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대 김주영 교수, 복싱과 평생을 함께하는 복싱인

-“우리 세대는 유명우, 장정구 등을 보면서 꿈을 키웠습니다”

-“군대 3년, 꾸준한 이미지 트레이닝 없었다면 선수 생활 지속 힘들었죠”

-“올림픽 메달 도전 이후의 삶도 똑같은 삶이고, 소중합니다”

복서 출신 용인대학교 김주영 교수(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복서 출신 용인대학교 김주영 교수(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용인]

“네 꿈이 뭐니”

“올림픽 금메달이요”

“올림픽 이후엔 어떤 삶을 살 거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올림픽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용인대학교 격기지도학과 김주영 교수는 학생선수를 만나면 습관처럼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매번 비슷한 답을 받는다.

김 교수는 평생을 복싱과 함께하고 있다. 실업팀 용인시청에서 선수 생활을 한 김 교수는 은퇴 후 다양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감독, 코치, 교수 등 한국 복싱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직책이란 공통점이 있다.

김 교수는 “올림픽 금메달이나 화려한 프로 경력이 없는 선수가 흘린 땀도 언젠가 빛을 발한다”고 강조한다. 남몰래 땀 흘린 선수 시절이 없었다면 교수와 한국복싱진흥원 이사장으로 살아가는 현재의 김주영은 없다는 뜻이다. 엠스플뉴스가 한국 복싱 발전과 학생선수들의 성장으로 고민 중인 김 교수를 만났다.

-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재능이 있는 줄 알았는데...운동부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

김주영 교수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복싱 선수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사진=엠스플뉴스)
김주영 교수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복싱 선수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사진=엠스플뉴스)

유도 명문으로 유명한 용인대학교에 복싱에 일생을 바친 지도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주인공이 용인대 격기지도학과 김주영 교수입니다.

저는 행운아예요. 복싱을 좋아해 선수 시절을 보냈습니다. 지금은 강단에서 강의하고 링 위에선 학생선수를 가르치고 있죠. 올림픽 출전이란 선수 시절의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평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복싱을 시작한 이후 한 번도 감사한 마음을 잊어본 적이 없어요(웃음).

복싱 선수, 감독, 교수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복싱과 첫 인연은 어떻게 맺은 겁니까.

제가 미숙아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체구가 작고 몸이 약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몸무게가 27kg이었습니다(웃음).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어린이였죠. 처음부터 선수의 꿈을 갖고 복싱을 시작한 건 아니에요. 초교 6년 때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에 체육관으로 향하던 친형을 따라나섰습니다. 복싱을 좋아하기도 했고요. 이땐 복싱과 평생을 함께할 줄 몰랐죠.

어린 시절 복싱을 좋아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복싱은 동경의 대상이었어요. 주말이면 텔레비전 앞에서 복싱 경기를 보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장정구, 유명우 등 세계 챔피언에 오른 선수의 경기를 보면서 감탄사를 연발했죠. 제가 97학번이에요. 같은 시대를 살아온 분들은 이해할 겁니다. 저분들은 우상이었어요. 길거리를 거닐다 보면 허공에 주먹질하는 사람이 많았을 정도였죠(웃음).

복싱 선수의 꿈이 없었던 건 아니네요.

막연히 유명우와 같은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꿨어요(웃음). 유명우 선수가 청코너에서 상대를 어퍼컷으로 KO 시키는 장면을 엄청나게 따라 했죠.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어요.

어떤?

복싱의 기초를 닦을 때쯤 체육관이 문을 닫았어요. 체육관을 찾는 사람이 적은 까닭에 수입이 안 났던 겁니다. 복싱이 할수록 재밌었어요. 깊이 빠져들었죠. 몸도 강해지는 걸 느꼈고요. 계속하고 싶었습니다. 선택이 필요했어요.

선택이요?

제 고향이 경상북도 영천이에요. 집 근처 복싱장은 문 닫는 날을 기다리는 곳 하나였습니다. 복싱을 계속하려면 버스를 타고 경주를 오가야 했어요. 어쩌겠습니까. 마음은 이미 경주에 있는 복싱장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웃음). 중학교 입학 후 주말마다 경주를 오갔어요.

주말에만 복싱한 겁니까.

토요일 학교 수업 마치면 버스 타고 경주로 향했어요. 도착하면 체육관 관장님이 마중 나와 있었죠. 관장님 차를 타고 체육관으로 이동해 1박 2일간 복싱을 배웠습니다. 3년간 이 생활을 반복했어요. 평일엔 주말에 배운 걸 내 것으로 만드는 데 집중했죠. 본격적인 학생선수 생활을 시작한 건 중학교 3학년 때입니다.

계기가 있었습니까.

고교 진학을 앞두고 내 길은 정해져 있었어요. 복싱이었죠(웃음). 어머니께선 크게 반대했습니다. 선수의 길로 들어서면 합숙을 해야 했어요. 어머니는 제가 타지에서 홀로 생활하는 걸 원치 않았죠. 그런데 자식 이기는 부모 있나요. 어머니께 ‘복싱이 아주 하고 싶다. 걱정시키지 않겠다’고 매일 말했습니다. 어머니 허락을 받고 진짜 운동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한국복싱진흥원 김주영 이사장(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한국복싱진흥원 김주영 이사장(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중학교 때까진 일반 체육관에서 주말에만 운동했습니다. 고교 운동부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매일 운동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강연을 나가면 남학생들에게 꼭 물어보는 게 있어요. 군 생활 어땠느냐는 겁니다(웃음). 대답이 다 같아요. “우리가 제일 힘들었다. 요즘은 많이 편해진 것”이라는 겁니다. 전역 6개월 차 친구들의 대답도 같습니다. 운동부 생활도 비슷해요. 힘든 점을 꼽으라면 수도 없이 많을 겁니다.

예를 들어줄 수 있습니까.

운동도 힘들었지만 운동부만의 규율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특히나 제가 운동한 시대엔 ‘사랑의 매’라는 게 있었습니다. 운동부뿐 아니라 일반 학생들도 매를 맞으면서 자랐죠(웃음). 영어단어를 모르거나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하면 선생님의 사랑이 담긴 매를 피할 수 없었던 시대죠. 그런데 그것보다 힘든 게 있었어요.

사랑의 매보다 힘든 게 있었다?

중학교 때까진 내게 재능이 있는 줄 알았어요. 복싱은 물론이고 달리기도 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학교 체육 시간엔 김주영이 최고였어요. 대단한 착각에 빠졌던 거죠(웃음). 고교 운동부에서 선수를 꿈꾸는 친구들과 생활하면서 느꼈습니다.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제가 제일 부족한 학생선수였어요. 쉽게 말해 이런 겁니다.

어떤?

생활체육에서 운동 좀 하던 친구가 엘리트 체육으로 와서 현실을 느낀 거죠(웃음). 그런데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했습니다. 어머니께 고교 입학 전 약속했거든요.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는 절대 안 하겠다’고. 대신 매일 운동 하면서 이런 생각은 했죠.

제2의 삶을 기획한 겁니까.

고향에 군인이 아주 많았습니다. 직업군인이 된 나를 그려봤어요(웃음). 체육 교사도 고민했죠. 하지만, 잠시뿐이었습니다. 복싱 선수로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고 싶었어요. 세계 챔피언 자리에도 오르고 싶었죠. 지금은 같이 땀 흘리는 학생선수들보다 뒤처지지만 언젠가 넘어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학창 시절 김주영은 어떤 학생선수였습니까.

거북이였죠. 재능은 조금 떨어지지만 늘 마지막까지 남아서 땀 흘리는 학생선수였어요. 실제로 복싱선수로 큰 성공을 거두진 못 했습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운동선수를 꿈꾸는 친구들이 꼭 알아줬으면 하는 게 있어요.

뭡니까.

그때 흘린 땀이 지금의 교수 김주영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만약 고교 시절 운동이 힘들어서 그만뒀다면 저는 강단에 설 수 없었을 거에요. 복싱 유망주를 양성하는 일은 꿈에서나 가능했을 겁니다. 학창 시절부터 온 힘을 다했기 때문에 일생을 복싱과 함께하는 거예요.

- “누구에게나 인생 경기는 있습니다” -

김주영 교수는 한국 복싱을 책임질 선수 육성에 집중하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김주영 교수는 한국 복싱을 책임질 선수 육성에 집중하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학창 시절 가장 늦게까지 땀 흘린 학생선수였습니다. 고교 졸업 후엔 어디로 향했습니까.

힘든 시간이 있었어요. 고교 시절 도 대표를 했고 전국복싱대회 우승을 경험했습니다. 졸업 후에도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고 굳게 믿었죠. 그런데 창단을 약속한 경북 지역 모 대학의 계획이 틀어진 거예요. 복싱부 창단을 못 한 겁니다. 복싱하고 싶지만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거죠. 그때 실업팀 용인시청에서 손을 내밀었어요.

용인시청이요?

용인시청엔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이승배 선수가 뛰었어요. 향후엔 국가대표 감독도 맡은 레전드죠. 이 선수가 용인시청 소속이었습니다. 저보다 좋은 기량과 성장 가능성을 지닌 선수가 많았어요. 그런 용인시청에 내게 기회를 준 겁니다. 아주 감사했어요. 복싱을 계속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실업팀 생활은 순탄했습니까.

21살까진 변함없이 살았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땀을 아끼지 않았어요. 코치님이 가르쳐주는 게 있으면 최대한 빠르게 내 것으로 만들려고 했죠. 체중도 8kg이나 뺐습니다. 힘들었지만 올림픽 출전이란 꿈을 이루기 위해 꾹 참았죠. 그런데 성적이 안 따랐어요.

아.

대회엔 많이 나갔는데 성과를 내지 못했어요. 절망스러웠죠. ‘내 재능이 이 정도인가’란 생각이 들었어요. 운동은 누구보다 열심히 했으니까. 슬럼프가 왔습니다. 운동에만 집중하는 게 어렵더라고. 22살에 군대를 갔어요(웃음).

일반병으로 간 겁니까.

물론이죠. 참고로 제 군시절 복무 기간은 3년이었습니다(웃음).

3년간 일반병으로 근무하면 복싱선수의 삶을 이어가는 게 어렵지 않습니까.

사실상 은퇴였죠. 그런데 복싱을 포기하진 않았어요. 군대에서 훈련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대신 이미지 트레이닝은 가능했어요.

이미지 트레이닝?

복싱은 반복훈련이에요. 지금까지 내가 배웠던 걸 하나하나 떠올렸습니다. 이 동작은 왜 배웠을까를 시작으로 여러 가지 물음을 던졌어요. 시간이 날 땐 정리된 동작을 몸에 익혔죠. 이미지 트레이닝의 효과가 생각보다 컸어요.

예가 있습니까.

전역 후 용인시청에 재입단했어요. 3년간 정상적인 복싱 훈련을 한 건 아니지만 몸 상태가 좋았던 겁니다.

이미지 트레이닝 효과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습니까.

입대 전엔 강한 체력과 힘으로 상대를 이기려고 했어요. 이미지 트레이닝에 집중한 군 시절 후엔 노련함이 생긴 겁니다. 어떨 때 힘을 쓰고 아껴야 할지 알게 된 거에요. 효율적으로 힘을 쓰면서 운동하고 경기에 나설 수 있었죠. 인생 경기도 전역 후 치렀습니다.

인생 경기요?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순간이 있잖아요. 전 2004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이었습니다. 꿈을 이룰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죠. 온 힘을 다해 준비했어요. 그리고 링 위에 올랐죠. 준결승에 진출했습니다. 꿈이 눈앞에 다가온 느낌이었어요.

준결승전에서 이겼습니까.

체력과 집중력에서 상대를 압도하지 못했습니다. 졌어요. 국가대표 최종선발전에서 살아남아 꼭 태극마크를 달고 싶었는데 아쉬웠죠. 하지만, 이 경기를 잊지 못해요. 가장 찬란했던 순간이고 꿈에 한 걸음 더 다가섰던 날이니까. 이 경기를 마치고 나서부터 제2의 삶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던 것 같아요.

제2의 삶이요?

제가 서른 살에 은퇴했습니다. 2006년부턴 박사 과정을 준비했어요. 복싱을 학생선수들에게 가르치고 향후엔 강단에 서고 싶은 꿈이 있었죠. 그래서인지 글러브를 벗을 때 서운한 마음보다 기대감이 컸어요(웃음).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는 설렘이 있었죠. 무엇보다 제2의 삶도 복싱과 함께한다는 사실이 참 좋았습니다.

- “올림픽 메달 이후의 삶도 똑같은 삶. 아주 중요해요” -

용인대학교 김주영 교수(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용인대학교 김주영 교수(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은퇴 후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복싱 감독, 교수, 한국복싱진흥원 이사장 등 많은 직책을 가지고 있죠. 그런데 제가 가진 직책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요. 모두 복싱과 관련된 일이라는 겁니다. 복싱은 동경의 대상이었고 꿈이었어요. 복싱을 시작한 이후엔 삶의 동반자가 됐죠. 복싱의 매력이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질 수 있도록 힘쓰고 싶어요.

선수 시절 성실함의 대명사였습니다. 은퇴 후에도 변함없이 한 길만을 달려왔다는 게 느껴집니다.

복싱이 좋으니까(웃음). 전 태극마크를 달지 못했어요. 아시아경기대회나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없었죠. 언젠가 눈앞에서 보고 싶어요.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제자가 해내는 걸 말이죠. 그래서 더 공부하고 연구해요. 학생선수들이 복싱에 더 깊이 빠지고 후회 없는 경기를 펼칠 수 있게 돕고 싶습니다.

교수님은 한국복싱진흥원 이사장으로도 활동 중입니다. 한국복싱진흥원은 정확히 어떤 곳입니까.

복싱 활성화에 힘쓰는 곳이죠. 2018년부터 복싱 대회를 열고 유소년 선수를 발굴해 키우고 있어요. 같은 해엔 러시아에서 초청 경기를 치르고 교육을 받기도 했죠. 한국 복싱이 위기라고들 이야기합니다. 유명우, 장정구 등이 활약한 1980년대와 비교하기 힘든 게 사실이죠. 그럴 때일수록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여기서 운동하는 학생선수들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납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운동하는 학생선수들의 얼굴이 참 밝아요. 질문도 많이 하는 등 배우려고 하는 의지도 큽니다. 이곳에서 10년 뒤 한국 복싱을 책임질 선수를 발굴하고 싶어요(웃음).

복싱계에서 어떤 복싱인으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한국 복싱 발전을 위해 참 열심히 했다. 그 사람은 복싱에 미친 사람”이란 얘기를 듣고 싶어요(웃음). 마지막으로 학생선수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제가 학생선수들에게 항상 던지는 질문이 있어요. 질문과 답이 거의 같습니다. “네 꿈이 뭐니”라고 물으면 “올림픽 금메달”이란 답이 돌아와요. 그럼 저는 다시 묻습니다. “올림픽 금메달 딴 이후엔 계획이 있니”라는 거죠. 수많은 학생선수를 만났지만 저 질문에 답한 친구는 한 명도 만나지 못했어요. 모두가 장정구, 유명우처럼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가 될 순 없습니다.

모두가 장정구, 유명우처럼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가 될 순 없다?

당연하죠. 운동할 땐 죽을힘을 다해야 합니다. 후회를 남겨선 안 돼요. 동시에 현실을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엔 은퇴 이후의 삶도 포함돼요. 아무리 뛰어난 선수도 평생을 링 위에서 보낼 순 없습니다. 누구든 은퇴를 하고 제2의 삶을 살아야 해요. 준비가 필요한 겁니다. 올림픽 금메달 따면 좋죠. 그런데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는 건 전 세계 딱 한 명뿐이에요. 그 기회는 4년에 딱 한 번 주어지죠.

아.

김주영의 선수 경력은 보잘 것 없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남들이 알아줄 만한 성과를 낸 적이 없어요. 하지만, 그 시절이 없었다면 코치, 감독, 교수 등으로 한국 복싱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는 김주영은 없었을 겁니다. 눈앞에 성과가 없다고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올림픽 금메달보다 값진 게 우리의 인생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웃음).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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