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움 히어로즈, 한국시리즈 준우승 감독 장정석과 재계약 포기

-손혁 SK 투수코치 신임 감독으로 임명…2000년대 4번째 준우승 감독 교체

-'이장석 옥중경영'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겠다는 구단 결의의 반영인가

-달라진 프로야구 감독 역할론의 방증이란 평가도

-국내 최고 투수 전문가 손혁, 감독으로도 성공 거둘까

손혁 키움 히어로즈 신임 감독. 3년 만에 히어로즈로 돌아왔다(사진=엠스플뉴스)
손혁 키움 히어로즈 신임 감독. 3년 만에 히어로즈로 돌아왔다(사진=엠스플뉴스)

[엠스플뉴스]

해마다 이맘때면 빈번하게 일어나는 감독 교체는 보통 형편없는 성적을 거둔 팀에서 나온다. 올 시즌만해도 하위권 5팀 가운데 꼴찌 롯데 자이언츠, 8위 삼성 라이온즈, 7위 KIA 타이거즈 등 3개 팀이 감독을 교체했다.

반면 상위권 팀, 특히 한국시리즈까지 올라간 팀에서 감독을 바꾸는 일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2000년대 이후 한국시리즈 준우승팀 감독이 교체된 사례는 2002년 LG 김성근 감독과 2010년 삼성 선동열 감독, 2013년 두산 베어스 김진욱 감독까지 총 세 차례. 여기에 키움 히어로즈 장정석 감독이 재계약에 실패하면서, 2000년대 네 번째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키움은 11월 4일 오후 손혁 SK 투수코치를 새로운 사령탑으로 선임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계약기간은 2년. 계약금 2억 원, 연봉 2억 원 등 총 6억 원을 받는 조건이다. 신임 손 감독은 이날 오전 구단 사무실을 방문해 계약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약 무난’ 빗나간 예상…장정석 감독 대신 손혁 신임 감독 선이

장정석 감독(사진=엠스플뉴스)
장정석 감독(사진=엠스플뉴스)

애초 야구계에선 계약 기간 3년 동안 좋은 성적을 거둔 장정석 감독이 무난하게 재계약할 것이란 예상이 많았다.

장 감독은 지난해 리그 4위로 플레이오프까지 올라간 데 이어, 올해도 ‘1위 같은 3위’로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뤘고, 한국시리즈에도 올라갔다. 구단과 호흡도 잘 맞았다. 언뜻 재계약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돌아보면 몇 가지 복선이 있었다. 우선 올 시즌으로 계약 기간이 마지막인데도, 구단은 시즌이 끝날 때까지 장 감독에게 정식으로 재계약을 제안하지 않았다.

이전까지 구단들은 좋은 성과를 낸 감독에겐 계약 마지막 해가 끝나기 전, 일찌감치 재계약을 제의해 힘을 실어주곤 했다. 하지만 키움은 박준상 전 대표이사가 구두로 재계약 의사를 전한 것 외엔 구체적인 논의를 하지 않고 결정을 미뤘다.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에도 곧바로 재계약 협상이 이뤄지지 않았다. 우승팀 두산은 한국시리즈 종료 사흘 뒤 김태형 감독과 역대 최고 대우 재계약에 도장을 찍었다. 반면 키움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키움 고위 관계자도 경영진에서 판단할 부분이라며 말을 아꼈다.

이 과정에서 구단 대표이사 교체라는 변수까지 생겼다. 이장석 전 구단주의 ‘옥중경영’ 문제가 불거지면서 ‘이장석 오른팔’로 알려진 박준상 사장이 사임하고 하송 신임 대표가 취임했다.

장 감독은 이장석 전 구단주 체제에서 1군 매니저와 운영팀장을 거쳐 감독 자리까지 올랐다. 지난해 초까진 서울 히어로즈 사외이사로 등록해 구단 경영에도 참여하는 모양새가 연출됐다. '이장석의 옥중 지시'가 코칭스태프 결정에 반영됐다는 얘기도 들렸다. 야구계에서 장 감독의 재계약 불발을 두고 ‘이장석 그림자 지우기’란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나는 신도 점쟁이도 아니다” 매니저 역할에 충실했던 장정석 감독의 역설

장정석 감독은 매니저 역할에 충실했지만, 바로 그 때문에 다른 지도자로 대체되는 불운을 맞게 됐다(사진=엠스플뉴스)
장정석 감독은 매니저 역할에 충실했지만, 바로 그 때문에 다른 지도자로 대체되는 불운을 맞게 됐다(사진=엠스플뉴스)

장정석 감독의 재계약 실패가 최근 야구계에서 주목받는 '보통 감독론'의 방증이란 시각도 있다.

한 야구계 관계자는 키움은 지난 2년간 거둔 좋은 성적에서 감독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냉정하게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감독을 교체해도 성적을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저변에 깔린 것 같다고 평했다.

여전히 야구팬 사이에선 필드에서 이뤄지는 모든 결정을 오롯이 감독 개인의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과거 지금보다 프로야구 선수단 규모가 작고 프런트의 전문성이 떨어졌던 시절엔 감독 한 사람의 비중이 절대적이었다. 트레이드, 선수 영입 등 중요한 결정을 감독이 직접 지휘하는가 하면 구단이 나갈 방향까지 결정하는 일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몇몇 감독은 ‘신’ ‘야구 대통령’ ‘제갈량’ 등의 찬양을 받았다.

그러나 선수단 규모가 커지고 프런트 오피스의 파워가 세진 최근 야구계에선 감독의 비중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천재적인 감독 혼자 머리를 짜내 ‘신의 한 수’를 두는 건 옛날얘기다. 특히 프런트의 파워가 강한 키움은 이런 변화를 가장 극단적으로 실행하는 구단이다.

키움이 바라는 이상적 감독은 프런트 오피스와 선수단 사이의 ‘매니저(manager)’에 가깝다. 큰 그림과 방향성은 데이터 분석으로 무장한 프런트가 감독과 함께 논의해 정한다. 실제 장 감독은 어떤 결정에 관해 설명할 때마다 전력분석팀과 각 파트 코치들과 의논해서 정했다는 말을 반드시 덧붙이곤 했다. 포스트 시즌 찬사가 쏟아졌던 불펜 운영도 이런 의사결정 과정을 거쳤다.

프런트와 함께 내린 결정을 선수들에게 전달하고, 이해시킨 뒤 경기장에서 구현하는 것도 새로운 시대 감독의 역할 중 하나다. 장 감독은 수시로 “선수들이 잘해서 이겼다” “난 한 게 없다”고 말하곤 했다. 포스트시즌 기간엔 “난 신도 아니고 점쟁이도 아니다. 운이 좋았다”며 겸허한 자세를 유지했다.

어쩌면 ‘한 게 없다’는 말에 장 감독의 사령탑으로서 장점이, 키움이 장 감독을 선택했던 이유가 모두 담겨 있는지 모른다. 장 감독은 3년간 ‘매니저’로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고, 야구의 ‘신’이나 ‘제갈량’이 되려 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팬들이 붙여준 ‘사마정석’이란 별명은 키움에서 감독이 하는 역할을 크게 오해한 것으로 봐야 한다.

실제 키움은 최근 3년간의 성과를 감독 개인이 아닌 구단 전체 구성원이 거둔 성과로 바라봤다. 키움 고위관계자는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감독 재계약 관련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장정석 감독님도 잘하셨고, 우리 구단과 선수단 모두가 잘해서 거둔 결과”라고 답했다.

한국시리즈 진출을 감독 개인이 아닌 구단 모두가 만든 성과라고 본다면, 감독 한 사람이 바뀌는 건 구단의 성적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구단의 의도대로 ‘매니저’ 역할에만 충실했던 장 감독의 겸허한 태도가 오히려 감독으로서 수명을 단축하는 결과로 돌아온 것일지 모른다.

‘피칭 이론+데이터 분석’ 최고의 투수 전문가 손혁, 감독으로도 성공할까

버건디색 넥타이를 착용한 손혁 신임 감독(사진=키움)
버건디색 넥타이를 착용한 손혁 신임 감독(사진=키움)

이제 시선은 손혁 신임 감독에게로 향한다. 손 감독은 자타가 공인하는 KBO리그 최고의 투수 전문가다. 2004년 현역 은퇴 뒤 미국으로 건너가 톰 하우스로부터 ‘바이오메카닉 피칭 이론’을 배웠고, 이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피칭 이론을 정립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엔 2009년 한화이글스 투수 인스트럭터를 시작으로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팀 투수 인스트럭터로 활약했다. 이후 2014년 넥센(현 키움)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해 2016년까지 투수코치를 지냈고, 2018년과 2019년엔 SK에서 투수코치로 활약했다.

손 감독과 함께하는 동안 SK는 2년 연속 팀 평균자책 1위를 차지했고, 지난해엔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거뒀다. 올 시즌에도 타선 침체 속에 마운드의 힘을 앞세워 구단 창단 이후 최다승(88승)을 거두는 성과를 냈다.

SK 시절 손 감독은 전매특허인 바이오메카닉 피칭 이론과 최근 각광받는 데이터 분석을 접목해 큰 성공을 거뒀다. 특히 국내 지도자 가운데 랩소도, 트랙맨 등 최신 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가장 뛰어나, 키움 전력분석팀과 더 긴밀한 협업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된다. 손 감독도 “(우리 팀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선진야구 시스템도 잘 갖춰져 있다”고 기대감을 보였다.

키움 사정에 밝은 관계자는 “기존 야수 파트의 경험 많은 코치가 수석코치로 손 감독을 보좌할 것”으로 내다봤다. 손 감독은 선수들은 물론 코칭스태프, 프런트와 긍정적인 소통을 나눠 그라운드에 나오는 모든 구성원들이 즐거움을 찾을 수 있도록 이끌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감독이 바뀌어도 키움은 여전히 강팀일 것이다. 어쩌면 올 시즌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 감독의 재계약 실패와 손 감독 선임으로 감독이란 자리가 더는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해졌고, 키움이 무엇을 지향하는 구단인지 선명하게 드러났다.

한국시리즈 준우승 감독조차 재계약을 못 했다면, 구단이 새 감독에게 뭘 요구하는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도 불과 2년이란 기간 동안 해내야 한다.

배지헌 기자 jhpae117@mbcplus.com

저작권자 © 스포츠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 후원하기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