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 홈런왕 행크 애런, 1월 23일 향년 86세로 별세

-1982년 프로 원년 내한한 행크 애런…‘헐크’ 이만수와 홈런 대결

-다운 스윙 일변도였던 한국 타자들에게 레벨 스윙 조언 건네

-“훌륭한 인격 보여준 분, 야구 잘하는 게 전부가 아니란 교훈 얻어”

한국의 홈런왕 이만수, 미국의 홈런왕 행크 애런
한국의 홈런왕 이만수, 미국의 홈런왕 행크 애런

[엠스플뉴스]

이만수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은 1월 23일 아침 지인으로부터 한 장의 사진을 받았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이제는 사라진 동대문야구장에서 찍힌 사진이다.

흐릿해진 기억처럼 뿌옇게 변한 사진 속에는 등번호 22번 삼성 유니폼을 입은 이만수 이사장과 전설의 홈런왕 행크 애런의 모습이 보였다. 배트를 쥔 이 이사장의 손 위에 행크 애런이 손을 포개고 뭔가 조언해주는 듯한 장면이다.

사진을 보내준 지인은 이 이사장에게 ‘행크 애런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애런은 이날 향년 86세로 미국 애틀랜타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소식을 접한 이 이사장은 “행크 애런을 만났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이제는 내가 그 당시 애런보다 많은 나이가 됐다”며 애석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레벨스윙 해봐라” 헐크 향한 애런의 조언…“훌륭한 인품 보여준 위대한 선수”

1982년 한국 방문 당시 이만수와 행크 애런(사진=이만수 제공)
1982년 한국 방문 당시 이만수와 행크 애런(사진=이만수 제공)

그렇다면 사진 속 만남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때는 KBO리그 원년인 1982년. 그해 애런은 8월과 10월에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찾았다. 막 프로야구가 태동한 한국야구에 도움을 주기 위한 방문이었다. 8월 26일 처음 한국 땅을 밟은 애런은 일주일 정도 머물며 기자회견과 사인회를 진행했다. 자신을 초청한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과 홈런 레이스를 펼쳤고, 타격 조언도 건넸다.

이 이사장은 “개인적으로 미국 야구에 관심이 많다 보니, 전설적인 선수를 직접 만나게 돼서 감격스러웠다. 그런 전설적인 선수에게 타격도 배우고 함께 홈런레이스도 했으니 얼마나 큰 영광이었겠나. 잊지 못할 추억이다”라고 돌아봤다.

애런은 8월 28일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롯데-삼성전을 앞두고 이만수, 김용철과 홈런 레이스를 벌였다. 당시 48세였던 애런은 5개를 담장 밖으로 날리며 각각 5개와 3개를 넘긴 20대 중반의 이만수와 김용철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실력을 보여줬다.

이 이사장은 “말로만 듣던 애런을 실제로 보니까 키는 그렇게 크지 않은데, 덩치가 정말 좋았다. 나이는 오십이 다 됐는데 어쩌면 그렇게 잘 치는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당시 그분들에 비하면 우리는 유치원생 정도였던 것 같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이 이사장은 당시 행크 애런에게 타격 조언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일본식 야구가 주류였던 시절에, 애런의 방문은 말 그대로 센세이션이었다.” 이 이사장의 말이다.

이 이사장은 “당시 타자들은 다운스윙으로 땅볼을 치는 타격을 하는 데 주력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애런은 내게 레벨스윙을 하라고 조언했다”며 “다운스윙을 하면 팔로스로우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스윙한 뒤 배트가 왼쪽 어깨 아래로 내려간다고 배트가 어깨 위로 올라가게끔 스윙하라고 조언했다. 그 얘길 듣고 굉장히 놀란 기억이 난다”고 했다.

10월 행크 애런의 두 번째 내한 때는 친선경기를 위해 신혼여행에서 하루 일찍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이 이사장은 “당시 제주도로 3박 4일 신혼여행을 갔는데, 그때 애런이 어니 뱅크스와 함께 애틀랜타 산하 마이너리그팀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했다. 친선경기에 참가해야 한다 해서 신혼여행 중에 올라왔다. 아내에게 굉장히 미안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당시 애틀랜타 부사장 자격으로 선수단 단장을 맡은 애런은 OB, 삼성, MBC 등과 8차례 친선 경기를 진행했다. 10월 16일 2차전을 앞두고 열린 홈런레이스에서도 애런은 4개의 홈런을 날리며 윤동균(3개), 신경식(0개) 등 한국 선수를 압도했다.

8차전까지 갔던 친선경기에서 애틀랜타 마이너리그팀은 3승 1무 4패를 기록했다. 당시 은퇴한 지 10년도 넘었던 51세의 뱅크스가 3차전에서 만루홈런을 때려내며 화제가 됐다.

이 이사장은 “함께 경기한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었다. 어니 뱅크스는 그 나이 많은 분이 홈런을 치는 보고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놀랐던 기억”이라며 “우리뿐만 아니라 팬들 역시 위대한 선수를 직접 본다는 기대감이 컸고, 왠지 우리 야구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듯한 느낌마저 받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생전의 행크 애런(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생전의 행크 애런(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무엇보다 이 이사장은 대스타 출신 애런이 보여준 훌륭한 인품에 감명을 받았다. 그는 “메이저리그 홈런 신기록을 세운 엄청난 스타인데도, 직접 만나보니 인품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며 다음과 같이 떠올렸다.

“애런이 선수 시절 흑인이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나. 그런데도 사람이 참 인자하고 따뜻했다. 훌륭한 인격을 갖춘 분이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지금도 행크 애런을 존경하고 따르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 이사장의 말이다.

애런은 은퇴 후 1980년부터 애틀랜타 구단 부사장과 방송사 TBS 부회장을 맡았다. 그는 야구계에서 흑인 선수들이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했고, 흑인 인권운동과 사회봉사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최근엔 코로나19 백신 등의 현안에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존경받는 야구 원로로 활동하다 평화롭게 세상을 떠난 애런이다.

이 이사장은 “행크 애런은 미국야구가 추구하는 가치를 잘 보여주는 사람”이라며 “팬이 없으면 프로야구는 존재 가치가 없다. 미국 선수들은 어릴 때부터 사회봉사를 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게 생활화가 돼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메이저리그가 많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것 아니겠나. 우리가 배울 점이 많다”고 말했다.

탁월한 선수를 넘어 위대한 영혼이었던 ‘해머’ 행크 애런, 그의 명복을 빈다.

배지헌 기자 jhpae117@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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