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열린 KBO 연봉조정위원회, '선수' 주권 손들어줬다

-역대 두 번째 선수 승리…공정성 강화한 KBO 변화가 주효

-정지택 총재 ‘공정한 조정위원회’ 주문…위원 선정기준과 판단 기준도 마련해

-꼼꼼하게 사안 챙기는 실무형 총재 평가…KBO 조직문화도 바뀔까

KBO 정지택 신임 총재(사진=엠스플뉴스 김도형 기자)
KBO 정지택 신임 총재(사진=엠스플뉴스 김도형 기자)

[엠스플뉴스]

신세계 이마트의 SK 와이번스 인수 소식에 야구계가 떠들썩했던 1월 25일, 한국야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또 하나의 중요한 소식이 전해졌다. 10년 만에 열린 한국야구위원회(KBO) 연봉조정위원회가 구단이 아닌 선수의 손을 들어준 것. 이로써 KT 위즈 주권은 2002년 LG 트윈스 류지현 이후 선수가 연봉조정위에서 승리한 역대 두 번째 사례가 됐다.

주권 이전까지 KBO 연봉조정위는 매번 구단 승리로 끝났다. 총 20차례 조정위에서 선수 쪽 성적은 1승 19패. 선수들 사이에서 연봉조정위는 구단 측에 유리한 인사로 구성돼 구단 측에 유리한 기준으로 판단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여겨졌다.

신청해봐야 이길 가능성이 없고, 괜히 신청했다가 불이익만 당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2011년 롯데 자이언츠 이대호를 마지막으로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조정위까지 가는 사례가 나오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러나 이번 주권 연봉조정위원회는 달랐다. 조정위는 2억2천만 원을 제시한 구단과 2억5천만 원을 제시한 선수 가운데 선수 쪽 손을 들었다. 여기엔 조정위를 앞두고 처음으로 조정위원 선정기준과 객관적인 판단 기준을 정해 공정성을 강화한 KBO의 변화가 주효했다.

디테일에 강한 실무형 총재, 연봉조정위원회 변화 이끌었다

1월 5일 열린 정지택 총재 취임식(사진=엠스플뉴스 김도형 기자)
1월 5일 열린 정지택 총재 취임식(사진=엠스플뉴스 김도형 기자)

“정지택 총재가 ‘이번에는 공정한 조정위원회가 돼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KBO 고위 관계자의 말이다. “구단과 선수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공정한 조정위가 돼야 한다는 총재님의 의지가 강했다. 조정위원 선정 기준과 판단 근거를 만들라는 지시도 있었다”는 설명이다.

실제 KBO가 내놓은 안을 보면 조정위원회의 공정성과 중립성 강화를 위해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KBO는 이번 조정위를 앞두고 “조정 또는 중재의 경험이 있는 법조인, 스포츠 구단 운영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인사 또는 스포츠 관련 학계 인사” 등을 조정위원 자격 요건으로 제시했다. 또 선수와 구단이 추천한 인사를 각각 1명씩 조정위원회에 포함해 균형을 맞췄다.

합리적인 조정위원회 판단 기준도 마련했다. 구단 측이 설정한 고과 자료에만 의존한 과거 조정위와 달리 ‘직전 시즌 선수의 공헌도와 이에 대한 기간 및 지속성, 선수의 성적에 따른 공식 수상 경력과 최근 소속 구단의 성적, 그리고 선수의 과거 연봉 및 동급 연차 선수들의 연봉 수준’ 등을 고려하도록 했다.

반면 ‘구단, 선수의 재정 상황이나 주관이 개입될 수 있는 언론의 의견 또는 평가 자료, 조정위원회 개최 전까지 구단과 선수가 논의한 조건, 양측 대리인 또는 변호사에 대한 비용, 타 스포츠 종목 선수 또는 직업의 연봉’ 등은 판단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정했다.

한 스포츠 에이전시 팀장은 “KBO에서 안을 내놓는다고 해서 불신이 있었는데, 실제 내놓은 결과물을 보니 메이저리그의 기준과 거의 비슷해서 깜짝 놀랐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상당 부분 반영한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에이전트도 “총재가 구단주대행 출신이라 구단 편향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선입견을 깨는 결과물이 나왔다”고 높게 평가했다.

더 고무적인 점은 앞으로 열리는 연봉조정위원회에도 같은 기준이 적용된다는 점이다. KBO는 “조정위원의 선정 기준 및 판단 기준 등 조정위원회 운영 관련 미비한 부분을 보완하여 규약에 명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간 유명무실했던 연봉조정신청 제도가 활성화될 가능성이 열렸다. 조정신청에 소극적이었던 선수들이 더 적극적으로 제도를 활용하게 될 전망이다.

연봉조정위원회의 변화를 놓고 ‘실무형 총재’의 강점이 유감없이 발휘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 야구계 핵심 관계자는 “KBO 관계자들의 정지택 총재에 관한 얘길 들어보면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유형의 총재’란 평이 많다. 디테일과 숫자에 강하고, 총재가 여러 실무를 직접 챙긴다고 하더라. 관료 출신으로 기업을 거친 인사라 그런지 굉장히 꼼꼼한 스타일이라고 한다”고 전했다.

다른 야구 관계자는 “총재가 취임 직후 업무 보고를 받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KBO 모든 부서의 업무 내용과 현안, 진행 상황을 상세하게 보고받았다고 들었다. 보고서도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해 올리는데 하나하나 다 살펴본다고 하더라”고 귀띔했다.

한 야구 원로는 “과거 KBO 총재 중엔 열심히 뛰어다니며 의욕적으로 일하는 분도 있었지만, 일은 하나도 안 하고 대접만 받다 임기를 마친 분도 있다” “아직 취임한 뒤 몇 주 안 지났지만, 지금까지 보고 들은 바로는 정지택 총재가 굉장히 의욕적인 것 같다”고 평했다.

야구계 "실무형 총재 등장 이후 기대 이상으로 KBO 변화, 일방적인 구단 옹호에서 선수 권익도 두루 살피는 조직으로 진화 중"

KBO는 그간 복지부동, 무사안일 조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사진=엠스플뉴스 김도형 기자)
KBO는 그간 복지부동, 무사안일 조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사진=엠스플뉴스 김도형 기자)

실무형 총재의 특징은 두산 베어스발 도박 파문 후속 대응에서도 잘 나타난다. 취임사에서 ‘신상필벌’과 ‘일벌백계’를 강조했던 정 총재다. 그렇기에 두산 사건이 터진 뒤 ‘부정행위 제재 강화’ 방침을 발표한 건 이해할 만한 일이다. KBO는 “관련 규약과 규정이 정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엄격하게 (제재를) 적용할 방침”이라며 강도 높은 제재를 예고했다.

또 “부정행위에 대해서는 제재 기준과 근거를 세분화하여 규약에 명시하는 등 미비한 규정을 재정비하고, KBO 조사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등 제재 규정의 실효성을 제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제재로만 그치지 않고 예방책까지 함께 내놨다는 게 눈여겨볼 대목이다. KBO는 부정행위 방지 ‘교육 강화’의 일환으로 스프링캠프 기간 현장 교육 계획을 공개했다. 지난해 코로나19 탓에 비대면 온라인 교육으로만 진행했던 선수 대상 교육을 캠프 기간과 시범경기 기간 현장 교육과 병행한다는 방침이다.

KBO는 실효성 있는 교육을 위해 “한국프로스포츠협회, 스포츠토토코리아,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 한국도핑방지위원회,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등 유관기관과 공조하여 선수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내용으로 보완하는 등 교육의 질과 효과를 향상할 방침”이라 밝혔다.

또 아마야구 선수들의 불법 도박 사례가 증가하는 흐름을 반영해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KBSA)와 연계해 아마야구 선수들이 프로 입단 이전부터 스포츠 윤리 교육을 지속해서 받을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 밝혔다.

꼼꼼한 실무형 총재 부임으로 KBO 조직 문화에도 변화가 기대된다. 앞의 야구 원로는 “정운찬 총재 시절부터 은폐, 축소가 일상이던 KBO가 조금씩 투명하게 운영되기 시작한 게 사실"이라고 말한 뒤 "정 총재의 리더십 한계로 KBO가 더 변화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며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리더가 의욕적으로 움직이면 밑의 간부급들 역시 열심히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가뜩이나 KBO 간부들도 예전처럼 복지부동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벌써 KBO 안팎에선 ‘총재가 바뀐 뒤 일이 두 배로 늘었다’라는 소리가 나온다. 굉장히 좋은 현상이라고 본다.”

배지헌 기자 jhpae117@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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