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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스플 레전드] 허정무 “마라도나·크루이프와 대결, 어떻게 잊겠어요”

  • 기사입력 2019.12.02 13:19:36   |   최종수정 2019.12.02 13: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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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무, 선수와 감독으로 한국 축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전설 중의 전설 

-중학교 졸업 후에야 정식으로 축구 시작, “축구로 먹고사는 사람이 있는지조차 몰랐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던 소년 “선배들에게 후배들이 맞아야 하는 이유를 물었다”

-“신세계였던 네덜란드, 그곳에서 축구를 다시 배웠다”

-“황금세대를 발굴한 게 지도자 생활의 가장 큰 보람”

 

한국프로축구연맹 허정무 부총재(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한국프로축구연맹 허정무 부총재(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

 

 우물 안의 한국축구에서 벗어나 '유럽축구'라는 망망대해에 뛰어든 개척자들이 있다. 차범근과 허정무다. 두 사람은 새의 양날개처럼 한국축구의 국제 진출을 이끌었다. 그 가운데 허정무는 반드시 공격수가 아니어도 한국축구인이 세계축구의 중심에서도 활약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선구자였다.” -청주 CITY  CITY FC 김현주 사장-

 

조그마한 골목에서 고무공을 차고 놀던 소년이 있었다. 중학교 졸업 전까지 축구 선수란 직업조차 몰랐다. 축구는 하나의 놀이일 뿐이었다. 

 

이 소년은 향후 한국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들을 남겼다. 1980년 네덜란드로 떠나 세계적인 선수들과 기량을 겨뤘고,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선 지도자로 원정 첫 16강 진출을 일궜다. 

 

한국프로축구연맹 허정무 부총재의 얘기다. 허 부총재는 중학교 졸업 후 1년을 쉬었다. 집안 사정으로 고등학교 진학이 어려웠던 까닭이다. 그때 축구와의 인연을 맺었다. 축구 선수로 성공하기 위해 중학교를 다시 갔고, 4년 만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뼈를 깎는 노력이 없었다면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허 부총재는 1980년 네덜란드 에레디비시 PSV 에인트호번 유니폼을 입고 세계 축구계의 전설 고(故) 요한 크루이프와 세 차례나 기량을 겨뤘다. 1986년엔 32년 만의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끌고 ‘축구의 신’ 디에고 마라도나와 맞섰다. 지도자가 된 뒤엔 박지성, 설기현, 김남일, 이천수, 이청용, 기성용 등 자신의 뒤를 잇는 전설을 여럿 발굴했다. 

 

허 부총재는 축구는 평생을 함께하는 동반자라고 말한다. 현재는 K리그1·2 경기를 챙겨보는 것은 물론이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와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등도 놓치지 않는다. 

 

엠스플뉴스가 허 부총재를 만났다. 허 부총재는 축구와 인연을 맺지 않았다면 농사꾼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축구를 통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일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보답하며 살고 싶다고 말한다.    

 

중학교 졸업 후 축구를 시작한 허정무 “축구 선수가 있다는 것도 몰랐지”

 

'1986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일본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터뜨리고 기뻐하는 허정무(사진 맨 오른쪽)(사진=대한축구협회)

'1986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일본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터뜨리고 기뻐하는 허정무(사진 맨 오른쪽)(사진=대한축구협회)

  

한국 축구 역사에서 선수와 감독, 행정가로 승승장구한 축구인은 흔하지 않습니다. 평생을 축구계에 몸담으면서 한국 축구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어요. 일생의 동반자인 축구와의 첫 인연은 어떻게 맺게 됐습니까.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진 축구 선수가 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습니다(웃음). 대중들은 일찍부터 축구를 시작한 선수로 기억하지만 사실이 아니에요. 얼토당토않은 인연으로 축구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선수 시절 왕성한 체력과 기술을 두루 갖춘 멀티 플레이어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기본기가 워낙 탄탄했던 까닭에 ‘축구를 일찍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내가 전라남도 진도군 출신입니다. 어릴 땐 사방이 논과 밭뿐이었죠. 축구 선수라는 직업조차 몰랐어요. 동네에서 친구들과 고무공을 차고 논 게 전부였죠(웃음). 운동신경은 좋았습니다. 학교 체육 대회나 운동회가 열리면 반 대표로 달리기, 높이 뛰기, 배구, 축구 등 다양한 종목의 선수로 뛰었어요. 정식으로 축구를 배운 건 목포중학교를 졸업한 뒤였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중학교 졸업 후 1년을 쉬었습니다. 고교 진학을 못 했죠. 내가 7남매 중 넷째입니다. 아버지께선 평생을 교육자로 지낸 교장 선생님이었어요. 집안 사정이 어려운 건 아니었죠. 하지만, 누나와 형이 대학 진학을 앞둔 시기였습니다. 동생들은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죠. 집에 여유가 생겼을 때 고교 진학을 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웃음).

 

축구를 하려고 쉰 건 아니군요. 

 

그때 쉬지 않았다면 축구랑 인연 맺을 일은 없었을 겁니다. 쉬고 있는 시기에 군 체육대회가 있었어요. 내가 살고 있던 의신면 의신중학교에서 ‘선수로 뛰어달라’는 연락을 받았죠. 지금은 ‘부정 선수’ 출전이 있어선 안 되지만, 그 당시엔 그런 일이 흔했어요. 부정 선수에 대한 인식이 없던 시절이죠. 딱히 하는 일이 없고 운동을 좋아하니까 큰 고민 없이 출전을 수락했습니다.

 

군 체육대회에서 눈에 띈 거군요. 

 

그곳에서 1960년대 한국 축구 대표팀 선수로 뛴 허윤정 선배의 눈에 띈 겁니다. 알고 보니 삼촌뻘 되는 친척이기도 했죠. 그분이 ‘서울에서 정식으로 축구해 볼 생각이 없냐’고 물어봤어요. 장학금까지 준다고 해서 솔깃했죠. 고교 진학을 못 한 상황인 까닭에 크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6개월 가까이 소식이 없는 겁니다. 

 

이유가 있었습니까.      

 

‘축구를 배워보겠다’는 답변을 주고 공 하나를 선물 받았습니다. ‘연락할 때까지 연습하고 있으라’고 했죠. 매일 집 앞 논·밭에서 연습했습니다. 그런데 연락이 안 오는 거야.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돼서야 소식이 왔죠. 1968년 한해는 푹 쉬고 이듬해 1월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게 됩니다. 

 

곧바로 축구부 생활을 시작했습니까.

 

그 당시 중동중·고등학교 축구부를 맡고 있던 고 유판순 감독께서 날 보고 딱 한 마디 했습니다. 키(153cm)가 작아서 안 된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죠. 그리고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어떤?

 

‘축구가 하고 싶으면 중학교를 다시 다니라’는 겁니다. '2학년으로 편입해서 2년간 기량을 갈고닦으라'고 했죠. 나나 아버지나 아무 말 못 했어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얘기니까. 장학금 받고 고교 진학할 생각에 들 떠 있었는데 막막했습니다. 

 

어떤 결정을 내렸습니까. 

 

고민 끝 아버지께 얘기했습니다. ‘딱 6개월만 도전해보겠다’고. ‘축구 선수가 안 되면 진도에서 농사지으며 살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1년을 쉰 뒤 중동중학교 2학년으로 편입하게 됩니다. 

 

1969년 1월 17일, 레전드의 길을 걷기 시작한 허정무

 

'2010 남아공 월드컵' 16강 진출에 성공한 뒤 기뻐하는 허정무 전 감독(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10 남아공 월드컵' 16강 진출에 성공한 뒤 기뻐하는 허정무 전 감독(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시작이 쉽지 않았습니다.

 

1969년 1월 17일을 잊지 못해요. 중동중학교 축구부에서 처음 운동한 날입니다. 이불 보따리 하나만 싸 들고 갔죠(웃음). 옛날 미아리 대지극장 뒤에 돌산이라고 있었어요.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서 다 없어졌지만, 그 당시엔 운동장이 있었죠. 그곳이 중동중·고등학교 연습장과 숙소였습니다. 

 

축구부에 처음 입소한 날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감정은 어땠습니까. 

 

눈이 어마어마하게 온 날이었어요. ‘무조건 성공한다’는 생각뿐이었죠. 유판순 감독께선 '고교 무대에서 주전으로 뛸 실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학비면제는 없다'고 했어요. 중학교 3학년이 아닌 2학년 편입을 제안한 것도 의지를 불타오르게 했죠. 감독께선 몸이 왜소해서 축구 선수는 어렵다고 본 겁니다. 그 판단이 틀렸다는 걸 꼭 증명하고 싶었어요.       

 

어릴 적 동네에서 볼을 많이 찼고, 군 체육대회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바 있습니다. 정식 축구부 생활은 어땠습니까. 

 

기본기부터 다졌죠. 드리블, 패스, 슈팅 등 하나하나 배웠습니다. 동네에서 볼을 차는 것과 정식 축구는 하늘과 땅 차이예요. 다른 선수들과 격차를 줄이기 위해 죽을힘을 다했습니다. 그해 겨울 발톱이 곪아서 빠진 것만 여러 차례였죠. 가로등 밑에서 드리블 연습하고, 줄넘기, 계단 뛰기를 반복했습니다. 새벽 3시 넘어서 숙소로 들어오는 일이 잦았죠. 당시 노력을 글로 써내면 책 한 권은 나올 겁니다(웃음). 

 

노력의 결실을 본 건 언제부터였습니까. 

 

운동 시작 두 달 만에 기회를 잡았습니다. 3월 첫 시합에서 주전으로 뛰었어요. 노력을 많이 했지만, 운도 따랐습니다. 당시 팀 선수가 나를 포함해 14명이 전부였어요. 경기를 앞두고 훈련을 하는데 오른쪽 측면 공격수로 뛰는 주전 선수가 감독 눈에 안 차는 겁니다. 그렇다고 대체 선수가 마땅한 건 아니었습니다. 후보가 3명뿐이잖아요(웃음). 감독께서 날 한번 보더니 ‘네가 한번 해봐라’고 했어요. 

 

그 경기가 축구 선수 허정무의 데뷔전이군요. 

 

운이 따랐다는 게 첫 경기 선발 출전에 이어 골까지 넣었습니다. 상대 진영에서 수비수가 볼을 걷어내려고 했는데 실패했어요. 공이 달려 들어간 내게 왔고 골대를 향해 드리블 친 뒤 슛을 때렸죠. 그게 들어갔어요. 

 

축구 시작 2개월 만에 주전으로 도약했습니다. 

 

유판순 감독께선 독한 훈련을 빼먹지 않고, 데뷔전에서 골까지 터뜨린 날 믿어줬어요. 그해 처음 출전한 대회 첫 경기 한양중전에서도 득점을 터뜨리면서 주전 경쟁에 쐐기를 박았죠(웃음). 

 

한국 축구의 미래로 불리는 이강인은 7살 때부터 이름을 알렸습니다. 대부분의 선수가 늦어도 초등학교 졸업 전엔 축구를 시작하죠. 하지만, 부총재께선 중학교 졸업 후 1년을 쉰 뒤 축구를 시작했어요. 그리고선 2개월 만에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노력도 대단했지만 타고난 천재로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볼을 다루는 감각은 타고난 것 같아요. 친구들과 조그마한 공간에서 볼을 찬 게 도움이 됐죠(웃음). 하지만, 죽을 각오로 연습한 시간이 없었다면 기회가 오지 않았을 겁니다. 축구를 늦게 시작한 만큼 다른 선수들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온 힘을 다했어요. 

 

지독한 개인 훈련으로 일찍 주전 자리를 확보했습니다. 축구를 하면서 힘든 건 없었습니까. 

 

훈련이 힘들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어요. 뚜렷한 목표가 있어 버틸 수 있었죠. 시합에 나가서 뛰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선·후배 관계와 같은 축구부 문화에 적응하는 게 힘들었어요. 그만두고 싶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선·후배 관계요?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엔 엄청나게 맞았습니다. 후배가 선배들 빨래하는 건 당연했고, 밤중에 라면을 끓여서 가져다주는 등 잔심부름도 많았죠. 당시 ‘선배는 하느님과 동격이다’ ‘선배의 말은 곧 법이다’란 걸 후배에게 복창하게 했습니다. 이유 없이 매일 맞다 보니까 ‘이렇게까지 축구를 해야 하나’란 생각을 많이 했죠.

 

아. 

 

훈련 중엔 이런 적도 있습니다. 일찍이 두각을 나타내다 보니까 선배들의 미움을 받았어요. 미니게임 하는데 골대 옆에 가만히 서 있으라고 한 적이 많았죠. 말 안 듣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후배들 집합시켜서 얼차려를 줬습니다. 회초리로 얼굴을 맞은 적도 있었죠. 결국 참다못해 한마디 했습니다. 

 

어떤? 

 

'이유나 좀 알자’고 했어요. 우리가 맞아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면 아무 말 하지 않겠다고 했죠. 

 

그 당시 분위기를 볼 때 큰 용기가 필요한 한 마디입니다.  

 

답답했어요. 선배와 후배 모두 축구 선수의 꿈을 품고 훈련하는 동료인데 왜 아무 이유 없이 맞아요. 그렇게 한 번 얘기하니까 바뀌었습니다. 

 

축구부 문화가 바뀐 겁니까.  

 

영등포공고에 다닐 때였어요. 실력이 눈에 띄게 좋아진 시기였죠. 선배들이 ‘쟤 뭐지’ 하면서 당황했을 겁니다. 그때까진 이런 일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감독께서 나를 예뻐했고, 전학이라도 가버리면 큰일 나니까 안 때리기 시작했죠. 동기와 후배들도 힘을 실어줬어요.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선·후배 문화를 바꿨던 기억이 납니다. 

 

어려운 일을 했습니다. 

 

맞는 건 물론이고 후배들 때리기도 싫었어요. 폭력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써선 안 되는 겁니다. 연세대 입학 후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똑같이 했어요. ‘왜 사람을 때리느냐. 이유나 좀 알자’고 했죠. 그 소문이 쫙 퍼지니까 선배들이 안 건드리더라고요(웃음).  

 

어릴 때부터 해야 할 말은 꼭 하는 성격이었습니까. 

 

그런 편이었죠. 하지만, 소문은 안 좋았어요. ‘바른말을 한다’보다 ‘성질 못된 놈’이란 말을 들었죠. ‘저 XX 건드리면 골치 아프니까 그냥 놔둬’란 얘기도 접했습니다(웃음). 후회는 안 해요. 사람을 때리는 건 잘못된 행동이고 있어선 안 될 일이니까.  

 

선·후배 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축구를 그만둘까 고민했던 적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때 축구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혼자 뒷산에 올라가서 펑펑 운 적이 많았어요. 짐 싸서 당장이라도 내려가고 싶었죠. 한편으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대로 물러나면 패배자일 뿐이다. 꼭 운동으로 너희들 위에 서겠다’고 다짐했죠. 마음을 독하게 먹고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이긴 게 선수 생활을 이어가게 했습니다.  

 

할 말 하는 허정무, 대표팀에서도 목소리를 내다

 

'1986 멕시코 월드컵'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 나선 허정무(사진 왼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1986 멕시코 월드컵'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 나선 허정무(사진 왼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고교 시절 축구계 문화를 바꿨습니다. 고교 시절은 순탄했습니까. 

 

축구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유판순 감독께서 영등포공고로 가게 됐어요. 학비와 식비 면제 조건을 내걸고 이적 제안을 했습니다(웃음). 따라갔죠. 영등포공고와 붙어있는 영도중에서 3학년을 마친 뒤 고교 생활을 했습니다. 고교 2학년 땐 처음 태극마크까지 달았어요. 

 

태극마크요?

 

지금으로 말하면 U-20 대표팀에 뽑힌 겁니다. 당시엔 청소년 대표팀이었죠. 고교 3학년 올라가든 해 3월엔 이란에서 열린 청소년 대회에서 뛰었어요. 가슴에 태극마크가 달린 걸 보면서 ‘축구하길 잘했다’ 싶었죠(웃음). 1974년엔 방콕 청소년 대회에도 출전했습니다. 그리고 연세대 1학년 말엔 A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어요. 축구를 시작한 지 6년 만에 이룬 성과였죠. 

 

한국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대표팀 생활은 어땠습니까.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축구 선수의 길을 걸을 거라곤 상상조차 안 해본 시골 소년이 태극마크를 달았습니다. 신기하고 감사했죠.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었어요. 

 

어떤?

 

지금은 도요타컵으로 불리는 재팬컵 1회 대회 때였습니다. 그때가 1978년이에요. 김재한, 차범근 선배와 같이 공격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메르데카컵, 박스컵, 아시아경기대회(방콕·북한과 공동 우승) 정상에 섰습니다. 자신감이 차 있을 때였죠. 재팬컵에선 브라질 축구 명문 SE 팔메이라스,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독일), 일본 2진과 한 조에 속했습니다. 

 

지금과 달리 프로팀과의 경기가 흔했었군요.

 

당시엔 A매치가 활성화되지 않았습니다. 국외의 유명한 팀을 초청해서 경기하는 게 흔했어요. 묀헨글라트바흐엔 덴마크 축구 영웅으로 분데스리가 3회 연속 우승 및 UEFA컵(현재의 챔피언스리그) 2회 우승을 이끈 알란 시몬센이 뛰었죠. 지금처럼 국제무대 경험이 풍부하거나 전술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빠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와의 수준 차이가 상당했습니다. 문제는 1차전 팔메이라스전에서 0-1로 지고 난 뒤 발생했죠.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두 번째 경기인 묀헨글라트바흐전을 앞두고 미팅을 했습니다. 우리도 상대처럼 윙백의 적극적인 공격 가담과 측면 공격수의 중앙 침투를 허락해달라고 요구했어요. 상대를 막는 데 급급했고, 포지션을 벗어난다는 걸 생각하지 못한 시절이었습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너희들이 쟤네하고 능력이 같아? 끝내’란 말을 들었죠(웃음). 축구계 풍토가 아쉬운 게 이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감독과 선수 사이에 토론 문화가 적어요. 아직도 ‘시키는 대로 하지 뭔 말이 많아’란 인식을 가진 지도자가 많습니다. 유럽은 감독과 선수가 싸우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치열하게 논쟁해요. 서로 머리를 맞대고 팀의 발전 방향을 찾는 거죠. 그래서 A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을 땐 이런 걸 했어요. 

 

어떤?

 

한 명씩 돌아가면서 5분 스피치를 했습니다. 처음엔 선수들이 입을 안 열어요. 선수들한테 '무슨 얘기든 좋다. 가족, 친구, 연애, 축구 아무 얘기나 해보라'고 했죠. 조금씩 나아지더라고요. 그러면서 미팅 시간에 자기 목소리를 내는 선수가 하나둘 생겨났죠. 어릴 때부터 토론 문화가 자리를 잡아야 한국 축구가 한 단계 올라설 수 있습니다. 돌아보면 이런 문화가 없는 게 아쉬웠어요. 

 

군 복무 마친 뒤 PSV 에인트호번 입단한 허정무 “크루이프와의 대결은 잊을 수 없지”

 

PSV 에인트호번 유니폼을 입고 요한 크루이프와 세 차례 대결을 벌인 허정무(사진 왼쪽)(사진=PSV 에인트호번)

PSV 에인트호번 유니폼을 입고 요한 크루이프와 세 차례 대결을 벌인 허정무(사진 왼쪽)(사진=PSV 에인트호번)

  

허정무 부총재께선 특이한 이력이 있습니다. 해병대 357기예요. 

 

해병대가 군 복무 기간이 30개월로 가장 짧았습니다(웃음). 교련 혜택까지 받아서 24개월 근무했죠. 우리 땐 육·해·공군 모두 축구팀이 있었어요. 막사 생활하면서 축구하는 거죠. 

 

군 시절은 어땠습니까. 

 

치열했죠. 해군엔 나를 포함해 조영증, 김강남, 박병철 등이 있었습니다. 공군엔 차범근, 장기문, 고 황재만 등이 버텼죠. 선수 구성은 육군이 가장 좋았습니다. 박성화, 김호곤, 박창선, 이영무, 조광래 등 초호화 멤버를 자랑했어요. 여기서 중요한 건 제가 군 복무하는 동안엔 육군과 공군에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웃음). 

 

군 시절 몸 관리에 철저했던 덕분일까요. 전역 후인 1980년 네덜란드 명문 PSV 에인트호번에 입단했습니다. 지금이야 손흥민, 황희찬, 이재성 등 유럽에서 뛰는 선수가 많지만, 당시엔 차범근을 제외하면 국외에서 뛰는 선수가 흔치 않았습니다. 

 

차범근 선배가 먼저 나갔죠. 1978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를 마치자마자 독일로 가서 테스트를 받았습니다. 차 선배가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면서 유럽 전역에 한국 선수에 관한 관심이 커졌어요. 구단에서 한국 교민에게 추천해줄 만한 선수가 없는지 여러 차례 물었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서 내 얘기가 나온 거죠. 

 

이적 과정은 어땠습니까. 

 

PSV와 분데스리가 소속 Vfl 보쿰, DSC 아르미니아 빌레펠트에서 초청장을 받았어요. 당시엔 에이전트나 통역이 없었습니다. 맨땅의 헤딩이었죠. 초청장도 당장 영입하겠다는 게 아니었어요. 

 

입단 테스트였습니까.  

 

훈련하는 걸 보고 계약을 결정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세계적인 선수들과 기량을 겨루고 싶은 마음에 고민하지 않고 한국을 떠났죠. PSV와 보쿰에선 한 번에 테스트를 통과했어요. 당장 계약을 하자고 얘기가 나왔죠. 두 군데서 계약 제의를 받는 바람에 빌레펠트는 가지도 못했어요(웃음). 

 

두 군데서 계약 요청을 받았습니다. PSV를 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가장 먼저 손을 내민 곳이었습니다. ‘계약하겠다’는 약속도 했고요. 하지만, 그때부터가 시작이었습니다. 언어와 문화 등 준비가 안 돼 있는 상태에서 네덜란드로 왔어요. 교민들 말고는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죠. 처음엔 너무 힘들었습니다. 

 

어떤 게 가장 힘들었습니까. 

 

감독을 포함한 코칭스태프, 선수들과 의사소통이 안 되니까 죽을 맛이었어요. 언어부터 공부했습니다. 영어로 된 기초 네덜란드어 책을 사다가 매일같이 봤죠. 지금처럼 한국어로 된 책을 구하기 어려울 때였어요. 네덜란드어 책이 흔하지도 않았죠. 4개월 죽자 살자 매달리니 아주 기본적인 회화가 가능해졌습니다. 

 

보통 의지력으론 안 되는 일입니다.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쌍방향 소통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출전 기회가 생겼어요. 이전까진 벤치에만 머물다가 주전으로 도약한 것이죠.  

 

1980년 PSV에 입단해 3시즌을 뛰었습니다. 그 당시 유럽 축구 수준은 어땠습니까. 

 

신세계였습니다. 지금처럼 유럽이나 남미팀과 경기하는 게 어려운 시절이었어요. 그 당시엔 유럽 아마추어팀을 초청해 친선 경기를 벌이면 지는 날이 많았죠. 유럽에서 뛰는 선수도 차범근 선배를 제외하면 없었습니다.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유럽은 한국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어떤 차이가 가장 컸습니까. 

 

훈련 방법부터 경기 운영 능력까지 모든 게 달랐어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아시아 무대에선 생각조차 못 한 패스가 있습니다. 지금은 공간으로 넣어주는 패스가 흔하지만, 당시 한국은 아니었어요. 선수가 있는 곳에만 패스를 연결하던 시절이죠. 네덜란드는 달랐습니다. 상대를 곤란하게 만드는 침투 패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어요.

 

성장하는 게 느껴졌습니까. 

 

아시아 무대에선 볼을 잡은 뒤 생각할 시간이 있었어요. 유럽에서 그랬다간 바로 빼앗깁니다. 볼을 받기 전에 다음 동작을 생각하고 바로 반응해야 해요. 축구를 새롭게 배우면서 성장한다는 게 느껴졌죠.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유럽 선수들은 키가 크고 다리가 깁니다. 이 강도로 볼을 찼을 때 정확히 전달되던 패스가 막히는 거예요. 드리블도 제쳤다 싶은데 걸립니다. 잔디도 달라요. 네덜란드는 습한 날씨가 많은 까닭에 잔디가 항상 축축해요. 패스 속도, 드리블할 때의 감각 등이 다르니까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1982-1983시즌엔 리그 준우승에 이바지했습니다. 3시즌 동안 77경기에서 뛰며 11골을 넣었어요.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던 것을 고려하면 대단한 기록입니다. 

 

축구를 처음 시작한 날부터 유니폼을 벗을 때까지 하루를 의미 없이 보낸 적이 없습니다. 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했어요. 1983년엔 구단에서 2년 계약 연장을 제안했죠. 2년 더 뛰면 네덜란드 시민권까지 주겠다고 했어요. 

 

네덜란드에 남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까. 

 

어머니, 아버지께서 '이제는 같이 살자'고 했습니다(웃음). 한국에 프로축구가 생기기도 했죠. 당시 네덜란드 언론에선 ‘허정무가 향수병에 걸려 팀을 떠난다’고 대서특필했어요. 감사하죠. 처음부터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조금씩 기회를 잡았고 선진 축구를 알게 해준 곳이니까. 네덜란드는 항상 세계 축구의 선구자 역할을 해왔어요.     

 

선구자요?

 

네덜란드는 현대 축구의 근간인 ‘토탈 풋볼’을 창시한 팀입니다. 리누스 미셸 감독과 그라운드 위의 지휘자 요한 크루이프를 앞세워서 세계 축구를 호령했죠. ‘1974 서독 월드컵’과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2연속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포지션을 파괴한 축구로 세계 축구 역사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대중에게 익숙한 루이스 반할 감독 아시죠?

 

한국에선 네덜란드 축구 대표팀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전 감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할 감독의 축구를 보면서 지도자 생활의 기반을 닦았어요. 네덜란드 명문 AFC 아약스(1991~1997) 지휘봉을 잡고 있을 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적(1995년)이 있습니다. 당시 반할 감독이 사용했던 포메이션이 3-4-3이에요. 수비수가 세 명인데 아주 공격적인 축구를 구사했죠. 측면 윙백의 적극적인 공격 가담과 쉴 새 없는 스위칭 플레이로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그걸 보고 '2000 시드니 올림픽' 때 3-4-3 포메이션을 사용했어요. 

 

지금도 네덜란드에서 배워야 할 게 많습니까.

 

네덜란드 인구가 1,700만입니다. 당시엔 1,400만이었어요. 그런 팀이 월드컵이나 유럽선수권대회에 출전하면 항상 우승을 다툽니다. 아르연 로번, 웨슬리 스네이더, 로빈 판 페르시 등 황금세대가 떠난 현재도 다르지 않죠. 유로 2020 예선에서 독일을 2위로 밀어내고 단독 선두를 질주 중입니다. 당연히 배워야죠. 

 

네덜란드에서 3시즌 간 뛰면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그 가운데 잊지 못하는 경기가 있습니까. 

 

대중들이 아르헨티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와의 대결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겐 잊지 못할 대결이 또 있어요. ‘토탈 풋볼’을 구현하는 데 앞장선 크루이프와의 대결입니다. 네덜란드에서 뛰면서 총 세 차례 기량을 겨뤘죠. 

 

크루이프는 세계 축구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전설입니다. 네덜란드 리그에서의 대결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궁금합니다. 

 

마라도나와의 대결은 월드컵이란 큰 무대였던 까닭에 TV로 지켜볼 수 있었죠. 하지만, 내가 네덜란드 리그에서 뛰던 때는 TV 중계란 걸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현지에 파견된 특파원도 없었죠. 당시 크루이프는 은퇴를 앞두고 아약스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던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세요. 

 

축구를 정말 잘했습니다. 볼 컨트롤, 패스, 시야 등 괜히 축구의 신으로 불리는 게 아니구나 싶었죠. 처음 아약스와의 경기를 앞두고 감독이 제게 물었습니다. ‘우리 팀엔 크루이프를 밀착 마크할 만한 선수가 없다. 네가 해볼 수 있겠느냐’고. 바로 ‘오케이’하고 다짐했죠. 오늘은 크루이프의 그림자가 되겠다.  

 

어떻게 됐습니까. 

 

크루이프는 전반전을 마친 뒤 교체로 물러났습니다. 경기에서도 우리 팀이 승리했죠. 경기 시작부터 끈질기게 따라붙은 게 효과를 봤어요. 하지만, 두 번째 대결에선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승부를 가로막았습니다. 

 

어떤 변수였습니까. 

 

경기 중 크루이프의 팔꿈치에 맞아서 실려 나왔어요. 왼쪽 눈을 정통으로 맞아서 뛸 수가 없었죠. 솔직히 레드카드를 꺼내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심판이 못 봤다는 겁니다(웃음). 여기서 재밌는 건 그 경기에서 실려 나오던 모습이 네덜란드 언론에 대서특필됐습니다. 유럽 전역에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됐죠. 지금도 네덜란드에 가면 ‘융무 후’라고 부르면서 크루이프 얘길 하곤 해요. 

 

세 번째 만남은 어땠습니까. 

 

경기 전에 감독께서 ‘오늘은 크루이프를 따라다니지 마라’고 했습니다. 이전 아약스와의 대결에선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공격에 중점을 뒀죠. 컵대회 준결승이었는데 연장(3-3) 혈투 끝 페널티킥에서 아깝게 졌습니다. 

 

1986년 유니폼을 벗은 허정무 “가끔 선수 생활을 더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한국프로축구연맹 허정무 부총재(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한국프로축구연맹 허정무 부총재(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한국 축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선수지만 월드컵은 딱 한 번(1986) 뛰었습니다. 

 

‘1954 스위스 월드컵’ 이후 32년 만에 밟아 본 본선이었습니다. 16강 진출보단 경험에 초점을 맞췄죠. 당시 한국은 큰 경기 경험이 없었어요. 차범근, 이태호, 최순호, 박창선, 조광래 등 멤버는 좋았지만 한계가 뚜렷했죠. 하지만,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1-3), 불가리아(1-1), 이탈리아(2-3)를 상대로 선전했습니다. 경험만 있었다면 더 좋은 결과를 내지 않았을까 싶죠. 

 

경험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그 당시 국외에서 뛰어본 선수는 딱 세 명이었어요. 나를 포함해 차범근(독일), 조영증(미국) 뿐이었죠. 나머진 다 한국에서 뛰었습니다. A매치를 말레이시아나 태국,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팀과만 할 때에요. 월드컵이나 올림픽 예선에서 이스라엘이나 호주를 만나면 이기지 못한 시절이죠. 1986년엔 운도 많이 따랐어요.   

 

운이요?

 

예선에서 중동과 이스라엘, 호주를 모두 피했습니다. 상당히 좋은 기회였죠. 고비가 없었던 건 아니에요. 조별리그 말레이시아 원정에서 패한 겁니다. 그 결과로 고 문정식 감독이 경질되고 김정남 코치가 지휘봉을 잡았죠. 

 

말레이시아 원정 패배는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홈에서 말레이시아를 잡았습니다. 우리와 한 조에 속한 네팔은 말레이시아 원정에서 무승부를 거두는 성과를 내줬죠. 그리고 만난 게 일본입니다. 홈&어웨이를 다 이기고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했어요(웃음). 

 

그해 몸 상태가 아주 좋았습니다. 그런데 월드컵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월드컵을 다녀오고 ‘1986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해 금메달을 땄어요. 제가 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이 두 개(1978·1986)입니다. 출전한 대회마다 정상에 올랐죠. 그리고 울산 현대에서 시즌을 마친 뒤 유니폼을 벗었습니다. 솔직히 더 뛰고 싶었고 몸 상태도 좋았어요. 

 

그런데 왜 은퇴를 선택했습니까. 

 

팀에 자리가 없다면 이적을 시켜달라고 구단에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구단이 왕인 시절이었어요(웃음). 몇 차례 이적을 요청하다가 지쳐서 ‘그럼 그만두겠다’고 했습니다. 최소 2년 이상은 더 뛸 수 있는 몸 상태였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았죠. 월드컵과 아시아경기대회를 아무런 문제 없이 소화했는데...    

 

명장 허정무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주역을 만든 게 가장 큰 보람”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한국 축구 대표팀을 이끌었던 허정무 전 감독(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한국 축구 대표팀을 이끌었던 허정무 전 감독(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허정무 부총재께선 지도자로서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선 첫 원정 16강이란 성과를 냈어요. 

 

지도자 생활을 쭉 돌아보면 '2000 시드니 올림픽'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당시 ‘2002 한-일 월드컵’을 겨냥하고 올림픽을 준비했습니다. 1998년부터 팀을 맡았는데 이동국을 제외하면 전부 대학생이었어요. 축구계에선 ‘역대 최약체’란 말을 쏟아냈죠. 하지만, 성장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빨랐습니다. 보람이 많았어요. 

 

보람이요?

 

선수들이 무언가 하나를 가르쳐주면 받아들이는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경기를 치를수록 성장하는 게 눈에 보였죠. 이동국을 제외한 선수 전원이 대학생 신분인 까닭에 훈련할 시간도 많았습니다. 이대로만 가면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큰 성과를 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죠. 내가 참 순진했습니다. 

 

순진했다?  

 

축구계 풍토를 몰랐던 겁니다. 처음 대표팀을 맡을 때 2002 한-일 월드컵까지로 계약했습니다. 당연히 장기 계획을 짰죠. 16강 진출을 위해선 유럽을 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체력과 기술향상에 집중했습니다. 솔직히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의 성과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비 에르난데스가 이끌던 스페인에 0-3으로 졌지만, 모로코(1-0), 칠레(1-0)를 이겼어요. 골득실에서 밀려 다음 라운드 진출에 실패했지만, 잘 싸웠습니다. 

 

월드컵 다음으로 큰 대회인 올림픽에서 2승 1패를 기록했다는 건 훌륭한 성과입니다.    

 

당시엔 분위기가 달랐어요. ‘조별리그 탈락’이란 결과만 봤죠. 그래서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2000 레바논 아시안컵’이 코앞이고 계약대로 ‘2002년 한-일 월드컵’까지 가자고 해서 고민 끝 지휘봉을 내려놓지 않았죠. 그때 가장 아쉬운 건 아시안컵에서의 선수단 운영이었어요. 

 

선수단 운영이요?

 

축구계 풍토를 알게 되면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전처럼 젊은 선수 위주로 가야 하는지 베테랑을 포함해 최정예 전력을 짜야 하는지 생각이 많았죠. 결론을 못 내렸어요. 어정쩡하게 멤버를 섞어서 대회에 나갔습니다. 과감하게 올림픽 대표팀 선수들로 아시안컵에 나갔으면 어땠을까 아쉬워요. 

 

‘2000 레바논 아시안컵’에서도 3위라는 준수한 성적을 냈습니다. 

 

축구계는 ‘우승에 실패했다’는 결과만 봤죠. 1996년 대회에서 2-6 대패를 당했던 이란을 8강전(2-1)에서 꺾었지만 소용없었어요. 이란과 연장 혈투를 치른 뒤 만난 사우디아라비아전에서 1-2로 패한 것만 기억했죠. 

 

올림픽과 아시안컵을 치르면서 한국 축구를 이끌어갈 인재들을 발굴했습니다.

 

그 당시 제 밑에서 성장한 선수들이 2002년에 성과를 냈어요. 거스 히딩크 감독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추천 명단을 넘겨줬습니다. 거기에 박지성, 이영표, 송종국, 김남일, 설기현, 이천수, 최태욱 등이 들어있었죠. 박지성, 이영표, 김남일은 ‘2010 남아공 월드컵’ 16강 진출에도 앞장섰어요.    

 

지도자 생활 최대 업적인 ‘2010 남아공 월드컵’은 축구 인생에 어떤 의미로 남아있습니까.

 

축구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죠. 솔직히 ‘더 잘할 수 있었다’는 아쉬움도 남아요. 우루과이와의 16강전은 정말 이길 수 있는 경기였습니다. 내용에서 밀렸으면 후회가 남지 않을 텐데 경기를 잘하고 패했어요. 

 

2010년 대회에서도 이청용, 기성용 등 어린 선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세대교체를 이뤄냈습니다. 16강 못잖은 큰 성과였어요. 

 

대표팀에 젊은 선수가 늘어나야 미래가 있습니다. 이청용, 기성용을 ‘2010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부터 주전으로 활용했어요. 당시 말이 많았죠. 이 중요한 경기에 경험이 부족한 선수를 왜 쓰느냐는 얘길 많이 들었습니다. 개의치 않았어요. 한국 축구가 발전하려면 경기를 거듭할수록 성장하는 게 눈에 보이는 선수가 많아져야 합니다. 

 

현재 한국프로축구연맹 부총재로 축구 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선수, 감독, 행정가로서 이룬 게 많습니다. 앞으로 더 이루고 싶은 꿈이 있습니까. 

 

누군가에게 큰 꿈일 수 있는 걸 많이 이뤘습니다. 아주 감사하죠. 가끔 중학교 졸업 후 1년을 쉬던 허정무가 축구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생각해요. 아마 농사를 짓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웃음). 축구를 통해 이름을 알리고 큰 사랑을 받았어요. 남은 축구인의 삶은 돌려주는 데 주력하고 싶습니다. 

 

돌려준다?

 

팬들에게 받은 사랑을 축구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돌려줘야죠. 유소년 축구에 관심이 많습니다. 어린 친구들이 축구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고 싶어요. 결과에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뛰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면 ‘제2의 손흥민’이 늘어날 것으로 믿습니다. 

 

지휘봉을 잡은 허정무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팬이 많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장 복귀에 대한 욕심이 있었어요. 이제야 축구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현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현재 K리그 지도자 모두가 제자들이에요. 이제는 뒤에서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힘쓰는 게 나에게 준 역할이 아닌가 싶습니다(웃음). 

 

[다음편에서 계속]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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