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바왕’ 윤동식, 유도인 출신 한국 대표 종합격투기 선수

-“유도 선수로 47연승 내달릴 땐 두려운 게 없었죠”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나서지 못한 건 지금도 아쉽다”

-“처음 종합격투기 링에 올랐을 땐 상대의 주먹과 킥이 두려웠다”

-“50살에도 부끄럽지 않은 경기력 보이는 게 마지막 꿈”

윤동식이 꼽는 인생 경기는 2007년 6월 2일 K-1에서 만난 멜빈 마누프전이다(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윤동식이 꼽는 인생 경기는 2007년 6월 2일 K-1에서 만난 멜빈 마누프전이다(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

2007년 6월 2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로세움. 유도에서 종합격투기로 전향 후 4전 4패를 기록 중인 윤동식(47)이 첫 승 도전에 나섰다. 전망은 밝지 않았다. 상대가 무에타이 전적 30승(23KO) 3패에 빛나는 멜빈 마누프였다. 마누프는 K-1에서도 5승 2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1라운드가 종료됐을 때 윤동식의 눈은 피멍투성이였다.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윤동식이 2라운드에서 마누프의 틈을 노려 그림 같은 암바를 성공시켰다. 윤동식이 종합격투기에서 첫 승을 거둔 순간이다.

윤동식은 1990년대 한국 유도를 대표한 선수였다. 고교 3학년 때부터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무대에서 이름을 알렸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진 공식전 47연승을 내달렸다. 1994년 일본 히로시마 아시아경기대회에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윤동식의 연승 기록은 2004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 이원희가 48연승(2003년 말 달성)을 질주할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 윤동식은 유도와 종합격투기 무대에서 업적을 남긴 한국 유일의 선수로 불린다. 엠스플뉴스가 “50살까지 링 위에 오르고 싶다”는 윤동식을 만났다.

윤동식, 한국 유도 레전드 전기영과 상대 전적에서 앞섰던 ‘비운의 유도 천재’

고교 시절부터 태극마크를 달았던 윤동식(사진=윤동식 제공)
고교 시절부터 태극마크를 달았던 윤동식(사진=윤동식 제공)

2017년 9월 ROAD FC 042 충주 대회를 끝으로 공식전 출전 기록이 없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50살 격투기 선수를 꿈꾸며 운동하고 있습니다(웃음). 평생 운동만 했어요. 유도로 시작해 격투기 선수의 삶을 살아가고 있죠. 많은 분이 ‘이젠 은퇴해야 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몸이 전성기 때와 다르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에요. 하지만, ‘아직 살아있다’란 평가를 받을 자신이 있습니다.

“평생 운동만 했다”고 했습니다. 그 시작은 언제였습니까.

처음부터 투기 종목을 한 건 아니에요. 초등학교 땐 육상을 했습니다. 60m가 주 종목이고 높이뛰기와 멀리뛰기 등을 병행했어요. 학교 대표로 서울시 대회에 나가 3위(높이뛰기)를 기록하는 등 재능이 있었죠.

어릴 땐 육상 선수를 꿈꿨던 겁니까.

학교에서 달리기가 가장 빨랐습니다. 운동신경이 아주 좋았죠. 내 특기를 살려 학교를 대표할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선생님과 친구들의 칭찬도 들을 수 있었죠. 본격적으로 운동선수의 삶을 살기 시작한 건 중학교 진학 후입니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체육 교사께서 불러 길을 제시했어요.

길을 제시했다?

체육 교사께서 “운동만 집중적으로 할 수 있는 학교가 있다”면서 서울체육중학교 진학을 권유했습니다. 크게 고민하지 않았어요. 운동에 재능이 있는 까닭에 한 번 도전해보자고 했죠. 운동을 얼마만큼 잘하는 친구들이 모이는 곳인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서울체육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운동선수의 삶을 시작한 겁니다.

육상선수를 목표로 서울체육중학교에 진학한 겁니까.

서울체육중학교에서 주 종목을 정했습니다. 운동부만 16개가 있었어요. 유도, 레슬링, 배드민턴, 태권도 등 다양했죠. 처음엔 이 모든 종목을 경험합니다.

많은 종목 가운데 유도가 적성에 맞았던 거군요.

당시 코치께선 “누르고 조이는 힘이 좋아서 무조건 유도를 해야 한다”고 했죠.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 하형주, 안병근 선배의 경기를 똑똑히 기억할 때였어요. ‘유도가 내 종목’이라고 판단했죠.

실제로 접해본 유도, 어땠습니까.

‘사람이 운동을 이렇게까지 할 수 있구나’란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운동량이 어마어마했어요. 새벽 훈련으로 하루를 시작해 오후, 야간 훈련을 했죠. 저는 지금도 다른 사람들과 밥을 못 먹어요.

밥을 못 먹는다?

중학교 때부터 밥을 5분 안에 먹습니다. 밥 먹는 시간을 줄여야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거든. 식사 시간이 30분이면 5분 만에 밥을 먹고 25분은 쉬는 겁니다. 빨리 먹는 습관이 생긴 거죠. 천천히 먹으려고 시도해 봤는데 안 고쳐집니다. 계속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아요. 친구들을 만나면 “밥은 따로 먹자”고 하죠(웃음).

이토록 힘든 운동을 지속한 힘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키가 140cm 이하였어요. 몸무게는 40kg이 안 됐죠. 여자 선배들과 연습하면 매일 졌습니다. 이를 악문 계기죠(웃음). 남들보다 1분이라도 더 운동했습니다. 그러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어요. 2학년 때 출전한 소년체전, 중·고 연맹전 등에서 1위에 오른 겁니다. 이렇게 쭉쭉 성장해 서울체육고등학교 3학년 때 태극마크를 달았습니다.

윤동식(사진 맨 왼쪽에서 세 번째)은 1993년부터 1995년까지 공식전 47연승을 기록했다(사진=윤동식 제공)
윤동식(사진 맨 왼쪽에서 세 번째)은 1993년부터 1995년까지 공식전 47연승을 기록했다(사진=윤동식 제공)

유도선수 윤동식의 이름 앞엔 늘 ‘비운의 사나이’가 붙습니다. 유도계는 그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용인대 출신이 아니란 걸 꼽습니다. 고교 시절 태극마크를 달았습니다. 그런데 유도 명문 용인대로 진학하지 않고 한양대를 선택했습니다.

용인대에서 연락이 왔죠. 고교 시절 잘 나갔으니까. 한양대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어요. 고교 시절 아주 가까운 1년 선배가 있었습니다. 그 선배가 한양대를 다녔어요. 한양대와 형에게 연락이 왔고 큰 고민 없이 용인대를 포기했죠. 지금 생각하면 참 순수했던 것 같아요. 바보였죠(웃음). 실력만 있으면 어느 대학을 가든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용인대 진학을 포기하게 한 1년 선배는 어떤 형이었습니까.

저를 엄청나게 예뻐했어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먼저 다가와 챙겨줬습니다. 훈련 마치면 맛난 음식도 자주 사줬죠(웃음). 친형이나 다름없었어요.

사실 대학 진학 후에도 잘 나가긴 했습니다. 윤동식은 1993년 아시아선수권 대회를 시작으로 공식전 47연승을 내달립니다. 이 기록은 2004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 이원희가 48연승(2003년 달성)을 내달릴 때까지 깨지지 않았습니다.

자신감은 훈련량에서 나옵니다. 태극마크를 단 이후 더 땀 흘렸어요. 첫 국제무대에서 키 크고 힘 좋은 유럽 선수들을 만났을 때 두렵기도 했지만 이겼습니다. 지금처럼 하면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 거죠.

1994년 일본 히로시마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연승을 이어갈 때였죠. 솔직히 두려울 게 없었습니다. 이기고 난 후에 한 번도 자만하지 않았으니까. 유도 종주국인 일본에서 대회가 열린다는 점도 평소보다 집중력을 갖게 했죠. 큰 어려움 없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마음속으로 ‘이제 올림픽 하나 남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 따고 바로 올림픽을 생각한 거군요.

올림픽은 모든 운동선수의 꿈이니까. 모든 운동선수가 공감할 거예요. 운동을 즐긴다? 솔직히 ‘말이 안 된다’고 봅니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들어요. 꾹 참고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건 아무나 올라설 수 없는 올림픽 시상대 가장 높은 위치에 서고자 하는 꿈이 있는 까닭입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아경기대회 결승전은 그날에 한 발 더 다가선 날이었어요.

윤동식의 거침없는 공식전 연승행진이 올림픽을 1년 앞둔 1995년 깨집니다.

1995년 일본 지바 세계선수권이었습니다. 16강전에서 팔을 다쳤어요. 팔이 떨어져 나간 줄 알았을 만큼 아팠습니다. 48연승에 실패한 거죠. 당시엔 아쉽지 않았어요. ‘팔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습니다(웃음).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금메달을 꿈꿨던 윤동식(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금메달을 꿈꿨던 윤동식(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부상 이후 이전과 같은 활약을 보이지 못했어요. 특히나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했습니다.

착실한 재활로 예정보다 일찍 복귀했습니다. 1996년 유도 톱랭커들이 출전하는 프랑스 파리 대회에서 금메달을 땄죠. 그런데 올림픽엔 나갈 수 없었어요. 당시 유도계에선 심판을 마술사라고 불렀습니다. 아무리 좋은 경기력을 보여도 이길 수가 없었어요. 상대를 한판으로 넘겨도 무효 판정이 났죠. 그렇게 대표 선발전을 마치고 1년간 낚시를 다녔어요.

낚시?

솔직히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금메달을 확신했어요. 부상을 당하면서 연승 기록은 깨졌지만 자신감이 있었죠. 어떻게 운동하고 경기에 나서면 승리를 거머쥘 수 있는지 아니까. 세계선수권, 아시아경기대회 등에서 거둔 성적도 자신감을 더해줬습니다. 그런데 올림픽 출전을 못 했어요. ‘내가 이러려고 고된 훈련 참아가면서 운동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죠. 더 이상 운동을 못 하겠더라고. 조용한 곳에서 낚시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낚시가 취미였습니까.

한 번도 안 해봤죠. 1990년대 운동선수가 다른 걸 즐긴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감독께 ‘쉬고 싶다’고 말하고 무작정 낚시하러 다닌 겁니다. 조용한 곳에서 혼자 앉아 많은 생각을 했죠. 참 웃겨요. 유도계가 밉고 유도복을 쳐다보는 것조차 싫었는데 그립더라고. 다시 개인 운동을 시작해 복귀를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올림픽과의 인연은 없었습니다. 2000년 호주 시드니 올림픽과 2004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체급을 78kg에서 90kg으로 올렸습니다. 90kg이라면 태극마크를 달고 올림픽에 나설 수 있다는 판단이었죠. 저녁마다 닭죽을 먹으면서 체중을 늘리고 운동을 엄청나게 많이 했어요. 2000년 아시아선수권에서 금메달을 따내는 등 성과도 냈죠. 하지만, 올림픽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어요. 몸이 가장 좋았던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에 나서지 못한 게 더 아쉬웠죠.

윤동식은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유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레전드로 불리는 전기영과 상대 전적에서 우위를(11승 9패) 점한 세계 유일 유도 선수였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라이벌이었습니다. 전기영 선수와는 붙으면 누가 이길지 몰랐어요. 한판은 없었습니다. 늘 팽팽하게 붙어 판정에서 승부가 갈렸죠. 유도 인생에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에요. 1996년 올림픽에 나서지 못한 건 지금도 너무 아쉽습니다. 하지만, 세계 최고 선수들과 경기에서 이겼던 기억들이 있어요. 유도 선수로 매 순간 온 힘을 다했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웃음).

‘비운의 유도왕’ 윤동식, 2005년 종합격투기 도전을 알리다

타격 훈련을 하고 있는 윤동식(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타격 훈련을 하고 있는 윤동식(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한국마사회 유도 코치로 있던 2005년 3월 일본 종합격투기 프라이드 진출을 선언합니다.

일본 종합격투기의 황금기죠. 도쿄돔에서 프라이드 경기가 열리면 5만 5천 석이 가득 찼습니다. 첫 제안을 받고 종합격투기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는 데 눈을 사로잡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일본 유도 전설 요시다 히데히코였죠. 요시다는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이름을 날린 선수였어요.

요시다?

유도계 전설이 종합격투기 무대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게 신기했죠. 사실 프라이드에서 처음 원했던 건 제가 아니었어요. 요시다에 버금가는 한국 유도 전설 전기영이었습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간의 대결을 꿈꿨던 거죠. 그런데 전기영은 프라이드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선수 생활은 마쳤지만 유도계 발전을 위해 나아가고 싶은 확고한 꿈이 있었죠.

프라이드가 전기영 영입에 실패하면서 종합격투기 진출 제안을 받은 겁니까.

그렇죠. 처음엔 내게 관심이 없었어요(웃음). 전기영이 프라이드 제안을 뿌리치면서 날 한 번 본 거죠. 당시 그쪽 에이전트가 했던 말이 생생하게 기억나요.

어떤 말이었습니까.

“(윤)동식아, 너 몸 좋다. 네가 한 번 도전해보는 건 어때”였습니다. 고민했죠. 유도 선수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도전은 불가능했습니다. 전성기가 지난 때였어요. 당시엔 ‘20대 후반이면 은퇴해야 한다’는 인식도 강했습니다. 30대 유도 선수는 꿈꿀 수 없었죠. 운동선수에 대한 미련이 프라이드 진출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였어요.

미련이요?

올림픽 하나만 바라보며 유도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아시아경기대회와 세계선수권 등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올림픽엔 나가지 못했죠. 미련이 남을 수밖에 없는 유도인의 삶을 살았어요. 종합격투기를 배운 적은 없지만 일본 유도의 전설이 활약하고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자신감이 생긴 거죠. ‘나도 할 수 있다’고. 또 하나 무시할 수 없었던 건...

무시할 수 없었던 건?

경기 수당과 계약금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엔 잘못 적은 줄 알았어요. 정확한 액수를 공개하는 건 어렵지만 유도인으로 살면서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금액이었습니다. 당시 나이 서른셋, 고민 끝 종합격투기 무대에 도전하기로 했죠. 2005년 3월 28일 기자회견에서 프라이드 진출을 선언했습니다.

종합격투기 진출을 선언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데뷔전이 잡혔습니다. 2005년 4월 23일 프로레슬러 출신 사쿠라바 카즈시와 대결을 확정했죠. 사쿠라바는 당시 프라이드 전적 15승 1무 6패를 기록 중인 최고 스타였습니다.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에 조건이 있었어요. 준비 기간 없이 데뷔전을 치르라는 겁니다. 상대는 프라이드 최고 스타인 사쿠라바였죠. 당시 사쿠라바는 3연패를 기록하면서 반등의 계기가 필요한 상태였어요. 그 상대로 한국 유도 국가대표 출신인 저를 콕 집은 겁니다. 무모했죠. 알면서도 했습니다. 일본 선수를 상대로 피할 수가 없었어요.

데뷔전에서 1라운드 38초 만에 KO 패배를 당했습니다.

이길 수가 없는 경기였죠. 종합격투기의 기본은 타격이에요. 이 훈련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프라이드 데뷔전 일정이 촉박하게 잡히면서 유도 기술로 승부를 봐야 했죠. 수만 명 앞에서 경기하는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대회가 열린 일본 오사카 돔엔 5만 3천 명이 넘게 왔어요. 하나같이 야유를 퍼부었죠. 정신 차려보니 링 바닥에 쓰러져 있더라고. 부끄러운 경기였습니다.

첫 경기 후 본격적인 종합격투기 훈련에 나선 겁니까.

죽자 살자 했죠(웃음). 한국을 대표해서 프라이드에 왔다는 생각으로 기초부터 다졌습니다. 훈련 시설과 프로그램이 잘 짜인 일본에서 1년간 생활했죠. 이 기간 데뷔전 상대였던 사쿠라바가 큰 도움을 줬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자기 일처럼 나섰습니다.

하지만, 네 번째 경기까지 모두 패했습니다.

결과에선 졌지만 점점 나아지는 걸 느꼈어요. 두 번째 상대는 타키모토 마코토였습니다. 타키모토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였죠. 유도로 두 차례 붙은 선수기도 했습니다. 두 번 다 이겼어요. 종합격투기는 초보지만 당시의 기억을 가지고 훈련에 매진했습니다. 그 결과 3라운드 접전 끝 판정으로 졌어요. 데뷔전처럼 허무한 패배는 아니었던 거죠.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걸 느낀 거군요.

세 번째 경기였던 퀸튼 잭슨전은 ‘프라이드 무대에서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습니다. 퀸튼은 2007년 프라이드 미들급 챔피언과 UFC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에 오른 세계 최고 선수였습니다. 많은 분이 “윤동식이 죽을 수 있는 경기”라고 했죠. 하지만, KO로 패하지 않았습니다.

특별 훈련이 있었던 겁니까.

이 경기 전 미국 시애틀에서 두 달 동안 훈련했어요. 미국 이종격투기 단체인 UFC 선수들과 훈련하면서 많은 걸 배웠죠. 타격은 부족했지만 상대 주먹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덜 아프게 맞는 법도 익혔습니다(웃음). 종합격투기가 무엇인지 느낌이 온 거죠. 퀸튼에게 훨씬 많이 맞았지만 마지막까지 싸울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격투기계는 “당시 윤동식이 이길 수도 있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암바 기회가 있었죠. ‘이겼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그걸 힘으로 빼더라고(웃음). 그대로 나를 들어서 던져버리고 엄청나게 때렸죠. ‘세계 최고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구나’라는 걸 느꼈습니다. 동시에 그런 선수에게 KO패 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얻었죠.

“인생 경기? 2007년 6월 2일 멜빈 마누프전이죠”

윤동식은 2007년 6월 2일 멜빈 마누프전에서 암바로 첫 승을 거뒀다(사진=윤동식 제공)
윤동식은 2007년 6월 2일 멜빈 마누프전에서 암바로 첫 승을 거뒀다(사진=윤동식 제공)

프라이드 전적 4전 4패. 마지막 경기였던 UFC 웰터급 챔피언 출신 무릴로 부스타만테전을 끝으로 또 다른 종합격투기 단체 K-1 히어로즈로 둥지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만난 상대가 무에타이 대회에서 30승(23KO) 3패를 기록한 멜빈 마누프(당시 K-1 전적 5승 2패)였습니다.

붙어본 상대 가운데 가장 강했을 겁니다(웃음). K-1에서 세 차례나 챔피언에 오른 마크 헌트를 이긴 선수예요. 이 선수는 공격적인 경기 운영으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많은 전문가가 “윤동식은 이번에도 첫 승은 어렵다”고 했죠. 저 역시 결과보단 ‘세계 최고 선수를 상대로 후회 없이 싸우자’는 생각이었어요.

많은 격투기 관계자가 “윤동식의 인생 경기는 마누프전”라고 합니다.

틀린 말이 아니죠(웃음). 선수라면 승리를 목표로 훈련하지만 솔직히 장담하지 못했어요. 상대가 워낙 강했으니까. 그런데 경기 당일 느낌이 좋았어요. 내 이름이 불리고 등장할 때부터 마음이 편했습니다.

경기는 어땠습니까.

마누프는 확실히 강했습니다. 주먹을 쉽게 피하고 강하게 반격했어요(웃음). 초반 그 반격에 살짝 정신을 잃기도 했습니다. 어려웠죠.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어요. 타격에선 힘들지만 그라운드로 가면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기회가 왔죠.

기회가 왔다?

마누프가 힘들어하는 게 보였습니다. 입가가 하얘진 거예요. 마누프에게 많이 맞았지만 후반에 기회가 올 것으로 확신했죠. 그런데 1라운드 마치고 세컨드가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어떤?

“잘 싸웠다. 지금 네 얼굴이 너무 부었다. 더 싸우다간 크게 다칠 수 있다. 그만하자”고. 바로 이야기했죠. “무슨 소리냐. 끝까지 싸울 거다. 오늘은 이길 수 있을 것 같다”고. 제 느낌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2라운드에서 기회를 잡았어요. 체력과 집중력이 떨어진 틈을 노려 암 바에 성공한 거죠. 이긴 겁니다.

유도에선 승리를 밥 먹듯이 했습니다. 하지만, 종합격투기에 도전하고 첫 승리를 거두기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첫 승리를 거뒀을 때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가장 먼저 유도인들이 떠올랐습니다. 어릴 적부터 함께 땀 흘린 동료, 코치, 감독 등에게 미안했거든요. 대학 시절 은사께선 종합격투기 진출을 만류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유도를 대표해 종합격투기로 왔는데 매일 패했어요. 미안하고 힘들었던 감정들이 싹 잊혔습니다. 아주 좋았어요(웃음). 부모님, 큰형, 지인 모두 마찬가지였죠. 이 이야기를 꼭 하고 싶어요.

네.

마누프전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렸습니다. 유명 인사가 많이 왔죠. 배우 니콜러스 케이지가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제게 가장 인상 깊은 인사는 다른 분이었어요. CJ그룹 이미경 부회장이었습니다. 경기 후 누군가 4~6명의 경호원의 보호를 받으며 다가오는 거예요.

그게 CJ그룹 이미경 부회장이었군요.

부회장께서 “괜찮나요. 경기가 아주 감동적이었습니다”란 짧은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리고 명함을 주셨죠. 사실 그땐 누군지 몰랐어요. 경호원이 “저분은 CJ그룹 부회장”이라고 해서 알았죠. 덧붙여 “6년 동안 부회장을 모셨는데 먼저 명함을 건넨 건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더 놀란 건 숙소 복귀 후였어요.

CJ그룹 이미경 부회장이 2007년 6월 2일 멜빈 마누프전에서 승리한 윤동식에게 남긴 자필 편지(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CJ그룹 이미경 부회장이 2007년 6월 2일 멜빈 마누프전에서 승리한 윤동식에게 남긴 자필 편지(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숙소 복귀 후요?

숙소 문을 열고 깜짝 놀랐습니다. 과일 바구니가 가득 한 거예요. 그리고 그 한 가운데 엽서가 있었습니다. 부회장께서 자필로 편지를 남기신 거예요. “꼭 한 번 연락하라”고 했는데 아직 못 했습니다(웃음). 이 자리에서 “정말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요.

마누프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4연승을 내달렸습니다. 그리고 ‘암바왕’이란 별명이 붙었습니다.

마누프전을 시작으로 암바로만 3연승을 했어요(웃음). 이후 만난 오야마 슌고는 판정으로 이겼죠. 종합격투기 무대에서 이기는 법을 익힌 겁니다. 이 기간 많은 분이 알아봐 주시고 응원해주면서 큰 힘을 받았어요. ‘최소한 부끄러운 경기는 하지 말자’는 신념으로 더욱 땀 흘릴 수 있었죠.

2013년 이후엔 한국 종합격투기 단체인 로드 FC로 둥지를 옮겨 선수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2017년 9월 ROAD FC 042 충주 대회를 끝으로는 링 위에 오른 적이 없죠.

마누프전 이후 4연승을 거뒀던 기간이 격투기 전성기였던 것 같아요(웃음). 하지만, 지금도 자신감은 있습니다. 당시와 똑같은 경기력을 보일 순 없겠지만 지켜보시는 분들의 박수를 받아낼 자신이 있어요. 은퇴를 선언하지 않고 선수 생활을 이어가려고 하는 건 이 때문이죠.

지금도 링 위에 서는 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까.

설레요(웃음). 그날을 위해 모든 걸 쏟아낼 준비도 됐습니다. 솔직히 처음 링 위에 섰을 땐 두려운 감정이 컸어요.

두려운 감정이 컸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링 위에 올라가는 게 괴로웠어요. 종합격투기 최강자로 불리는 선수들의 타격과 킥입니다. 링 위에 올라서기 전부터 두렵고 맞으면 엄청나게 아파요(웃음). 반면 전 무기가 없었습니다. 유도 외엔 기술이 없었어요. 상대에게 무작정 달려들어 그라운드 기술을 쓰려고 했죠. 유도나 종합격투기나 두려움을 떨쳐내는 법은 하나였습니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빼먹지 않는 윤동식(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웨이트 트레이닝을 빼먹지 않는 윤동식(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방법은 하나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경기에서 승리하려면 훈련밖에 없어요. 많이 맞아본 사람이 타격도 잘합니다. 내 강점인 유도 기술도 점점 살려 나갈 수 있죠. 20대까지 유도를 하지 않았다면 종합격투기 무대에서 이토록 오래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을 해요.

이유가 있습니까.

훈련은 유도가 훨씬 힘듭니다. 운동량에서 비교가 안 돼요. 유도 선수 시절엔 하루 훈련 마치면 3kg이 빠졌습니다. 이 시기를 버티면서 살아온 게 종합격투기 선수 윤동식을 만들어 준 거예요. 링 위에 서는 게 두려울 때마다 ‘중학교 때부터 그 힘든 훈련도 해냈는데 이것 하나 못할까’란 생각을 했죠.

50살이 넘어서까지 현역 종합격투기 선수를 꿈꿉니다. 다음 경기는 언제로 예상합니까.

2월 2일부터 더블지 FC란 한국 종합격투기 단체와 대화를 나눴어요. 금액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선수 생활을 이어가는 게 가장 중요했죠. 하지만, 계약서를 쓰진 못 했습니다. 4개월 넘게 대화만 하다가 끝났어요. 운동을 이어가면서 뛸 수 있는 단체를 찾아볼 계획입니다. 좋은 경기력을 보일 자신이 있어요. 이른 시일 내 링 위에서 증명하겠습니다(웃음).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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