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최근 마운드에 올라간 한화 이글스 내야수 강경학과 외야수 정진호의 투구로 야수들의 깜짝 등판이 화제가 됐다. 36년 전 '그라운드 위의 여우' 유격수 출신 김재박 전 감독이 보여준 투구가 KBO리그에서 사실상 야수의 깜짝 등판 관련 첫 사례다. 김 전 감독은 36년 전 마운드에 올랐던 기억을 회상하면서 야수의 깜짝 등판도 팬 서비스라는 긍정적인 시선을 보냈다.

김재박 전 감독은 현역인 MBC 청룡 시절 직접 야수의 깜짝 등판 사례를 만든 뒤 LG 사령탑 재임 시절 내야수 최동수의 투구 기용을 결정하기도 했다(사진=LG)
김재박 전 감독은 현역인 MBC 청룡 시절 직접 야수의 깜짝 등판 사례를 만든 뒤 LG 사령탑 재임 시절 내야수 최동수의 깜짝 투수 기용을 결정하기도 했다(사진=LG)

[엠스플뉴스]

흔치 않은 야수의 깜짝 투수 등판이 최근 KBO리그에서 큰 화제다. 한화 이글스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은 4월 10일 대전 두산 베어스전에서 1대 14로 뒤진 9회 초 마운드에 야수인 강경학과 정진호를 올렸다.

크게 뒤진 경기 막판 불펜진을 아끼고자 내린 수베로 감독의 이 결정은 적중했다. 한화 팬들에겐 재밌는 팬 서비스 장면을 만들었고, 투수를 아낀 결과 다음 날 불펜진의 활약상을 통해 위닝 시리즈를 확정했다.

KBO리그 역사에서 투수로 등록하지 않은 야수가 마운드로 올라가 깜짝 등판한 사례는 극히 적다. 해태 타이거즈(KIA 타이거즈 전신) 김성한 전 감독은 1982년 프로 원년부터 투수와 타자를 겸한 대표적인 스타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만 마운드에 올랐던 김 전 감독은 투수로서 통산 41경기 등판 15승 10패 2세이브 평균자책 3.02를 기록했다. 하지만, 투·타 겸업이었기에 야수로서 깜짝 등판이라고 보긴 어려운 사례였다.

실질적인 야수의 깜짝 등판 첫 사례는 ‘그라운드 위의 여우’ MBC 청룡(LG 트윈스 전신) 김재박 전 감독이다. MBC 청룡 유격수로 활약했던 김 전 감독은 1985년 7월 27일 잠실 삼성 라이온즈전 10회 초 1대 1로 맞선 1사 만루 위기에서 깜짝 등판했다.

김재박 전 감독은 엠스플뉴스와의 통화에서 “전혀 계획에 없었던 일이었다. 당시 유격수를 보다가 벤치에서 갑자기 마운드로 올라가라고 해서 공을 던졌다(웃음). 웬만한 투수들을 다 소모해서 불안한 데다 비기고 있으니까 점수를 절대 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벤치에선 아마추어 때 내가 투수를 해봤으니까 나에게 공을 넘겼는데 솔직히 자신은 있었다”라며 웃음 지었다.

실제로 김 전 감독의 자신감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김 전 감독은 이해창을 3루 직선타로 잡은 뒤 3루 주자 함학수까지 잡는 더블 플레이로 급한 불을 껐다. 마운드에서 내려간 김 전 감독은 10회 말 1사 만루 기회에서 곧바로 끝내기 안타를 날리면서 결승타 겸 승리 투수를 맛보는 진귀한 기록에 성공했다.

아마추어 시절에 마무리 투수를 해본 경험이 있었으니까 위기 상황인데도 크게 떨리진 않았다. 공을 몇 개 던지면서 연습하니까 곧바로 감이 잡히더라. 속구만 던진 게 아니라 슬라이더와 싱커도 던진 기억이 난다(웃음). 자신감을 크게 느낀 만큼 잘 막고 다음 이닝에서 곧바로 끝내기 결승타를 치는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김 전 감독의 말이다.

한 차례 깜짝 등판 이후 김 전 감독의 투수 등판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김 전 감독은 “1980년대 초반엔 투수와 야수를 같이하는 게 보편적인 추세였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는 야수가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가는 게 보기 안 좋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 뒤로도 나도 투수로서 공을 던지지 않았다. 오히려 OB 베어스와 붙을 때 포수가 없어서 포수를 본 기억은 난다”라며 전했다.


- 김재박 전 감독이 만들었던 두 차례 야수 깜짝 등판 "팬 서비스 차원에서도 긍정적" -

2009년 5월 12일 잠실 SK전에서 9회 말 적시타와 득점으로 극적인 동점에 힘을 보탠 최동수는 12회 말 직접 마운드에 올라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투수로서 등판을 소화하기도 했다(사진=LG)
2009년 5월 12일 잠실 SK전에서 9회 말 적시타와 득점으로 극적인 동점에 힘을 보탠 최동수는 12회 말 직접 마운드에 올라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투수로서 등판을 소화하기도 했다(사진=LG)

공교롭게도 김재박 전 감독은 LG 트윈스 사령탑 재임 시절인 2009년 두 번째 야수의 깜짝 등판 사례를 만들었다. 2009년 5월 12일 잠실 SK 와이번스전에서 당시 LG는 1대 9로 뒤진 9회 말 8득점으로 극적인 동점을 만들어 연장까지 승부를 끌고 갔다. 하지만, 10대 16으로 뒤진 12회 초 투수 우규민이 사구로 퇴장 명령을 받은 탓에 불가피하게 야수를 투수로 올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김 전 감독은 내야수인 최동수를 투수로 기용하기로 했다. 최동수는 2사 1, 3루 위기에서 박경완을 상대로 2구 만에 2루수 내야 뜬공으로 돌려세우면서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투수 등판을 마쳤다.

최동수는 엠스플뉴스 야구 토크쇼 ‘스톡킹’을 통해 “내 별명이 미스터 제로다(웃음). 당시 우규민이 퇴장 당한 뒤 정성훈과 이진영이 마운드 올라와서 자기들끼리 던지겠다고 막 그랬는데 감독님이 나보고 나가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4연타석 홈런 기록이 있던 박경완을 상대로 2구 만에 내야 뜬공으로 잡아 자부심을 느꼈다. 공이 높이 뜨자 손가락질을 한번 해주고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라며 깜짝 등판의 순간을 회상했다.

김 전 감독은 최동수의 투수 기용과 관련한 질문에 “하도 오래전 일이라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웃음). 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야수를 기용한 듯싶은데 어떻게 보면 야수의 깜짝 투수 등판은 팬 서비스 차원에서 이벤트로 보여줄 만하다고 생각한다. 팬들이 즐거워하신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라며 긍정적인 답변을 내놨다.

최동수 이후 야수의 마운드 등판 사례는 가끔 나왔다. 2009년 6월 25일 광주 KIA 타이거즈전에서 SK 와이번스 최 정이 12회 말 3루수에서 투수로 자리를 옮겨 3루타와 볼넷, 그리고 도루를 허용한 뒤 포일로 끝내기 패전 투수가 됐다. 당시 리그 규정에서 무승부는 곧 패배로 인정됐기에 나온 장면이었다.

2019년 9월 29일 수원 삼성 라이온즈전에선 KT WIZ 강백호가 마운드에 올라 1이닝 1볼넷 무실점을 기록했다. 입단 때부터 투·타 겸업이 가능할 수 있다고 평가받았기에 강백호의 투구가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 깜짝 등판은 아니었다.

2020년 5월 9일 대구 삼성전에서 KIA 내야수 황윤호가 최근 한화 강경학·정진호 등판 사례와 유사한 깜짝 등판을 펼쳤다. 당시 2대 14로 크게 뒤진 8회 말 2사 만루에서 황윤호가 마운드에 올라 박해민을 상대했다. 황윤호는 4구 만에 박해민을 포수 파울 뜬공으로 잡고 위기에서 탈출했다. 크게 승부가 기울어진 상황에서 필승조 계투진을 아끼고자 나온 KIA 매트 윌리엄스 감독의 결정이었다.

김근한 기자 kimgernhan@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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