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수준 높고 짜임새 있는 야구로 왕조 이룬 삼성…빅볼로도 스몰볼로도 이겼다

-올 시즌 메가삼성홈런포 부활…팀 홈런 27개로 리그 3위

-홈런에만 의존 안 해…도루와 추가 진루, 스몰볼로 이긴 경기도 많다

-흐뭇한 허삼영 감독 “감독이 말 안 해도 선수들이 스스로 희생한다”

삼성 뛰는 야구의 주역 구자욱과 김지찬(사진=엠스플뉴스 김도형 기자)
삼성 뛰는 야구의 주역 구자욱과 김지찬(사진=엠스플뉴스 김도형 기자)

[엠스플뉴스=대전]

“삼성 왕조시절이요? 그 시절에 제가 없어갖고…”

요즘 삼성 야구에서 과거 왕조 시절 느낌이 나는지 묻자 구자욱은 “잘 모르겠다”며 딴청을 피웠다. 구자욱은 삼성 왕조의 마지막 해인 2015년 1군 무대에 데뷔했다. 그해 삼성은 5년 연속 정규시즌 우승을 달성했지만 한국시리즈에선 우승하지 못했다. 이듬해 ‘라팍’이 개장했고, 프랜차이즈 역사상 가장 길고 잔인한 암흑기가 시작됐다.

구자욱이 기억 못 하는 그 시절 삼성은 수준 높은 야구를 하는 팀이었다. 리그에서 제일 홈런이 잘 나오는 구장을 홈으로 썼고 홈런타자도 많았지만, 결코 큰 것 한 방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선발투수, 불펜투수, 수비력이 강해 한 점 뽑은 뒤 지키는 야구도 잘했다. 방망이가 안 터질 때 도루나 추가 진루, 작전으로 점수를 짜내서 이기는 경기도 많았다. 타격전도 이기고 투수전도 이기고, 홈런으로도 이기고 스몰볼로도 이겼다. 경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든 결국 마지막에 웃는 팀은 삼성이었다.

홈런이 안 터지면? 도루, 추가 진루, 작전으로 이긴다

평발의 고통을 참으며 전력질주하는 피렐라(사진=삼성)
평발의 고통을 참으며 전력질주하는 피렐라(사진=삼성)

올 시즌, 삼성이 다시 1위 자리로 돌아왔다. 삼성은 4월 28일 NC전 승리로 2015년 10월 6일 이후 2,031일 만에 리그 단독 선두에 올라섰다. 지난 5년간 극심한 새집증후군을 겪으며 잃어버렸던 홈런포가 살아났다. 6일 현재 팀 홈런 27개로 NC와 SSG에 이은 리그 3위. 호세 피렐라가 9홈런으로 앞장서고 강민호와 구자욱이 각각 5개를 때렸다. 아직 오재일이 터지기 전인데도 벌써 이 정도다.

그렇다고 홈런에만 의존하지는 않는다. 홈런 외에도 다양한 공격 옵션으로 어떻게든 점수를 만들어서 이기는 경기가 많다. 대표적인 예가 5월 2일 대구 LG전. 이날 삼성은 0대 1로 끌려가다 4회말 구자욱의 홈런으로 동점을 만들었다.

이어 호세 피렐라가 안타로 출루한 뒤 폭투에 2루까지 내달렸다. 올 시즌 삼성은 폭투 시 추가 진루가 26회로 10개 팀 중 가장 많다. 포수인 강민호가 총 6회로 리그에서 1위, 피렐라와 박해민이 4회로 리그 3위다. 허삼영 감독은 “매년 주루파트에서 폭투 나왔을 때 스타트하는 연습을 한다. 일단 출루하면 주루사를 두려워하지 말고 공격적으로 움직이라고 강조한다”고 말했다.

강민호가 볼넷을 얻어 무사 1, 2루를 만들었고 오재일이 끈질기게 파울을 쳐내며 버티다 1루 쪽 깊은 땅볼을 쳐 1사 2, 3루가 됐다. 여기서 이원석의 중견수 플라이 때 3루 주자 피렐라가 홈을 밟았고, 홈 송구를 포수가 놓친 사이에 강민호까지 홈에 들어와 한 점을 더 뽑아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강민호까지 뛰는 야구에 동참하고 있다.

평발의 고통을 감수하고 매 순간 전력 질주와 허슬플레이를 선보이는 ‘피렐라 효과’다. 허삼영 감독은 “피렐라를 보며 모든 선수가 다 영향을 받을 것”이라 했다. 구자욱은 “같은 선수지만 멋있다고 생각하고 존경스럽다”고 말했다. 원태인은 “피렐라가 우리 팀 상승세의 일등 공신”이라며 “피렐라의 헌신적인 플레이를 보고 베테랑인 (강)민호 형까지 허슬 플레이를 보여주니까 자연스럽게 팀 분위기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 젊은 선수들도 덩달아 기세를 타게 된다”고 했다.

3대 4로 뒤진 7회말 다시 동점을 만드는 과정도 인상적이었다. 뛰는 야구와 작전 야구, 벤치의 섬세한 전략이 멋진 조화를 이뤘다. 선두타자 박해민이 안타로 나간 뒤 곧장 2루 도루에 성공했다. 올 시즌 삼성은 팀 도루 25개로 KT에 이어 2위다. 실패는 단 7차례로 78.1%의 높은 성공률을 자랑한다. 도루 8개(실패 0)로 팀 내 도루 1위인 구자욱은 “도루 욕심보다는 갈 수 있는 확실한 상황에 뛰려고 한다. 강명구, 박진만 코치님이 투수들 습관을 잘 잡아주셔서 편하게 도루하고 있다”고 했다.

계속된 1사 3루에 이학주 타석. 여기서 LG가 좌완 김재유로 투수를 바꾸자 삼성은 대타로 김호재를 냈다. 김호재는 초구를 지켜본 뒤, 2구째에 기습적인 스퀴즈 번트로 3루 주자를 홈에 불러들였다. 그리고 대주자 김지찬과 교체됐다. 번트에 능한 김지찬 대신 김호재를 대타로 낸 게 핵심이다. 허삼영 감독은 대타 기용에 상대에게 혼란을 주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인정했다.

허 감독은 “여러 가지를 복합적으로 생각했다. 김호재에게 스퀴즈도 생각하라고 미리 주문했다. 초구 기다리는 걸 봤는데 타이밍을 못 잡기에 어렵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김대유의 속구는 볼 끝이 좋아 우타자도 헛스윙하기 쉽다. 1낫싱 이후 변화구를 예상하고 스퀴즈를 주문했는데 김호재가 침착하게 잘 이행했다”고 말했다. 멋진 스퀴즈 플레이로 흐름을 되찾은 삼성은 결국 8회 2득점 해 주말 3연전을 싹쓸이했다.

왕조 시절과 올 시즌 각종 지표 비교 분석. 숫자는 10개 구단에서 삼성의 순위다(통계=스탯티즈)
왕조 시절과 올 시즌 각종 지표 비교 분석. 숫자는 10개 구단에서 삼성의 순위다(통계=스탯티즈)

5일 대전 한화전에서도 삼성은 ‘작은 야구’로 승리했다. 이날 삼성은 공격이 잘 풀리지 않았다. 1사 1, 3루에서 잘 맞은 타구가 투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가는가 하면, 대량득점 찬스에서 피렐라가 내야뜬공으로 물러나 어린이 팬들의 탄식을 자아냈다.

0대 1로 뒤진 8회초. 1사후 이학주가 내야안타로 출루하자 삼성은 김지찬을 1루 대주자로 기용했다. 김상수의 잘 맞은 땅볼타구가 2루 베이스 뒤쪽으로 향했다. 정은원이 빠르게 움직여 잡아내는 듯 했지만, 발 빠른 김지찬과 김상수를 의식했는지 서두르다 공을 떨어뜨렸다. 주자 올세이프.

삼성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화를 몰아붙였다. 구자욱이 좌완 김범수의 초구 슬라이더를 받아쳐 동점타를 날렸고, 피렐라가 좌측 담장을 맞는 역전 2루타로 이날의 부진을 만회했다. 강민호는 우중간을 가르는 2루타로 쐐기점을 뽑았다. 홈런은 안 터졌지만, 내야안타와 빠른 발로 실마리를 풀어 기어이 역전에 성공한 삼성이다.

“감독이 뭘 안 해도, 선수들이 알아서 희생합니다” 흐뭇한 허파고

허삼영 삼성 감독(사진=엠스플뉴스 김도형 기자)
허삼영 삼성 감독(사진=엠스플뉴스 김도형 기자)

이날 경기에선 삼성의 달라진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 나왔다. 득점으로 연결되진 않았지만, 4회초 무사 2루에서 나온 구자욱의 번트 장면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사실 통계적으로는 팀 내 최고 강타자인 2번타자가 무사 2루에서 번트를 대는 건 해선 안 될 일이다. 그러나 마운드에는 좌완 강속구 투수 라이언 카펜터가 있었고, 구자욱은 올 시즌 좌투수 상대 타율 0.161로 약하다. 구자욱은 초구 스윙 뒤 안타를 치기 쉽지 않겠다고 판단했고, 곧바로 번트로 방향을 바꿨다.

그는 “초구에 내 스윙을 했다가 실패했다. 선취점을 내서 선발 벤 라이블리가 편하게 던지게 해주고 싶었다. 주자를 진루시켜서 선취점을 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번트를 시도했다”고 말했다. 구자욱의 1루 쪽 번트는 내야안타가 됐다.

이날 경기전 허삼영 감독은 “선수들이나 저나 승리를 원한다. 선수들에게 희생을 요구해도 불만이 없다”며 “사실 선수 입장에선 타석을 까먹으면 본인에게 마이너스다. 고과점수는 나올지 몰라도 안타만큼 체감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희생을 요구하지 않아도, 선수들이 스스로 팀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 그런 부분에서 팀이 잘 돌아간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구자욱도 “감독님이 그런 희생을 추구하는 스타일이시기도 하고, 한 점 차 승부에서 자신을 희생해서 진루타를 친다는 마음으로 타석에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피렐라 선수, 강민호 형이 워낙 좋기 때문에 출루를 목적으로 경기하고 있다. 상황상황에 맞게 플레이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허삼영 감독은 “내가 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 선수들이 스스로 알아서 움직여 준다”고 했다. 그는 “작년에는 뭔가 (감독이) 만들려는 게 많았다. 지금은 흐름상 분위기상 선수들이 스스로 움직이고, 열심히 한다. 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있다. 승리할 때의 쾌감과 작은 성취감으로 선수들이 하나로 뭉쳐 있다”며 흐뭇함을 감추지 않았다.

구자욱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힘이 생긴 것 같다. 점수 차가 엄청나게 벌어지지 않는 이상 포기하지 않는다. 투수들이 잘 던지다 보니 그런 경기 자체가 줄었다. 팀 성적도 좋다 보니, 선수들의 자신감이 더 좋은 플레이를 만들고 있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구자욱은 왕조 시절을 기억 못 한다 했지만, 팬들은 요즘 삼성 야구를 보며 그때 그 시절을 간접 체험하는 중이다. 올 시즌 삼성 야구에서 그 시절 향기가 난다.

배지헌 기자 jhpae117@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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