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GA 전설 강욱순 프로, 2017년부턴 사업가로 변신해 골프 산업 발전에 앞장서고 있다

-“형님이 피땀 흘려 번 돈 20만 원이 프로 골퍼의 꿈을 이루게 했다”

-“생활비 걱정 떨치고 마음껏 스윙한 2년이 6년 만의 첫 우승을 만들었다”

-“미국은 아카데미마다 스윙 다르다는 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프로 골퍼로 누린 영광, 골프 산업 발전으로 보답하고 싶다”

'강욱순 골프 아카데미 in 안산' 강욱순 대표(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강욱순 골프 아카데미 in 안산' 강욱순 대표(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안산]

웅장하다. ‘강욱순 골프 아카데미 in 안산’을 처음 본 순간 떠오른 말이다. 이 아카데미의 대표는 1989년 KPGA(한국남자프로골프투어)에 입회해 통산 18승(코리안투어 12승·아시안투어 6승)을 기록한 강욱순(54) 프로다.

강 프로는 20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다. 1년 만에 세미 프로 자격을 취득했지만 프로 골퍼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KPGA 입회까지 5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생활비 걱정을 말끔하게 덜어준 첫 우승까진 6년이 더 걸렸다.

아카데미에서 만난 한 골프 관계자는 그런 강 프로를 ‘선구자’로 표현했다. 강 프로는 1995년 KPGA 투어 포카리일간스포츠오픈 정상에 오른 뒤 새 도전을 선택했다. KPGA에서의 도전을 뒤로하고 아시아 무대로 도전장을 내던졌다. APGA(아시안투어) 도전 첫해인 1996년 강 프로는 두 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한국 선수 최초 아시아 상금 랭킹 1위를 차지했다.

2002년 미국 PGA(미국남자프로골프투어) 도전을 준비하면서는 제2의 삶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한국과 다른 교육 방식에 큰 깨달음을 얻고 ‘아카데미’ 설립을 기획했다. 그렇게 프로 골퍼 인생을 바친 아카데미는 2017년 3월 17일 문을 열었다.

대표란 직함이 익숙해진 강 프로는 10대부터 90대까지 언제 어디서나 골프를 즐길 수 있는 환경 구축과 유망주 육성 등 다양한 꿈을 꾸고 있다. 엠스플뉴스가 ‘선구자’ 강 대표를 만났다.

- 강욱순 “형님이 지원해준 20만 원이 프로 골퍼의 꿈을 이루게 했습니다” -

1989년 KPGA 입회 프로 통산 18승을 기록한 강욱순 프로(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1989년 KPGA 입회 프로 통산 18승을 기록한 강욱순 프로(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코로나19로 많은 분이 힘겨운 나날을 보내는 한 해입니다. 대표님은 2017년 3월 17일부터 프로 골퍼이자 ‘강욱순 골프아카데미 in 안산’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20년 대표님은 어떻게 보내고 있습니까.

세계 역사에 가장 힘겨웠던 한 해로 기록될만한 2020년입니다. 2월 베트남에서 올 시즌을 준비할 때만 해도 올 한 해가 이토록 힘겨울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습니다(웃음). 주변을 둘러보시면 아시겠지만 안산엔 공단이 아주 많아요. 하룻밤 자고 나면 도산하는 기업이 수두룩했습니다.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면서 한 해를 보낸 것 같아요.

프로 골퍼이자 사업가로 고민도 두 배이지 않습니까.

사업가로 고민이 많은 한 해죠. 프로 골퍼는 대회 준비에만 신경 쓰면 됩니다. 사업은 직원들부터 회원들까지 신경 써야 할 게 한둘이 아니죠. 3월부턴 잠을 푹 잔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나마 다행인 건 골프 연습장 타석 간의 거리가 2.5m입니다. 정부에선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해 2m 거리두기를 강조하고 있죠. 아카데미를 큼지막하게 지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웃음). 회원간 겹치는 동선이 적습니다. 코로나19 피해를 최소화한 거예요.

코로나19로 고민할 게 한둘이 아닙니다.

일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는 게 감사한 시대입니다. 평생의 동반자인 골프와 계속해서 함께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어요. 올해 이런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어떤?

골프를 안 했으면 코로나 시대에 밥벌이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을까 생각합니다. 프로 골퍼의 꿈을 이룬 이후 세계적인 기업인 삼성과 인연을 맺었어요. 삼성과 16년을 함께 했죠. 이 시기에 17승을 거뒀습니다. 전성기를 보낸 거죠. 이후엔 후배 양성과 골프 활성화 등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사업을 시작했고요. 코로나19로 어려움이 없는 건 아니지만 골프 덕분에 세계인이 힘든 한 해에도 버텨나가고 있습니다. 골프를 만나서 혜택을 참 많이 받았어요.

혜택을 받았다?

모든 스포츠가 똑같습니다. 1등만 기억해요. 골프는 유독 심합니다. 우승자가 중심이에요.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운 좋게 18승을 거두면서 명예와 부를 축적할 수 있었죠. 평생을 함께할 사람들을 만났고요. 골프를 하면서 입은 혜택들을 조금씩 돌려줘야 합니다. 2017년 3월 17일 아카데미 운영을 시작한 결정적인 이유죠.

- “형님이 피땀 흘려 번 돈 20만 원이 프로 골퍼의 꿈을 이루게 했죠.” -

강욱순 프로는 20살에 골프를 시작해 KPGA에 전설로 자리매김했다(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강욱순 프로는 20살에 골프를 시작해 KPGA에 전설로 자리매김했다(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평생을 골프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골프와 첫 인연은 어떻게 맺었습니까.

20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어요(웃음). 늦게 시작한 편이죠. 학창 시절 운동을 좋아하긴 했습니다. 장거리 달리기를 가장 잘했고 방과 후엔 친구들과 어울려 축구를 했죠. 1970~80년대엔 프로 골퍼를 꿈꾸기 힘든 환경이었어요. 친구들 10명 가운데 9명은 복서를 꿈꿨습니다. 오직 노력만으로 세계 최고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복서는 모두의 꿈이었죠.

학창 시절까진 골프채를 잡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골프채를 잡게 된 겁니까.

운동 쪽으로 진로를 결정하고 싶었어요. 그러던 중에 골프를 접한 겁니다. 처음엔 프로 골퍼로 성공해야겠다는 확신이 없었어요. 1980년대만 해도 롤 모델이 없었거든(웃음). 그때 같은 연습장을 쓰던 한 분의 말씀이 골프채를 꽉 잡게 했어요.

인생을 바꾼 은인이군요.

그분은 싱글 골퍼였어요. 30년 전 양재동에 있는 연습장에서 오다가다 만났던 분이라서 정확히 기억은 나질 않습니다. 다만 그 말만큼은 확실히 기억해요. 이분이 20살이던 제게 이런 말을 했어요.

어떤?

그분은 “스포츠를 하고 싶으면 지금 잡은 골프채를 꽉 잡아라. 골프만큼 장래가 밝은 스포츠는 없다. 골프는 운동선수로 황금기를 보내고 제2의 삶까지 보장된 스포츠다. 인생을 걸고 충분히 도전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했어요. 그땐 100% 이해하지 못했죠. 이제 막 골프채를 집어 든 20살이 뭘 알겠어요(웃음). 지금 돌이켜보면 그분은 골프의 미래를 정확히 짚었다는 걸 알 수 있죠.

골프는 2010년대 후반부터 대중 스포츠의 길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대표님이 골프를 처음 시작한 건 1980년대입니다. 당시만 해도 골프는 부잣집 자녀들만 할 수 있는 스포츠 아니었습니까.

부자는 무슨(웃음). 제가 경상북도 영덕군 출신이에요. 시골 촌놈이었죠. 형님이 프로 골퍼로 성장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을 줬어요. 월급이 5만 원이면 밥값으로 3만 원을 쓸 시기입니다. 20살 청년이 돈이 어딨어요. 형님이 골프를 치고 싶어 하는 제게 20만 원이란 거금을 주면서 딱 한 마디 했습니다.

어떤 말이었습니까.

“내가 네 꿈을 이루는 데 도와줄게. 죽자 살자 해서 꼭 이름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선 매달 20만 원씩 지원했죠.

그 20만 원이 지금의 강욱순을 있게 한 거네요.

1년간 종일 공만 쳤어요(웃음). 골프장 밖에서도 스윙 연습에 매진했죠. 한 달에 네 번은 용인 프라자 CC에서 기량을 갈고닦았어요. 한남동에서 프라자 CC로 향하는 직원 버스에 올라타 문 닫을 때까지 있었죠. 1980년대 프라자 CC에서 한 번 공을 치는 데 5만 원이었어요. 매일 프라자 CC에서 공을 칠 순 없었습니다. 각오를 다지고 직원 버스에 올라탄 기억이 나네요.

그렇게 골프에만 매진한 성과는 언제부터 나타났습니까.

딱 1년 걸렸어요. 1984년 세미 프로가 됐습니다. 이후엔 강사 일을 하면서 프로 골퍼 도전을 이어갔죠.

골프에만 매진하게 한 골프의 매력은 무엇이었습니까.

모든 스포츠는 경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축구를 보세요. 전쟁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스포츠입니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상대와 부딪치길 반복해요. 쓰러지면 곧바로 일어나서 다시 부딪치죠. 골프도 축구처럼 상대와 경쟁해서 우위를 점해야 하는 스포츠인 건 같습니다. 다만 미세한 차이가 있죠.

미세한 차이?

골프는 나만 흔들리지 않으면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나 자신과 싸움에서 이기면 상대와 경쟁에서 웃을 수 있는 거죠. 골프는 몸싸움이 없어요. 상대가 주는 변수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게 참 매력적이더라고. 내가 나를 이기면 정상에 설 수 있는 스포츠. 골프가 유일하지 않나요(웃음).

프로 무대에서 한두 번 우승한 게 아닙니다. 정신력 강화를 위한 훈련법이 있습니까.

기술을 익히는 것만큼 멘탈 훈련을 중요시했어요. 하루 30분에서 1시간은 꼭 자연과 함께했습니다.

자연과 함께한다?

골프장 주변에 나무로 우거진 길을 묵묵히 걸었습니다. 호흡을 가다듬고 그동안 준비해온 것들을 하나둘 떠올렸죠. 필드에서 일어날 일을 상상하기도 하고요. 어떤 상황에서든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게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매일 자연 속에서 멘탈을 바로잡은 게 18승이란 성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어요(웃음).

- “철학을 공부한 큰형님이 프로 골퍼 강욱순의 인생을 또 한 번 바꿨습니다” -

강욱순 프로는 서른이 넘어서야 프로 골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강욱순 프로는 서른이 넘어서야 프로 골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골프 시작 1년 만에 세미 프로가 됐습니다. 세미 프로에서 프로로 가는 데는 얼마나 걸렸습니까.

마음먹으면 금세 프로 자격을 획득할 줄 알았어요. 세상을 만만하게 봤죠(웃음). 세미 프로가 된 이후 방황을 했습니다. 골프에만 집중을 못 한 거예요. 군대까지 다녀오니 5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났죠. 시간은 날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걸 그때 처음 느꼈습니다. 전역 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시 골프채를 잡았어요.

프로 자격을 취득한 겁니까.

다시 골프에만 집중한 덕분에 1989년 KPGA 입회에 성공했죠. 문제는 이후였어요. 프로 골퍼로 이름을 알려야 하는데 쉽지가 않은 거야(웃음). 출전하는 대회마다 30위권을 맴돌았죠. 대회 경비 정도를 상금으로 받았어요. 코오롱과 계약을 맺지 않았다면 골프를 계속할 수 없었을 겁니다.

코오롱이요?

1989년 프로에 입문한 이후 코오롱과 계약을 맺었어요. 코오롱에서 가능성을 보고 제안을 했죠. 600만 원을 계약금으로 받았습니다. 이 돈을 아내에게 생활비로 주고 투어를 다녔어요. 대회에서 경비를 마련하고 일반인 레슨을 진행하면서 가장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족(아들)이 늘어나면서 부담이 점점 커졌어요. 우승을 차지하지 않는 한 생활비 마련이 쉽지 않았던 거지.

아.

우승 트로피를 내가 원한다고 해서 들 수 있나. 프로 입문 4년 차까지 뚜렷한 성과가 없었어요. 스트레스가 상당한 시기에 큰형님을 만났습니다. 큰형님은 철학을 공부했어요. 형님은 내 이름으로 사주를 봐줬습니다. 보통 사주는 재미로 본다고 하잖아요. 이 사주가 제 인생을 또 바꿨습니다.

어떤 사주였길래 인생을 바꾼 겁니까.

큰형님이 “서른 살 때부터 인생이 바뀐다”고 했어요. 당시 28살이었습니다. 서른까지 2년 남은 상태였죠. 프로 골퍼의 삶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니까 생각이 많았습니다. 20살 때부터 프로 골퍼의 길로 들어섰는데 포기할 순 없잖아요. 형님 말을 믿었습니다. ‘2년만 골프에 매진해보자’고 결심했죠.

사주가 이를 악물게 만든 거군요.

형님 말을 듣고 생각했어요. 냉정하게 지금처럼 해선 서른 후에도 내 삶이 바뀔 거 같지 않은 거야(웃음). 형님 말대로 내가 서른 살부터 풀릴 팔자라면 후회 없이 골프를 쳐보자고 생각한 겁니다. 단순히 열심히 하겠다는 게 아니었어요.

열심히 한다는 게 아니었다?

프로 골퍼는 대회마다 상금을 받습니다. 우승자만 상금을 획득하는 게 아니에요. 가정이 있는 선수들은 한 샷 한 샷이 돈입니다. 공격적으로 샷을 해야 할 때 주춤하는 이유죠. 무모한 선택이 한 타를 잃게 만들 수 있으니까. 28살 이전까진 나도 모르게 늘 안정을 추구했어요. 투어에서 최소한 경비는 벌어야 하니깐. 형님 말을 듣고 바뀐 겁니다.

필드에서 과감해진 거군요.

결과와 관계없이 생각대로 경기를 운영했어요. 공을 마음대로 쳐본 게 그때가 처음입니다. 이게 나를 KPGA 정상급 선수로 발돋움시켰죠. 2년간 컷오프 탈락을 여러 차례 경험했지만 실력은 확실히 좋아졌어요. 그렇게 경비에 대한 부담 없이 2년을 보내니 첫 우승에 다다르게 됐죠.

강욱순 프로는 1995년 첫 우승을 시작으로 총 18승을 기록했다(사진=한국프로골프협회)
강욱순 프로는 1995년 첫 우승을 시작으로 총 18승을 기록했다(사진=한국프로골프협회)

첫 우승은 언제였습니까.

골프 인생에서 잊지 못하는 순간입니다. 1995년 KPGA 투어 포카리일간스포츠오픈에서 정상에 올랐어요. KPGA 입회 6년 만에 일군 성과였죠. “무엇이든 처음이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번 우승의 맛을 보니 어떻게 해야 정상에 설 수 있는지 배웠어요. 같은 해 KPGA 챔피언시리즈에서도 정상에 올랐죠. 이른바 전성기가 시작된 겁니다(웃음).

1995년 2승을 거뒀습니다. 이듬해 골프계가 깜짝 놀랄 선택을 했어요. 국외로 눈을 돌려 아시아 투어에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큰 선수가 되고 싶었어요. 국외에 도전해서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그 경험이 프로 골퍼로 성장하는 데 큰 자양분이 될 것으로 확신했죠. 국외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1996년 APGA 상금 랭킹 1위를 차지했어요. 1996년 APGA 투어 토너먼트플레이어스챔피언십과 쿠알라룸푸오픈에서 정상에 오르면서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했죠(웃음).

1996년 아시아 투어에서의 성과에 힘입어 삼성과 손을 잡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시아 투어에서 성과를 내면서 삼성과 인연을 맺었죠(웃음). 1997년부터 삼성이 후원해주기 시작하면서 골프에만 더 매진할 수 있었어요. 삼성의 후원을 받으면서 17승을 기록했습니다. 평생 감사함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해요(웃음). 1999년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1999년부턴 고(故) 이건희 회장님의 개인 레슨을 맡았어요. 첫 레슨 이후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KPGA 코리안투어와 아시안투어에서 3주 연속 우승을 했어요. 골프 인생에서 가장 좋은 컨디션을 자랑할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KPGA에서 2승을 수확한 뒤 타이완 오픈에서 정상에 올랐죠. 바로 다음 대회였던 SBS 최강전에선 2위를 기록했습니다. 이건희 회장님은 좋은 기억을 많이 선물해주셨어요.

예를 들어줄 수 있습니까.

이건희 회장님과 하와이를 비롯한 미국을 자주 다녔어요. PGA 투어를 눈앞에서 지켜보며 아카데미 설립에 대한 꿈을 키울 수 있었죠. 삼성의 후원을 받지 못했다면 아카데미 설립은 꿈도 꾸지 못했을 거예요.

-“마흔 살 때부터 아카데미 설립을 꿈꾸기 시작했죠”-

강욱순 프로는 2017년 3월 17일 강욱순골프아카데미 in 안산을 오픈했다(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강욱순 프로는 2017년 3월 17일 강욱순골프아카데미 in 안산을 오픈했다(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아카데미 설립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2002년 한국 나이로 마흔이었습니다. 더 큰 무대에 도전할 마지막 기회로 판단했죠. 하와이에서 미국 진출을 논의했습니다. 주변에선 적극적으로 만류했어요.

만류했다?

편안하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놔두고 무모한 도전에 나서는 것처럼 보인 거죠(웃음). 제 생각은 확고했어요. 미국에서 성공하든 실패하든 ‘도전하지 않았다’는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미국 진출을 논의하면서 많은 아카데미를 돌아다녔어요. 충격을 받았죠.

이유가 있습니까.

당시 미국은 티칭 프로도 랭킹이 있었습니다. 10위 안에 드는 티칭 프로를 모조리 찾아다녔죠. 그들에게 레슨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배운 골프와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미국은 티칭 프로마다 색깔이 뚜렷했습니다.

색깔이 뚜렷하다?

아카데미마다 가르치는 법이 다른 거예요. 이런 겁니다. 한국은 선수에게 맞춰서 레슨을 진행해요. 선수가 원하는 상품을 만들어주죠. 미국은 선수가 어떤 스타일이든 맞추지 않습니다. 아카데미마다 다른 스윙을 가르치고 조언을 건네죠. 10개의 상품이 다 다른 거예요. 한 티칭가 제게 했던 말이 아직도 잊히질 않습니다.

어떤?

“한국 프로들은 스윙이 다 똑같다. 어떻게 붕어빵을 찍어내듯이 선수들 스윙이 똑같을 수가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그때서야 나에게 맞는 스윙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사람마다 딱 맞는 스윙이 있습니다. 같을 수가 없어요. 스윙에 맞추게 되면 동물적인 감각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러 스윙을 시도하면서 나에게 맞는 걸 찾아간다. 아주 당연한 걸 미국에서 깨달은 거예요.

미국 아카데미를 돌아보면서 제2의 삶을 구상했습니다. 미국 진출 도전은 어떻게 됐습니까.

70일 동안 미국 PGA(미국프로골프협회) 투어 퀄리파잉 스쿨에 도전했습니다. 70일 동안 얼마를 투자한 지 아세요?

얼마요?

7천만 원을 썼어요. 먹고 자고 이동하는 데만 돈을 썼는데 어마어마한 금액이 나왔죠(웃음). 22위를 기록하면서 PGA 출전권도 따내지 못했어요. 하지만, 후회는 없었습니다. 미국 골프 산업을 눈앞에서 지켜보며 많은 걸 배웠거든. 제2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었죠.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든 건 언제였습니까.

2008년 민자개발 투자사업 아이디어 공모에 기획서를 냈어요. 10개 전문기업과 경쟁에서 당당히 1위에 올랐죠. 사업권을 따낸 겁니다. 2만 3천 평 규모에 건물과 설비비만 약 300억 원이 들어갔어요. 프로 골퍼로 이룬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위험한 도전이기도 했죠. 딱 하나만 생각했어요.

딱 하나?

내가 눈으로 보고 느낀 선진화된 골프 교육 시스템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었어요.

2019년 9월 19일 경기꿈의학교 영어골프수료식. 강욱순 대표(사진 가운데)는 10대부터 90대까지 언제 어디서든 골프를 접할 환경을 만드는 데 앞장설 계획이다(사진=엠스플뉴스)
2019년 9월 19일 경기꿈의학교 영어골프수료식. 강욱순 대표(사진 가운데)는 10대부터 90대까지 언제 어디서든 골프를 접할 환경을 만드는 데 앞장설 계획이다(사진=엠스플뉴스)

제2의 강욱순 발굴에 나선 거군요.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경기도, 안산시 등과 협력해 초등학생들에게 골프를 접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 결과 매 학기 600명씩 1,200명의 학생이 아카데미를 찾았어요. 골프는 프로 골퍼를 꿈꾸는 학생들만 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야구나 축구처럼 골프가 누구든 쉽게 즐길 수 있는 스포츠로 자리 잡는 데 앞장서고 싶어요.

골프는 빠르게 대중 스포츠로 자리 잡아가고 있습니다.

이젠 어린 학생들이 즐길 수 있는 스포츠로 만들어야 해요. 2017년 취미로 골프채를 잡은 학생들이 프로 골퍼의 꿈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런 학생들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요. 꼭 프로 골퍼를 꿈꾸지 않아도 됩니다. 한 달에 한 번 주말이면 연습장에 나와 골프를 즐기는 친구들도 많아요.

골프가 대중 스포츠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비용 부담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경기도, 안산시 등과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 더 많은 학생과 지역 주민이 골프를 즐길 수 있게 함께할 수 있는 사업을 기획하고 있죠. 그래서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건강 골프입니다.

건강 골프요?

골프 방송을 보면 기술에 대한 얘기가 99%입니다. 타수를 줄이는 법에 대해서만 다뤄요. 골프가 장기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선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걸 증명해야 합니다. 100세 시대예요. 10대부터 90대까지 누구든 골프를 통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장래가 더 밝아질 수 있습니다. 골프의 가장 큰 매력이 뭔지 아세요?

뭡니까.

골프는 3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스포츠입니다. 필드에서 운동 효과를 극대화할 뿐 아니라 대화를 나누면서 관계까지 돈독히 할 수 있는 매력적인 스포츠죠.

프로 골퍼에 이어 사업가로 한국 골프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향후 어떤 골프인으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프로 골퍼에 만족하지 않고 골프 산업을 발전시킨 사람. 프로 골퍼를 꿈꾸는 후배들이 지금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운동할 수 있도록 도운 선배. 10대부터 90대까지 쉽게 골프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이바지한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해요. 아직 가야 할 길이 멉니다(웃음).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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