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유나이티드 유상철 명예감독, 6월 7일 췌장암 투병 끝 별세

-A매치 124경기 18골 유상철,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앞장선 전설 중의 전설

-“1990년 청소년 대표 첫 발탁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

-“유럽 리그에 도전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누구보다 행복한 선수 시절 보냈다”

-“유상철은 그라운드에서 보인 이미지와 달리 누구보다 여리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유상철. 그는 한국 축구의 전설이다(사진=엠스플뉴스)
유상철. 그는 한국 축구의 전설이다(사진=엠스플뉴스)

[엠스플뉴스]

인천 유나이티드 유상철 명예감독이 췌장암 투병 끝 세상을 떠났다.

유 감독은 6월 7일 오후 7시경 서울 아산병원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향년 50세.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주역, 유상철은 전설이다

유상철 감독(사진=엠스플뉴스)
유상철 감독(사진=엠스플뉴스)

인천 유나이티드 유상철 명예감독은 한국 축구의 전설이다. 왼쪽 측면 공격수로 축구를 시작해 중앙 미드필더, 스트라이커, 중앙 수비수, 왼쪽 풀백 등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한 ‘원조 멀티 플레이어’였다. 특출 난 재능이 없어서 다양한 포지션을 맡은 게 아니었다.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완벽히 소화했다.

유 감독이 탄탄대로의 길을 걸었던 건 아니다. 학창 시절 왜소한 체격은 프로축구 선수의 꿈을 가로막을 뻔하기도 했다.

“중학교 때까지 키가 165cm였다. 왜소했다. 태극마크를 달고 뛴다는 건 상상조차 못했다. 고교 2학년 땐 축구부 코치가 아버지를 찾아와 ‘(유)상철이의 신체조건이 좋지 않다. 축구를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는 날 믿었던 거다. 아버지는 코치에게 ‘상철이가 축구를 좋아하니 고교 졸업까지만 지켜봐 달라’고 했다. 은퇴하고 이 얘길 들었다.” 유 감독의 회상이다.

유 감독은 고교 2학년 겨울 방학에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 성장통이 심해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통깁스하고 있었다. 유 감독이 제대로 잠을 못 이룰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그 시기 키가 10cm 이상 컸다. 축구부 복귀 후 미드필더에서 최전방 공격수로 포지션을 옮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성장통으로 운동을 한 달 이상 쉬었다. 종일 배가 고팠다. 밥 먹고 1시간 지나면 또 배가 고팠다. 며칠 굶은 사람처럼 먹기만 했다. 깁스를 풀고 학교에 갔는데 다들 놀랐다. 170cm도 안 된 아이가 184cm로 커서 나타났다. 신기했다. 왼쪽 측면 수비수, 중앙 미드필더로 성장한 내가 처음 스트라이커로 뛰었다.” 유 감독의 말이다.

유 감독은 고교 졸업 후 건국대학교로 진학했다. 1990년엔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다. 19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에 발탁된 것. 건국대에선 중앙 수비수로 기량을 갈고닦았다. 다양한 포지션을 맡은 까닭에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도 했지만 유 감독은 묵묵히 제 역할에 충실했다.

유 감독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1994년 울산 현대 입단 후였다. 처음 A대표팀의 부름을 받아 김주성, 고정운, 홍명보, 황선홍 등과 호흡을 맞췄다. 유 감독은 당시를 떠올리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바 있다.

“대표팀 유니폼이 다 똑같다. U-20 대표팀에서 태극기가 달린 유니폼을 처음 입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다. 날아갈 것 같았다.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걸 빨리 벗어선 안 되겠다. 대표팀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도록 운동에만 매진해야겠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주역 유상철(사진 오른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주역 유상철(사진 오른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유 감독은 누구보다 성실하고 철저했다. 프로가 된 후엔 콜라를 마시지 않았다. 울산 차범근 전 감독에게 성공하려면 어떤 길로 나가야 하는지 배웠다. 최고의 경기력을 보이기 위한 훈련과 관리에만 집중했다.

유 감독은 1994년 3월 5일 미국과의 친선경기(0-1)에서 A대표팀에 데뷔해 2005년 6월 3일 2006 독일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우즈베키스탄전(1-1)까지 뛰었다. A매치 124경기에서 뛰며 18골을 터뜨렸다. 차범근(136경기 58골), 홍명보(136경기 10골), 이운재(133경기 115실점), 이영표(127경기 5골)에 이은 A매치 최다출전 5위다.

프로에서도 대단한 업적을 남겼다. 유 감독은 K리그에서 9시즌을 뛰었다. 리그 142경기에서 뛰며 37골 9도움을 기록했다. 컵대회에선 36경기에 출전해 3골 1도움을 올렸다. 유 감독은 K리그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 부문 베스트 11에 선정된 경험이 있다. 김주성 이후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 부문 베스트 11에 선정된 선수는 유 감독이 처음이었다.

유 감독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이후 득점왕(23경기 15골)에 오른 경험이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후엔 리그 8경기를 남겨두고 울산에 복귀해 9골을 터뜨렸다. 유 감독이 꼽은 프로 생활 중 몸이 가장 좋았던 시기다.

유 감독은 J리그(일본) 요코하마 마리노스(1999-2001/2003~2005), 가시와 레이솔(2001, 2002) 등에서도 뛰었다. J리그 통산 기록은 113경기 출전 44골. 유 감독은 J리그에서도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았다.

그런 유 감독 축구 인생 최고의 순간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이었다. 유 감독은 성남 FC 김남일 감독과 중원의 한 축을 담당하며 한국의 4강 진출에 앞장섰다.

유 감독은 한국의 조별리그 첫 경기 폴란드전(2-0)에서 승부의 쐐기를 박는 두 번째 골을 터뜨리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폴란드전은 한국의 월드컵 본선 첫 승리였다. 한국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을 시작으로 총 5차례 월드컵 본선에서 한 번도 이기지 못한 팀이었다.

유 감독의 진가가 나타난 건 16강전 이탈리아와의 경기(2-1)였다. 유 감독은 중앙 미드필더와 중앙 수비수 두 포지션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한국의 8강 진출을 책임졌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썼지. 생각할 때마다 놀란다. 한국이 월드컵 4강전에서 독일과 대결할 거라고 누가 상상했겠어. 월드컵을 준비한 과정부터 마지막 터키와의 3-4위전까지 모든 게 생생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은 내 축구 인생의 마지막 월드컵이기도 했다.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유 감독의 얘기다.

선수를 먼저 생각한 지도자, 따뜻한 사람이었던 유상철

유상철 감독은 웃음을 잃지 않았던 따뜻한 사람이었다(사진=엠스플뉴스)
유상철 감독은 웃음을 잃지 않았던 따뜻한 사람이었다(사진=엠스플뉴스)

인천 유나이티드 유상철 명예감독은 2006년 정든 그라운드를 떠났다. 월드컵, 올림픽, 아시아경기대회 등에서 뛰며 프로축구 선수로 이룰 수 있는 건 다 이뤘다. 유 감독은 “유럽 리그를 경험하지 못한 게 아쉽지만, 누구보다 행복한 선수였다”고 선수 시절을 평가했다.

유 감독은 은퇴 후 고민에 빠졌다.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에게 휴식을 주고 싶었다. 치열한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축구계를 떠난 것도 고려했다. 하지만, 절친한 친구인 한국 U-15 축구 대표팀 송경섭 감독의 한 마디가 유 감독의 마음을 바꿨다.

“(송)경섭이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경섭이는 ‘축구계를 떠나는 건 네 자유다. 그런데 유상철이란 사람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대단한 역사를 쓴 주역이다. 그 경험을 후배들에게 알리지 않는 건 누구보다 큰 사랑을 받은 축구인으로서 책임이 없는 일일 수 있다’고 했다. 경섭이의 말이 한동안 머릿속에서 빠져나가질 않았다. 그렇게 축구계로 돌아온 거다.”

유 감독은 최소 1년은 휴식을 취하려던 계획을 바꿨다. 축구교실을 차려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2009년엔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 축구부 감독을 맡았다. 이후엔 대전 시티즌(대전하나시티즌의 전신), 울산대학교(2014.01~2017.12), 전남 드래곤즈(2017.12~2018.08), 인천 유나이티드(2019.05~12)를 거쳤다.

유 감독이 지도자로 승승장구했던 건 아니다. 남몰래 아픈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유 감독은 “선수와 감독은 다르다”“실패를 맛봐야 더 큰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솔직히 힘들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커서 우울증도 알았다. 5개월 동안 사람도 만나지 않고 집에만 있었던 것 같다. 우울증 치료를 마치고 나니 머릿속이 축구로 가득해졌다. 뼛속까지 축구인이구나 싶었다. 개인적으론 울산대학교 시절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4년이란 시간이 보장돼 있었다. 결과와 관계없이 선수들과 함께 성장했다. 준우승만 네 차례 기록했지만 성적 부담 없이 재밌게 축구한 것 같다.” 유 감독의 회상이다.

유 감독에겐 지도자 생활의 마지막으로 남은 인천 생활도 특별했다. 유 감독은 2019년 5월 14일 강등 위기에 놓인 인천 지휘봉을 잡고 팀 잔류를 이끌었다.

그러나 유 감독과 인천의 동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병마가 프로 지도자로 빛을 보려던 유 감독의 발목을 잡았다.

마지막까지 그라운드 복귀 꿈을 잃지 않았던 인천 유나이티드 유상철 명예감독(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마지막까지 그라운드 복귀 꿈을 잃지 않았던 인천 유나이티드 유상철 명예감독(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유 감독은 췌장암 투병 사실이 알려진 후에도 꿈을 잃지 않았다. 반드시 건강을 되찾아 그라운드로 복귀하겠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인천이 2020시즌 강등 위기에 놓였을 땐 감독 복귀를 추진하기도 했다. 인천 홈경기는 물론이고 2020년 11월 29일 수원FC와 경남 FC의 K리그2 플레이오프 등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유 감독은 지도자로 어려웠던 시간을 발판삼아 더 강한 지도자로의 복귀를 준비했다.

유 감독은 그라운드 위에선 투사였다. 벤치에선 명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유 감독과 축구 인생을 함께한 이들은 또 한 가지를 더한다.

“유 감독은 그라운드 위 이미지와 달리 여리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용기를 북돋아 넣을 줄 아는 지도자였다.”

그라운드 위 투사, 벤치 앞 명장이기 전 따뜻한 사람이었던 유상철. 유상철 감독의 명복을 빈다.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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