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코칭스태프와 함께 하는 한화 이글스, 짧은 시간 동안 큰 변화

-공 하나도 허투루 던지지 않는다…생각하는 훈련, 집중력 극대화

-자유롭고 수평적인 문화…선수들에게 과감하고 공격적인 플레이 주문

-최고참부터 신인까지 치열한 내부 경쟁…한화의 ‘문화’가 바뀌고 있다

한화 이글스 수베로 감독(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한화 이글스 수베로 감독(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엠스플뉴스=대전]

‘캠프 분위기는 어때요?’

스프링캠프를 취재할 때 가능하면 안 하는 게 좋은, 제일 바보 같은 질문은 ‘분위기 어떠냐’는 질문이다. 백이면 백, 하나같이 ‘분위기 정말 좋다’는 답이 나오기 때문이다. 혹은 ‘지금 분위기가 안 좋으면 어떡하냐’라는 답이 돌아오게 마련이다. 아마 1996년 하와이 전지훈련 당시 해태 타이거즈에 물어봤어도 대답은 똑같았을 거다.

영하 강추위에 롱패딩을 껴입고, 비닐하우스에서 불펜피칭하고, 코로나19 사태에 휴식일에도 ‘집콕’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스프링캠프는 역시 스프링캠프다. 지난 시즌 우승팀부터 최하위 팀까지 모든 구단이 이 시기엔 새로운 시즌을 향한 기대와 희망을 한가득 품고 캠프를 치르게 마련이다.

2월 22일 찾은 대전 한화 이글스 스프링캠프도 시종 웃음이 끊이지 않고, 사방에서 우렁찬 기합 소리가 들린다는 점에선 여느 캠프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한화 캠프엔 단순히 ‘분위기 좋다’는 다섯 글자만으로 요약하기 힘든 차이가 있었다. 무엇보다 과거 한화 캠프에선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변화가 여러 차례 눈에 들어왔다.

몸만 힘든 노동은 없다, 한화는 ‘생각하는’ 훈련을 한다

큰 소리로 기합을 외치며 훈련하는 노시환(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큰 소리로 기합을 외치며 훈련하는 노시환(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가장 큰 차이는 외국인 코칭스태프의 존재다. 한화는 올 시즌을 앞두고 구단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 감독과 외국인 수석코치, 타격코치, 투수코치를 영입했다. 전에도 외국인 감독을 기용한 팀이 있긴 했지만, 1군 코칭스태프 주요 보직 네 자리를 전부 외국인으로 채운 건 한화가 처음이다.

훈련장에서 만난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은 온몸을 써가며 열정적으로 선수들을 지도했다. 투수조와는 픽오프 훈련을 앞두고 긴 시간 대화를 나눴고, 야수들과도 수비 훈련을 앞두고 의견을 교환하는 시간을 가졌다.

전날 청백전에서 확인한 좋은 점과 개선할 점을 공유하고 지금부터 하는 훈련이 왜 중요한지,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선수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이런 방식에 익숙한 외국인 타자 라이온 힐리가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노시환 등 나이 어린 국내 선수들도 자신이 느낀 점을 스스럼없이 표현했다.

과거 올드 지도자들이 이끈 캠프에선 시키는 대로 몸만 움직이는 훈련을 했다. 이유를 모른 채 하는 몸만 힘든 운동은 훈련이라기보단 중노동에 가까웠다. 이제 한화 캠프에선 무의미한 기계적 반복훈련을 하지 않는다. 투수들의 불펜 피칭도 그냥 힘껏 던지고 포수가 ‘나이스볼!’을 외치는 식이 아니다. 공 하나하나마다 구체적인 상황을 설정하고 생각하며 공을 던진다.

“호세 로사도 코치님이 공 하나를 던질 때마다 계속 옆에서 얘기를 해주십니다. ‘불펜피칭도 실전처럼 하자’고 강조하세요.” 투수 김이환의 말이다. “여러 상황을 정해놓고 공을 던집니다.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으라거나, 주자 2, 3루에 있는 상황을 생각하고 던져요. 투수들이 엄청 집중하게 됩니다.”

21일 치른 자체 6이닝 청백전에서도 투수들은 주자를 1루에 둔 가운데 공을 던졌다. 수베로 감독은 “벤치에서 상황을 설정해놓고 한 경기였다. 투수들이 스트레스가 주어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다들 꾸준히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모습을 확인했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주자들도 1루에서 3루까지 두 베이스를 뛰거나 폭투 때 추가 베이스를 얻는 모습이 나왔고, 외야수들이 공격적인 강한 송구로 추가 진루를 막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타자들도 보더라인 피칭을 골라내거나, 불리한 카운트 상황에서 유리한 카운트를 만드는 등 퀄리티 있는 타격을 해줘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수베로 감독의 말이다.

“스케쥴만 보면 훈련이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예전보다 더 집중한 가운데 훈련해서 그런지 체력 소모가 더 큰 것 같습니다.” 김이환이 말했다. “피칭할 때도 상황을 정해놓고 공 하나하나에 집중해야 합니다. 한번은 실내연습장에서 타자를 세워놓기만 하고 공을 던졌는데도, 숙소에 들어가서 바로 뻗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내야수 강경학은 “훈련량 자체는 많지 않은데, 그 속에서 집중도가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공 하나를 받을 때도 선수들이 집중하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깔끔한 플레이가 이루어져요. 아무 생각 없이 하는 플레이가 아니라, 모든 선수가 같이 생각하고 움직이니까 더 피로가 쌓이는 것 같아요. 내가 이걸 왜 치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하다 보니까 피로도가 높습니다.”

달라진 훈련 시스템 속에 한화 선수들 개개인도 보다 자기 주도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각자 자신만의 목표와 과제를 찾아가며 능동적으로 훈련에 임하는 모습이다.

작년에 볼넷이 많아 고민이었던 김이환은 올 시즌 어이없는 볼넷을 줄이는 걸 미션으로 정했다. 훈련 때부터 가상의 보더라인을 그리며 집중해서 투구한다. 강경학도 구체적인 목표를 정해놓고 훈련한다. “공을 정확히 보고 인플레이 타구를 만드는 훈련을 한다. 타격 시 잡동작을 없애려고 훈련 중이다. 공을 더 편하게 보고 정확하게 치는 방향으로 훈련하고 있다”고 했다.

강경학은 통산 출루율 0.340으로 타율(0.240)보다 0.100 높은 출루율을 기록 중이다. 준수한 출루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낮은 타율 때문에 저평가된 면이 있었다. 그는 “(출루를 강조하는) 감독님 말씀을 듣고 내가 그렇게 나쁜 타자는 아니란 생각이 들고 자신감을 얻었다. 내 장점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쪽으로 방향을 설정해 타격 연습을 하게 된다”고 했다.

수평적인 코칭스태프-선수단 관계…창의적이고 과감한 플레이 나온다

새 외국인 타자 라이온 힐리(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새 외국인 타자 라이온 힐리(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수직적이고 경직됐던 코칭스태프-선수단 관계에도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조니 워싱턴 타격코치는 1984년생으로 야수 최고참 이성열과 동갑이다. 워싱턴 코치가 이성열을 부르는 호칭은 ‘영 보이’다. 이성열은 “나이도 동갑이라 서로 친해지려고 다가가고 있다”고 했다.

사실 ‘영 보이’는 후배 하주석이 지어준 별명이다. 이성열은 “주석이를 비롯한 후배들, 워싱턴 코치님 힐리 등 선수들이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덕분에 재미있게 생활하면서 훈련에 임하고 있다. 후배들에게 자극받아서 젊어지고, 패기 있게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워싱턴 코치님은 장난치는 것도 좋아하고, 선수들과 격의를 두지 않으려 합니다. 한국 문화도 좋아하시고, 한국말도 자꾸 해보려고 하세요. 저희에게도 먼저 ‘너 몇 살이야?’라고 한국말로 물어보기도 합니다.” 강경학의 말이다. “코치님보다는 동료 같은 느낌입니다. 스스럼없이 얘기하게 되고,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 물어보면서 계속 야구에 관해 대화하고 연구하게 됩니다.”

이성열은 “우리나라 야구에 그동안 약간은 억압적인 문화가 있었다. 눈치를 보는 문화가 있었는데, (외국인 코칭스태프가) 그걸 깨뜨리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새 감독님과 코치님이 오시면서 많이 달라졌어요. 선수 개개인이 개성과 책임감을 갖고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성열의 말이다.

수평적이고 열린 조직 문화는 구성원들의 개성과 창의력을 끌어낸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도전할, 공격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할 공간이 만들어진다. 수베로 감독이 ‘실패할 자유’를 강조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성열은 “실패는 어떤 선수라도 할 수 있다. 수비를 잘하는 선수도 실수는 하게 마련”이라며 “감독님이 우리에게 자신감을 주려고, 실수하더라도 과감하게 해보라는 의미에서 하신 말씀 같다”고 했다.

강경학은 “수베로 감독님은 공격적인 주루플레이를 추구한다”며 “안되는 건 없다, 연습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기 것이 될 거란 말씀을 자주 하신다”고 했다.

“예전엔 야구할 때 ‘너는 안되니까 하지 마’란 말을 들었다. 한 베이스 더 가는 주루보단 안전한 플레이를 하려 했다. 주춤하다가 판단미스도 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게 없어지고 자신감이 붙었다. 내가 할 수 있는데 안 했다는 걸 깨달았다. 수베로 감독님과 훈련하면서 많이 배워가고 있다.” 강경학의 말이다.

‘노시환 타도!’ 외치는 최고참…“보이지 않는 경쟁, 큰 시너지 효과”

열정적으로 선수들을 지도하는 수베로 감독(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열정적으로 선수들을 지도하는 수베로 감독(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외국인 감독 앞에선 모든 선수가 평등하다. 나이도, 경력도, 출신 학교도, 지역도, 인종도 외국인 감독에겐 평가의 유효한 기준이 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이 눈으로 보고 확인한 실력을 바탕으로 주전 선수를 정하고, 1군 선수단을 구성한다. 자연히 치열한 내부 경쟁이 펼쳐지게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선수 개개인의 잠재력이 발휘되고, 팀 전체가 객관적인 평가보다 좋은 퍼포먼스를 내는 효과가 나온다.

수베로 감독 체제 한화에서도 웃음꽃 활짝 핀 즐거운 분위기 한편으로는 내부 경쟁이 가져오는 긴장감이 감돈다. 지난해까지 백업 역할에 머물렀던 강경학은 “모두가 평등하게 시작한다는 생각을 갖고 훈련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이 된다”고 했다.


“훈련하면서도 은근히 신경을 쓰게 됩니다. 저 선수보다 더 잘해서 눈에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서로 간에 보이지 않는 경쟁을 통해 좀 더 시너지 효과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최고참 이성열은 캠프 초반 인터뷰에서 ‘노시환 타도’를 외쳤다. 보통은 신인급 선수가 베테랑 선배에게 도전장을 내밀게 마련인데, 반대로 까마득한 후배를 상대로 도전장을 던졌다. 베테랑 선수의 ‘계급장’을 자진해서 떼어내고 도전자의 자리로 내려온 이성열이다.

“작년에 힘든 시간을 보냈잖아요.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노시환 타도’를 외친 것도, 그 선수만큼 경기에 나가고 싶은 욕심이 있고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팀에서 필요하다면 1루수로도 나가야죠. 저는 도전하는 입장입니다.” 이성열의 말이다. 매년 똑같은 베테랑 선수들로 1군 더그아웃을 가득 채웠던 예전의 한화는 더는 없다.

돌아보면, 지난 20년간 한화의 역사는 대증요법과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하위권 탈출을 위해 감독 교체부터 대형 FA(프리에이전트) 영입까지 온갖 시도를 다 했지만 정작 구단의 근본적인 문제는 수술하지 않았다. 원칙 없는 감독 교체는 팀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단 오히려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FA와 외부영입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성적 향상을 가져왔을지 몰라도, 팀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올겨울엔 달랐다. 한화는 거물 FA나 대형 트레이드 같은 대증요법 대신 구단의 ‘문화’ 전체를 바꾸는 길을 택했다. 구단 프런트부터 코칭스태프, 선수단까지 모든 영역에 걸쳐 새 판을 짰다. 인적 쇄신이 필요한 파트엔 과감한 구성원 교체도 단행했다.

효과는 조금씩 눈에 보이는 변화로 나타나고 있다. 이제 스프링캠프가 시작한 지 3주가 지났을 뿐이지만, 훈련에 임하는 선수들의 모습에서 차이가 느껴진다. 수동적인 자세와 위축된 모습이 사라지고, 예전 한화 캠프에선 볼 수 없던 활력과 역동성을 느낄 수 있었다. 한화 캠프를 단순히 ‘분위기 좋다’는 표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다. 수베로호는 지금 한화의 ‘문화’를 바꾸고 있다.

배지헌 기자 jhpae117@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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