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프로야구, 관중감소와 인기하락에 미래세대 무관심까지 “이대로면 다 죽는다”

-정체된 KBO리그 판을 깰 게임 체인저, SSG 랜더스 등장

-근엄한 구단주 이미지 과감하게 깬 정용진 부회장 행보…SNS 직접 소통에 과격 발언까지

-“SSG 인지도 높이려는 전략” “구단 내부와 임원진 겨냥한 메시지” 등 해석 분분해

창단식에서 엄지를 치켜세운 정용진 부회장(사진=엠스플뉴스)
창단식에서 엄지를 치켜세운 정용진 부회장(사진=엠스플뉴스)

[엠스플뉴스]


프로야구가 위기다. KBO리그 위기론이 대두된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최근 들어 구단 실무자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사상 최고 수준이다. 지난해 시작된 코로나19 여파가 여전한 가운데, 모든 구단이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시즌 개막 한 달이 되도록 광고가 안 팔려 속앓이하는 팀도 있다. 6월쯤에는 선수단 급여를 못 주는 구단이 나올 거란 전망도 나올 정도다.

야구 인기도 예전 같지 않다. 한때 2%는 가볍게 넘겼던 중계방송 시청률이 이제는 1%만 넘어도 대박으로 통한다. 코로나19만 가라앉으면 구름 관중이 몰려올 줄 알았건만, 30% 입장 경기에 800명이 들어온 구장도 있다. 실내시설은 무제한 입장을 허용하면서 야구장만 목 조르는 불합리한 정책 탓에 기껏 관중을 받아도 부대수입은 그림의 떡이다. KBO는 정부 눈치만 보고, 방역 당국은 야구에만 다른 잣대를 들이댄다.

SNS로 팬과 직접 소통…지금까지 이런 구단주는 없었다

플로깅 운동에 동참한 정용진 구단주(사진=정용진 부회장 SNS)
플로깅 운동에 동참한 정용진 구단주(사진=정용진 부회장 SNS)

더 큰 문제는 이제부터다. 2년 전 잘못 맺은 뉴미디어 계약 때문에 안 그래도 야구에 관심 없는 10·20세대가 야구에서 더욱 멀어질 공산이 커졌다. 뉴미디어 중계권을 보유한 통신·포털 컨소시엄의 저작권 계엄군들이 각종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팬들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다. SNS와 온라인 활동, 각종 밈(meme) 생산에 친숙한 1020 세대를 야구로 끌어들이긴커녕 오히려 야구에서 관심을 끊도록 떠밀고 있다.

2000년대 중후반 프로야구 붐은 WBC, 베이징 올림픽 이전에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와 블로그에서 시작됐다. 야구팬들이 다양한 패러디물과 움짤을 만들고 공유하면서 야구가 즐거운 ‘놀이’이자 유행이 됐고, 야구에 관심 없던 젊은 세대가 야구장으로 유입되는 선순환이 이뤄졌다. 이런 팬들의 문화를 위협하고 탄압하는 환경에서 야구 인기를 기대하긴 어렵다. 한 야구 관계자는 이를 두고 “SK가 야구단 매각을 앞두고 프로야구판에 큰 오물을 투척했다”고 비판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KBO와 10개 구단은 복지부동이다. 위기 해결을 위해 앞에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정지택 총재는 취임 이후 어디서 뭘 하는지 소식이 없다는 점에서 점점 전임 총재와 닮아간다. 취임 100일 기념 기자회견을 열려다 KBO 실무자 반대로 무산됐다는 얘기도 들린다. 코로나19 위기를 기회로 삼아 창조적 파괴든 일대 혁신이든 뭐라도 해야 했는데 지난 1년을 허송세월로 보냈다.

야구 위기를 피부로 느끼는 야구단 실무진들만 발을 동동 구른다. 하지만 실무자나 구단 임원 수준에선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40년간 그대로였던 판을 완전히 뒤엎으려면 야구단을 소유한 그룹 오너들이 나서야 하는데, 이분들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문제다. 야구단에 관심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구단주가 6년 만에 야구장에 나와서 7회까지 보고 돌아간 게 화제가 될 정도니 말 다 했다. 다들 뒷짐 진 채 헛기침하며 체면만 차린다. 파티는 계속되지만, 배는 점점 가라앉고 있다.

이런 가운데 먼저 웃옷을 벗고, 팔을 걷어붙이고 앞에 나선 사람이 있다. SK 와이번스를 인수해 SSG 랜더스를 창단한 신세계그룹 정용진 부회장이다. 앞에 나서기 꺼리는 점잖으신 분들만 가득한 야구판에서 정 부회장은 유별난 존재다. 개인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자사 제품을 직접 홍보하고, 경쟁사 매장 방문 후기를 남긴다. 팔로워들의 질문에 직접 댓글로 소통도 한다. 기존 재벌 1대, 2세 근엄한 총수들에게선 보기 힘들었던 행보를 통해 대중들에게 마치 ‘아는 형’ 같은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간다. 물론 보여지는 것과 실상은 다르겠지만.

정 부회장의 독특한 캐릭터는 야구단을 인수한 뒤에도 여전하다. 시즌 개막전을 앞두고 정 부회장은 음성형 SNS ‘클럽하우스’에서 유통 라이벌 롯데를 겨냥한 도발적 발언으로 화제를 모았다. “롯데는 본업(유통)과 야구를 서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 “경기에선 우리가 질 수 있어도 마케팅에서 반드시 이길 것이다” “걔네(롯데)는 울며 겨자 먹기로 우리를 쫓아와야 할 거다”.

전례 없는 야구단 오너의 도발로 SSG 랜더스와 롯데 자이언츠의 개막전 분위기가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4월 4일 열린 인천 개막 경기는 단골 시청률 1위 KIA의 개막전을 제치고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정 부회장의 도발은 최근 롯데에 더해 키움 히어로즈로 대상을 넓혔다. 정 부회장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야구장 방문 다음 날인 28일 클럽하우스에 등장해 “야구에 관심 없는 동빈이 형이 6년 만에 야구장을 찾은 건 내 도발 덕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동빈이 형은 원래 야구에 관심이 없었는데 내가 도발하니까 제스처를 취했다”며 “야구를 좋아하면 그렇게 (7회에) 나가지 않는다. 야구를 좋아했다면 지금까지 야구장에 그렇게 오지 않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내가 도발하니까 롯데가 불쾌한 것 같은데, 그럴 때 더 좋은 정책이 나온다. 롯데를 계속 불쾌하게 만들어서 더 좋은 야구를 하게 만들겠다”며 공격을 이어갔다.

키움 히어로즈에 대해선 비속어까지 섞어가며 폭탄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과거 키움이 넥센 시절일 때 (내가) 야구단을 인수하려고 전전긍긍할 때, (넥센 측이) 나를 X무시했다. 자존심이 땅에 떨어질 정도로 내몰았다”고 말했다. 또 “이번에 우리가 키움을 밟았을 때 기분이 좋았다. 이 XXX들 잘됐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허민 이사장과는 개인적으로 친하지만 키움은 발라버리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

정용진 파격 발언, 후발주자 랜더스 인지도 향상 전략? SSG 내부 겨냥한 메시지?

정용진 구단주와 민경삼 SSG 랜더스 대표이사(사진=엠스플뉴스)
정용진 구단주와 민경삼 SSG 랜더스 대표이사(사진=엠스플뉴스)

마치 빅매치를 앞둔 프로레슬러나 UFC 선수 같은 정 부회장의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 구단 마케팅 담당자는 “표현이 다소 거칠지만 정 부회장이 발언한 시점이나 사용한 매체, 발언 내용을 보면 철저하게 계산된 움직임이라고 본다”는 의견을 밝혔다.

“정 부회장은 신동빈 롯데 회장이 야구장을 방문한 바로 다음 날 채팅방을 만들어 소통했다. 삼엄한 경비와 함께 방문해 얼굴만 비추고 사라진 신 회장의 모습과, ‘핫’한 미디어를 이용해 일반 야구팬과 격의 없이 소통하는 정 부회장의 모습은 굳이 어필하지 않아도 대조를 이룬다. 후발주자인 SSG가 순위 1~2위를 다투는 동안 하위권을 맴도는 롯데의 성적도 비교 대상”이란 분석이다.

SSG 랜더스 구단과 신세계그룹 내부를 겨냥해 의도적으로 평소보다 ‘오버’했다는 분석도 있다. 신세계그룹 사정에 밝은 유통업계 관계자는 “그룹 내부에서는 정 부회장이 내부 임원과 기존 SK 와이번스 출신 직원들에게 뭔가 솔선수범해서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고 전했다.

SSG는 창단하면서 기존 SK 와이번스 임직원을 100% 고용 승계했다. 하지만 신세계그룹의 기업문화와 SK 기업문화가 달라 아직 두 조직이 완벽하게 화학적 결합을 이루진 못한 상태다. SSG 랜더스라는 새 옷을 입었지만 랜더스 직원들도 기존 KBO리그 관행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런 가운데 구단주인 정 부회장이 직접 경직된 야구계 문화를 깨부수는 데 앞장섰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앞의 유통 관계자는 “정 부회장은 ‘내가 이렇게 나와서 움직이는데, 당신들 임직원들이 자리만 지키면서 안주할 거야?’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말로 지시해서는 바뀔 것 같지 않으니, 직접 나서서 파격적인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신세계그룹 내부에선 그렇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라 전했다.

용진이형의 광역 도발, 침체한 프로야구에 새 활력…라이벌 롯데도 변화 조짐

27일 잠실야구장을 찾은 신동빈 회장(사진=롯데)
27일 잠실야구장을 찾은 신동빈 회장(사진=롯데)

의도가 어떻든 정 부회장의 광역 도발이 침체하고 정체된 프로야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것만은 분명하다. 당장 정 부회장 발언이 알려진 다음 날 온갖 미디어가 정 부회장과 SSG 랜더스, 롯데 자이언츠 소식으로 뒤덮였다. 순위싸움과 개인타이틀 도돌이표만 그리던 스포츠면에 정 부회장의 발언은 신선한 화제거리였다. 스포츠 매체는 물론 야구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독자인 일간지, 경제지까지 야구 얘기가 등장했다. 야구장과 스포츠면이란 좁은 우물에 머물던 야구의 영역을 넓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정 부회장에게 저격당한 롯데의 변화도 눈에 띈다. 롯데에선 부인하지만, 야구계에선 신동빈 회장의 야구장 방문이 정 부회장을 의식한 행보라고 풀이한다. 모 구단 관계자는 “적어도 그룹 실무진에서 ‘야구장에 한 번 방문하시라’고 조언하지 않았겠느냐. 롯데 모자와 마스크, 점퍼로 중무장한 신 회장의 모습은 정 부회장의 도발에 맞불을 놓는 것처럼 보였다”는 의견을 말했다.

롯데가 시즌 개막을 앞두고 야구단 이름인 ‘자이언츠’를 내건 할인전을 열고, SSG를 다분히 의식한 듯한 ‘원정 가서 쓰윽 이기고 온(ON)’ 이벤트를 연 것도 이런 시각에 힘을 싣는다. 롯데는 5월 5일과 6일엔 자사 서비스 이름을 딴 ‘롯데 ON 시리즈’ 행사도 연다. 야구단과 본업을 연결하는 데 소극적이었던 롯데로서는 큰 변화다. 정 부회장처럼 소매까지 걷어붙이는 정도는 아니라도, 일단 웃옷 벗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푸는 단계에는 도달했다.

구단 마케팅 팀장을 지낸 김경민 4D REPLAY 책임은 “콘텐츠가 살아남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챙겨야 하는 건 고객들에게 널리 회자할 수 있는 화제성이다. 그런 점에서 정 부회장의 행보는 경직된 야구계와 프로스포츠 문화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강조했다.

김 책임은 “워낙 전례가 없다 보니 지금은 낯설게 여기거나 불쾌해하는 반응도 나오지만, 그간 국내 프로구단 중에 정 부회장처럼 구단주가 나서서 오너십을 발휘하는 구단이 있었는지 묻고 싶다. 정 부회장의 행보가 앞으로는 프로야구는 물론 한국 프로스포츠에서 새로운 리더십 모델이 될 거라고 본다”고 밝혔다.

지금 KBO리그는 우아하게 다 같이 죽느냐, 필사적으로 몸부림쳐서 살아남느냐의 기로에 섰다. 여전히 근엄하게 뒷짐지고 헛기침하는 회장님들 사이에서 ‘용진이형’이 웃옷 벗고, 소매 걷고 나섰다. 다른 구단 오너들도, 리그 구성원들도 함께하자고 손짓한다. KBO리그는 이 초대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배지헌 기자 jhpae117@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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