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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스플 인터뷰] 두 발가락 ‘절단’ 오장은 “축구에 미쳐 아픈 것도 모르고 뛰었다”

  • 기사입력 2019.09.09 07:50:02   |   최종수정 2019.09.09 05: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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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 무렵 불의의 사고로 엄지와 검지 발가락 일부를 잘라낸 오장은, 태극마크를 달았던 인간승리 주역 

-“축구에 미쳐 아픈 것도 모르고 뛰었습니다”

-10대 때 벨기에와 일본 축구 경험한 오장은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소중한 추억”

-“대구 FC 시절 내 별명이 박종환 감독님 ‘양아들’이었습니다”

-“선수 시절 돌아보면 나는 복 받은 사람”

 

올여름 이적 시장에서 새로운 팀을 찾지 못한 뒤 은퇴를 선언한 오장은(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올여름 이적 시장에서 새로운 팀을 찾지 못한 뒤 은퇴를 선언한 오장은(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동탄]

 

어린 시절 불의의 사고로 엄지와 검지 발가락 일부를 잘라냈다. 그라운드를 누빌 땐 통증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축구 선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2006년엔 태극마크까지 달았다. 2018년까지 K리그2 대전 시티즌 유니폼을 입고 푸른 잔디를 누빈 오장은의 얘기다.  

 

오장은은 올여름 공식 은퇴를 선언했다. 유종의 미를 위해 막판까지 새 소속팀을 찾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2014년부터 지난 시즌까지 부상으로 28경기(1골)밖에 소화하지 못한 까닭이다.  

 

K리그 통산 291경기에서 뛰며 24골 21도움을 기록한 오장은은 선수에 대한 미련은 없다고 말한다. 3월 독일로 건너가 몸을 만들고, 여름엔 K리그 구단을 돌며 막판까지 온 힘을 다했기 때문이다. 

 

엠스플뉴스는 제2의 삶을 준비하고 있는 오장은을 만났다. 지금부터 부상에 대한 걱정이 없어 마음이 아주 편하다는 오장은의 파란만장한 축구 인생으로 들어가 보자.

 

불의의 사고로 잘려 나간 발가락 일부···오장은 “축구에 미쳐 아픈 것도 모르고 뛰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엄지와 검지 발가락 일부를 잘라낸 오장은의 발(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불의의 사고로 엄지와 검지 발가락 일부를 잘라낸 오장은의 발(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인간승리 스토리로 유명한 선수였습니다. 어릴 적 발가락 일부가 잘려 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유치원에 다니던 때로 기억합니다. 외할아버지 댁에 놀러 갔을 때였죠. 외할아버지께선 벽 보수 공사를 하고 계셨어요. 그런 쪽에 관심이 많은 까닭에 슬리퍼를 신고 구경했죠. 그러다가 뭐가 잘못됐는지 벽이 무너졌습니다. 내 쪽으로 벽돌이 막 떨어지는 데 제대로 피하지 못했죠. 지금도 기억나는 건...

 

말씀하세요. 

 

당황해서 슬리퍼가 벗겨졌어요. 그때 그냥 뛰쳐나갔으면 크게 다치지 않았을 수 있는데 그걸 다시 신었습니다. 그때 벽돌이 제 왼발 엄지와 검지 발가락에 딱 떨어진 거죠. 병원에선 칼로 잘리듯이 잘렸으면 다시 붙일 수 있다고 했는데... 내 발가락은 완전히 문드러져서 붙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엄지발가락은 한 마디, 검지는 일부를 잘라냈죠.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사고였습니다.

 

병원에선 ‘발가락이 조금 더 잘려 나갔으면 걷는 데 지장이 있을 수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천만다행이었죠. 수술 마치고 치료에 충실하면서 큰 문제 없이 지냈던 거로 기억해요. 

 

일상생활엔 문제가 없다지만 오장은은 축구 선수로 성장했습니다. 

 

일찍부터 운동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축구화를 신으면 발가락이 아프긴 했지만, 꿈을 막을 순 없었죠.

 

축구를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습니까. 

 

내가 제주도 출신이에요. 원래는 한라산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토평초등학교에서 육상을 했었죠. 4학년 때 서귀포시에 있는 초등학교 축구부 코치께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습니다. 달리기가 빨랐던 제가 마음에 든다고 했죠. 친구들과 축구를 즐겼던 까닭에 기분이 아주 좋았어요. 축구를 정식으로 배우면 어떨까 궁금하고 설렜죠. 하지만, 한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어떤?

 

버스로 10분 거리인 학교로 전학 가는 게 두려웠습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게 무서웠어요(웃음). 혼자서 깊은 고민 끝 전학을 선택한 건 축구에 대한 마음이 그만큼 컸다는 거죠.      

 

깊은 고민 끝 시작하게 된 축구, 어땠습니까. 

 

하루하루가 설렜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축구를 배운다는 게 아주 좋았어요. 초교 시절 내내 쉬는 시간마다 볼을 들고 나가서 축구를 했죠. 점심시간에도 친구들과 볼을 찼고요. 수업을 마치면 정식 축구부에서 축구를 배웠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면 개인 운동까지 했어요. 쉽게 말해 축구에 미친 아이였습니다(웃음).   

 

친구들과 마음 편히 즐기는 축구와 정식 축구부에서 볼을 차는 건 다르지 않았습니까. 

 

축구부에 들어오기 전 육상을 했죠. 어릴 땐 달리기 빠른 게 최고입니다(웃음). 처음 맡은 포지션이 윙 포워드였어요. 툭 치고 달리면 따라올 자가 없었죠. 중학교 진학 뒤엔 스트라이커로 포지션을 바꾸면서 골을 많이 넣었습니다. 유소년 시절엔 매일 웃으면서 재미있게 축구를 했던 거 같아요. 

 

어릴 적부터 잘 나갔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스카우트 제의는 없었습니까. 

 

서울에 있는 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많이 받았죠. 실제로 고교 진학은 서울로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제주도에서 성장할 당시만 해도 한 가지 문제가 있었어요. 제주도 출신 선수는 성인이 될 때까지 이곳에서 성장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던 거죠. 

 

그렇다면 프로 데뷔 전까지 고향인 제주도에서 쭉 성장한 겁니까. 

 

중학교 3학년 말쯤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전학을 갔어요. 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정착에 실패했고 다시 제주도로 와야 하는 상황에 놓였죠. 그런데 제주도에서 저를 받아주지 않는 겁니다. 축구를 그만둬야 하는 위기 상황에 놓인 거죠. 그러던 중에 한 에이전트를 통해서 벨기에 유학 프로그램을 접하게 됐어요. 

 

벨기에 유학 프로그램이요?  

 

당시엔 지금처럼 유럽에서 뛰는 선수가 흔치 않았어요. 막연한 환상이 있었죠. 당장 뛸 팀을 찾아야 하는 시기기도 했습니다. 큰 고민 없이 벨기에로 떠났어요. 벨기에뿐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테스트를 받았죠. 그러다가 벨기에 2부 리그 소속이었던 몰렌벡 유소년팀에 입단해 볼을 차기 시작했습니다. 

 

서울 유학 실패 후 찾게 된 벨기에, 선진 축구를 몸소 체험하다

 

2008 베이징 올림픽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볼을 빼앗기 위해 몸을 날리고 있는 오장은(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08 베이징 올림픽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볼을 빼앗기 위해 몸을 날리고 있는 오장은(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고교 진학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유럽에서 선진 축구를 배우게 됐습니다.  

 

신세계였습니다. 유럽이 왜 세계 축구의 흐름을 주도하는지 확실하게 알았죠. 선수들 마인드부터가 달랐습니다. 운동장 안에선 말 그대로 전쟁이에요. 둘도 없는 친구 사이라도 운동장에선 부상이 우려되는 태클을 서슴없이 가하고 욕도 주고받죠. 더 충격적이었던 건 훈련이 끝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이었습니다. 

 

유럽 선수들의 기량은 어땠습니까. 

 

기본기가 아주 탄탄했습니다. 화려한 기술은 한국 선수들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기본적인 드리블, 패스 등에선 유럽 선수들이 훨씬 우위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게요. 유럽 선수들은 패스 강도와 관계없이 볼을 받고 다음 동작으로 연결하는 게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반면 한국 선수들은 패스를 제대로 받지 못해 다음 동작에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죠. 

 

기본기 차이가 가져오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훈련 수준이 달라집니다. 기본기가 탄탄하면 수준 높은 훈련이 가능해요. 수비 지역에서부터 짧고 빠른 패스로 빌드업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죠.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실수가 지속해서 발생하면 훈련이 어렵습니다. 유럽 선수들은 어릴 적부터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한 훈련을 진행하다 보니 성인이 됐을 때 더 높은 수준의 축구를 구현할 수 있는 거죠. 

 

높은 수준의 축구를 배울 수 있는 건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하지만, 중학교 때까지 제주도에서 가족과 함께 지냈어요. 낯선 땅에서 축구하며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습니다. 외로웠어요. 제주도에선 어머니, 아버지가 많은 걸 챙겨줬었는데 여기선 모든 걸 혼자 해야 하니까 매일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죠. 결국 6개월을 버티다가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선진 축구를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후회는 없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유럽에서 축구를 배운 게 아주 큰 도움이 됐고요. 곧바로 수원 삼성 2군에도 입단했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수원 스카우트분께 관심을 받았어요. 그분이 벨기에에서 돌아온 이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던 내게 연습생으로 프로에 입문할 기회를 주셨죠.  

 

그 당시 수원은 한국판 레알 마드리드로 불리지 않았습니까. 

 

전설로 불리는 ‘고데로 트리오(고종수-데니스-산드로)’가 있던 때죠(웃음). 이운재, 최성용, 서정원, 이기형 등 내로라하는 선배들을 보는 것만으로 꿈같았습니다. 2군엔 신인 선수였던 (김)두현이 형과 (조)성환이 형이 있었죠. 유럽에서 축구를 배우고 와서 한창 자신감이 붙던 때 또 다른 세계를 경험했어요.

 

또 다른 세계요?  

 

윤성효 감독께서 2군을 지도했었는데 운이 좋게도 많은 경기를 뛰었습니다. 하지만, 프로는 정말 달랐어요. 당장 K리그에서 뛰어도 문제가 없는 기량을 갖춘 선수가 즐비했습니다. 프로답게 몸을 관리하는 능력도 남달랐죠. ‘괜히 프로가 아니구나’라는 걸 크게 느꼈습니다(웃음). 그러던 중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2군이었지만 출전 시간을 늘려가며 자리를 잡가던 중에 일본 쪽 에이전트에게 연락이 왔어요. ‘(오)장은아, 일본에 한 번 가보자’고 했죠. 고등학생 때입니다. 또 흔들렸죠. 많은 한국 선수가 일본에서 뛴 시기였고 선진 축구 문화를 받아들인 J리그였던 까닭에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렇게 연습생으로 수원에 들어온 지 두 달 만에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제주도-서울-벨기에-수원을 거쳐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처음 테스트를 보러 간 곳이 FC 도쿄였습니다. 공항에 도착했는데 구단 직원이 나와 있었어요. 구단에 짐을 풀자마자 U-18 선수들과 훈련을 했죠. 그런데 축구가 너무 쉬운 겁니다. 

 

축구가 쉽다?

 

벨기에에서 선진 축구 배우고 수원에선 2군이긴 했지만 프로 선수들과 볼을 찼습니다. 18세 이하 선수들보단 확실히 우위에 있었던 거죠. 연습 경기를 뛰는 데 마음먹은 대로 했습니다. 그걸 감독께서 보시곤 ‘내일부터 바로 1군에서 훈련하자’고 했죠. 그렇게 도쿄와 계약을 맺고 일본에 안착하게 됐습니다. 

 

프로 생활의 시작. 만 16세 8개월에 J리그에 데뷔하다

 

오장은은 16세 8개월에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오장은은 16세 8개월에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그때가 2001년, 고교생 때였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고교생이었죠(웃음). FC 도쿄 1군에 갔는데 충격적이었습니다. 벨기에와 수원 2군에서 한층 성장해 ‘도쿄 U-18 선수들은 아무것도 아니구나’란 생각을 전날까지 했어요. 그런데 1군 훈련을 해보니까 무서웠습니다. ‘큰일 났다. 잘못하면 성장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시기를 그냥 떠나보낼 수도 있겠다’란 생각이 들었어요.

 

1군은 또 달랐습니까.    

 

벨기에 선수들이 가지고 있는 탄탄한 기본기에 수원 2군 선수들의 피지컬과 기술이 접목돼 있었습니다. 연습할 때 볼을 한 번도 못 잡았어요. 솔직히 텃세도 심했습니다. 한국 고교생이 우리랑 같이 뛰겠다는데 좋게 볼 리가 없었죠. 패스를 안 줘요. 어쩌다가 볼을 잡아서 실수라도 하면 호되게 질책하고 무시했습니다.   

 

첫인상은 강렬했지만, 일본 생활의 시작은 순탄하지 않았네요. 

 

벨기에에서 오랫동안 버티지 못하고 돌아온 경험을 떠올렸습니다. 수원 2군을 떠나 일본으로 오기까지의 고민과 결심도 돌아봤죠. 이번엔 포기할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고 다짐했죠.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습니까. 

 

그라운드에선 내가 잘하는 걸 보여줘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다음날부터 엄청나게 뛰었어요. 벨기에 선수들이 그랬던 것처럼 연습장에서 죽자 살자 덤볐습니다. 몸으로 강하게 부딪치고 태클했죠. 부상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어머니께 일본어 문제집 보내 달라고 해서 공부도 꾸준히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TV를 틀어놓고, 사전을 찾아가며 신문을 읽었죠.  

 

변화가 있었습니까. 

 

일본 선수들이 조금씩 나란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패스를 주기 시작했고, 실수했을 땐 격려도 해줬죠. 선수들에 먼저 다가가니까 대화에도 끼워줬습니다. 살아남아야겠다는 절실함이 일본 선수들의 마음을 연 거죠. 

 

그런 노력의 결실일까요. 16세 8개월에 J리그에 데뷔했습니다. 그 당시(2002년) J리그 최연소 출전 기록이었어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감바 오사카와의 경기였는데 큰 점수 차(0-5)로 벌어진 상황이었어요. 감독께서 벤치에 앉아있던 내게 출전 기회를 줬고, 엄청나게 뛰었습니다. 공만 본 거 같아요. 그러다가 머리를 다쳤죠. 

 

머리요?

 

내 볼이 아닌 상황에서 머리를 들이밀었어요. 상대의 발에 머리가 맞으면서 피가 났죠. 이른바 ‘붕대 투혼’을 선보였습니다. 다른 선수들은 큰 점수 차에 전의를 상실했는데 한국에서 온 어린 선수는 죽자 살자 뛰니 팬들께서 큰 박수를 보내주셨죠. 그때부터 모두가 오장은이란 선수를 인정해준 거 같아요.    

 

하지만, 일본에선 3시즌 간 13경기 출전에 그쳤습니다. 

 

현실이었죠. 당시엔 아시아 쿼터가 없었어요. 브라질 선수와의 경쟁에서 이겨야 출전 기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2군에서 뛴 시간이 길었어요. 하지만, 후회하지 않습니다. 2군에서 주장 완장을 차기도 했고 많은 걸 배웠어요. 한국과 벨기에에서 배우지 못한 짧고 빠른 패스 중심의 축구를 습득하면서 한층 성장할 수 있었죠.  

 

‘오짱’ 오장은, 박종환 감독이 이끌던 대구의 별로 떠오르다

 

대구 FC 시절 한국 축구 대표팀에 데뷔한 오장은(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대구 FC 시절 한국 축구 대표팀에 데뷔한 오장은(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05년 일본 생활을 마무리하고 대구 FC에 입단했습니다. 

 

FC 도쿄에서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하던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했어요. J2로 임대를 가서 경험을 쌓으란 거였죠. 하지만, 당시 J2리그는 생소했어요. 고심 끝 뛸 수 있는 K리그 팀으로 가서 마음껏 그라운드를 누비자고 결심했죠. 그때 손을 내민 게 2003년 공식 창단한 대구였습니다.  

 

한국 U-20 축구 대표팀에서도 주축 선수로 뛰었습니다. 신생팀 대구 외 영입 제안을 한 팀은 없었습니까. 

 

조금 있었죠(웃음). 연습생으로 있었던 수원 삼성과도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하지만, 그때의 수원은 어린 선수를 키워주는 팀이 아니었던 까닭에 협상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죠. 당시 20살이었습니다. 박종환 감독께서 강력한 구애를 보냈고, 뱀의 머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대구행을 결심하게 됐죠.  

 

20살인데 경험은 베테랑 선수 못지않았습니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딱 맞습니다. 대구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축구를 했어요. 처음엔 너무 힘들었습니다. 자유로운 분위기였던 도쿄에 있다가 한국에서도 최고로 타이트한 팀에 오니까 죽을 맛이었죠. 박종환 감독께선 별말이 없어도 선수단을 장악하는 카리스마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축구는 어떻게 달랐습니까. 

 

11:11 맨투맨 시스템을 아십니까(웃음). 처음엔 ‘뭐 이런 축구가 다 있나’ 싶었어요. 실제로 최전방 공격수부터 골키퍼까지 맨투맨을 붙였습니다. 90분 내내 자기 마크맨만 책임지면 돼요. 오른쪽 풀백이 첫 포지션이었던 저는 상대 왼쪽 공격수만 쫓아다녔죠. 악바리 근성이 있는 까닭에 곧잘 따라다니긴 했습니다. 

 

11:11 맨투맨 축구, 생소합니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어요. 후반 중반까지 상대 왼쪽 공격수를 꽁꽁 묶었어요. 그랬더니 상대 벤치에서 이 선수를 오른쪽으로 돌리는 겁니다. 그때부터 우리팀 벤치에서 난리가 나기 시작했죠. 내가 반대편으로 이동하지 않는 게 이유였습니다. 90분 내내 자기가 맡은 선수를 막는 게 가장 중요했어요.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축구죠(웃음).      

 

벨기에와 일본 등을 거치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성장해 온 오장은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선 감독께서 추구하는 축구에 적응하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힘들어서 심리 상담을 받은 적도 있어요. 그때 그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네가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선 무조건 뛰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감독의 말을 따라야 한다. 선택과 책임은 네 몫이다’란 말이었죠. 그때부터 박종환 감독님의 양아들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박종환 감독 양아들이요?

 

세계에서 맨투맨 전술을 가장 잘 수행하는 선수가 되기 위해 엄청나게 뛰었습니다. 감독께서 ‘장은아, 오늘은 쟤다’라고 하면 그 선수를 완전히 지워버렸죠. 그라운드에서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었어요. 거기다 공격력까지 갖췄다 보니까 공격 포인트도 곧잘 올렸습니다. 이후 감독께선 딱 한 마디 하셨습니다. 

 

어떤?

 

‘장은이, 네 마음대로 하고 나와’라고. 팀에서 그런 말을 듣는 건 저 하나였습니다. 감독께선 아침 밥상 위에 올려져 있는 스팸 두 개도 제게 주셨어요. ‘장은이, 이거 가져가’라시면서 저를 참 예뻐했습니다. 형들이 항상 부러워했고, 양아들이란 별명이 탄생하게 됐죠. 저는 그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 더 잘해야 한다고 다짐했고요.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건 축구를 처음 시작한 초교 4학년 때부터 공격 포지션을 소화했습니다. 수비를 전문적으로 배운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일본에서 수비를 배웠습니다. 압박 축구의 개념을 정립한 것도 도쿄에 있을 때였죠. 처음엔 압박이 뭔지 수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알지 못했어요. 열심히만 뛰었습니다. 그때 도쿄 코치께서 수비의 기본과 압박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차근차근 알려주셨죠. 이 시절이 없었다면 대구에서의 활약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대구에서 공·수 능력을 두루 갖춘 맹활약을 보이면서 한국 축구 대표팀에 발탁됐습니다. 

 

2006년 9월 24일 전북 현대와의 경기에서 생애 첫 해트트릭을 기록했어요. 그 경기를 한국 축구 대표팀 핌 베어벡 전 감독이 지켜봤죠. 운이 좋았던 거 같아요(웃음). 감독께선 전북에서 뛰던 (염)기훈이 형을 보러 온 거였습니다. 특별히 신경 써서 한 건 아니었지만, 박종환 감독께서 큰 신뢰를 보내준 까닭에 자신감은 있었어요. ‘어딜 가든 내 몫을 할 수 있다’는. 

 

한국 축구 대표팀 유니폼을 입는 건 모든 선수의 꿈입니다. 

 

연령별 대표(U-20·23)를 거치긴 했지만, A 대표팀은 확실히 달랐죠. 처음 들어갔을 때부터 느꼈어요. 훈련장에서부터 긴장감이 넘칩니다. 수준도 아주 높고요. 2006년 10월 8일 가나와의 친선경기에선 데뷔전도 치렀습니다. 1-3으로 패하긴 했지만, 마이클 에시엔처럼 세계적인 선수와 기량을 겨눈 뜻깊은 순간이었죠. 

 

데뷔전부터 베어벡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은 덕분일까요. 2007년도엔 AFC(아시아축구연맹) 아시안컵에도 출전했습니다. 

 

3경기밖에 뛰지 못했지만 많은 걸 배웠습니다. 베어벡 감독께선 많이 뛰진 않지만 아주 효율적인 축구를 구사했거든요. 이전엔 배우지 못한 축구였죠. 체력을 꼭 필요할 때만 썼어요. 한국보단 기본기가 탄탄한 유럽 선수들이 잘 구현할 수 있는 축구였던 거 같아요. 

 

베어벡 감독은 아시안컵 이후 지휘봉을 내려놓았습니다. 

 

베어벡 감독 축구의 핵심은 볼 컨트롤이었습니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5m 앞으로 뛰쳐나가면 안 되는 축구였어요. 한 발 이동해 볼을 잡고 다음 동작으로 연결해야 했죠. 안정적인 볼 터치와 빠른 판단 및 패스가 필수였습니다. 이런 스타일은 유럽 선수들에 더 적합할 것으로 판단한 건 이 때문이죠.  

 

2008년엔 U-23 대표팀 소속으로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했습니다. 

 

올림픽은 월드컵 다음으로 큰 대회입니다. 그런 무대를 누빌 수 있다는 건 아주 큰 영광이죠. 하지만, 개인적으론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몸 상태가 완벽하지 않았고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았거든요. 확실한 건 성과와 관계없이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를 다녀오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시안컵과 올림픽을 치르면서 정말 많은 걸 배웠어요. 

 

정상급 선수로 올라선 오장은, ‘철퇴 축구’ 앞세운 명가 울산에 합류하다

 

2007년 울산 현대 유니폼을 입은 오장은(사진=울산 현대)

2007년 울산 현대 유니폼을 입은 오장은(사진=울산 현대)

 

대구 FC에서 2시즌을 뛰며 정상급 선수로 올라섰습니다. 2007년부턴 K리그 명가 울산 현대 유니폼을 입었어요. 

 

2006시즌을 마친 뒤 FA(자유계약선수) 자격을 획득했습니다. 울산을 포함한 세 팀에서 연락이 왔어요. 고민이 많았는데 울산에서 좋은 조건을 제시하기도 했고 (이)종민이 형의 존재도 팀을 선택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죠. 고교 선배인 데다가 울산의 장점을 하도 많이 설명해줘서 고민 끝 결정을 내리게 됐습니다. 

 

대구에서도 오장은을 붙잡기 위해 온 힘을 다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 

 

고민이 많았죠. 대구에서 K리그 정상급 선수로 발돋움했고 태극마크까지 달았습니다. 하지만, 더 큰 팀에서 발전하고 싶은 욕심이 울산행을 이끌었어요. 

 

울산은 매해 K리그를 정상을 목표로 하는 빅클럽입니다. 

 

울산으로 향한 가장 이유였죠. 참 신기한 게 울산은 또 달랐습니다. 당시 김정남 감독께서 지휘봉을 잡고 계셨는데 색다른 축구를 구사하셨어요. 스리백을 기반으로 한 탄탄한 수비로 실점을 막은 뒤 빠른 역습으로 승점을 낚는 이른바 ‘철퇴 축구’였죠. 

 

팀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축구를 경험했습니다.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후방에서 볼을 잡으면 전방으로 한 번에 넘겨주는 킥이 가장 중요했어요. 팀 스타일에 맞추기 위해 온 힘을 쏟아부었죠. 

 

일반 대중들은 철퇴 축구를 뻥 축구로 부르기도 합니다. 

 

후방에서 전방으로 볼을 전달했을 때 슈팅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으면 ‘뻥 축구’입니다. 하지만, 울산은 달랐어요. 전방으로 볼을 연결하면 (이)천수 형, (정)경호 형 등이 어떻게든 골을 만들었죠. 아주 매력적이고 효율적인 축구라고 생각합니다. 

 

K리그 정상을 목표로 하는 울산만의 분위기도 있었습니까. 

 

감독님 성향에 따라서 팀 분위기가 좌지우지되는 것 같아요. 울산은 가족적인 분위기였습니다. 훈련도 자율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죠. 정상급 선수가 많은 까닭에 스스로 몸 관리하는 게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그 선수들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몸 관리하는 법을 배우고 또 한 번의 성장을 이룰 수 있었죠. 

 

울산에서 4시즌을 뛰며 팀에 없어선 안 될 선수로 발돋움했습니다.  

 

울산이란 팀에서 꾸준한 출전 시간을 부여받는 게 큰 자신감으로 이어졌습니다.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축구하며 재미도 배가됐죠. 어떻게 하면 승점 3점을 거머쥘 수 있는지 알게 됐고요. 2009시즌엔 리그 28경기에 출전해 4골 6도움을 기록하면서 프로 데뷔 첫 두 자릿수 공격 포인트도 달성했습니다. 최고의 팀에서 그에 걸맞은 선수로 성장한 때가 아니었나 싶어요.

 

2011년, 고교 시절 짧게나마 인연을 맺었던 수원의 일원이 되다

 

2011년 수원 삼성 유니폼을 입은 오장은(사진=수원 삼성)

2011년 수원 삼성 유니폼을 입은 오장은(사진=수원 삼성)

 

울산의 레전드로 자리를 잡아가는 듯했지만, 2011년 수원 삼성 이적을 선택하게 됩니다. 

 

고교 시절 짧게나마 수원 2군에 있을 때 인연을 맺은 윤성효 감독께서 지휘봉을 잡은 게 컸습니다(웃음). 사실 국외 진출을 시도했어요. 울산 시절이 제 축구 인생의 정점이라고 판단했거든요. 컨디션이 아주 좋았고 자신감도 넘쳤죠. 유럽이 아니더라도 일본이나 경험해보지 못한 다른 무대에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국외 이적은 쉽지 않았던 겁니까. 

 

여러 가지로 안 맞는 게 많았죠. 프로에서의 첫 스승이나 다름없는 윤성효 감독님과 한 번 해보자는 생각도 있었고. 많은 고민 끝에 수원 이적을 결심했습니다. 

 

국외 이적은 아쉽게 불발됐지만, 수원 역시 울산 못지않은 K리그 명가입니다.

 

한국에서 축구 선수를 꿈꾸는 이들 가운데 수원에서 뛰는 걸 상상해보지 않은 친구가 있을까요. 국외 이적은 불발됐지만 아쉬움이 크진 않았어요. 무엇보다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많은 경기를 소화할 수 있다는 게 아주 좋았죠. 

 

수원의 홈인 수원월드컵경기장이요?

 

수원 팬들은 확실히 다릅니다. 대구에서 뛸 때부터 느꼈어요. 수원 원정 경기가 있는 날이면 설레는 마음에 잠을 못 이룰 정도였죠. 관중이 A매치 못지않게 많고 열기가 뜨거우니까 신이 나는 겁니다. 우리한테 야유해도 좋은 거예요(웃음). 그런 관중들 앞에서 경기한다는 게 쉽지 않으니까 마냥 좋았죠. 

 

그런 팬들의 응원을 받는 선수가 되니 어땠습니까. 

 

힘들었습니다(웃음). 많은 팬의 함성 속 죽자 살자 뛰는 선수들을 상대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요. 우린 꼭 이겨야 하는 데 상대는 져도 그만이니까 부담은 훨씬 더 컸죠. 그래서 더 많은 땀을 흘렸습니다. 열정적인 팬들 앞에서 승리를 따냈을 때의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죠.

 

2011년부터 2016년까지 수원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볐습니다. 수원은 오장은이 프로 생활을 하며 가장 오랜 기간 머문 팀입니다. 

 

그만큼 많은 걸 경험했습니다. 아주 좋은 시기도 있었지만, 힘들었던 때도 많았죠. 솔직히 다른 팀에 있었을 땐 좋은 기억밖에 없어요. 하지만, 수원에선 달랐죠. 첫 세 시즌은 이전처럼 그라운드를 마음껏 누볐습니다. K리그 최고의 매치인 FC서울과의 라이벌전에서 골을 기록한 순간도 있었죠. 문제는 부상이었습니다. 

 

부상이요?

 

2014년 5월 갑상선 항진증 판정으로 1년을 쉬었습니다. 그 시즌을 준비하던 유럽 전지훈련 때부터 이상했어요. 하루 휴식을 취한 뒤 몸을 푸는 데 너무 힘든 겁니다. 다친 곳이 없는데 이해할 수 없었죠. 리그 개막전을 뛰고 나선 죽을 것 같더라고요. 속으로 ‘나이를 먹었구나. 더 운동해야겠다’고 다짐한 뒤 운동량을 확 올렸습니다. 

 

운동량을 늘리고 난 뒤 어떻게 됐습니까.  

 

계속 힘들었어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상주 상무와의 FA컵에선 연장전까지 치르고 라커룸으로 돌아오는 데 눈앞이 희미해지는 경험도 했죠. 결국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는데 갑상선 항진증 판정을 받았습니다. 다른 병원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죠. 최소 6개월은 쉬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급작스럽게 갑상선 항진증이 온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병원에서도 정확한 원인은 찾아내지 못했어요. 다만 ‘이런 것 때문이다’란 얘기는 해줬죠. 과도한 운동과 스트레스로 인해 문제가 생겼다는 것. 사실 이 병을 앓기 전 시즌 무리를 했습니다. 주장인 두현이 형이 근육 파열로 시즌 초부터 경기에 뛸 수 없었어요. 부주장인 제가 팀을 이끌어야 했죠. 당시 팀 성적이 좋지 않다 보니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몸이 아파도 참고 뛴 게 나도 모르는 사이 과도한 스트레스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프로 생활을 하면서 부상으로 자리를 비운 경험이 없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이전까진 큰 부상 없이 쭉쭉 내달렸습니다. 6개월 이상 쉬는 건 축구를 시작한 이후 처음이었죠. 당시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겠더라고요. 하루빨리 복귀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죠. 고민 끝에 가족들과 떨어져서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명상하는 등 몸을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죠. 

 

효과가 있었습니까. 

 

그렇게 3개월을 하다 보니까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병원에서 놀랄 정도였죠. 문제는 운동을 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무리하게 복귀를 추진했고, 결국엔 무릎 부상으로 이어졌죠. 그때 착실히 몸을 만들고 복귀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2014년 5월 그라운드를 떠난 뒤 2015년 4월 8일 AFC 챔피언스리그 브리즈번 로어(호주)와의 경기에서야 복귀전을 치렀어요. 하지만, 이 경기에서 무릎 부상이 심해지면서 또다시 팀 전력에서 이탈했습니다. 

 

계약 기간이 1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도 조급한 마음으로 이어진 거 같습니다. 순서에 맞게 몸을 만들었어야 하는데...‘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길까’라면서 원망도 많이 했어요. 이후 무릎 수술을 받기로 하면서 결장 기간은 더 길어지게 됐죠. 축구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2016년 4월 10일 702일 만에 선발 출전을 알렸고 6일 뒤엔 948일 만의 골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이전처럼 그라운드를 활발히 누비는 오장은의 모습은 보지 못했어요. 

 

처음 몸이 안 좋았을 때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때 쉬지 못한 게 이런 결과로 이어진 거죠. 하지만, 후회하진 않습니다. 지도자가 됐을 때 아주 큰 자산이 될 거로 보거든요.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오장은 “선수 시절을 돌아보니 나는 복 받은 사람이었다”

 

지난 시즌 K리그2 대전 시티즌에서 뛴 오장은(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지난 시즌 K리그2 대전 시티즌에서 뛴 오장은(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2016시즌을 마치고선 수원을 떠나게 됐습니다. 

 

2016년 리그에서 7경기밖에 뛰지 못했어요. 당연한 결과죠(웃음). 2017년엔 성남 FC, 지난 시즌엔 대전 시티즌 유니폼을 입고 부활을 꿈꿨지만 어려웠습니다. 한 번 아프기 시작한 몸은 여러 가지 부상을 불러왔고 꾸준한 출전을 가로막았죠. 어떻게든 이전의 기량을 되찾기 위해 온 힘을 다했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더라고요. 

 

2018년 대전과의 계약이 끝난 이후 올여름까지 새로운 소속팀을 찾았던 거로 알고 있습니다. 

 

3월에 독일 5부 리그 팀에서 몸을 만들었어요. 훈련이 끝나면 지도자 연수까지 받을 기회가 주어져서 5월 중순까지 있었죠. 이대로 은퇴하면 아쉬움이 클 것 같다는 생각에 온 힘을 다했습니다. 

 

독일 5부는 어땠습니까. 

 

처음엔 5부 리그라고 해서 아마추어 수준일 줄 알았는데 직접 뛰어보니 아니었습니다. 수준이 생각보다 훨씬 높았어요. 어릴 적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성장한 선수들이 뛰는 리그였습니다. 이곳에서 몸을 만들면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온 힘을 다했죠(웃음).  

 

K리그 최고의 미드필더로 이름을 날렸고 태극마크도 달았습니다. 선수에 대한 미련이 남았던 가장 큰 이유가 있습니까. 

 

실력에서 밀린 게 아니라 부상으로 몇 년을 허송세월했다는 게 아쉬웠습니다. 부상만 아니었다면 후회 없이 뛰는 날이 많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죠. 마무리만큼은 후회를 남기지 않고 해보자는 마음이 컸어요. 

 

그렇게 올여름 이적 시장까지 기다린 겁니까. 

 

솔직히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구단을 찾아가서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죠. 뛸 기회만 준다면 죽을 각오로 그라운드에 나서겠다고 했습니다. 모든 걸 내려놨죠.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어요. 2014년부터 2018년까지 28경기(1골)를 뛰었습니다. 지난 시즌엔 K리그2에서 6경기 출전에 그쳤죠. 구단이 은퇴가 코앞인 나를 영입한다는 건 큰 모험이었습니다. 그렇게 현재의 나를 인정하게 됐죠. 

 

현재의 나를 인정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했어요. 내가 영입을 결정할 수 있는 구단 인사라면 어떤 결정을 내릴까. 과거 화려한 경력이 있더라도 가장 중요한 건 현재의 능력입니다. 5년 6개월간 보여준 게 아무것도 없는데 영입을 한다는 건 말도 안 되죠. 그렇게 현실을 인정하게 되면서 다음 인생을 준비하자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은퇴를 결심한 거군요.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건 다 했습니다. 도와준 분들도 아주 많았죠. 그런데 안 됐어요. 겨울까지 기다리는 방법도 있지만, 지금보다 어려운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았고요. 미련이 없을 때 떠나는 게 옳다고 판단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나는 참 복 받은 사람이에요.

 

복 받은 사람이다?

 

오랜 시간 그라운드를 누볐습니다. K리그에서만 291경기를 뛰었어요. 수원과 울산에선 은퇴 행사까지 치러줬습니다. 대구 팬들도 SNS로 안부를 묻고 은퇴를 축하해줬고요. 정말 감사한 일이죠. 

 

제2의 인생의 시작점에 섰습니다. 

 

축구를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이 자리까지 오게 했습니다. 이 마음이 없었다면 일찌감치 유니폼을 벗었을 거 같아요. 향후엔 지도자에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또한 뜻대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시간을 갖고 차근차근 준비할 생각입니다. 지금은 가족들과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선수 시절 자주 만나지 못한 지인들과 함께하면서 여유를 즐기려고 해요(웃음).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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