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홍정호, 한국 여자 핸드볼 최초 유럽 리거

-“핸드볼을 놀이로 접하고 기본기를 탄탄히 다진 게 아주 큰 힘 됐어요”

-“지도자와 선수가 자유롭게 소통하고 알아서 훈련하는 문화가 신기했어요”

-“유럽 선수들은 짧은 시간 모든 걸 쏟아붓는 훈련에 익숙해요”

-“남몰래 흘린 땀이 달콤한 열매로 돌아온다는 건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한국 여자 핸드볼 전설 홍정호(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한국 여자 핸드볼 전설 홍정호(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홍정호는 한국 여자 핸드볼 금메달 획득에 일조했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승승장구(乘勝長驅)했다. 홍정호는 두 차례 올림픽에 더 출전해 은메달(1996 애틀랜타)과 동메달(2008 베이징)을 목에 걸었다. 1993년 노르웨이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선 득점왕과 베스트 7에 선정되는 기쁨을 맛봤다. 1995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공동 개최한 세계선수권에선 한국의 우승에 앞장섰다.

홍정호는 한국 여자 최초 유럽 리그를 경험한 선수이기도 하다. 홍정호는 노르웨이 벡킬라게츠 SK, 덴마크 슬라겔세 FH에서 5년간 활약했다. 더 큰 성장을 이루고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싶다는 욕심이 이뤄낸 성과였다.

홍정호는 은퇴 후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후배 양성은 기본이고 세계반도핑기구(선수위원), 국제스포츠전략위원회(이사), 한국도핑방지위원회 선수위원장으로 활동한다. 단국대학교에선 국제스포츠학과 초빙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엠스플뉴스가 홍정호를 만났다.

홍정호 “초등학교 시절 놀이로 핸드볼 접하고 기본기 탄탄히 다졌죠”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두각을 나타낸 홍정호(사진 가운데)(사진=엠스플뉴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두각을 나타낸 홍정호(사진 가운데)(사진=엠스플뉴스)

경력만 봐도 한국 여자 핸드볼 전설인 걸 알 수 있습니다. 핸드볼과의 인연은 어떻게 맺게 된 겁니까.

인천 구월초등학교를 졸업했어요. 이 학교가 여자 핸드볼로 아주 유명합니다(웃음). 여자 핸드볼팀 창단 멤버였어요.

창단 멤버요?

초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우일규 선생님이라고 계셨습니다. 클럽 활동으로 핸드볼을 접하신 분이었죠. 선생님은 핸드볼의 매력을 전파하고자 팀을 만들었어요.

창단팀에 뽑힌 겁니까.

1980년대엔 학교에서 운동회를 했어요. 운동회 하이라이트는 학년별 달리기였죠. 선생님은 학년별 달리기 3위 안에 든 학생을 뽑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뛰어노는 걸 좋아한 덕분에 핸드볼과 인연을 맺은 것 같아요.

핸드볼이란 종목에 대해선 아는 게 있었습니까.

전혀 몰랐어요. 예나 지금이나 핸드볼은 비인기 종목인 게 사실이에요. 학교에 남자 배구부가 있었습니다. 여자 배구부를 만들어 운영하려는 줄 알았죠. 공보고 알았습니다. 우리가 배울 게 배구는 아니구나(웃음).

재밌었습니까.

처음엔 아무 설명이 없었어요. 선생님은 작은 공 하나 던져 주면서 ‘놀아’라고만 했죠. 핸드볼을 알지 못했습니다. 방과 후 1시간 동안 친구들과 편을 나눠서 피구를 즐겼죠. 신나게 놀았어요. 공에 익숙해지고 흥미를 느낄 때쯤 핸드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어땠습니까.

공과 가까워진 덕분인지 재밌었어요. 핸드볼은 뛰는 운동입니다. 매일 신나게 뛰어놀았죠. 선생님은 승부에 연연하지 않았어요. 학생들이 핸드볼을 놀이로 인식할 수 있게끔 환경을 조성했죠. 그렇게 핸드볼을 배운 게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비결이 아닌 가 싶어요.

학창 시절 운동을 그만둘 뻔한 고비는 없었습니까.

한국에서 운동부 생활을 한 선수 가운데 고비가 없었던 사람 찾기 어려울 겁니다(웃음). 초등학교 땐 창단 멤버여서 선배가 없었어요. 마음 편히 놀았죠. 중학교부턴 아니었어요. 흔히 이야기하는 선·후배 문화가 이런 거구나 느꼈죠. 학교 폭력 이슈가 화두였죠?

그렇습니다.

학교 폭력 이슈를 보고 학창 시절을 돌아봤어요. 이런 문제가 왜 생긴 걸까 고민했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시기·질투가 큰 원인이었던 것 같아요. 어느 팀이든 에이스가 있어요. 하나를 가르치면 열 가지를 해내는 선수죠. 한국엔 그런 선수를 인정하고 배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깎아내리려고 하는 문화가 있지 않나 싶어요. 그런 걸 알면서도 외면하는 지도자 문제도 있고요.

힘든 과정을 이겨내고 국가대표로 성장한 원동력은 뭐였습니까.

핸드볼이 재밌었어요. 태극마크를 달고 꼭 한 번 뛰어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죠.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의지가 힘든 시간을 참아낼 수 있게 해준 것 같아요.

두각을 나타낸 건 언제였습니까.

초등학교 6학년 때 첫 우승을 경험했어요. 전국소년체육대회 정상에 올랐죠. 중학교 3학년 땐 국가대표 상비군에 뽑혀서 기량을 갈고닦았어요. 고등학교에 진학한 해엔 태극마크를 달고 아시아 주니어 대회에 출전했습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은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었어요”

한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사진=엠스플뉴스)
한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사진=엠스플뉴스)

처음 태극마크를 단 순간 기억합니까.

국가대표팀에 처음 뽑힌 건 고교 2학년 때였어요. 선수촌에 들어가는 길부터 엄청나게 떨었죠. 당당하게 들어가려고 했는데 떨림이 멈추질 않았어요(웃음). 저를 뺀 모든 선수가 대학이나 실업팀 소속이었습니다. 머릿속엔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가득했죠. 지금은 추억이에요.

1992년엔 태극마크를 달고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고교 3학년 때였습니다. 주전 선수는 아니었어요. 주축 선수의 체력 안배와 경기 흐름을 바꾸는 후보 선수였죠. 몇 분을 뛰든 팀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온 힘을 다했어요. 벤치에 앉아있을 땐 선배들을 열심히 응원했고요.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습니까.

예선 오스트리아전이었어요. 감독님이 심판 판정에 거칠게 항의하면서 퇴장당한 경기였습니다. 그 경기에서 겁 없이 뛰었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론 가장 만족스러운 경기였습니다(웃음).

한국은 1988년 서울 올림픽 금메달 팀이기도 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세대교체가 성공적으로 이뤄졌어요. 세대교체가 이뤄지지 않았다면 내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하는 건 어려웠을 거예요.

고교 3학년 때 올림픽 시상대 가장 높은 위치에 섰습니다.

얼떨떨했어요(웃음). 많은 사람이 쳐다보는 데 시선을 어디에다가 둬야 할지 몰랐어요. 좋았습니다. 선수 생활을 돌아보면 일찌감치 세계 정상에 서본 게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이유가 있습니까.

많은 분이 “고교 3학년 때 올림픽 금메달을 땄다. 이후 목표 설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고 합니다. 아니었어요. 세계 최고의 팀에서 주축 선수로 활약하고 싶은 꿈이 커졌죠. 또 다른 목표도 생겼습니다.

“에이전트가 뭔지 알지 못한 시대, 유럽 리그 도전 의지가 확고했어요”

홍정호는 1993년 노르웨이 세계선수권 대회 득점왕과 베스트 7에 선정됐다(사진=엠스플뉴스)
홍정호는 1993년 노르웨이 세계선수권 대회 득점왕과 베스트 7에 선정됐다(사진=엠스플뉴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후 생긴 또 다른 목표는 뭐였습니까.

‘유럽 리그에서 반드시 뛰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고교 졸업 후 바로 유럽으로 향한 건 아니었어요. 한국체육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선수 은퇴 후의 삶까지 고려하면 대학 진학은 꼭 필요하다고 봤어요. 대학에서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서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고 판단했죠. 온 힘을 다했습니다.

당시 유럽 리그에서 뛰는 한국 여자 선수가 있었습니까.

없었어요. 내가 한국 여자 핸드볼 최초 유럽 리그에 진출한 선수예요. 축구나 야구처럼 에이전트가 있거나 인터넷으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혼자 힘으로 유럽 리그에 대한 정보를 알아본 뒤 도전해야 했어요.

그게 가능한 겁니까.

국제무대에서의 활약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올림픽, 세계선수권 등에서 좋은 기량을 보이면 유럽 팀에서 뛸 기회가 반드시 올 것으로 믿었죠. 1993년 노르웨이 세계선수권이 아직도 생생해요.

1993년 노르웨이 세계선수권이요?

노르웨이는 핸드볼 강국입니다. 프로 리그가 활성화되어 있어요. 노르웨이에서 경기하는데 꿈같은 곳이란 걸 느꼈어요. 운동 환경과 경기장 분위기 등이 한국과 크게 달랐습니다. 쉽게 말해 핸드볼이 인기 종목이었어요. 큰 관심을 받았죠. 감독, 코치와 자유롭게 소통하는 문화도 신기했습니다.

당시 대회에서의 활약은 어땠습니까.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마친 뒤 대표팀 주전으로 자릴 잡았어요. 그 덕분에 1993년 노르웨이 세계선수권 득점상과 베스트 7에 선정됐죠. 사실 팀 성적은 저조했습니다. 대회 11위를 기록했죠. 혼자서만 돋보인 것 같아서 동료들에게 미안함이 컸어요.

돋보이는 활약을 펼치면서 유럽 팀의 눈을 사로잡은 거군요.

대회를 마치고 집으로 연락이 왔어요. 협회가 “유럽 몇몇 팀에서 네 영입을 원하고 있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대학생 신분이었어요. 서두르지 않았죠. 대학을 마치고 유럽 리그에 도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부모님도 대학을 졸업하고 유럽 리그에 도전하는 게 옳다고 했습니다.

계획대로 풀렸습니까.

대학 졸업 후 일본으로 향했어요. 구체적으로 말하기엔 어려움이 있어요. 확실한 건 일본 진출을 원하진 않았습니다. 노르웨이로 가고 싶었는데···어쩔 수 없이 일본 팀과 계약을 맺고 1년간 뛰었어요.

일본 리그는 어땠습니까.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요. 유소년부터 성인까지 핸드볼을 쉽게 접해요. 그 점이 참 부러웠어요.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문제요?

환경은 좋은데 마음이 딴 곳에 가 있는 거예요(웃음). 좋은 경기력이 나올 리 없었죠. 결국 팀과 협의해서 계약 기간을 2년에서 1년으로 줄였어요.

그게 가능합니까.

노르웨이에서 영입을 원한 팀이 있었습니다. 그 팀에서 위약금을 지불한 덕분에 계약 기간 변경이 가능했어요.

그렇게 노르웨이 리그로 향한 거군요.

유럽 리그 진출이란 의지가 확고하지 않았다면 어려웠을 거예요. 무조건 유럽 리그를 경험하겠다는 의지가 노르웨이 진출로 이어졌습니다. 내 가치를 인정하고 위약금을 지불한 팀에 감사했어요. 1998년 마침내 유럽 진출의 꿈을 이뤘습니다.

“지도자와 선수가 자유롭게 소통하고 알아서 훈련하는 문화가 아주 신기했습니다”

홍정호는 선수 시절 노르웨이와 덴마크 리그를 경험했다(사진=엠스플뉴스)
홍정호는 선수 시절 노르웨이와 덴마크 리그를 경험했다(사진=엠스플뉴스)

꿈에 그리던 유럽 리그였습니다.

적응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훈련장 분위기부터 생활까지 모든 게 달랐어요. 외국인 선수 신분으로 팀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고요. 하지만, 후회하진 않았습니다. 아주 좋았어요. 홈경기가 있는 날이면 경기장 안팎이 관중으로 가득했어요. 노르웨이 팬들이 내 이름을 불러주는 데 온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죠. 훈련장에서 더 땀 흘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어요.

핸드볼 인기가 대단하군요.

시내를 나가면 아이들이 ‘홍이다’라고 하면서 사인을 요청했어요. 한국이나 일본에선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죠.

한국 여자 최초 유럽 리그 진출이었습니다. 외롭진 않았습니까.

1993년 노르웨이 세계선수권 대회 때 인연을 맺은 교포 언니가 있어요. 언니 가족이 딸처럼 챙겨줬죠. 그분들이 있어서 외롭지 않았어요.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내 일처럼 도와줬거든요. 쉬는 날엔 언니 가족과 시내에 나가서 맛있는 음식 사 먹고 관광을 즐겼습니다.

덴마크 리그에서도 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노르웨이 리그에서 2년간 뛰고 덴마크 리그로 둥지를 옮겼습니다. 노르웨이 팀에 있을 때 가장 가까웠던 선수가 덴마크인이었어요. 그 선수가 부상으로 일찌감치 은퇴하면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어요. 덴마크 프로팀을 맡은 겁니다. 내게 함께 하자는 제안을 해주면서 큰 고민 없이 이적을 선택했어요.

노르웨이와 덴마크엔 어떤 차이가 있었습니까.

훈련부터 생활까지 모든 게 비슷했어요. 적응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상으로 고생을 많이 했어요. 어깨가 안 좋아 수술을 받았습니다. 2000년에 한 번, 2003년에 두 번 어깨에 칼을 댔죠. 덴마크에선 아픈 어깨로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것 같아요. 재활을 병행하면서 외국인 선수 역할을 해야 했으니깐. 어려운 점이 많았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세계 최고 선수와의 경쟁을 이어갔습니다.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에 출전하면 다른 게 있었습니까.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엔 어깨가 아파서 출전을 못했어요. 유럽에서 뛰던 시기라서 아쉬운 마음이 컸죠. 유럽 리그에서 뛸 땐 태극마크를 달 기회가 적었어요.

이유가 있습니까.

국제 규정에 따르면 소속팀은 대표팀 차출 요청에 무조건 응해야 해요. 대표팀에서 부르지 않았습니다. 아시아경기대회나 아시아선수권 등은 최정예 선수가 나가지 않아도 메달을 딸 수 있는 실력이었거든요. 협회에서 소속팀 경기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거예요. 선수 생활하면서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한 건 1994년 히로시마 대회가 유일해요.

세계선수권은 어땠습니까.

큰 무대 경험이 쌓이다 보니 떨지 않았던 것 같아요. 세계 최고 선수가 즐비한 팀을 만나도 마음 편히 경기에만 집중했어요.

선진 리그에서 5년간 뛰었습니다. 한국이 꼭 배워야 하는 건 무엇입니까.

자율성과 소통입니다. 한국은 지금도 지도자와 선수의 관계가 수직적이에요. 지도자가 시키면 무엇이든 해야 해요. 유럽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유럽 지도자는 이 훈련을 왜 해야 하는지 반드시 설명했어요. 선수들은 훈련 목적을 이해해야만 땀을 흘렸고요. 소통의 힘은 성과가 확실했습니다.

성과가 확실했다?

선수가 훈련 목적을 이해하고 땀을 흘리면 성과가 달라요. 팀 훈련을 마치면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개인 운동을 해요. 선수는 어떤 강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해야 출전 시간을 늘릴 수 있는지 알아요. 한국 스포츠가 지금보다 발전하려면 지도자 말에 무조건 ‘네’를 외치는 문화가 사라져야 해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세대는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어요. 지도자가 무서워서 무엇을 이야기하든 ‘네’라고만 답했습니다. 선수가 생각하고 결정하는 법을 모르는 거예요. 선배와 후배 사이도 마찬가지예요. 선배란 이유만으로 명령만 하고 후배는 무조건 복종해야 했어요. 그런 게 한국에선 당연했습니다.

아.

지도자나 선배를 존중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서로 자유롭게 소통하면서 나아가자는 겁니다. 유럽과 한국의 가장 큰 차이가 뭔지 아세요?

뭡니까.

훈련량입니다. 한국은 팀 훈련이 너무 많아요. 하루 3시간이 넘습니다. 강도도 매우 높죠. 그 시간 내내 집중력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해요. 선수들은 팀 훈련을 왜 이리 많이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하루를 조용히 보내야 하니까. 조금 더 솔직히 얘기하면 시간을 보내는 거예요. 그게 효과가 있겠습니까.

노르웨이나 덴마크는 어땠습니까.

팀 훈련이 1시간 30분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중에서도 30분은 몸을 푸는 데 써요. 그리고 1시간 동안 모든 걸 쏟아붓습니다. 살벌해요.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실전보다 더 치열하게 경쟁하죠. 높은 집중력을 유지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훈련이 끝나면 개인 운동을 합니다.

개인 운동이요?

선수마다 부족한 부분이 다릅니다. 그 부분을 파악해서 보강하는 거예요. 선수들이 부족한 점을 알고 있는데 개인 운동을 소홀히 한다면 프로 의식이 없는 겁니다. 유럽에선 늘 보완해야 할 부분을 확실히 파악하고 개인 운동을 했어요. 코칭스태프는 선수와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성장을 도왔죠.

한국 지도자들을 만나보면 이런 고충을 토로합니다. 선수들이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찾고 운동하는 데 익숙하지가 않다고. 그걸 지켜만 보는 건 지도자의 도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유럽 생활을 마무리하고 국내 실업팀에 몸담았을 때의 일입니다. 베테랑이었어요. 훈련장에서부터 솔선수범하면 후배들이 따라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개인 운동하는 걸 보고 지나치는 선수가 많았어요. ‘네 갈 길을 가라. 나는 내 길을 간다’는 느낌이었죠. 지도자들의 고충을 이해해요. 그래서 더 유소년 교육이 중요한 겁니다.

유소년이요?

많은 선수가 지도자의 지시에 따라서 운동하는 데 익숙합니다. 스스로 훈련 프로그램을 짜고 운동하는 데 익숙하지 않아요. 많은 성인 선수가 팀 훈련 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겁니다. 어린 선수가 스스로 성장하는 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해요. 어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남몰래 흘린 땀이 달콤한 열매로 돌아온다는 건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홍정호(사진 왼쪽)는 핸드볼을 처음 가르쳐준 우일규 선생이 있어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고 강조한다(사진=엠스플뉴스)
홍정호(사진 왼쪽)는 핸드볼을 처음 가르쳐준 우일규 선생이 있어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고 강조한다(사진=엠스플뉴스)

2011년 12월 선수 생활을 마감했습니다.

운동할 수 없는 몸 상태였습니다. 핸드볼화를 들고 체육관으로 향하는 게 힘들 정도였어요. 즐거운 마음으로 훈련하질 못했습니다. 체육관으로 향하는 길이 고통스럽고 두려웠죠. 큰 고민 없이 은퇴했어요. 계획도 있었습니다.

계획이요?

한국, 일본, 유럽에서 다양한 경험을 했습니다. 한국어, 일본어, 영어를 할 줄 안다는 건 어떤 일을 하든 큰 장점이라고 여겼죠. 여기서 만족하고 싶지 않았어요. 지식과 경험을 더 하고 싶었습니다. 은퇴 시즌인 2011년 공부를 시작해서 2017년 박사 학위(체육측정평가 전공)를 받았어요.

아.

새로운 경험도 쌓았어요. 국제핸드볼연맹, 세계대학스포츠연맹, 아시아핸드볼연맹, 대한핸드볼협회 등에서 기술위원을 역임했어요. 세계반도핑기구에선 선수위원으로 활동했고요. 국제스포츠전략위원회에선 이사직을 맡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한국도핑방지위원회 선수위원장으로 있고요. 핸드볼의 재미를 알리고 더할 수 있는 지도자로도 활동 중입니다.

대학교수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도자의 눈으로 평가한 홍정호는 어떤 선수였습니까.

내성적이지만 체육관에선 누구보다 승리욕이 강했던 선수. 성장하고자 하는 욕심이 강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유럽으로 나갔던 선수. 선수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게 있어요.

뭡니까.

무슨 일을 하든 내가 땀 흘린 만큼의 결과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어떤 시대에 살든 변하지 않는 진리에요. 남몰래 흘린 땀이 달콤한 열매로 돌아온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꿈이 있습니까.

분야를 한정하고 싶지 않아요. 선수 시절부터 쌓아온 경험과 철학을 공유할 수 있는 분야라면 어디든 도전하고 싶습니다.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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