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치 경력 12년 김태영, 2020시즌부터 K3리그 천안시축구단 지휘봉 잡는다

-“투명 인간이나 다름없던 고교 입학 후 6개월이 축구 인생을 바꿨다”

-“실업팀 소속이란 이유로 1994년 미국 월드컵 출전이 좌절됐다는 이야기 들었을 땐 축구를 그만두고 싶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최고의 경기? 1년 6개월 준비한 본선 조별리그 첫 경기 폴란드전”

-“현재의 전북 현대 만든 최강희 감독처럼 천안시축구단의 역사 만들고 싶어”

천안시축구단 김태영 감독(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천안시축구단 김태영 감독(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천안]

코치 생활 12년 만에 지휘봉을 잡았다. 축구계가 역대 최고 수비수로 꼽는 천안시축구단 김태영 감독의 얘기다.

김 감독은 큰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 축구 레전드다. 1992년 A매치에 데뷔해 2004년까지 105경기(3골)를 뛰었다. 한국의 역대 다섯 번째 센추리 클럽 가입자로 두 차례 월드컵(1998·2002)을 경험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은 김 감독 축구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기억된다. 홍명보, 최진철과 함께 스리백 수비의 한 축을 담당한 김 감독은 아시아 첫 4강 진출에 앞장섰다. 이탈리아와 16강전에선 코뼈 골절을 이겨내고 팀 승리에 일조하며 깊은 감동을 전했다.

2005시즌을 마치고 은퇴한 뒤엔 지도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쉴 틈 없이 내달렸다. 2009년부턴 홍명보 감독을 도와 한국 U-20 축구 대표팀 코치로 활동했다. 이 팀은 거침없는 성장세를 보이며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냈다. 한국이 올림픽에서 메달을 획득한 건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후 성인 대표팀과 전남 드래곤즈, 수원 삼성에서 코치 경력을 이어간 김 감독이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김 감독은 2022년 K리그2 참가를 목표로 나아가고 있는 천안시축구단 지휘봉을 잡았다. 엠스플뉴스가 새 출발을 앞둔 김 감독을 만났다.

농구부 출신 김태영, 형님들 따라 축구의 길로 들어서다

천안시축구단의 훈련을 지휘하고 있는 김태영 감독(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천안시축구단의 훈련을 지휘하고 있는 김태영 감독(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감독께선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입니다. 오랜 선수 생활을 마친 뒤엔 코치와 감독으로 축구와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축구는 언제부터 시작하게 된 겁니까.

두 형님이 중학교 때까지 축구를 했습니다. 그런 형들 밑에서 자라다 보니 자연스럽게 운동을 좋아했죠. 초등학교 땐 반 대표로 육상 대회에 나가고 농구부 활동을 했어요(웃음).

농구부요?

학교에 농구부가 있었습니다. 전라남도 지역 대회에서 성과를 낼 정도로 유명했죠(웃음). 축구에 눈을 뜨면서 농구가 축구랑 비슷하다는 걸 느꼈어요. 손과 발을 사용한다는 큰 차이가 있지만 많이 뛰고 상대와 쉴 새 없이 부딪친다는 공통점이 있죠.

농구 선수를 꿈꾸진 않았습니까.

수도권 학교에서 농구부 생활을 했다면 인생이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웃음). 전남에선 농구부가 있는 중학교로 진학하는 게 어려웠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축구로 전향한 결정적인 이유죠. 처음엔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형님들이 고교 진학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축구를 그만뒀습니다. 부모님께선 축구 선수로 성장하는 게 쉽지 않은 걸 잘 아는 까닭에 ‘안 된다’고 했죠. 하지만, 적극적으로 ‘축구 선수의 길을 걷고 싶다’고 했습니다. 축구부 감독께서도 ‘(김)태영이가 축구에 소질이 있다’고 부모님을 설득했죠. 그렇게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했습니다.

육상과 농구에 재능이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처음 축구부 생활은 어땠습니까.

축구는 친구들과 취미로 즐겼어요. 모든 운동을 다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축구부 생활은 달랐죠. 체력훈련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경기에 뛰기 위한 경쟁도 치열했죠.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턴 부담까지 더해졌어요. 우리 학교가 전남 대표로 소년체전에 출전하면서 성적에 대한 압박이 상당했습니다.

어려움이 있었지만 학창 시절엔 잘 나갔습니다. 축구 명문 금호고로 진학해 주전 선수로 활약했어요.

고교 진학을 앞두고 고민이 많았습니다. 아버지께선 명문고에서 출전 기회를 못 잡는 것보다 뛸 수 있는 팀으로 가길 바라셨죠. 어머니는 금호고에서 어떻게든 기회를 잡는 게 축구 선수로 성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어요. 고민 끝 쟁쟁한 선배들과 함께할 수 있는 금호고를 선택했습니다.

금호고는 신연호, 김판근, 윤정환, 고종수, 기성용 등 한국 축구의 레전드를 대거 배출한 명문입니다.

입학 후 6개월은 ‘투명 인간’이었습니다(웃음). ‘이 팀에서 난 무엇인가’를 매일 고민했죠. 팀에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였어요. 쟁쟁한 선배들이 버틴 까닭에 벤치에 앉기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기간이 축구 인생을 바꿨습니다.

후보 선수로도 선택받지 못한 6개월이 김태영의 축구 인생을 바꿨다는 겁니까.

개인 훈련을 아주 많이 했습니다. 팀 훈련이 끝나면 계단 뛰기와 점프 연습을 쉴 새 없이 했죠. 볼을 누구보다 잘 다루기 위해 공을 가지고 하는 훈련도 빼먹지 않았어요. 하루하루 무엇이 부족했는지 기록하고 개인 훈련 일정을 짰죠. 그렇게 6개월을 보내니 기성용의 아버지로 유명한 기영옥 감독께서 기회를 줬습니다.

어떤 경기인지 기억합니까.

대학교 팀과의 연습경기였어요. 감독께서 6개월 만에 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아주 잘했어요(웃음). 대학 선배들이 하나같이 빠르고 개인기가 좋았는데 모조리 막았습니다. 그 이후 많은 게 달라졌어요. 공식전에서 출전 기회를 잡기 시작했죠. 2학년 때부턴 확고한 주전으로 자릴 잡았습니다.

그 당시 포지션도 수비수였습니까.

초등학교 땐 측면 공격수로 뛰었습니다. 달리기가 아주 빨랐거든요. 중학교 땐 중앙 미드필더로 뛰면서 공·수 연결고리 역할을 맡았죠. 수비수로 뛰기 시작한 건 고교 시절부터입니다. 측면 수비수와 중앙 수비수를 오갔어요.

원래 오른발잡이입니다. 현역 시절 왼발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선수로 유명했어요. 왼발 훈련도 고교 입학 후 6개월간 집중적으로 한 것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축구하면서 오른쪽 발목을 다친 적이 많았어요. 제가 운동할 때만 해도 아파서 쉬는 건 상상 못 할 일이었죠. 그럴 때마다 왼발을 사용했습니다. 훈련도 꾸준히 했고요.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어느 순간부터 왼발이 편해졌습니다. 어머니가 왼손잡이인 것도 왼발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웃음).

학창 시절부터 양발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했습니다. 축구를 처음 시작했을 땐 공격수였고요. 중앙 미드필더를 거쳐 수비수로 자릴 잡았는데 아쉬움은 없었습니까.

성인이 되고 ‘공격수를 계속할 걸’이란 후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어쩌다 수비까지 내려온 걸까 생각했죠(웃음). 수비수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없어요. 실수 하나에 90분 동안 흘린 땀방울이 가려집니다. 팀의 결과가 좋지 않을 땐 책임을 집니다. 반면 공격수는 한 골만 넣으면 큰 주목을 받아요. 죽을힘을 다해 승리에 공헌해도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게 아쉬웠습니다.

“1994년 월드컵 출전 좌절, 축구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

2020시즌부터 K3리그 천안시축구단을 이끄는 김태영 감독(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2020시즌부터 K3리그 천안시축구단을 이끄는 김태영 감독(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금호고를 졸업하고 부산 동아대로 진학했습니다.

동아대는 대한축구협회(KFA) 최영일 부회장, 김상호, 황영우 선배 등을 배출한 축구 명문이었죠. 고교 시절까진 태극마크를 꿈꿔 본 적이 없어요. 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해 많은 경기를 뛰자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대학에서 프로팀과의 연습 경기 후 더 큰 꿈을 가지게 됐죠(웃음).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부산 대우 로얄즈(부산 아이파크의 전신)와 연습 경기를 자주 했어요. 충격적이었죠. 경기 템포부터 달랐습니다. 공과 선수들의 속도가 정말 빨랐어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속도였습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가장 큰 차이는 속도’라는 걸 그때 처음 느꼈죠. 파워도 달랐어요. 힘에선 자신이 있었는데 프로 선수들과 부딪치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프로 선수들은 ‘납 조끼’ 입고 뛰는 줄 알았어요. 강하게 부딪쳤다가 죽는 줄 알았습니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똑같았어요. 돌덩이랑 부딪친 것 같았죠. 그때 ‘아무나 프로 선수가 되는 게 아니구나’라는 걸 배웠습니다. 이런 경험이 죽자 살자 축구에만 매진하게 했어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대학 시절이 있습니까.

4학년 땐 365일 축구만 했어요. 휴식 날에도 집에 안 갔습니다. 팀 훈련이 끝나면 공격수가 앞에 있다고 가정하고 전진했다가 백 스텝 후 돌아 뛰는 동작을 수천 번 반복했어요. 수비수는 공격수를 따라서 움직입니다. 그 동작이 0.1초라도 늦으면 실점으로 이어지죠. 상대에게 한 골도 내주고 싶지 않았어요. 주변에선 그런 저를 보고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어떻게 얘기했습니까.

‘징그럽다’면서 ‘저런 연습벌레는 처음 본다’고 했죠. 전 축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특별한 재능이 있는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남보다 더 땀 흘리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었어요. 대학 시절부터 꿈꾼 태극마크를 달기 위해선 상상 이상으로 훈련에 매진해야 했죠.

한 가지 의아한 게 있습니다. 누구보다 많은 땀을 흘린 김태영이 졸업 후 향한 곳은 프로팀이 아닌 실업팀 국민은행입니다.

프로에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프로팀 창단을 준비 중이던 완산 푸마에서 연고지명으로 뽑아갈 것이란 얘기를 들었죠. 고민했습니다. 많은 선수가 프로에서 자릴 잡을지 확실치 않은 신생팀보단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팀으로 가고 싶어 했어요. 저 또한 마찬가지였죠. 그게 저를 포함한 동기들이 프로 대신 실업팀을 택한 이유입니다.

프로 대신 선택한 실업 무대는 어땠습니까.

대중이 떠올리는 이미지부터 큰 차이가 있었죠. 그 당시 K리그를 대표한 대우 로얄즈, LG 치타스, 포항제철 아톰즈 등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실업팀은 프로팀에서 선택받지 못한 선수가 가는 느낌이었죠. 프로팀 대신 실업팀을 선택하면서 크게 후회한 일이 있습니다.

어떤 일입니까.

1992년 10월 21일 UAE전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이후 1994년 미국 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을 뛰었어요. 그런데 본선엔 가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큰 충격이었죠.

어떤 이유였습니까.

시간이 흐른 뒤에 이런 얘길 들었어요. 축구인들 사이에 ‘실업팀 선수가 어떻게 태극마크를 다느냐’란 불만이 컸다는 겁니다. 전 특출 난 선수는 아니지만 누구보다 많은 땀을 흘렸어요. 국민은행 소속으로 월드컵 예선까지 뛰었습니다. 충격이 너무 컸어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월드컵을 3차례 뛸 수 있었던 겁니다.

축구 인생 가장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축구를 그만두려고까지 했죠. 도저히 운동에 집중할 수 없었어요.

프로팀으로 둥지를 옮길 생각은 안 했습니까.

쉽지 않았어요. 팀에서 놔주질 않았죠(웃음).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축구밖에 없더라고요. 당시 충격이 후회 없는 선수 생활의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때 다짐했어요. ‘훈련장에서나 실전에서나 죽을힘을 다해 반드시 대표팀에 복귀한다’고. 훈련장에서부터 후회 없는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1994년 12월엔 K리그 신생팀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했죠.

대학 졸업 후 신생팀 완산 푸마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전남을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아픔을 겪고 무조건 프로에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역사가 깊은 팀이든 신생팀이든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프로팀에서 불러만 주면 죽을힘을 다할 각오였어요. 그렇게 전남 유니폼을 입고 뛰면서 대표팀 복귀에 성공했죠(웃음).

축구계가 궁금해하는 게 있습니다. 감독께선 두 차례 월드컵(1998·2002)을 경험한 한국 최고의 수비수였습니다. 그런 선수가 전남 프랜차이즈 스타로 남았어요.

전남 창단멤버로 시작해 10년 뛰고 은퇴했습니다. 이런 선수 찾기 어려워요(웃음). 솔직히 국외 진출 욕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죠.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이라도 경험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기회가 올 때마다 구단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감독님들도 국외 진출보단 팀에 남길 원했죠. 제 욕심보단 구단과 감독님들의 의견을 많이 따랐던 것 같아요.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뉴캐슬 유나이티드에서 제안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서른셋에 찾아온 마지막 기회였어요. 더군다나 아무나 뛸 수 없는 EPL이었습니다. 하지만, 내 뜻만으론 이적이 어려웠습니다(웃음). EPL 도전 대신 전남과 3년 재계약을 맺었어요.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태극마크 되찾은 김태영, 세계와의 벽 실감한 ‘1998 프랑스 월드컵’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진출에 앞장선 중앙 수비수 김태영(사진 왼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진출에 앞장선 중앙 수비수 김태영(사진 왼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전남 드래곤즈에서 뛰며 대표팀 복귀에 성공했습니다.

1996년 UAE 아시안컵 이후 대표팀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차범근 감독께서 지휘봉을 잡고 선수 구성도 바뀌었죠. 그때 태극마크를 다시 달았어요.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다신 밀려나지 않는다는 생각뿐이었어요. 하지만,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은 안 했습니다. 전 특출 난 선수가 아니었어요. 소금 같은 역할을 하는 선수였죠.

소금 같은 역할이요?

눈에 띄진 않지만 팀에 꼭 필요한 선수죠. 상대와 몸싸움 피하지 않고, 내 동료가 뚫리면 몸을 날려 태클하는 게 제 역할이었습니다. 차범근 감독께서 그런 점을 좋게 봐주신 덕분에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함께할 수 있었죠.

월드컵 출전은 전 세계 축구 선수의 꿈입니다. 첫 월드컵 어땠습니까.

아픔이었죠(웃음). 0-5로 대패한 본선 조별리그 2차전 네덜란드와의 경기는 충격이었습니다. 그 선수들은 축구선수가 아니라 축구의 신인 줄 알았어요. ‘120% 기량을 발휘해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든 건 그 경기가 처음이었습니다. 피지컬에서 압도적인 선수들이 날렵하기까지 했어요. 움직임도 남달랐죠.

어떻게 달랐습니까.

중앙 수비수는 후방에서 필드 플레이어의 움직임을 볼 수 있어요. 네덜란드 선수들은 볼을 주고 가만 서 있질 않았습니다. 계속 움직이면서 공간을 만들었죠. 볼 터치와 패스 등도 차원이 달랐습니다. ‘우리도 어릴 때부터 축구만 했는데 이렇게 다를 수 있나’란 자괴감이 들 정도였어요.

KFA는 네덜란드전을 마치고 차범근 감독을 경질했습니다.

지금도 감독께 죄송한 마음이 큽니다. 네덜란드전을 마치고 감독께선 조기 귀국했어요. 요즘 말로 표현하면 ‘멘붕’이었죠. 선수들과 얘기했습니다. ‘우리가 감독께 해드릴 수 있는 건 마지막 벨기에전에서 희망을 남기는 것’이라고. 벨기에전에서도 개인 기량 차는 컸지만 하나로 똘똘 뭉친 덕분에 승점 1점(1-1)을 따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은 축구 인생에서 어떤 의미입니까.

‘세상은 아주 넓다’는 걸 몸으로 느꼈죠(웃음). 우린 우물 안의 개구리였습니다. 세계적인 선수들과 계속 부딪치면서 실력 향상을 꾀하지 않으면 발전하기 어렵다는 걸 확인했죠.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는 어려웠을 겁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진출 원동력은 ‘파워 프로그램’”

선수 김태영은 2002년 한-일 월드컵 16강전 이탈리아와 경기에서 크리스티안 비에리(사진 왼쪽)와 볼 경합 중 코뼈 골절이란 큰 부상을 당했다(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선수 김태영은 2002년 한-일 월드컵 16강전 이탈리아와 경기에서 크리스티안 비에리(사진 왼쪽)와 볼 경합 중 코뼈 골절이란 큰 부상을 당했다(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분위기를 바꿔보겠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얘길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거스 히딩크 감독께서 지휘봉을 잡고 1년 6개월간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준비했습니다. 집에 갈 시간이 없을 정도로 훈련에만 매진했죠. 세계 정상급 팀과 여러 차례 부딪치면서 실력 향상을 꾀했습니다.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 프랑스전(0-5), 체코 원정(0-5) 등을 통해 많은 걸 배우고 느꼈어요.

경기는 졌지만 많은 걸 배웠다?

히딩크 감독께선 프랑스, 체코전 등으로 한국의 약점을 정확히 진단했어요. 후반 중반 이후 뛰지 못하는 선수들을 봤죠. 감독께선 피지컬 좋은 유럽 선수들과 부딪치기 전 겁부터 먹는 선수들을 확인했습니다. 히딩크 감독이 ‘파워 프로그램’을 실시한 건 이 때문이죠.

월드컵 개막을 6개월 앞두고 한국은 북중미 골든컵에 출전했습니다. 당시 대표팀을 향한 비판이 심했어요. 대회 개막이 코앞인데 체력 훈련만 한다는 게 이유였죠. 선수들은 어땠습니까.

히딩크 감독은 선수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았어요. 지금도 골든컵에서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이 대회가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린 월드컵 첫 경기 폴란드전을 목표로 나아간다’고 강조했어요.

2002년 4강 신화의 원동력, ‘파워 프로그램’은 어땠습니까.

살면서 그렇게 힘든 훈련은 처음이었습니다. 훈련 끝나고 서로의 얼굴을 보면 사람이 아니었어요(웃음). 매일 체지방은 얼마인지 몸무게는 몇인지 확인했습니다. 선수들에게 살이란 걸 찾아볼 수 없었죠.

우리가 월드컵에서 사고 한 번 치겠다는 느낌을 받은 건 언제입니까.

월드컵 개막을 한 달 앞두고 제주 서귀포에 베이스캠프를 차렸습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4-1), 잉글랜드(1-1), 프랑스(2-3) 등과 친선경기를 했죠. 선수들이 뛰면서 놀랐습니다. 유럽 선수들과 부딪치는 데 상대가 힘들어하는 거예요. 온 힘을 다해 90분을 뛰었는데 힘들지가 않은 겁니다.

한국은 2002년 한-일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첫 경기 폴란드전을 목표로 내달렸습니다. 2002년 6월 4일 폴란드전을 기억합니까.

한국은 폴란드, 미국, 포르투갈과 한 조였습니다. 폴란드는 무조건 잡아야 한다고 봤어요. 어떤 대회든 첫 경기가 가장 어렵지만 후회 없이 준비한 만큼 자신 있게 해보자고 했죠. 2-0으로 이겼습니다. 월드컵 본선 도전 48년 만에 첫 승리를 따냈죠. 첫 번째 목표를 이룬 선수단에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자만하지 않고 16강 진출 준비에 매진했어요.

한국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폴란드(2-0), 포르투갈(1-0), 이탈리아(2-1) 등을 이겼습니다. 그런데 한국이 만난 상대 가운데 전력이 가장 약한 것으로 평가받는 본선 조별리그 2차전 미국전에선 1-1 무승부를 기록했습니다.

미국을 다른 팀보다 낮게 본 건 사실입니다. 미국은 야구와 농구, 미식축구, 아이스하키가 강한 국가잖아요. 그렇다고 방심한 건 아닙니다. 폴란드전처럼 철저하게 준비했어요. 선제골을 내주는 등 경기력과 결과 모두 아쉬웠던 이유엔 경기 시간이 있습니다. 미국전은 낮 경기였어요. 밤 경기에 익숙한 선수들이 낮 경기를 하면서 생체리듬이 바뀐 거죠. 많은 선수가 저녁 경기보다 몸이 무겁다는 걸 느꼈습니다.

1승 1무를 기록 중인 한국의 다음 상대는 포르투갈이었습니다. 당시 포르투갈은 1989년과 1991년 U-20 월드컵을 우승한 ‘황금 세대’의 팀이었죠. 루이스 피구, 주앙 핀투, 세르지우 콘세이상, 파울레타 등이 중심이었습니다.

미국전 결과가 아쉬웠지만 두려운 건 없었습니다. 팀엔 어느 팀과 붙어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어요. 실제로 붙어본 포르투갈 선수들의 개인 기량은 우리보다 훨씬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조직력에선 우리가 앞섰어요. 협력 수비를 통해 상대 공격을 철저히 틀어막았죠. (박)지성이의 결승골이 터지면서 승전고까지 울렸습니다(웃음).

월드컵 1승과 16강이란 목표를 모두 이뤘습니다.

더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포르투갈전을 마치고 치료실에서 마사지를 받으며 뉴스를 봤어요. 온 국민이 붉은 옷을 입고 환호하는 게 보였습니다. 하나같이 웃고 행복한 얼굴이었죠. ‘이건 뭐지? 축구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좋아할 수 있는 걸까’란 생각이 들었어요. 동시에 ‘이분들을 더 웃게 해드리고 싶다’는 의지가 커졌죠.

축구선수 김태영이 가장 빛났던 경기가 16강 이탈리아전입니다.

선수 생활하면서 그렇게 거친 팀은 처음 봤습니다(웃음). 모든 선수가 손이 먼저 들어와요. 볼 경합하는 데 손으로 목이나 가슴을 가격합니다. 2002년 이전의 한국이었다면 주눅이 들어서 일찌감치 승부가 갈렸을 거예요. 하지만, 그땐 달랐죠. 승리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부딪쳤습니다. 크리스티안 비에리에게 선제골을 내줬지만 패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이탈리아전에서 비에리와 볼 경합 도중 코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처음엔 단순 타박이라고 들었어요. 코뼈 골절이란 걸 알았다면 솔직히 두려웠을 겁니다(웃음). 코피와 통증이 멈추지 않았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이탈리아를 어떻게든 이기고 8강으로 가야 했습니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은 정신력과 수비수를 하나둘 빼고 황선홍, 이천수, 차두리 등 공격수를 투입한 히딩크 감독의 용병술이 더해지면서 짜릿한 역전승(2-1)을 거둘 수 있었죠.

코뼈 골절 사실은 경기가 끝나고 안 겁니까.

선수들과 손잡고 운동장을 돌고 있는데 의무팀에서 급히 부르는 겁니다. ‘(김)태영아 너 빨리 병원 가야 한다’고. 그때 알았죠(웃음). 선택이 필요했어요. 수술하면 남은 경기를 뛰기 어려웠습니다. 히딩크 감독과 상의 후 응급 수술을 받고 일본에서 마스크를 구했죠. 남은 경기를 뛰기로 한 겁니다.

스페인과 8강전엔 마스크를 쓰고 경기에 나섰습니다. 축구는 매우 거친 스포츠예요. 코를 다시 다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없었습니까.

마스크를 착용하고 경기를 뛰니 불편한 게 많았습니다. 두렵기도 했죠.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어요. 그때가 서른셋이었습니다. 마지막 월드컵 출전이란 걸 생각하고 ‘전사 모드’로 경기에만 집중했죠. 4강 진출을 확정했을 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어요. 내가 이 팀의 일원이란 사실이 감사했습니다. 수많은 분과 기쁨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게 아주 좋았어요.

감독께서 꼽는 2002 한-일 월드컵 최고의 경기는 무엇입니까.

1년 6개월 준비한 성과를 평가받은 폴란드전입니다. 우린 16강 진출이 아닌 월드컵 첫 승리를 바라보고 훈련에 매진했어요. 첫 경기에서 목표를 이루며 자신감이 붙었죠.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에요(웃음).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경험하면서 ‘축구 선수란 직업을 선택하길 아주 잘했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2002년 한-일 월드컵은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했습니다. 매일 웃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죠. 자부심을 느껴요. 월드컵 후 식당에 가면 가족이 온 것처럼 반겨주시고 서비스를 왕창 주셨습니다(웃음). 2002년 한-일 월드컵은 많은 분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처음 잡은 지휘봉, 김태영 감독은 언제나 간절하다

김태영이 천안시축구단 감독 면접을 봤던 자리에 앉아있다. 김 감독은 “면접이 처음인 까닭에 엄청나게 떨었다“고 회상했다(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김태영이 천안시축구단 감독 면접을 봤던 자리에 앉아있다. 김 감독은 “면접이 처음인 까닭에 엄청나게 떨었다“고 회상했다(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2005년 11월 6일 홈(광양)에서 열린 인천 유나이티드전에서 선수 생활을 마쳤습니다.

주심이 경기 종료 휘슬을 울리는 데 지난 시간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나갔습니다. 전날까지만 해도 덤덤할 줄 알았는데 감정이 북받쳐 오르더라고요. 눈물이 나왔죠. 선수로 뛰며 힘든 일을 많이 겪었지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성실함을 잃지 않은 선수 김태영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었죠(웃음).

감독께선 2006년 관동대학교 축구부 코치로 지도자 생활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2009년엔 홍명보 감독께서 지휘봉을 잡은 한국 U-20 축구 대표팀 코치로 자릴 옮겼습니다. 이후엔 U-23 축구 대표팀 코치를 맡아 2012년 런던 올림픽 동메달 획득에 일조했습니다.

김영권, 홍정호, 김보경, 김민우 등 가능성 있는 선수를 발굴하고 키우는 재미가 컸습니다. 2009년 이집트 U-20 월드컵 8강 진출에 성공했을 땐 선수 시절 느끼지 못한 뿌듯함이 있었죠. 이 선수들과 함께 성장해 2012년 런던 올림픽 동메달 획득을 일궜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못지않은 감동을 전했죠(웃음).

2002년 한-일 월드컵 못지않은 감동을 전한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습니까.

3-4위전이죠. 상대가 일본으로 결정됐을 때 모두가 ‘끝났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길 걸 100% 확신했어요. 지도자가 확신을 가지면 선수들의 자신감이 2배로 오릅니다. 경기 전부터 패배할 수 없는 분위기였죠.

감독께선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도 코치로 참가했습니다. 지도자로 참가한 첫 월드컵입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은 정말 아쉬워요. 결과를 떠나서 과정이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기성용, 구자철, 지동원, 김보경, 손흥민 등 유럽에서 시즌을 마치고 합류한 선수가 많은 까닭에 팀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게 쉽지 않았어요. 현지 적응에도 어려움이 많았죠. 유럽에서 월드컵이 열렸다면 다른 결과를 내지 않았을까 싶어요. 물론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건 우리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감독께선 한국 최고의 수비수로 선수 시절을 보냈습니다. 2006년부터 2018년까진 코치 경력을 쌓았죠.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감독께선 일찍 지휘봉을 잡을 기회는 없었습니까.

제안이 없었습니다(웃음). 감독 제안이란 게 쉽게 오지 않더라고요. 감독 후보로 거론된 적은 있지만 그뿐이었어요. 실망하진 않았습니다. 인연이 닿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준비를 멈추지 않았어요. 언젠가 기회는 찾아올 것이고 그때 준비한 걸 보여주면 된다고 믿었죠.

마침내 K3리그 천안시축구단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천안시축구단에서 제안을 받은 건 아닙니다. 천안시축구단 감독 공개모집에 지원했어요(웃음). 다들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제가 K3리그로 올 것이란 걸 예상 못 한 까닭이죠. 서류와 면접을 거쳐 최종합격했습니다.

K리그1이나 K리그2에서의 제안을 기다리거나 도전할 생각은 없었습니까.

12년을 기다렸습니다(웃음). 기다린다고 기회는 오지 않아요. 내가 먼저 움직여서 잡아야 합니다. 천안시축구단이 지금은 K3리그 소속이지만 2022년엔 K리그2로 나아갈 거예요. 팀과 함께 성장하고 싶습니다. 코치로 많은 경험을 했어요. 배우고 경험한 걸 다 쏟아내겠습니다.

2006년부터 2018년까지 쌓은 코치 경력이 큰 무기가 될 것으로 봅니까.

아무리 뛰어난 감독도 혼자서 팀을 이끌진 못합니다. 각자의 역할이 있어요. 제 최대 강점은 여기 있습니다. 선수는 물론 코치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요. 감독이 권위를 내려놓고 선수, 코치에게 다가갈 때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감독께선 K리그1 최상위 팀을 맡아도 이상하지 않을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수들이 어려워하진 않습니까.

먼저 다가가고 장난칩니다. 처음엔 선수들이 어려워한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코치와 선수들이 ‘생각했던 이미지와 다르다. 아주 부드럽다’고 얘기해요. 대신 딱 한 가지를 강조합니다. ‘운동장에서만큼은 죽을힘을 다해야 한다’고.

운동장에서 죽을힘을 다해라?

승부의 세계입니다.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과로 인정받는 게 프로예요. 선수들에게 ‘승리했을 때와 패했을 때 네 얼굴을 상상해보라’고 이야기합니다. 경기장에선 실력만 봅니다. 선수들에게 강조하는 게 하나 더 있어요.

어떤?

경기장에 오는 팬들은 선수들의 동작 하나하나에 대리만족을 느낍니다. 책임감을 가지고 뛰어야 해요. ‘내가 이만큼 땀 흘렸다. 프로는 확실히 다르다’는 걸 경기장에서 증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팬들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 경기장을 찾아요.

오랜 기다림 끝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감독께선 어떤 꿈을 꾸며 달려왔습니까.

현실적인 꿈과 이상적인 꿈 두 가지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론 현재의 전북 현대를 만든 최강희 감독(현 상하이 선화)처럼 한 팀에서 오랫동안 일하고 싶어요. 천안시축구단 감독직에 도전한 이유가 여기에 있죠(웃음). 한 팀의 역사를 만들고 아름답게 떠나고 싶습니다.

이상적인 꿈은 무엇입니까.

프로축구단 감독이나 사장직에 도전하고 싶어요. 축구인이 구단 수뇌부에 있으면 유리한 점이 많습니다. 현장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에 여러 가지 문제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죠. 팀이 빠르게 발전할 계획을 마련할 수 있고요. 이상적인 꿈입니다. 지금은 천안시축구단과 함께 나아가는 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네.

2020년 K3리그가 새 출발을 알립니다. 기존 8개팀과 내셔널리그 8개팀이 합쳐 ‘통합 K3리그’가 탄생했죠. K4리그와 승강제도 이뤄져요. 천안시축구단이 천안시를 대표하는 팀이자 K리그 흥행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구단으로 나아가는 데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많은 분이 관심과 응원을 보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저작권자 © 스포츠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 후원하기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