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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Rival)의 어원은 강(river)이다. 라이벌은 치열한 전쟁 중에도 강물이 마르면 강바닥을 아군과 적군이 함께 판데서 유래했다. 경쟁을 하면서도 '운명 공동체'가 돼야 하는 것. 그것이 라이벌의 운명이다.

한국 프로야구사에서 최고의 라이벌은 선동열과 최동원일 것이다. 하지만, 타자로 치면 양준혁과 이종범일지 모른다.

두 이는 고향부터 달랐다. 양준혁은 대구, 이종범은 광주에서 태어났다. 포지션도 판이했다. 양준혁은 고교 시절부터 이름난 외야 거포였고, 이종범은 아마무대를 평정한 발 빠른 유격수였다.

양준혁과 이종범의 본격적인 라이벌 구도가 형성된 건 1993년부터다. 이해 두 이는 나란히 프로에 데뷔했다. 야구팬들도 이때부터 양준혁과 이종범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신명철 스포츠서울 전 국장은 “두 선수의 스타일이 원체 달라 더 흥미진진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고 회상했다. 사실이다. 양준혁이 험한 산길을 내달려 정상에 섰다면 이종범은 바람이 돼 정상을 밟은 이였다.

험난한 야구인생을 걸어온 양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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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혁의 야구인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양준혁은 초교 시절 몹시 가난했다. 사촌형 양일환(삼성 코치)을 보며 야구선수의 꿈을 키웠지만, 현실은 엄혹했다. 야구부 회비는 고사하고, 글러브 살 돈도 없었다. 그런 양준혁이 야구를 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는 만류했다. 하지만, “오늘 죽더라도 야구를 꼭 하고 싶다”는 어린 아들의 눈물에 어머니는 쌈짓돈을 내밀었다.

어머니의 희생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양준혁은 중학 시절부터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가고 싶던 고교에 가지 못했다. 대신 대구상고에 입학했다. 대구상고의 장학 혜택이 더 많았던 까닭이다.


대구상고를 졸업할 즈음, 양준혁은 서울의 명문대들로부터 입학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이때도 그는 가고 싶은 대학 대신 대구 영남대에 입학했다. 고교 동기들을 함께 입학시키겠다는 영남대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부모님과 떨어지기 싫었다. ‘나’보다 친구와 가족을 생각했던 양준혁은 자신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탄탄대로를 달리던 양준혁에게 거대한 고난이 닥친 건 영남대를 졸업할 무렵이던 1991년이었다. 당시 삼성은 ‘88학번’ 선수 가운데 유독 실력이 출중했던 양준혁을 스카우트하려 했다. 그러나 정작 삼성이 선택한 1차 지명자는 계명대 투수 김태한이었다. 왼손 투수 부족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던 삼성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삼성은 “방위 복무를 마치고 나서, 다시 신인지명회의에 나오면 그때 1차 지명하겠다”며 양준혁을 달랬다. 하지만, 양준혁의 실망감은 컸다.


2차 우선지명권이 있던 두산은 삼성이 양준혁을 포기하는 듯하자 양준혁에게 40평 아파트와 백지수표를 내밀었다. 하지만, 양준혁은 “삼성 입단이 내 유일한 목표이자 꿈”이라며 두산 제의를 뿌리치고 상무에 입대했다.

1993년 뒤늦게 프로에 데뷔한 양준혁은 1998년까지 삼성 타선을 이끌었다. 그러나 1999년 해태로 트레이드되는 아픔을 겪었고, 2000년 다시 LG로 트레이드됐다. 2001년엔 선수협 주동자로 몰리며 은퇴 위기까지 몰렸다. 이때 양준혁은 메이저리그 뉴욕 메츠의 입단 제의를 받고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KBO리그를 지켰다. 기회에 편승하기보다 정도를 걸은 양준혁은 우여곡절 끝에 2002년 친정팀 삼성에 복귀하며 2010년 은퇴 때까지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우뚝 섰다.

바람 같은 야구인생을 살았던 이종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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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혁이 굴곡 많은 야구인생을 살았다면 이종범은 거칠 게 없었다. ‘바람의 아들’이란 별명처럼 그의 야구인생 자체가 바람이었다. 아버지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야구를 시작한 이종범은 야구 명문 광주일고를 졸업하고서 건국대에 입학했다. 당시 건국대는 이종범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프로구단 이상으로 이것저것을 신경 썼다.

건국대 시절부터 국가대표 주전 유격수로 활약한 이종범은 해태 1차 지명을 받고, 광야의 바람처럼 거칠 것이 없는 출세 행진을 이어갔다.

1993년 입단 첫해 타율 2할8푼 16홈런 53타점 73도루를 기록한 이종범은 ‘5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야구 천재’로 불렸다. 프로야구 흥행의 바람몰이 역할을 담당한 것도 그였다. 하지만, ‘숙명의 라이벌’ 양준혁에게 그해 신인왕을 뺏기며 쾌속질주에 잠시 제동이 걸렸다.

그러나 이종범은 이듬해 타율 3할9푼3리 19홈런 84도루로 프로 데뷔 2년 차에 정규 시즌 MVP에 올랐다. 여기다 한국시리즈 MVP 2회, 미스터 올스타에 한차례 오르며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로 부상했다.

이종범은 1998년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했다. 한국 프로야구 출신 타자로는 처음으로 국외 리그에 진출한 쾌거였다.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일본 진출이 실패로 끝났지만, 2002년 KIA로 돌아와서는 '바람의 아들'다운 맹활약을 펼쳤고,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한국이 4강에 진출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라이벌’에서 ‘상생의 파트너’로 변신한 양준혁과 이종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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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가 인생이고, 자아였던 두 이 가운데 먼저 야구계를 떠난 쪽은 양준혁이었다. 2010년 양준혁은 시즌 도중 은퇴를 선언했다. “후배들에게 기회를 양보하겠다”는 게 이유였다. 물론 코칭스태프의 세대교체론이 은퇴 결심에 큰 영향을 미친 게 사실이었다.

양준혁은 은퇴를 결심하기 전, 기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현역생활 지속과 은퇴를 두고 장고를 거듭했다. 결국, 은퇴로 가닥을 잡은 양준혁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세월에 굴복해 은퇴한다. 하지만, 이종범만은 이젠 양준혁이 아닌 세월을 라이벌 삼아 현역에서 오래 뛰었으면 좋겠다.”

양준혁은 현역 시절 내내 ‘이종범이 없었다면’이란 가정과 싸워왔다. 원망과 시샘을 할 법도 했다. 하지만, 양준혁은 은퇴를 앞두고 자신의 최대 라이벌 이종범이 계속 그라운드에서 뛰길 진심으로 바랐다. 어쩌면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종범이 이어가길 바라는 눈치였다.

이종범도 마찬가지였다. 양준혁의 은퇴 소식이 알려졌을 때 누구보다 서운해했던 건 이종범이었다. 이종범은 “양준혁 선배는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였다. (양)준혁이 형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도 있는 것”이라며 “경험과 경륜이 패기와 신예보다 우월할 수 있다는 것을 준혁이 형 대신 내가 증명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종범의 다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2012시즌을 앞두고 이종범은 은퇴를 선언했다. 역시 팀의 세대교체를 바라던 코칭스태프의 의중이 크게 반영된 결과였다.

두 이는 은퇴 후, 한동안 각자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 지난해부터 한 방송사에서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젠 ‘더블 해설’로 함께 마이크 앞에 서고 있다.

어쩌면 두 이는 현역 시절부터 라이벌이 아닌 동반자였는지 모른다. 라이벌은 시대가 붙인 수식어일뿐, 운명은 그들에게 ‘야구’라는 강물을 함께 파는 동반자가 될 것을 요구했는지 모르겠다.

예전처럼 라이벌이 보이지 않는 프로야구를 보며 양준혁-이종범 같은 시대의 라이벌이 나오길 꿈꾸는 건 기자만이 아닐 것이다. 한국 프로야구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운명 같은 라이벌'이 자주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엠스플뉴스 박동희 대표 기자 (dhp1225@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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