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진, 2003년부터 2008년까지 한국 축구 대표팀 최전방 책임진 ‘스트라이커’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시작한 축구, ‘잘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연세대 대신 수원 택한 조재진 “지금까지 한 건 ‘공놀이’란 걸 느꼈다”

-“뉴캐슬 입단 무산은 축구 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순간”

-“지금도 축구와 함께할 때가 가장 행복해. 죽을 때까지 축구계에 종사하는 게 꿈”

2003년부터 2008년까지 한국 축구 대표팀 최전방을 책임진 조재진(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2003년부터 2008년까지 한국 축구 대표팀 최전방을 책임진 조재진(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남양주]

상대 수비를 등지면 어떤 볼이든 잡아냈다. 세계적인 수비수와 공중볼 경합에서도 밀리는 법이 없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과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선 그의 헤딩 능력에 온 국민이 열광했다. 2003년부터 2008년까지 한국 축구 대표팀의 최전방을 책임진 조재진의 얘기다.

조재진은 이동국, 안정환 등 당대 최고의 스트라이커와 경쟁을 펼치며 10년 이상 한국 축구를 이끌어갈 재목으로 불렸다. 하지만, 조재진은 29살의 어린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선수 시절 내내 괴롭힌 고관절 이형성증(고관절의 선천성, 발달성 형성 이상증)을 이겨내지 못했다.

조재진이 선수 인생에서 가장 아쉬워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뉴캐슬 유나이티드 이적 무산도 고관절 이형성증이 원인이었다. 하지만, 조재진은 평생을 함께한 축구라며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축구와 함께하는 게 여전히 행복하다고 말한다.

엠스플뉴스가 2018년 말부터 유소년 축구 사업에 집중하고 있는 ‘조재진 축구교실’ 조재진 대표(총감독)를 만났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조기축구회’에 나간 어린이, 축구선수의 길로 들어서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프랑스전에서 에릭 아비달(사진 왼쪽)과 볼 경합 중인 조재진(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06년 독일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프랑스전에서 에릭 아비달(사진 왼쪽)과 볼 경합 중인 조재진(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작은 황새(리틀 황선홍)’란 별명에서 알 수 있듯 조재진은 한국의 스트라이커 계보를 잇는 선수였습니다. 인생의 동반자인 축구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습니까.

경기도 파주가 고향입니다. 집 근처에 있는 자그마한 오락실을 빼면 친구들과 재미난 시간을 보낼 공간이 없었어요. 축구공이 최고의 친구가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죠(웃음). 아버지께서 ‘친구들하고 뛰어놀아’라고 하시면서 축구공을 선물해 주신 게 축구와의 첫 만남입니다.

친구들과 즐길 거리가 마땅치 않은 환경이 조재진을 축구의 길로 인도한 거군요.

친구들하고 모여서 할 수 있는 게 공놀이밖에 없었습니다. 운동장에서 정신없이 뛰어다는 게 일상이었죠. 공 하나로 친구들과 하나 돼 시간을 보낸다는 게 좋았습니다.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죠. 그렇게 축구에 푹 빠져든 것 같아요.

뛰어놀다가 축구 선수의 길을 걷게 된 겁니까.

내가 아버지 피를 제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축구를 아주 좋아하세요. 매일 새벽 6시에 조기 축구회를 나가셨죠.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볼 차는 걸 좋아했고, 아버지를 따라나선 적이 많았죠. 7살 소년이 오전 6시에 일어나 조기 축구회에 나간 겁니다(웃음).

7살 소년이 조기 축구회에 나가서 할 수 있는 게 있습니까.

직접 뛰는 것뿐 아니라 보는 것도 재밌었어요. 어른들이 축구하는 걸 보면서 이것저것 따라 했죠. 조기축구회엔 축구공이 많습니다. 옆에서 혼자 연습한 거예요. 당시 초등학교 축구부 감독이 한분 계셨는데 축구 열정이 보통 아닌 소년을 눈여겨본 겁니다. 그분께서 아버지께 ‘(조)재진이 축구한 번 시켜보시죠’라고 한 게 시작이었죠. 초등학교 입학하자마자 축구부에 들었습니다.

한국 프로축구 선수들은 보통 초등학교 입학 후 축구부에 들어갑니다. 축구를 정식으로 시작한 시기가 아주 빨랐습니다.

‘축구에 미쳤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아요. 솔직히 동네에서 친구들과 놀이로 접하는 축구와 정식 운동부 생활은 차이가 큽니다. 운동량이 보통 아니고 규율도 엄격하죠. 하지만, 내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뿐이었어요. ‘누구보다 열심히 해서 고학년 형들처럼 축구를 잘하고 싶다’는 것.

괜히 새벽 6시에 일어나 조기 축구회에 나간 게 아니네요. 축구 열정이 일찍부터 대단했습니다.

학창 시절엔 밥 먹고 축구만 했죠(웃음). 하지만,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까지 키가 작아서 미드필더를 봤어요. 165cm를 갓 넘었죠. 부모님께서도 걱정이 컸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형제분들 가운데 왜소하신 분이 한 분씩 있어요. 부모님께선 그 당시를 떠올리면 ‘네 성장이 멈춘 건 아닐까 걱정돼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았다’고 하세요(웃음).

대중이 알고 있는 조재진은 186cm의 건장한 체격을 갖춘 정통 스트라이커입니다.

중학교 3학년 때 놀라운 일이 생겼죠(웃음). 운동 중 왼쪽 어깨를 크게 다쳐서 3개월을 아무것도 안 하며 쉬었습니다. 10cm가 확 자랐죠. 그리고선 복귀했는데 이번엔 반대쪽 어깨가 부러진 거예요. 그땐 6개월을 쉬었습니다. 신기한 건 키가 또(10cm) 크더라고요. 1년 가까이 쉬면서 신체능력을 향상시켰습니다(웃음).

신체능력이 좋아지면서 미드필더에서 스트라이커로 변신하게 된 거군요.

고등학교 진학 후 스트라이커로 포지션을 바꿨습니다. 하지만, 짧은 기간 키가 확 자라면서 몸 밸런스가 안 맞는 문제가 생겼어요. 키가 콩나물처럼 쑥 크고 몸은 빼빼 마른 체형이었죠. 그때부터 웨이트 트레이닝을 엄청나게 했습니다. 최기봉 감독께서 근력 보강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죠. 매우 힘들었습니다(웃음).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왜소한 체격 때문에 미드필더를 보다가 남부럽지 않은 체격 조건을 갖추면서 스트라이커로 변신했습니다. 축구계엔 ‘우월한 신체조건이 필수이냐 아니냐’를 두고 다양한 의견이 존재합니다. 대표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특정 포지션에선 신체조건이 좋은 게 유리하다고 봅니다. 골키퍼, 중앙 수비수, 스트라이커가 그 예죠. 키 큰 골키퍼는 큰 키를 공중볼을 안정적으로 처리하는 데 아주 유리해요. 건장한 체격의 중앙 수비수는 상대와의 몸싸움과 세트피스 수비에 강점이 있죠. 스트라이커 역시 전술의 다양성을 더할 수 있습니다. 전방에 체격 좋은 선수가 있으면 상대 수비의 부담이 커요. 우리팀 동료를 활용하는 데 유리하고요.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근력을 보강한 뒤부터 전성기가 시작된 겁니까.

학창 시절엔 축구를 특출 나게 잘한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전국대회에 나가면 나보다 잘하는 선수가 차고 넘쳤죠. 말 그대로 운동만 했습니다. 팀원들은 주중 합숙을 마치고 주말엔 무조건 집에 가서 휴식을 취했어요. 나는 집에 안 갔습니다. 학교에 남아서 개인훈련을 했죠. ‘지금보다 축구를 훨씬 잘하고 싶다’는 생각만 했어요.

2000년 연세대 대신 수원에 입단한 조재진 “첫 훈련에서 ‘지금까지 했던 건 공놀이’란 걸 느꼈다”

J리그 시미즈 S펄스 시절 조재진(사진 가운데)(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J리그 시미즈 S펄스 시절 조재진(사진 가운데)(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겸손한 말씀입니다. 조재진은 고교 졸업 후인 2000년, 2연속 K리그 정상에 오르며 황금기를 구가한 수원 삼성에 입단했습니다.

우리 학교(대신고)가 수원 삼성의 지원을 받는 연고 팀이었습니다. 수원은 대신고와 통진고, 수원공고에서 우선지명권을 활용해 각각 1~3명을 뽑을 수 있었죠. 개인적으론 연세대학교 진학을 원했고 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고교 졸업 후 프로로 직행하는 게 흔치 않은 시기였고요. 하지만, 내가 수원행을 거부하면 모교에 지원되는 후원금이 끊기는 상황이었습니다.

아.

그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프로 입단 후 생각이 바뀌었죠. 학생선수는 프로축구 선수가 되는 게 목표입니다. 한국의 가장 수준 높은 리그를 빨리 경험한 게 큰 도움이 됐어요. 당장 주전으로 뛸 순 없었지만, 차원이 다른 수준의 선수들과 훈련하면서 배운 게 아주 많았죠.

프로는 어떻게 달랐습니까.

첫 훈련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내가 했던 건 공놀이였구나’란 생각이 들었죠(웃음). 선수들이 공을 주고받는 속도부터 다른 거예요. 당시 수원 지휘봉을 잡은 김 호 감독께선 실전보다 강한 훈련으로 유명했습니다.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죠.

데뷔 시즌에 리그 5경기를 뛰었습니다. 이듬해(2001)엔 3경기를 소화했죠. 수원이 역대 최고의 공격 조합으로 꼽는 ‘고데로 트리오(고종수-데니스-산드로)’가 뛰던 시절입니다. 치열한 주전 경쟁이 큰 고민으로 다가오진 않았습니까.

수원 입단 후 많이 못 뛴 이유 중엔 부상이 있습니다. 고교 때부터 무릎 뼈(슬개골)가 좋지 않았어요. 그 상태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했습니다. 몸 상태가 악화됐죠. 한 번은 공중 볼 경합 후 착지하는 데 ‘아차’ 싶었습니다. 병원에서 ‘무릎 뼈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죠. 일본에서 수술하고 재활에 몰두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참 어려웠어요.

어려웠다?

정상적인 몸 상태에서 온 힘을 다해도 출전 기회를 잡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 결심했죠.

어떤?

김 호 감독께 ‘일찍이 병역을 해결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어요. 수원에서 조커로도 활용되지 못했던 만큼 병역을 해결하는 게 선수 생활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감독께서 흔쾌히 동의해주셨죠.

그때가 20살이었습니다. 유망한 프로축구 선수가 이른 나이에 병역을 해결하는 시대가 아니었어요.

‘축구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어요. 뛰고 싶었습니다. 상무 1년 차 땐 아마추어 대회를 나갔어요. 프로선수로 구성된 상무인 까닭에 적수가 없었죠. 이듬해(2003년)엔 광주 상무(상주 상무의 전신)가 K리그 참가를 확정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K리그 31경기(3골 3도움)를 뛰었죠. 프로 무대에서 주전 스트라이커로 뛰면서 성장하는 게 느껴졌어요.

상무에 몸담은 2년 가운데 절반은 실업팀, 나머진 프로팀을 상대했습니다. 대표께선 ‘프로에서 뛴 1년 동안 성장하는 게 느껴졌다’고 했죠. 상대가 실업일 때와 프로일 때,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 겁니까.

실업팀과의 경기에선 생각한 대로 플레이했습니다. 수비 위치를 파악한 후 볼을 잡고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는 데 문제가 없었어요. K리그 팀을 상대할 때도 공이 오기 전 수비 위치를 파악하고 볼을 받죠. 여기서부터 다릅니다. 머릿속에 그려놓은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는 게 쉽지 않아요. 공이 내 발에 닿는 순간 두세 명이 달라붙습니다. 속도와 힘에서 매우 큰 차이가 있어요.

그런 무대(K리그)에서 경쟁력을 증명했어요. 한국 U-23 축구 대표팀 김호곤 전 감독의 눈도 사로잡았습니다.

올림픽 대표팀 코칭스태프와 첫 만남을 기억합니다. 지방 프로팀과의 연습경기였죠. 경기 전 코치께서 넌지시 말씀해주셨어요. ‘올림픽 대표팀 코칭스태프가 현장에 온다. 평소보다 더 열심히 해보라’고. 죽자 살자 했죠(웃음). 그 경기에서 멀티골을 넣었습니다. 처음 좋은 인상을 남긴 게 올림픽 출전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편할 줄 알았던 J리그, K리그보다 많은 훈련량에 매우 힘들었다”

조재진은 2004년 7월부터 2007년까지 J리그 시미즈 S펄스 유니폼을 입고 101경기에 출전해 45골을 기록했다(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조재진은 2004년 7월부터 2007년까지 J리그 시미즈 S펄스 유니폼을 입고 101경기에 출전해 45골을 기록했다(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축구계는 ‘조재진의 축구인생 황금기는 J리그에서 뛸 때’라고 말합니다. 시미즈 S펄스(2004. 07~2007)에서 통산 101경기 45골을 기록했어요.

K리그와 J리그는 많은 게 달랐습니다. K리그는 맨투맨 수비를 우선시했어요. 필드 플레이어 10명의 선수는 각자 맡아야 할 이가 정해져 있었죠. 수비 대형은 스리백이나 파이브백이었습니다. J리그에선 대다수 팀이 포백을 썼어요. 체력 소모가 큰 맨투맨 대신 지역 방어를 사용했고요.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 겁니까.

K리그에서 뛸 땐 나를 전담하는 수비수 한 명만 제치면 득점 기회였습니다. J리그는 아니었어요. 한 명을 따돌리면 곧바로 협동 수비가 들어왔죠. 처음엔 K리그와 다른 수비 스타일에 적응하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J리그 적응을 마치고 나서 ‘승승장구’ 하지 않았습니까.

많은 분이 알고 계신 것보다 힘든 게 많았습니다. 일본에 처음 와서 깜짝 놀랐어요. 솔직히 J리그로 이적하면 K리그에 있을 때보다 편할 줄 알았죠. 훈련량이 줄고 자유로운 팀 분위기에서 운동할 줄 알았습니다.

그게 아니었다?

시즌 중 훈련량이 엄청나게 많은 거예요. 매우 힘들었습니다. ‘이대로 하다간 부상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어떻게 했습니까.

감독, 코치와 계속해서 얘기했어요. 의견 차가 커서 다툰 적도 있지만, 코칭스태프가 나를 배려해줬습니다. 팀 훈련이 큰 부담으로 다가오면, 개별 훈련을 할 수 있게 해 줬어요.

코칭스태프가 조재진을 배려한 건 철저한 자기 관리와 실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J리그에서 뛰며 ‘K리그와 다르다’고 느낀 게 또 있습니까.

J리그 관중을 유심히 보면 아줌마, 아저씨가 중심입니다. 그게 ‘가족’ 중심 응원 문화로 이어지죠. 아버지, 어머니, 아이가 손을 잡고 경기장을 찾는 거예요. 반면 K리그엔 가족보다 학생이 많습니다. 훈련장을 찾는 것도 ‘오빠부대’라고 불리는 여고생들이죠.

J리그 관중의 중심이 ‘중장년층’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J리그는 중장년층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은 겁니까.

스타플레이어죠. 1993년 출범한 J리그는 ‘하얀 펠레’ 지코, 카를로스 둥가, 스토이코비치 등 세계적인 스타를 영입해 대중의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2010년대엔 디에고 포를란, 페르난도 토레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등이 J리그를 누볐습니다. 이니에스타는 2020년 ACL 무대에도 데뷔하죠.

세계적인 스타 영입은 ‘반짝 효과’를 내는데 그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결국 팬을 끌어 모으기 위해선 ‘내국인 스타’가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내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 영입은 눈에 보이지 않는 효과를 불러옵니다. 스타플레이어와 한 팀에서 뛰면 배우는 게 아주 많아요. 훈련 자세나 기술 등을 전수받을 수 있죠. 생활 태도나 몸 관리 법 등도 배울 수 있습니다. 내국인 선수들의 성장과 새로운 스타 탄생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거죠. 또 있습니다.

어떤?

세계적인 스타가 합류하면 새로운 스폰서가 붙습니다. 경기장엔 관중이 늘어나죠. 한 선수가 그라운드 안팎에서 미치는 영향력이 아주 큽니다.

J리그에서 뛰며 함께한 선수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선수는 누구입니까.

J리그가 출범한 1993년 신인왕을 받은 사와노보리 마사아키입니다. 1992년부터 2005년까지 시미즈에서만 뛴 프랜차이즈 스타죠. 일본 축구 대표팀에서도 16경기를 뛰었습니다. 세계적인 선수는 아니지만 배울 게 아주 많았어요.

어떤 부분에서 배울 점이 많다는 걸 느꼈습니까.

나와 호흡을 맞출 땐 팀 최고참이었습니다. 그런 선수가 팀 훈련 2시간 전 훈련장에 도착합니다. 트레이너에게 마사지받고 개별 트레이닝을 하는 거죠. 팀 훈련이 끝나고서도 집에 가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불편한 곳이 있으면 치료받고 보강 운동을 마친 뒤 훈련장을 떠나요. 가장 먼저 훈련장에 와서 맨 마지막에 떠나는 거죠. 이 선수를 지켜보는 것만으로 배우고 느끼는 게 많았어요.

전성기에 찾아온 뉴캐슬(EPL) 입단 기회, 부상에 꿈을 이루지 못하다

'조재진 축구교실' 조재진 총감독(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조재진 축구교실' 조재진 총감독(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2004 아테네 올림픽’과 ‘2006 독일 월드컵’에서 경쟁력을 증명했습니다. J리그에선 최정상급 공격수로 발돋움했죠. 2008년 1월 겨울 이적 시장에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진출을 눈앞에 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성용이 뛰고 있는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몸담을 뻔했죠. 내 이름이 적힌 유니폼이 나온 상태였어요.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겁니까.

20대 초부터 고관절이 안 좋았어요. 약 챙겨 먹고 주사를 맞아야 하는 날이 많았죠. 사실 어느 팀으로 이적하든 메디컬 테스트에서 안 걸린 적이 없어요.

안 걸린 적이 없다?

시미즈 S펄스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J리그는 맨 마지막에 선수 의사를 물어봤어요. ‘메디컬 테스트 결과에 문제가 있는데 네 생각은 어떤지’를 확인한 후 영입을 결정했죠. J리그로 건너가 문제없이 뛸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뉴캐슬은 달랐군요.

J리그에선 감독이 ‘저 선수를 쓰겠다. 책임은 내가진다’고 하면 계약이 진행됐습니다. 뉴캐슬에서도 그럴 줄 알았어요. 하지만, 10시간 넘는 메디컬 테스트를 마치고 구단 사무실로 갔을 때 분위기부터 달랐습니다.

어떻게 달랐습니까.

구단 사장을 포함한 직원들과 메디컬 팀장이 앉아있었죠. 표정은 어두웠고 몇 초간 정적이 흘렀어요. 잠시 후 사진을 보여주면서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메디컬 쪽에서 사인을 안 해준 거예요. 감독이 아무리 원하는 선수라도 메디컬 팀장이 사인을 안 해주면 영입을 할 수 없었던 겁니다.

축구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알고 있습니다.

축구선수로 이루고 싶은 세 가지 목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태극마크를 달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것. 또 하나는 월드컵 출전이었죠. 두 가지는 이뤘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꿈인 유럽리그 진출은 이루지 못했어요. 후회 없이 부딪쳐보고 싶었는데 매우 아쉬웠죠.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어요. 많이 힘들었던 시기입니다.

이후 전북 현대로 향했습니다.

J리그 여러 구단에서 연락을 받았어요. 개인적으론 시미즈로 돌아가고 싶었죠. 하지만, 팀이 재정난으로 큰돈을 쓸 수 없었어요. 그러다가 최강희 감독께 전화를 받았죠. ‘K리그에서 뛸 마음이 있느냐’고 물어보셨어요. 감독님이 신뢰를 보내주신 덕분에 성공적인 한 해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2008년 전북 유니폼을 입고 리그 31경기에 출전해 10골 3도움을 기록했습니다.

전북에서의 시작은 불안했어요. 뉴캐슬 이적 실패 후 방황한 시간이 있었죠. 홀로 여행하며 머릿속을 정리한 까닭에 시즌 준비가 늦었습니다. 하지만, 감독께서 시간을 두고 기다려주셨어요. 감독님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면 안 되는 시즌이었죠(웃음).

전북에선 산골 마을 학교와 아이들을 전액 자비로 초청하는 일을 했습니다. 당시 K리그에서 이런 팬 서비스는 흔하지 않았습니다.

J리그에서 배워온 겁니다. J리그 모든 구단은 한 달에 한두 번씩 인근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를 찾아가요. 3~5명씩 조를 짜서 움직이죠. 아이들을 만나서 축구를 가르쳐주는 거예요. 방과 후 수업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겁니다. 마지막엔 홈경기 티켓을 선물로 주고,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해요.

약속이 지켜지는 편입니까.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은 경기장에 혼자 오는 게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꾸준히 나가는 이유가 있어요. 아이들이 티켓을 갖고 집에 가서 부모님께 말합니다. ‘이번 주말에 축구장 가자’고. 자연스럽게 가족 단위 관중이 늘어나는 거예요.

전북에서 어린아이들을 경기장으로 초청한 건 이 때문이군요.

2008년 K리그로 돌아왔을 때 실망한 게 있습니다. ‘관중이 없다’고 얘기하면서 아무것도 안 하는 거예요. 그때 감독님과 단장님께 당당하게 얘기했습니다. ‘구단에선 아무것도 안 하면서 관중이 없다’고 하십니까. ‘선수들 노는 시간에 주변 학교를 찾아 축구를 가르쳐야 합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도 필요해요’라고.

지금은 팬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모습이 흔하지만, 당시만 해도 아니었습니다. ‘선수는 쉬는 날 확실히 쉬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할 때예요.

잘못된 생각이죠. 과거 축구계는 ‘선수는 축구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모든 프로 스포츠는 팬이 있어 존재해요. 구단의 수익을 책임지는 것 역시 팬입니다. 선수의 연봉도 팬이 주는 거나 다름없죠. 프로 선수가 팬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이른 은퇴, 몸이 프로선수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고 있는 조재진 총감독(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고 있는 조재진 총감독(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2011년 3월 18일 29살의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전북 현대에서 2008시즌을 치른 뒤 J리그 감바 오사카로 이적했습니다. 감바가 전북에 큰 이적료(15억 원)를 제시했어요. 5배가 넘는 연봉도 제안했죠. 하지만, 2년 동안 제대로 뛰질 못 했습니다. 몸이 너무 안 좋아서 그라운드를 뛸 수가 없었어요. 결국 은퇴를 결심했죠.

젊은 나이에 은퇴했습니다. ‘더 뛰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까.

감바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았습니다. 어떻게든 뛰려고 했어요. 하지만, 더 이상 선수로 뛸 수가 없었습니다. 몸이 운동선수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20대 초부터 ‘안 좋았다’던 고관절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20대 초부터 부상을 안고 선수 생활을 이어간다는 건 유소년 시절의 훈련이 원인일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없다면 거짓말이죠. 지금도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새벽 6시에 일어나 아스팔트 도로를 뛰었습니다. 8km를 매일같이 달렸죠. 중학교 땐 틈만 나면 산을 뛰었어요. 이와 같은 훈련은 프로에 입단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특히나 내가 운동하던 시절엔 운동장이 모래바닥이었어요. 몸이 성할 수 없는 환경에서 큰 거죠.

지난해 한국 축구 대표팀에서 은퇴한 구자철도 똑같은 얘길 했습니다. 잘못된 유소년 훈련법이 선수 생활을 단축시킨다고요.

무턱대고 뛰는 훈련이 필요할 때도 있어요. 예를 들어 휴가를 마치고 팀에 복귀했을 때 테스트를 봅니다. 12분 안에 3,200m를 통과해야 하죠. 이런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곤 공과 함께하는 훈련 프로그램이 좋습니다. 우린 축구 선수지 육상 선수가 아니에요. 공을 가지고서도 체력을 키울 수 있죠.

예를 들어줄 수 있습니까.

경기장에서 공을 가지고 움직이는 거예요. 공을 가지고 움직이면 기본기 강화에도 도움이 됩니다. 1년에 한두 번은 육상선수처럼 뛸 수 있어요. J리그에서도 기초 체력을 끌어올릴 땐 공 없이 훈련합니다. 다만 그런 훈련은 중심이 될 수 없어요. 어릴 적부터 눈앞의 결과보다 성장에 초점을 맞춘 훈련 문화가 자리 잡았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대표께선 선수 시절 내내 따라다닌 부상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른 은퇴로 이어졌죠. 제2의 삶은 언제부터 기획했던 겁니까.

은퇴하고 1년은 무조건 쉬려고 했어요. 이곳저곳 여행 다니는 게 계획이었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웃음). 일본에서 뛸 때 취미로 골프를 쳤어요. 그때 알게 된 선배랑 우연찮게 마음이 맞아서 골프사업을 했죠.

“나는 뼛속까지 축구인. 죽을 때까지 축구계에 종사할 것”

평생을 축구와 함께 하고 싶다는 '조재진 축구교실' 조재진 총감독(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평생을 축구와 함께 하고 싶다는 '조재진 축구교실' 조재진 총감독(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2018년부턴 축구교실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우리 아이들 또래라서 재밌습니다(웃음). 큰 아이가 이제 8살이에요. 남자아이라서 축구를 아주 좋아합니다. ‘아빠처럼 축구 선수되는 게 꿈’이라고 하죠. 작은 아이는 6살 공주님이고요. 아이들이 공 가지고 놀면서 땀 흘리는 걸 보면 뿌듯합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가장 중요시하는 건 무엇입니까.

코치들에게 ‘안전이 최우선’이라고 강조합니다. 우리 축구교실엔 선수보다 취미로 축구를 접하는 아이가 많습니다. 운동이 서툴다 보니 다칠 위험이 크죠. 항상 아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신경을 써요. 잔디 밑엔 패드를 깔아놨죠. 아이가 넘어지더라도 충격이 크지 않게 만들어 둔 겁니다.

대표께선 엘리트 코스를 거친 국가대표 선수였습니다. 취미로 축구를 접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어려움은 없습니까.

더 재밌습니다. 무언가를 가르쳐주면 받아들이는 속도가 아주 빨라요. 친구를 배려하고, 리더십을 발휘하는 아이를 볼 땐 웃음이 절로 납니다.

‘제2의 손흥민’을 꿈꾸는 어린이는 없습니까.

일찍부터 축구선수를 꿈꾸는 아이가 있죠. 그런 친구일수록 냉정하게 평가합니다. 아이들에게 운동을 시켜보면 알아요. 운동에 소질이 있는지 없는지. 간단한 훈련을 시켜 봐도 운동신경이 있는 것과 없는 건 크게 다르거든요. 또 어릴 적부터 국가대표 선수를 많이 봤습니다. 학부모님께 현실적인 평가와 조언을 많이 하죠.

축구교실 운영을 지도자의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으로 봐도 됩니까.

지금은 아니에요. 우리 아이들이 아직 어립니다. 내 꿈을 이루자는 핑계로 아이들에게 소홀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지도자의 꿈은 항상 있습니다.

어떤 지도자를 꿈꿉니까.

‘축구가 재밌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듣는 지도자. 선수를 꿈꾼다고 해서 누구나 손흥민이 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축구를 하는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축구선수를 꿈꾼다면 후회 없이 땀 흘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나는 선수가 계획대로 나아갈 수 있게끔 도와주는 지도자를 꿈꿉니다.

국가대표나 K리그 경기도 많이 챙겨봅니까.

축구인 중에 나보다 많은 경기 챙겨보는 사람 없을걸요. 축구 공부를 아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최소 10경기 이상은 볼 거예요. K리그, EPL,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등 TV에서 중계하는 건 모두 봅니다. 팀마다 감독의 철학은 무엇이고 전술은 어떻게 다른지 필기도 하죠(웃음). 난 뼛속까지 축구인이에요. 죽을 때까지 축구계에 머물 겁니다(웃음).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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