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체육 ‘산증인’ 이용로, 교통사고로 척수장애 판정받은 후 장애인 테니스 국가대표 거쳐 장애인 체육 최초 박사 학위 받아

-“교통사고 후? 내 아픔보다 어머니의 절규가 잊히질 않는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대결할 수 있는 테니스의 매력에 푹 빠졌다”

-“장애인 체육계의 변화? 장애인을 가장 잘 이해하는 장애인이 중심에 서야 한다"

장애인 체육 최초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용로 박사(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장애인 체육 최초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용로 박사(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

1990년 7월 23일. 유난히 어두운 날이었다. 하늘에선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그날 보디빌더 이용로(56)의 인생이 바뀌었다.

이용로는 미스터 코리아를 꿈꾼 보디빌더였다. 미스터 코리아란 보디빌딩 남자 일반부 9체급 챔피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근육을 지닌 1명에게 주는 한 해 최고의 상이다.

이용로는 미스터 코리아가 된 후엔 영화배우에 도전하기로 다짐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이용로의 꿈은 한 번의 사고로 산산조각이 났다. 택시가 빗길 과속을 하면서 마주 오던 차와 크게 부딪쳤다. 정신을 차린 이용로는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하반신 마비였다. 그의 나이 26살 때의 일이다.

이용로는 척수장애인으로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았다. 삶을 포기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보디빌더 경험을 살려 장애인 테니스 국가대표에 도전해 태극마크를 달았다.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에선 금메달 2개를 목에 걸었다.

이용로는 국가대표 선수에 만족하지 않았다. 두 번의 도전 끝 용인대학교 특수체육학과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엔 용인대학교 대학원 석사(운동처방전공) 과정을 밟았다. 2010년 2월엔 장애인 체육 최초 체육학 박사 학위 수여자에 이름을 올렸다.

이 박사는 장애인 체육계에서 누구보다 이룬 게 많다. 그리고 잘 안다. 이 박사가 인터뷰 말미 장애인 체육계를 향해 쓴소리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무슨 이유일까. 엠스플뉴스가 이 박사를 만났다.

- 불의의 사고 떠올린 이용로 “내 아픔보다 어머니의 절규가 잊히질 않습니다” -

이용로 박사는 고교 졸업 후 보디빌더로 활동하며 미스터 코리아에 도전했다(사진=엠스플뉴스)
이용로 박사는 고교 졸업 후 보디빌더로 활동하며 미스터 코리아에 도전했다(사진=엠스플뉴스)

체육계에선 박사님을 “평생 체육과 함께하는 진짜 체육인”이라고 부릅니다. 불의의 사고로 장애를 갖기 전엔 보디빌더로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출신이에요.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입니다. 모두가 가난에 허덕이던 시절이죠. 당시엔 뛰어노는 것 외엔 친구들과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방과 후 축구공 차고 노는 게 일상이었죠. 운동화가 없어서 구멍 뚫린 고무신 신고 공을 찼던 게 기억납니다(웃음). 겨울엔 동네 빙판길 찾아서 스케이트를 탔고요. 운동을 좋아했어요.

축구와 스케이트 말고 즐긴 운동이 또 있습니까.

철봉에 매달려 있는 걸 좋아했어요. 턱걸이도 잘했죠(웃음). 배구, 탁구 등도 즐겼습니다.

진로를 보디빌더로 결정한 계기가 있습니까.

친형이 미스터 코리아 출신이에요. 형을 따라서 헬스장을 다닌 게 인생을 바꿨죠. 고등학교 때까진 자신감이 없었어요. 집안 사정이 어렵다 보니 기가 죽었던 거죠. 몸이 좋아지면서 바뀌었습니다. 자신감이 붙더라고. 영화 터미네이터 주인공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세계적인 스타로 거듭난 시기입니다. 한국의 터미네이터를 꿈꾸면서 운동 열심히 했죠(웃음).

고교 시절부터 보디빌더의 길을 걸은 거군요.

고교 졸업 후인 1983년 강남으로 상경해 헬스 트레이너로 일했습니다. 동시에 보디빌더 생활을 시작했죠. 교통사고로 장애가 생기지 않았다면 미스터 코리아와 영화배우에 도전했을 거예요. 사고가 인생을 바꾼 겁니다.

어떤 사고였습니까.

비가 주룩주룩 내린 1990년 7월 23일입니다. 26살 때였어요. 택시 타고 헬스장으로 향했습니다. 대회가 코앞이라 운동에 집중할 때였죠. 택시가 빗길 과속을 한 거예요. 끽하는 소리와 함께 미끄러지면서 마주 오던 차와 쾅 부딪친 것까지 기억합니다.

병원으로 실려 간 겁니까.

지금도 꿈을 꾼 것 같습니다. 사고 후 정신을 차려보니 하반신 감각이 사라졌어요.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이리저리 움직여봤어요. 그러다 병상에서 떨어졌습니다. 아파야 하는데 아무런 느낌이 나지 않는 거예요. 주먹으로 바닥을 치면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아.

너무 힘들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생을 마감할까 고민했죠. 그런데 어머니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생각이 바뀌었다?

‘가슴이 찢어진다’고 하죠? 그 말뜻을 어머니를 보고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내 이름을 부르며 절규하는 걸 봤어요. 그 장면이 잊히질 않아.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부모보다 먼저 생을 마감하는 것만큼 불효는 없다’는 말이 있어요. 전 몸을 다치면서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보자 수천 번 다짐했죠.

장애를 가지고 운동을 이어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변 사람들이 공기 좋은 시골로 가서 요양하며 살라고 했어요. 오기가 생겼습니다. 장애는 조금 불편할 뿐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장애인도 사람입니다. 사람은 기적을 만들 수 있다고 굳게 믿었어요. 보디빌더 경험을 살려서 할 수 있는 운동을 찾았습니다.

가장 처음 접한 운동은 뭐였습니까.

할 수 있는 게 상체 운동뿐이었어요. 병원에서 조금씩 근력을 키웠습니다. 재활 프로그램도 누구보다 열심히 했죠. 그러던 중 더 단단해진 계기가 있었습니다.

어떤?

교통사고 후 처음 외출했을 때입니다. 병원에 입원한 지 3개월째 되는 날이었죠. 차 엔진 소리를 듣는데 소름이 끼쳤습니다. 사고 날이 생각나면서 도망치고 싶더라고. 꾹 참았습니다.

첫 외출, 목적지는 어디였습니까.

코엑스에서 장애인 의료기기 전시회가 열렸어요. 간호사 한 분이랑 같이 가기로 했는데 응급 환자가 생긴 거야. 고민 끝에 혼자 길을 나섰죠. 힘들게 택시를 잡고 코엑스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예상 못한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두려움이요?

코엑스엔 사람이 많습니다. 저 사람들이 나만 보는 것 같은 거예요. 지금처럼 장애인 편의시설이 없던 때입니다. 사람들이 ‘저 장애인은 왜 코엑스에 왔을까’란 생각을 하는 것 같았죠. 그리고선 비웃는 것 같았어요. 사람들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온몸이 빨개졌습니다.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벌벌 떨었어요.

그 상황을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전시회장으로 가려면 고개를 들어야 하잖아. 고개를 들어서 주변을 둘러봤어요. 내 생각과 달리 사람들은 내게 관심이 없는 거야. 큰 교훈을 얻었죠. 내가 무엇을 하든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기죽을 필요가 없구나. 전시장을 다 구경하고 당당하게 병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첫 외출 후로 삶이 많이 바뀌었어요. 본격적으로 장애인 선수 활동을 시작한 겁니다.

- “교통사고 후 첫 외출, 제 삶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

이용로 박사는 2002년 부산 장애인 아시아경기대회 남자 테니스에서 금메달 2개를 목에 걸었다(사진 가운데)(사진=엠스플뉴스)
이용로 박사는 2002년 부산 장애인 아시아경기대회 남자 테니스에서 금메달 2개를 목에 걸었다(사진 가운데)(사진=엠스플뉴스)

장애인 농구, 역도, 테니스 등 다양한 종목을 경험했습니다.

최종적으로 테니스를 선택했어요. 1995년부터 2002년까지 장애인 테니스 국가대표로 활약했죠. 테니스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뭔지 아세요?

뭡니까.

1992년 2월 병원에서 퇴원한 이후 처음 선택한 종목은 역도였어요. 전국장애인체육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보디빌더 경험을 살려 역도에 도전한 겁니다. 보디빌더 시절 180~200kg을 쉽게 들어 올렸어요. 적수가 없었죠. 두 달 연습하고 출전한 전국장애인체육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이후엔 농구에 도전했어요.

농구요?

교통사고 전까지 보디빌더로 살았습니다. 장애인 역도에선 적수가 없었어요. 새 종목에 도전하고 싶었죠. 재밌었어요. 학창 시절부터 여러 종목을 경험한 까닭에 꽤 잘했죠(웃음). 하지만, 농구로 채워지지 않는 게 있었어요.

채워지지 않는 게 있었다?

장애인 농구는 경기에 참여하는 모든 선수가 휠체어를 타야 합니다. 비장애인과 대결이 불가능하죠.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고민했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대결할 수 있는 종목은 없을까. 그게 테니스였습니다.

테니스요?

테니스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과 일반인이 대결을 벌일 수 있습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구분이 없는 거예요. 장애인이 일반인과 대결에서 이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죽어라 연습했어요(웃음). 어딜 가든 라켓을 들고 다녔습니다. 종일 스윙 연습에 매진했죠. 성과가 있었어요.

성과가 있었다?

라켓을 들고 한강공원 테니스장을 자주 갔어요. 일반인과 연습경기를 자주 했습니다. 쉽게 패하지 않았어요. 이기는 날이 많았죠. 태극마크를 달고선 1998년 태국 방콕 장애인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동메달 2개를 목에 걸었습니다. 2002년 부산 장애인 아시아경기대회에선 금메달 2개를 땄죠. 단식과 복식을 모두 석권한 거예요(웃음).

패럴림픽엔 출전하지 않았습니까.

아시아 최고의 자리에 오른 뒤 올림픽 도전을 준비하려고 했습니다. 휠체어부터 바꿔야 했죠. 1998년부터 2002년까지 테니스에만 매진한 까닭에 완전히 낡은 거예요.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려면 성능 좋은 휠체어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어요.

어떤 문제였습니까.

2002년 부산 장애인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메달 2개를 땄습니다. 금메달 하나당 포상금 500만 원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어요. 1천만 원을 받아서 휠체어를 바꾸려고 했죠. 통장에 입금된 건 190만 원이었습니다. 아시아경기대회 메달리스트와 달리 연금도 없었죠. 구형 휠체어로는 세계 무대에 도전할 수 없었어요. 그렇다고 모아둔 돈이 있거나 빌릴 수도 없었습니다.

어떤 결론을 내렸습니까.

미련 없이 은퇴했어요. 그리고선 공부에 집중했죠. 장애인 선수가 흘린 땀방울의 가치가 인정받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 “책과 거리가 멀었던 삶, 지금은 책만 보고 삽니다” -

이용로 박사의 일과엔 운동이 반드시 포함된다(사진=엠스플뉴스)
이용로 박사의 일과엔 운동이 반드시 포함된다(사진=엠스플뉴스)

장애인 테니스 국가대표로 더 많은 걸 이룰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후회는 없어요. 제 선택은 옳았습니다. 병원에서 재활 치료를 받을 때마다 느낀 게 있었어요. 운동 전문가로 살아왔는데 재활 운동에 대해선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겁니다. 이용로는 운동기구를 잘 활용하는 사람이었던 거예요. 이 운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아는데 왜 해야 하는지는 몰랐던 거죠.

대학 입학은 쉬웠습니까.

1996년 용인대 특수체육학과에서 국내 최초 장애인 특별전형을 만들었어요. 시험만 통과하면 원하는 걸 배울 수 있었죠. 공부를 시작한 겁니다. 그런데 시험 준비 과정부터 만만치 않았어요. 학원에 다니고 싶었는데 받아주는 곳이 없는 겁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 편의시설 미비 등 여러 가지 이유가 겹쳤죠.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1995년부터 독학을 시작했습니다(웃음). 테니스 국가대표로 활동할 때예요. 낮에 운동하고 밤에 공부했죠. 첫 시험에선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고민 끝 승부수를 띄웠죠.

승부수요?

감독님에게 양해를 구한 뒤 3개월간 공부에 집중했습니다. 용인대 특수체육학과에 들어갔어요(웃음). 1997년 35살 때의 일입니다. 궁금했던 것들을 하나둘 알아갈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원하는 대학에 입학한 것 아닙니까.

1997년이 어떤 해입니까. 외환위기 여파로 학교에서 약속한 장애인 편의시설을 갖추지 못한 거예요. 장애인에게 한없이 높은 문턱이 수두룩했죠. 테니스장에서 종일 운동하는 것보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게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어요.

포기하지 않았다?

장애인들이 지금보다 나아진 세상에서 사는 데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었습니다. 내가 포기하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 확신했죠. 등굣길이 누구보다 힘들었어요. 수업이 끝나도 자릴 뜨지 않았습니다.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교수님을 붙잡았어요(웃음). 질문을 끊임없이 했죠. 교수님이 이런 말까지 했어요.

어떤?

제가 질문하기 시작하면 수업을 끝냈습니다. 그리고선 “질문 없는 학생은 나가도 된다”고 이야기했죠(웃음). 교수님과 3시간 동안 일대일 수업을 했어요. 이런 날이 수두룩했습니다. 공부하는 게 아주 재밌었어요. 공부에 미쳐서 학부를 졸업한 뒤 대학원으로 진학했죠. 그 과정에서 장애인 체육 최초 운동처방사 자격증까지 땄습니다.

운동처방사 자격이요?

운동처방사는 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자신의 신체 상태에 딱 맞는 운동을 처방하는 거예요. 용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엔 한국체육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어요. 운동생리학과 운동처방을 공부했습니다. 장애인이 유산소와 근력 강화 운동을 할 수 있는 운동기구를 연구 개발해 박사 학위를 받았죠. 10년 전 일입니다(웃음).

쉴 틈 없이 달려왔습니다.

박사 학위를 취득하면 공부가 끝나는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었습니다.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지식에 굶주릴 거예요. 새로운 책을 읽고 체육계 전문가가 올린 글을 보면 몰랐던 게 많습니다.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많은 걸 배우죠. 겸손함을 잃지 않고 배움을 이어갈 겁니다.

- “장애인은 장애인이 가장 잘 안다” -

이용로 박사는 장애인 체육계가 바뀌어야 한다고 목소릴 높였다(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이용로 박사는 장애인 체육계가 바뀌어야 한다고 목소릴 높였다(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장애인 체육에 있어선 최고의 전문가입니다. 한국의 10년 전과 현재 장애인 체육계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2009년 9월 이천장애인체육종합훈련원이 완공됐습니다. 모텔에서 먹고 자며 운동한 선수들이 선수촌에서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죠. 발전한 겁니다. 그러나 개선해야 할 점이 많아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습니까.

간단하게 말할게요. 장애인 체육계에선 장애인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몇 곳을 제외하면 대부분 비장애인이 장애인 체육의 미래를 기획하고 있죠.

비장애인이 장애인 체육의 미래를 기획한다?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에요. 장애인의 삶이 어떨지 추측하면서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겁니다.

아.

장애인은 장애인이 가장 잘 압니다. 장애인의 시선으로 장애인을 바라보고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데 그게 아닌 거예요. 한국에서 장애인 체육 전문가로 불리는 교수들은 대부분 특수체육을 전공했습니다. 특수체육은 장애아동과 발달장애인 등의 신체 활동을 위한 학문이죠.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어요.

어떤?

장애인 체육 발전을 위한 위원회를 꾸린 적이 있습니다. 10명이 넘는 위원 가운데 장애인은 저 하나였죠. 누구도 제 주장에 반론 제시를 못했어요. 비장애인인 다른 분들은 장애인 체육에 대한 학습과 이해가 부족했던 겁니다. 장애인 체육의 미래는 장애인 체육인이 앞장서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 주장만 들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계속 말씀하세요.

장애인 체육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나눌 수 있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 안엔 장애인 체육인이 포함되죠.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장애인 체육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거예요. 장애인 전용 체육관에 가본 적 있으세요?

장애인 전용 체육관이요?

문화체육관광부는 2018년 ‘장애인 체육, 모두를 위한 체육의 시작’이란 비전으로 3대 추진 전략을 발표했습니다. 장애인이 주도하는 체육, 장애인이 즐기는 체육, 장애인과 함께하는 체육이 핵심이죠. 그리고 2025년까지 장애인 체육시설인 ‘반다비 체육센터’ 150개를 신규 건립하기로 했어요. 언뜻 보면 참 감사한 일입니다.

언뜻 보면?

전국 어디든 장애인 체육관에 한 번 가보세요. 장애인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 체육관은 어찌 될까요. 일반인을 받아야 운영이 가능합니다. 장애인들이 마음껏 운동할 수 있는 곳이 점점 사라지는 거죠. 장애인체육관을 이용하는 사람은 대부분 일반인입니다.

처음 장애인 체육관이 만들어졌을 때부터 적극적으로 홍보해서 장애인들의 활용을 도모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장애인들이 체육관을 찾지 않는 명확한 이유가 있어요. 대다수 장애인은 혼자서 운동하기 힘든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애인을 이해하고 가르칠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해요. 그런데 턱없이 부족합니다. 왜냐. 대학에서 특수체육을 전공한 지도자가 장애인 체육 지도자로 활동해요. 발달장애 아동 위주의 교과 과정을 이수한 분들이죠. 지체장애인 등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진다는 게 큰 문제입니다.

박사님 주장에 따르면 장애인 체육계는 개선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닙니다.

땀 흘린 만큼 정당한 대우를 바라는 게 잘못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능력에 맞는 대우를 해줘야 해요. 장애인 체육이 지금보다 발전할 방법은 이것뿐입니다. 얼마 전 가까운 후배가 급작스럽게 생을 마감했어요.

갑자기?

장애인 체육 실업팀 감독으로 있던 친구였습니다. 장애인들은 신체기능이 일반인보다 현저하게 떨어져요. 나이를 먹을수록 각종 질환에 시달릴 가능성이 큽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이미 장기에 문제가 있는 상태입니다. ‘척수장애인은 20년 살면 많이 산 것’이란 말이 있어요. 올해로 장애를 얻은 지 30년째입니다. 후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어떤?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다. 그럼 난 어떻게 살 것인가. 내게 묻고 또 물었습니다.

답은 뭐였습니까.

인생 마지막 날까지 장애인 체육 발전을 위해 힘쓸 거예요. 장애인 테니스 국가대표, 박사 과정을 거치면서 느낀 걸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후배들이 지금보다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제언을 아끼지 않을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꼭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후배들이 앞장서서 지금보다 발전한 장애인 체육 환경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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