 승산이 없다는 이유로 안 된다는 거에요. 정 하려면 저보다 더 강자인 선수 상대로 도전자 결정전을 치르고, 거기서 이긴 선수가 챔피언 결정전을 해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프로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얘기잖아요. 결국 저는 안 해도 될 경기를 어쩔 수 없이 하게 됐죠. 


사실 WBA 랭킹이나 경력상으론 WBA 4위에 20전 19승(9KO승) 1패의 손오공이 WBA 7위에 17전 전승(3KO승)의 유명우보다 다소 앞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공격력이 좋은 손오공이 우세할 거란 평가가 많았습니다. 

 

당시 손오공 선수는 경량급에서 장정구 다음가는 강자였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제가 KO로 이겼죠. 결과적으로 제게 많은 도움이 된 경기였어요. 제가 더 많은 복싱 팬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됐고, 절대 강자인 선수 상대로 승리하면서 자신감을 얻었고요. 덕분에 세계 챔피언 도전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한 수 위라고 평가한 손오공 상대로 완승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선수는 펀치를 크게 치는 스타일이었어요. 반면 저는 짧게 연타를 치는 스타일이구요. 물론 손오공 선수의 펀치력이 좋긴 했지만, 어느 정도 레벨에 오르면 그렇게 크게 치는 주먹은 다 보이거든요. 가드를 할 수도 있고요. 안쪽으로 파고들면서 경기했더니 오히려 다른 선수들보다 더 쉽게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손오공 선수가 다소 방심했던 것도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방심이요?

 

손오공 선수는 경기 전부터 ‘유명우는 내 상대가 아니다’라고 자신만만했어요. 절 얕잡아봤던 거죠. 반면 저는 목숨을 걸고 싸웠고요. 누가 이기겠어요. 손오공뿐만 아니라 제가 상대한 선수들이 대부분 그랬습니다. 지금이야 제가 나이가 들면서 주름도 생기고 얼굴도 까매지고 했지만, 그때만 해도 얼굴도 뽀얗고 키고 작고 하니까 약해 보였던 모양이에요. 저랑 경기한다고 하면 죄다 ‘오케이’였으니까요.

 

손오공 상대로 승리한 뒤 두 팔을 번쩍 든 유명우. 손오공 상대로 승리한 뒤 두 팔을 번쩍 든 유명우.

 

한국 프로복싱 사상 최장기간 타이틀 보유(6년 9일), 최다 방어 기록(17차)의 주인공입니다. 17번의 타이틀 방어전 가운데 제일 기억에 남는 한 경기를 꼽는다면.

 

일본의 이오카 히로키에게 타이틀을 내준 경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그렇습니까.

 

원래 제 목표는 20차까지 방어에 성공한 뒤, 타이틀을 자진 반납하는 거였어요. 그런데 18차 방어전에서 졌죠. 프로에서 37경기 만에 처음 진 경기였어요. 지고 난 뒤 정말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세간에서 들리는 얘기도 절 아프게 했어요. 강하지도 않은 상대한테 졌다, 챔피언 오래 하고 돈 많이 벌더니 일본 가서 팔아먹고 왔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또 한일 관계가 지금보다도 더 좋지 않았던 시절이라, 일본 선수에게 패했다는 데 분노한 분들도 많았어요.

 

충격이 컸겠습니다.

 

주위에서 저더러 그러더군요. 네가 원하는 걸 다 가질 순 없다. 그건 욕심이다. 지금까지 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요. 


그로부터 약 1년 뒤 이오카 상대로 리턴매치가 성사됐습니다. 

 

18차 방어전 당시 제 경기를 세계권투협회 회장이 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판정에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한 회장이 1년 뒤 재경기를 만들어 줬어요. 대신 이오카 선수가 두 차례 방어전을 치르고 난 뒤에 하는 조건이었습니다. 


만약 1년 사이 이오카가 타이틀 방어에 실패했다면 복수할 기회도 없었겠군요.

 

그 선수가 계속 유지를 하고 있어야 저와도 경기할 수 있는 거예요. 안 그랬으면 만회할 기회가 사라졌을 겁니다. 다행히 2차 방어전을 무사히 마치더군요. 다시 만났을 때, 기자회견에서 제가 그랬어요. “그동안 챔피언벨트를 잘 지켜줘서 고맙다”고요(웃음). 


18차 방어전 당시 실제로 일본의 편파 판정이 심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때 판정이 잘못됐다거나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가요.

 

그보단 나 스스로 준비가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 거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적지에 가면 어느 정도 홈 어드밴티지가 있는 건 어쩔 수 없어요. 그래서 원정에선 더 완벽한 경기를 해야 이길 수 있습니다. 당시 저는 원정 경기가 처음이었어요. 첫 원정이라고 나름대로 준비한다고 하긴 했는데, 저도 모르게 요령을 부렸던 것 같아요.

 

요령이요.

 

들어보세요. 원래 권투에서 체중 감량이 제일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훈련이나 경기보다 감량이 더 힘들어요. 평소 제 체중이 60kg 정도인데, 경기 때는 49kg 이하로 감량해야 했으니까요. 경기 일주일 앞두고는 요구르트, 사과, 귤 1개만 먹고 굶다시피 하면서 체중을 줄였습니다. 20대 초반에는 견딜 만 했죠. 그런데 30세가 가까워지니 감량해도 좀처럼 회복이 안 되더군요. 한창때는 힘들어도 고비를 이겨내고 더 열심히 운동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요령이 생긴 뒤부터는 좀 힘들다 싶으면 나도 모르게 요령을 부렸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오카 상대 방어전 때도 후반에 체력이 달렸던 거죠. 상대가 나보다 키가 크니까, 파고 들면서 제압해야 하는데 완벽하게 제압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진 겁니다.

 

독기를 품고 리턴매치를 준비했을 것 같습니다.

 

지옥훈련을 했죠. 스태미너가 충분하지 않으면 절대 이오카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매일같이 관악산 산악훈련을 하면서 체력을 비축했습니다. 서울대 정문에서부터 관악산 정상까지 뛰어서 올라갔다 내려오는 훈련을 계속했습니다. 한창 젊을 때도 그렇게는 안 했을 겁니다.

 

챔피언을 되찾는 게 그 정도로 중요했군요. 

 

사실 타이틀 방어에 실패한 뒤 ‘여기서 그만할까’ 생각도 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지고 끝나면 그때까지 해온 노력이 무의미해질 것 같았고, 그래서 다시 도전하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지키는 게 도전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는가 봅니다.

 

복싱 시작할 때 제 목표가 챔피언이었잖아요. 챔피언에 등극하면 그게 끝일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때부터 새로운 시작이더군요. 방어전 하는 게 더 어렵더라고요. 저는 이미 실력이 노출된 상태인데, 수많은 새 도전자들이 제 타이틀을 뺏으려 도전해 왔습니다. 챔피언을 지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지 1차 방어전 때부터 깨달았어요. 푸에르토리코 선수가 상대였는데, 이기긴 했지만 고막이 터질 정도로 힘든 경기를 했습니다. 그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중남미 선수들과 상대하니 너무 힘들더군요. 그때 생각했죠. 챔피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챔피언은 끝이 아닌 시작이다. 

 

전 챔피언이 되고 난 뒤 오히려 더 열심히 운동했습니다. 심지어 화장실에서 볼일 볼 때도 ‘초심 잃지 말자’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어요. 선배들의 사례를 보고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챔피언 되기 전에는 그렇게 잘하던 분들이, 정작 챔피언이 된 뒤에는 이상하게 단명하더군요. 


당시 세계챔피언은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었습니다. 주위에서 유혹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맞아요. 챔피언이 되면 돈이 생기거든요. 경기 한번 하면 몇백만 원, 몇천만 원씩 큰돈이 생기니까요. 지금도 물론 큰돈이지만 당시엔 정말 어마어마한 거액이었습니다. 그렇게 돈이 생기고 인기를 얻으면 어딜 가나 좋은 대우를 받아요. 힘들게 운동하는 것보다 돈 쓰고 노는 게 더 재밌으니까. 그러다 보니 챔피언 방어전 몇 차례 하고 나면 처음의 모습이 사라지는 거에요. 그런 선배들의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았습니다. 선배들의 전철을 밟지 말자, 항상 초심을 지키자는 생각을 항상 놓치지 않았습니다. 


아오키 상대로 타이틀을 되찾은 뒤, 1993년 딱 한 차례 방어전을 치르고 은퇴했습니다. 챔피언 벨트를 반납할 때는 어떤 기분이었나요.

 

너무 좋았어요(웃음).

 

그렇습니까. 아쉽지는 않았나요.

 

제가 이룰 수 있는 건 다 이뤘기 때문에, 미련 없이 글러브를 벗을 수 있었습니다. 간혹 선수 중에는 아쉬움이 남아서 은퇴했다가 다시 복귀하는 경우도 있는데, 저는 만족스럽게 마무리했기 때문에 후련했습니다. 

 

타이틀을 다시 되찾은 만족감인가요.

 

그래요. 한번 진 선수가 만회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특히 복싱 같은 격투기에선 한번 타이틀을 뺏기면 그대로 계속 내려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번 졌다가 다시 타이틀을 찾았기 때문에, 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전승으로 은퇴하진 못했지만, 그 한 번의 패배가 저를 더 단단하게 하고 빛나게 해준 것 같습니다.

 

“장정구는 ‘넘지 못할 산’…맞대결 안 한 게 천만다행이죠”

 

이오카를 상대로 챔피언 타이틀을 뺏은 유명우. 이오카를 상대로 챔피언 타이틀을 뺏은 유명우.


전성기 유명우와 장정구가 붙으면 누가 이길까. 지금까지도 복싱 팬 사이에서 끝나지 않은 논쟁입니다.

 

사실 장정구 선수와는 한번 스파링 파트너를 한 적이 있어요. 장정구 선수와 일라리오 사파타의 챔피언 매치를 앞두고 두 선수 상대로 스파링했습니다.


스파링해보니 어땠습니까. 정식으로 대결하면 해볼 만할 것 같던가요.

 

(고개를 저으며) 두 선수 다 ‘산’ 같았어요.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산.

 

그 정도입니까.

 

저도 나름 프로 경력이 있고, 전승을 거두고 있었는데도 두 선수를 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복서들은 몸을 한번 부딪쳐 보면 감이 옵니다. 1라운드만 뛰어도 이 선수의 펀치와 기술이 어느 정도인지, 감각은 어떤지 나오고 경기가 어렵게 갈지 쉽게 갈지 계산이 서거든요. 그런 면에서 장정구는 천재예요. 완전 싸움꾼이고, 제 입장에서 상대하기 제일 어려운 스타일이었습니다. 제가 갖지 못한 여러 가지 전술이나 기술도 갖추고 있었죠. 저로서는 맞대결 안 한 게 천만다행이에요. 


지나친 겸손입니다. 복싱 올드팬과 전문가 사이에선 유명우 대표를 더 높게 평가하는 분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프로 입문 초기가 아니라 세계챔피언이 되고 나서 상대했다면 느낌이 다르지 않았을까요.

 

글쎄요, 분명한 건 장정구 선수의 존재가 제게도 큰 도움이 됐다는 겁니다. 솔직히 저로선 장정구 선수와 라이벌 구도가 된 게 기분 좋은 일이었어요. 나보다 먼저 챔피언이 됐고, 스파링 파트너를 한 선수와 대등한 위치에 선 것 같아서 좋더라고요. 롱런하는 장정구 선수를 보면서 나도 롱런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됐고요. 라이벌의 존재가 제겐 더 열심히 하는 자극제가 됐습니다.


결국 장정구 대 유명우의 라이벌 대결은 끝까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죠. 경기 매치업은 메이저 기구에서 합의로 이뤄지는 거니까요. 덕분에 지금까지도 복싱 팬들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대결로 남았습니다. 


장정구 외에 라이벌로 생각한 선수는 누가 있었나요.

 

글쎄요. 그 당시 적수는 사실 장정구 선수밖에 없었어요. 챔피언은 해마다 한 번은 협회에서 지정해주는 상대와 ‘지명 방어전’을 하게 돼 있습니다. 약한 상대만 골라서 경기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죠. 그런데도 특별히 라이벌이라 할 만한 선수가 나타나지 않았어요. 


1980년대 장정구-유명우 못지않게 흥미진진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문성길-허영모 선수는 어떻습니까.

 

문성길은 저와 체급이 달랐고, 저나 장정구 선수보다 조금 늦게 등장한 선수였어요. 당시 문성길과 허영모의 라이벌전이 정말 대단했죠. 허영모 선수는 저와 나이가 비슷해서 친구로 지냈습니다. 아마추어에서는 최고였죠. 같은 또래 친구인데도 우상 같은 존재였습니다. 전 아마추어에서 한 번밖에 못 이겨봤지만, 그 당시 허영모는 적수가 없었어요. 


장정구, 문성길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한국 프로복싱의 ‘대모’로 불리는 심영자 여사입니다. 당시 김성준, 장정구, 문성길, 김용강 등 많은 챔피언을 키워내며 최고의 프로모터로 이름을 날렸는데요. 심 여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적은 없습니까.

 

인연이 있을 뻔했죠. 제게도 스카우트 제의가 온 적이 있어요.

 

역시 그랬군요.

 

한국타이틀 경기를 앞둔 때였습니다. 심 여사님 쪽에서 제 가운을 맞춰 주시면서 ‘이번에 이기면 우리 프로모션에 합류하라’고 제안하셨어요. 그런데 그때 제가 그 경기를 치르지 못했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경기를 펑크내고 도망갔거든요. 좋아서 시작한 복싱인데, 그때는 이상하게 운동이 너무 하기 싫었어요. 체중 감량하는 것도 고통스럽고, 놀고 싶고. 그래서 경기 열흘 앞두고 도망을 가 버렸죠. 이미 포스터도 다 붙이고, 티켓도 발행한 시기였는데 난리가 난 거지. 저 때문에 우리 김진길 관장님은 징계까지 받았어요. 원래는 저도 영구제명 당할 판이었는데, 관장님이 애써주신 덕분에 제명까지는 면했어요.


다시 체육관에 돌아가니까 뭐라고 하시던가요. 

 

못 돌아갔죠. 선생님 무서워서 도망 다녔어요. 그날 이후 공사장에서 막노동도 하고, 술 먹고 담배 피우면서 방황했습니다. 그런데 6개월 정도 되니까 그것도 사람 할 짓이 못되더군요. 내 안에서 챔피언의 꿈이 꿈틀거리고 있는데, 단순히 운동이 힘들어서 포기하면 너무 창피한 일이잖아요. 방황한 끝에 다시 정신을 차렸죠. 세계챔피언 향해서 열심히 해보자 마음먹고 다시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어금니 꽉 물었어요. 한 방 날아올 것 같아서.


얼마나 맞으셨습니까.

 

아뇨. 선생님은 화를 안 내시더군요. 오히려 ‘알았다, 잊어버리고 열심히 해보자’고 말씀하셨어요. 수많은 선수와 상대하고 별의별 놈들을 다 겪어봐서 그런지 화내기보단 따뜻하게 받아주셨습니다. 그날 이후 정신 차리고 열심히 운동했습니다. 

 

훈훈한 결말이네요.

 

생각해 보면 다 선생님 덕분인 것 같아요. 만약 그때 크게 화를 내면서 저를 쫓아내셨다면 복서로서 꽃을 피우지 못했을 겁니다. 선생님께선 제가 실수할 때마다 항상 옆에서 좋은 말씀을 해주시고, 일깨워 주셨어요. 선생님께 권투를 배웠고 마무리까지 함께했으니, 제겐 가장 고맙고 절대적인 분이죠.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럼 심영자 여사님의 스카우트 제의는 어떻게 됐습니까.

 

경기 앞두고 펑크내고 도망갔으니 없던 얘기가 됐죠. 저는 김진길 관장님 따라서 김현치 선생이 있는 동아 프로모션으로 갔습니다. 김현치 선생님도 아마추어 국가대표 출신으로 프로에서 세계 챔피언까지 도전한 엘리트 복서 출신이에요. 

 

“복싱은 내 인생 전부…다시 태어나도 복싱할 것”

 

유명우는 한국 복싱을 다시 살리려는 사명감으로 복싱 프로모션 일을 하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유명우는 한국 복싱을 다시 살리려는 사명감으로 복싱 프로모션 일을 하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왕년에 복서로 이름을 날린 분 중에는 은퇴 후 사업 실패로 몰락한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유명우 대표는 예식장, 설렁탕집, 오리고기 전문점을 경영하며 사업에서도 성공을 거뒀습니다. 

 

저야 그냥 평범하게 삽니다(웃음). 지금까지 잘살고 있는 건, 주위에 좋은 분들을 많이 둔 덕분인 것 같아요. 대부분의 운동선수들이 사회생활 경험이 없잖아요. 운동만 하다 보니 세상을 잘 몰라요. 운동하는 사람 주위엔 이상한 사람도 많이 꼬이잖아요. 또 운동선수들은 한번 사람을 믿으면 끝까지 의심하지 않고 믿어 버리거든요. 


안타까운 경우가 많습니다.

 

운동하다 한번은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못 하겠다’ 했더니, 돌아가신 김진길 관장님이 그러시더군요. 힘들어도 참고 해라, 복싱할 때가 제일 행복한 거다, 사회 나가면 지금보다 더 힘들다. 사실 그때는 몰랐어요. 이 힘든 운동도 하는데 이런 정신으로 사회에 나가면 뭘 못할까 생각했죠. 그런데 사회에 나와보니까 알겠더군요. 복싱할 때는 상대 선수 한 명과만 싸우면 됐는데, 사회에선 상대가 한 명이 아니잖아요.

 

사업에서 성공을 거둔 뒤 다시 복싱계로 돌아왔습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지금도 복싱 일을 하고 있네요. 이런저런 사업도 하고 돈도 벌어봤지만, 복싱이 아닌 다른 일로 돈을 벌면 만족감이 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복싱은 달라요. 여기서 선수 키우고, 열심히 운동한 우리 선수들이 경기 나가서 이기고 하면 정말 행복하고 큰 보람을 느낍니다.


그동안 했던 사업들과 달리 복싱의 사업적 전망은 그리 밝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만약에 이 판이 좋은 상황이었다면, 제가 여기에 돌아오진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고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소리는 아니에요. 누군가는 해야 되니까, 그 ‘누군가’ 중의 한 사람이 되려는 것뿐입니다. 거창한 사명감보다는, 그냥 제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제가 잘할 수 있고, 잘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지금 복싱이 어려운 상황이니까, 여기서 보람을 찾고 싶어요. 


한국 복싱의 몰락과 대조적으로 외국에선 복싱이 여전히 높은 인기를 누린다고 들었습니다.

 

안타깝죠. 외국은 오히려 시장이 더 커졌어요. 웸블리 구장에서 경기하면 티켓 10만 장이 순식간에 팔려 나갑니다. 미국도 여전하고, 일본은 그야말로 최전성기에요. 세계 챔피언이 일본에 6명이나 됩니다. 그 외에도 필리핀, 태국 등에서도 여전히 복싱 인기가 좋아요. 한국만 어렵습니다.


재능있는 선수들이 프로 전향보다는 아마추어에 머무는 쪽을 택한다고 하더군요.

 

아마추어는 각 지방자치단체마다 복싱팀이 있어요. 연봉도 많이 받고, 선수 대우도 좋습니다. 물론 우리 복싱계 어른들이 잘하는 게 우선이겠지만, 아마추어 선수들도 너무 안주하지 말고 도전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최근에도 올림픽 지역 예선에 10명이나 나갔는데 본선행 티켓 확보한 남자 선수가 한 명도 없어요. 외국 선수들이 잘하는 것도 있지만, 우리 선수들이 너무 약해진 거에요. 

 

그렇군요.

 

선수들이 국내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실업팀 소속으로 도민체전, 전국체전 나가면 1년 농사 다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태극마크를 못 달아봤지만, 사실 아마추어에서는 태극마크 다는 게 꿈 아닌가요? 요새는 태극마크 싫어하는 선수도 있어요. 태릉선수촌에 갇혀서 합숙해야 한다고. 10명이 나가서 한 명도 못 이겼다는 건, 정말 치욕적인 일이죠.

 

한국 복싱의 위상이 예전만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복싱은 저를 포함한 어른들이 문제에요. 복싱인들이 하루빨리 사고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세상 아닙니까. 주먹구구식으로 한다고 되는 세상이 아니잖아요. 미래를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이 모양 이 상태가 됐는데, 복싱인들이 달라져야 하고 좋은 인재를 영입해서 키워내야 합니다.


최근 열린 한국 프로복싱 대회 포스터를 봤는데, 솔직히 1980년대에 만든 포스터인 줄 알았습니다. 요새는 씨름대회 포스터도 그보다는 세련되게 디자인합니다. 젊은 세대의 감성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젊은 층을 잡지 않으면 살아나기 어렵습니다. 추억의 스포츠로만 남아 있어선 안 돼요. 경기 자체가 주는 재미도 있어야 합니다. UFC니 이종격투기니 볼거리가 많은데 재미없는 경기를 누가 돈 주고 티켓사서 보러 오겠어요.


대회 스폰서 구하기도 쉽지 않죠?

 

기업 스폰서는 기대하기 어려워요. 스타 선수가 없고 중계방송도 안 해주는데 누가 선뜻 스폰서를 하겠어요. 지인 중에 중소기업인, 개인 사업하는 분들, 복싱 좋아하는 분들에게 부탁해서 어렵게 경기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했던 사업 중에 유일한 적자 사업이겠군요.

 

항상 마이너스죠. 그런데 손을 뗄 수도 없습니다. 도와주신 분들에게 근 10년 이상 ‘선수 키우겠다’고 약속해놓고 이제 와서 그만하겠다는 말은 못하겠더군요. 어떻게든 세계 챔피언 한 명이라도 만들어서 그간 도와준 분들께 감사를 전해야죠. 이제 더는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만약 다시 복싱한다면, 그때는 한번 자유분방하게 해보고 싶다"

 

유명우가 운영하는 버팔로 프로모션 입구(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유명우가 운영하는 버팔로 프로모션 입구(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복싱 후배 중에 가능성 있는 선수가 보입니까.

 

이제는 국내에서는 순위 타이틀 매치를 할 수가 없어요. 외국에 원정 나가서 챔피언을 만들어 와야 합니다. 우선 강종선이라고 지금 유스 동양 챔피언 선수가 있는데, 세계랭킹 15위까지 올랐습니다. 가장 챔피언에 근접한 선수에요. 여자 선수로는 통합 타이틀을 앞둔 최현미 선수가 있고, 우리 프로모션 소속인 ‘신보미레’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신보미레는 WBA나 WBC보다 한 단계 아래인 여성국제복싱협회(WIBA) 세계챔피언입니다. 다들 눈물겨울 정도로 열심히 하고 있어요.

 

 

 


 

 


복싱하는 젊은 후배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미안하고 안쓰럽죠. 그래도 저나 장정구 선수는 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인기도 누렸잖아요. 지금 후배들은 기약 없이 꿈을 좇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우리 운동할 때만 해도 회사에서 월급 받고 훈련비 받으면서 했는데, 지금은 아르바이트하면서 운동하고 있으니. 그 선수들 봐서라도 이 일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열심히 뛰어야죠. 꼭 챔피언을 만들 겁니다.

 

대단한 복싱 사랑입니다.

 

복싱은 저 유명우 인생의 전부에요. 다시 태어나도 복싱을 할 겁니다. 아마도 다시 태어나서 복싱한다면, 그때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39전 38승보다 더 잘할 수가 있나요. 

 

원래 지나고 나야 더 잘 보이는 게 있잖아요. 그때는 시대가 시대다 보니 너무 복싱을 얌전하게 했던 것 같아요. 프로라면 자기 PR도 하고, 어느 정도 쇼맨십도 있어야 진짜 프로인데 그때는 좀 튀면 건방지다는 소리 듣는 시대였으니까요. 만약 다시 복싱한다면, 그때는 한번 자유분방하게 해보고 싶어요.

 

배지헌 기자 jhpae117@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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