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구, 1980년대 한국 복싱 황금기 중심에 섰던 ‘전설’

-“과거 복서는 지금 세대 ‘아이돌’이었지”

-“1984년 8월 18일 도카시키 가쓰오와 4차 방어전이 가장 기억에 남아”

-“제2의 인생? 좋은 사람 만나면서 마음 편히 살고 싶어”

-“누가 이기든 지든 유명우와 라이벌전 했어야 했다”

한국 복싱의 '전설 중의 전설' 장정구(사진=엠스플뉴스)
한국 복싱의 '전설 중의 전설' 장정구(사진=엠스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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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전설’ 유명우 “장정구는 ‘넘지 못할 산’…맞대결 안 한 게 천만다행이죠” [엠스플 레전드]

[엠스플뉴스]

온 국민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장정구’를 응원했습니다. 링 위에 올라가면 ‘상대를 때려눕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죠. 그분들이 있어 15차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장정구(57) 홀로 링 위에 있던 적이 없다. 자신을 응원하는 국민과 함께 링 위에 올라 싸우기를 반복했다.

지금으로부터 38년 전. 장정구는 1983년 3월 26일 일라리오 사파타를 3회 TKO로 꺾고 WBC(세계복싱위원회) 라이트 플라이급(48kg 이하) 세계챔피언이 됐다. 그리고서 무려 15차 방어전에 성공했다. 통산 전적은 38승(17KO) 4패.

장정구는 2000년 WBC가 선정한 ‘20세기 위대한 복서 25인’에 한국인 복서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2009년엔 국제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엠스플뉴스가 1980년대 한국 복싱 황금기 중심에 섰던 '전설 중의 전설' 장정구를 만났다.

‘타고난 싸움꾼’ 장정구 “과거 복서는 지금의 ‘아이돌’이었어요”

장정구는 12살 때부터 복싱 세계 챔피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사진=장정구 제공)
장정구는 12살 때부터 복싱 세계 챔피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사진=장정구 제공)

복싱인들에게 "1980년대 한국 프로복싱 황금기를 이끈 주역을 꼽아달라"고 했더니 유명우, 장정구 두 복서를 언급하는 분이 많더군요.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아침에 눈 뜨면 체육관(강남 장정구 좋은복싱)으로 나와요. 많은 분이 제가 체육관에 나와 있으면 물어봅니다. ‘후배들 가르치거나 개인 운동하지 않느냐’고. 젊었을 때 에너지를 다 쏟아서 운동은 안 해요. 후배들도 방향을 잘 못 잡거나 궁금해하는 게 있으면 조언만 건네지 직접 지도는 안 해요.

젊었을 때 에너지를 다 쏟았을 정도면 훈련량이 대단했겠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웃음). 12살 때부터 체육관에 다녔다고. 1970년대엔 복싱 선수가 지금의 ‘아이돌’이었어요. 당시엔 방송도 많지 않았어요. 텔레비전에서 하는 것도 뉴스, 복싱, 축구가 전부였고. 아직도 기억나는 프로가 있습니다.

뭡니까.

매주 일요일 저녁 MBC에서 ‘챔피언 스카우트’란 복싱 프로를 했어요. 이 프로 챙겨보려고 7살 위 누나랑 엄청나게 싸웠습니다.

왜 싸웠습니까.

가요 프로그램 시간이랑 겹쳤거든. 누나는 그걸 꼭 봐야 하거든. 당시엔 텔레비전은 흑백 하나였어요. 집에서 텔레비전을 본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였지. 어찌 됐든 난 ‘챔피언 스카우트’를 꼭 봐야 하는데 누나가 양보를 안 해주니까 싸울 수밖에(웃음).

‘챔피언 스카우트’가 그렇게 재밌었습니까.

‘챔피언 스카우트’ 볼 생각으로 한 주를 보냈어요(웃음). 복싱 선수들을 볼 때마다 아주 멋있었습니다. 링 위에 올라 정해진 규칙에 따라 우열을 가리는 선수들을 보면 정신을 못 차렸죠. 또 내가 자란 동네가 험하기로 유명했거든. 친구들하고 참 많이 싸웠지.

장정구의 복싱은 치열함 그 자체였다. 그의 경기에 복싱팬들이 열광한 것도 그가 늘 치열하게 싸웠기 때문이다
장정구의 복싱은 치열함 그 자체였다. 그의 경기에 복싱팬들이 열광한 것도 그가 늘 치열하게 싸웠기 때문이다

복싱에 빠져든 상태에서 체육관을 찾은 거군요.

어머니께 체육관 입관비와 회비 1,500원 받아서 부산 극동체육관으로 갔어요. 복서의 길로 들어 선 겁니다. 그땐 얼마나 힘든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전혀 몰랐어요(웃음). ‘언제쯤 데뷔하겠다’란 계획 없이 죽어라 운동만 했어요. 그때 나이가 12살이라, 너무 어려 출전할만한 대회가 없었어요.

하염없이 운동만 한 겁니까.

배우는 시기로 봤어요. 경기에 나서진 못하지만, 하루하루가 즐거웠습니다. 새로운 걸 알아가는 게 아주 재밌었지. 낮엔 체육관에 사람이 없어요. 밤에 가야 사람이 바글바글해. 거기서 곁눈질로 배우는 게 많았어요. ‘어깨너머로 배운다’고 하잖아요. 어린 학생이 이것저것 배우려고 하니 가르쳐주는 선배도 많았고(웃음). 그 시기에 기본기를 다진 겁니다.

배우는 속도가 아주 빨랐다고 들었습니다.

타고난 싸움꾼이었으니까(웃음). 무언가를 가르쳐주면 바로바로 이해했어요. 선배들이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어 했죠. 그걸 또 안 까먹으려고 엄청나게 훈련했어요. 집에 가는 길에도 주먹을 '훅훅' 휘둘렀다고. 체육관에서 사랑을 독차지했지(웃음).

타고난 재능과 복싱 열정이 더해졌으니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늘었겠습니다.

복싱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어요. 운동은 아주 재밌는데 아침에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든 거야. 짐을 싸서 체육관으로 갔어요. 사범께 말했습니다. "잠만 잘 수 있는 공간 하나 만들어 달라"고. 처음엔 사범님이 얘가 가출했나 싶었나 봐요. "집에 무슨 일 있냐"고 하더라고.

뭐라고 답했습니까.

솔직하게 말했죠. "조금이라도 더 배우고 싶은데 아침에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들다"고. 사범께서 크게 웃고서 방을 만들어줬습니다. 운동하는 공간과 샤워장 사이에 자그마한 방이었죠. 그때부터 밥 먹고 운동만 했어요. 지금도 정말 감사한 게 저를 자기 자식처럼 챙겨준 분이 많았습니다. 그분들이 있어 운동에만 매진할 수 있었어요.

장정구 성공의 조력자들이군요.

체육관에서 식사까지 챙겨주셨어요. 돈을 더 낸 것도 아닌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죠. 체육관 근처에 정육점 하신 분이 계셨는데 이분도 절 참 예뻐했어요. 운동하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면서 매일 고기를 공짜로 먹게 해주셨어요. ‘운동 열심히 하라’면서 용돈 챙겨주신 분도 많았고. 그런 환경에서 운동했으니 난 ‘행운아’지(웃음).

“초졸이라고, 예선 1위하고도 전국체전 고등부 출전 못 했다”

복싱 레전드 장정구는 1983년 3월 26일 WBC 라이트 플라이급 세계 챔피언에 등극했다(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복싱 레전드 장정구는 1983년 3월 26일 WBC 라이트 플라이급 세계 챔피언에 등극했다(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14살에 아마추어 복싱계에 데뷔했습니다. 부산 신인선수권 대회 우승, 최고선수권 준우승 등을 차지하며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하지만, 학력(초등학교 졸업) 때문에 많은 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1978년 전국체전 고등부 출전권이 걸린 부산시 예선 1위에 올랐어요. 경기 후 시상대에 오를 준비를 하는데 본부석에서 날 부르는 겁니다. 갔더니 ‘왜 학생이 아닌데 학생 신분으로 나왔냐’고 하더라고.

네?

초졸이니. 바로 실격됐죠(웃음). 당시엔 틀린 말이 아니니까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1년 후 전국체전 일반부 출전을 목표로 죽어라 운동했어요.

결과는 어땠습니까.

만 16세 나이로 전국체전 일반부 출전권이 걸린 부산시 예선에서 우승했어요. 그런데 전국체전엔 나가지 못했습니다. 부산시 대표 선수들과 합동훈련까지 했는데... 전국체전을 앞두고 예선에 참여하지 않은 국가대표 선수가 부산시 대표 자격을 얻었어요. 그땐 정말 화가 나더라고. 아마추어 무대에선 힘들겠다는 확신이 서더라고요. 프로 전향을 결심했죠.

1980년 MBC 프로복싱 신인왕전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1980년 11월 17일. 날짜 정확히 기억하죠? 우승하고 상금 30만 원을 받았어요. 프로 데뷔전부터 자신감이 넘쳤죠. 훈련량이 어마어마했으니까. 그런 나를 한층 성장하게 만든 경기가 있어요.

어떤 경기였습니까.

1982년 9월 18일 라이트 플라이급(48.89kg 이하) 챔피언 일라리오 사파타전이에요.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던 때 사파타에게 세계 타이틀 도전장을 냈죠. 15라운드를 모두 치른 뒤 1-2로 판정패했습니다. 사실 경기 앞두고 부상을 당했어요. 잔디밭에서 스트레칭을 하던 중 깨진 병을 밟았죠. 오른쪽 뒤꿈치가 찢어졌습니다. 병원에선 ‘3주는 쉬어야 한다’고 했죠. 경기가 코앞이었는데. 방법이 없었어요. 죽을힘을 다해 싸웠지만, 결과는 패배였습니다.

오른쪽 뒤꿈치가 찢어지지 않았다면, 경기 결과가 바뀔 수 있었다고 봅니까.

(잠시 생각하다가) 정상 컨디션으로 붙었어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겁니다. 당시 사파타는 저보다 한 수 위였어요. 경기를 마치고 패한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했어요. 패배 원인을 부상에서 찾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보이더군요.

뭐가 보였습니까.

죽어라 운동만 하면 결과는 저절로 따라오는 줄 알았어요. 틀린 말은 아니죠.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요. 체계적인 분석이 필요했던 거죠. 사파타에게 패하기 전까지 상대를 집중적으로 분석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 경기 이후 상대 선수를 분석하기 시작한 겁니까.

1983년 3월 26일 사파타와 재경기가 잡혔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훈련하고, 분석했어요. 사파타의 장단점을 파악했습니다. 링 위에서의 작은 습관까지 철저하게 파고들었죠. 사파타는 절대 맞받아치지 않았어요. 상대 주먹을 피한 뒤 주먹을 뻗었죠. 거기서 이길 방법을 찾은 겁니다.

이길 방법을 찾았다?

사파타는 주먹을 내밀면 무조건 피했어요. 처음 주먹을 내밀고 사파타가 빠질 때 어퍼컷을 내리꽂으면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죠. 사파타 경기를 하루 네 번씩 봤어요. 훈련은 사파타의 움직임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진행했고.

결과는 어땠습니까.

상대 움직임이 뻔히 보이는 데 패할 리가 있겠습니까(웃음). 재경기에서 3회 TKO승을 거뒀습니다. WBC 라이트 플라이급 세계 챔피언에 등극한 거죠.

세계 챔피언 장정구
세계 챔피언 장정구

당시 승리의 감정, 지금도 기억나십니까.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는데 어떻게 잊겠습니까. 생생하게 기억하죠. 사파타 이기고 챔피언 자리에 오르니까 지금까지의 고생이 다 생각나는 거예요. 눈물이 절로 났습니다. 마음속으로 ‘(장)정구야, 참으로 고생했다. 드디어 네가 세계 챔피언이 됐구나. 자랑스럽다’는 얘길 여러 번 했어요(웃음). 그런데 기쁨은 잠시였어요.

왜요?

슬슬 부담이 밀려오기 시작하더라고. 지켜야 한다는 부담. 링 위에 올라서 경기하는 건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사파타를 이기면서 한층 더 성장했고. 누구와 붙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죠. 문제는 링 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이었어요. 체급 운동하는 분들은 이해할 겁니다. 경기에 나설 체중을 맞추는 게 정말 힘들어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죠.

어느 정도로 힘든 겁니까.

링 위에 올라가면 항상 행복했어요. 상대를 쓰러뜨리든 내가 주저앉든 준비한 걸 하면 되니까 쉬웠죠. 체중 관리는 달랐어요. 먹는 것부터 운동량까지 매일 신경 써야 했어요. 조금만 쉬면 몸무게가 막 올랐거든. 몸무게가 62kg까지 찐 적도 있어요. 경기에 나서려면 14kg을 빼야 하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하니 한 경기가 '딱' 떠오르네요.

어떤 경기입니까.

1984년 8월 18일 포항에서 열린 일본 도카시키 가쓰오와의 4차 방어전입니다.

“챔피언 장정구는 홀로 링 위에 올라간 적이 없습니다. 제 뒤엔 국민이 있었습니다”

1984년 8월 18일 도카시키 가쓰오와 4차 방어전에 나선 장정구(사진 오른쪽). 장정구는 이날 4차 방어에 성공했다(사진=장정구 제공)
1984년 8월 18일 도카시키 가쓰오와 4차 방어전에 나선 장정구(사진 오른쪽). 장정구는 이날 4차 방어에 성공했다(사진=장정구 제공)

1984년 8월 18일 도카시키 가쓰오(일본)와 4차 방어전 준비 과정부터 듣고 싶습니다.

운동하면서 체중이 가장 불어났을 때 경기가 잡혔어요. 하루 섭취하는 물량까지 조절했습니다. 사람은 갈증이 나면 자기도 모르게 물을 꿀꺽꿀꺽 들이켜요. 정신이 들면 ‘아차’ 싶은 거지. 찜통더위가 숨통을 조여 오는 데 꾹 참고 운동만 했습니다. 배고프고 갈증 나는 걸 참아내면서 하루하루를 보냈죠.

경기보다 체중 맞추는 게 더 힘들었겠군요.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힘들어요. 당시 몸무게를 정확히 기억합니다. 경기 전 62.5kg인 몸무게를 48.5kg까지 뺐어요. 특히나 도카시키전은 8월 15일 광복절 후에 열렸습니다. 링 위에 올랐을 때 분위기가 달랐죠. ‘여기서 패하면 맞아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어요(웃음).

경기는 어떻게 진행됐습니까.

1라운드에 다운을 빼앗었어요. 기분 좋게 출발해 9회 TKO로 이겼죠. 그날 경기는 막중한 부담을 느낀 까닭인지 유독 힘들었습니다. 끝나고 펑펑 울었어요. 그런데 신기한 게 뭔지 아세요?

글쎄요.

눈물이 안 나오는 거라. 왜냐? 몸에서 수분이 다 빠져나갔거든. 날까지 무더워서 경기 중에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까지 날 정도였어요.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면서도 무려 15차 방어전까지 성공했습니다.

링 뒤에서 나만 바라보는 국민이 있었으니까. 챔피언 장정구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늘 국민과 함께 링 위에 올랐어요. 마주치는 사람마다 ‘장정구 선수를 보면서 삶의 희망을 얻습니다. 장정구 선수만 믿어요’란 말을 했어요. 제가 어떻게 그분들의 말씀을 외면합니까. 링 위에서 죽거나 이겨야지. 어떤 사람들은 제게 이런 말을 합니다.

어떤?

프로는 돈이라고 하잖아요. 돈 많이 주니까 힘든 과정 참아가면서 운동한 거 아니냐고. 솔직히 운동하면서 돈 생각해본 적 없어요. 후회 없이 준비하고 링 위에 올라 승리하면 돈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거든. 돈 벌 목적으로 운동했으면 15차 방어에 성공 못 했습니다. 난 단순한 사람이에요. 날 응원해주는 국민과 더불어...아, 이거 하나 더 생각나네요.

말씀하시지요.

경기에서 이길 때마다 자축파티를 했습니다. 그게 아주 재밌었어요(웃음). 그동안 못 먹었던 음식 마음껏 먹고, 술도 한잔하는 거죠. 그 기억으로 버텼어요. 우리 삶이 그런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과분한 걸 바라면 잘 될 일이 없어요. 주어진 일 열심히 하고, 소소한 것에 행복을 느껴야 발전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웃음).

1980년대 인기가 대체 어느 정도였습니까.

지금은 상상 못 하지. 복싱 인기가 하늘을 찔렀거든. 경기 있는 날엔 사람들이 하던 일을 다 멈춰(웃음). 텔레비전 앞에 모여 응원하는 겁니다. 거리를 걸으면 모든 사람이 날 알아봤어요. ‘최고다’ ‘고맙다’ ‘응원한다’ 좋은 말을 많이 해주셨죠. 복싱 하나 잘한다고 이렇게까지 응원해주시는 데 내 어찌 운동을 게을리할 수 있겠어요. 챔피언 벨트 지키려고 죽어라 운동해야지.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해에 마지막 15차전을 치렀습니다.

1988년 6월 27일 일본 도쿄 고라쿠엔 경기장에서 오하시 히데유키와 붙었죠(웃음). 11차 방어전에서 5라운드 TKO로 이겼던 상대였어요. 평상시와 다름없이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자신감이 있었죠. 일본 사람들의 응원을 등에 업은 오하시가 온 힘을 다했지만, 패할 거란 생각이 안 들었습니다.

그 경기에서 8회 TKO로 이겼습니다.

일본 관중이 외치는 ‘오하시’를 ‘장정구’라고 생각했어요. TV 앞에 모여 있을 우리 국민을 잊지 않았죠. 미안한 얘기지만 오하시는 제 상대가 아니었어요. 오하시는 11차 방어전에서 패하고 달라진 게 없었어요. 어퍼컷을 시도하면 다 통했죠. 그전에 이겼다고 훈련이나 분석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이길 수밖에 없는 경기였어요.

세계 챔피언 장정구와 함께 웃고, 울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은 젊은 날을 장정구와 함께 했던 이들이다(사진=엠스플뉴스)
세계 챔피언 장정구와 함께 웃고, 울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은 젊은 날을 장정구와 함께 했던 이들이다(사진=엠스플뉴스)

15차 방어에 성공하고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이 맛에 복싱하는구나(웃음). 복싱한 걸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 지금도 자부심을 느끼고 삽니다. 전 최고로 불리는 선수하고만 붙었어요. 국민이 제 이름을 기억해주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아휴. 복서 인생을 그때 끝냈으면 참 좋았을 텐데...

1988년 6월 27일 15차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1년 2개월 후인 1989년 8월 27일 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3경기를 치러 모두 패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선택입니다. 15차 방어전까진 쉼 없이 전력 질주를 했어요. 은퇴 번복 후 링 위에 섰을 땐 달랐습니다. 잠시 멈추고, 다시 뛰려니까 예전 같은 속도가 안 나오는 거예요. 개인 사정으로 운동에만 집중할 수도 없었습니다. 예전 같은 경기력이 나올 수가 없었죠. 너무 후회해요.

은퇴 번복 후 링 위로 돌아왔을 때 이전과 달랐던 점이 또 있습니까.

링 위에서 생각이 많아졌어요. ‘내가 지금 어퍼컷을 하면 통할까’란 의구심이 들었죠. 예전엔 몸이 먼저 반응했습니다. 생각할 틈이 없었어요. 사실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복귀를 결정했던 겁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링 위로 돌아오는 선택은 하지 말았어야 해요. 평생 운동만 했으니 뭘 알겠습니까. 경험이 없으니 잘못된 선택을 한 거죠. 주변에 제대로 조언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15차 방어전 이후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음.

세상에 나보다 장정구를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운동은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 해야 효과가 있어요. 운동만 바라보며 달려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죠. 인생을 살아보니 돈이란 건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삽니다(웃음). 다른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렸어야 했는데.. 은퇴 번복은 참 아쉬운 결정이었어요.

그래도 대중의 기억 속엔 세계 최고의 복서로 남아있습니다.

그분들이 있어 인생의 황금기를 맞았습니다. 평생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갈 거예요(웃음).

타이슨이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던데...명우야, 우리도 한판 붙어볼까(웃음)

복싱 선수의 길로 들어선 걸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는 장정구(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복싱 선수의 길로 들어선 걸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는 장정구(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2000년 한국 유일 WBC 선정 ‘20세기 위대한 복서 25인’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선수 때 누구보다 많이 땀 흘린 성과 아니겠습니까(웃음). 이 상을 받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해요. 2000년 12월 20일이었습니다. 아내, 두 딸과 함께 시상식이 열린 멕시코로 향했죠. 여기서 또 재미난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이야기입니까.

당시엔 필름 카메라를 썼습니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하잖아요. 필름을 왕창 챙겨서 멕시코로 갔죠. 아내가 시상식에서 필름을 새것으로 바꿨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필름을 5살인 막내딸에게 맡긴 겁니다. 사진이 '싹' 날아갔지. 그 어린아이가 필름을 잡아당기고 논 겁니다. 이걸 왜 막내딸에게 맡겼는지 이해가 안 돼서 아내랑 크게 싸웠어요. 이 중요한걸...지금은 다 추억입니다(웃음).

제2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좋은 사람들 만나면서 마음 편히 살고 싶어요. 웃으면서 하루를 보내는 거죠. 그거면 충분합니다.

일전에 인터뷰했던 유명우 씨가 ‘장정구는 넘지 못할 산이었다. 대결하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했습니다.

겸손하시네(웃음). (유)명우와의 대결은 국민이 가장 보고 싶어 한 경기였습니다. 세기의 대결이라고 하죠? 누가 이기든 붙었어야 했어요. 하지만, 우리가 붙고 싶다고 경기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지금도 참 아쉬웠습니다. 얼마 전 기사 보니 마이크 타이슨이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던데...명우야, 우리도 한판 붙어볼까(웃음).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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