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원조’ 장신 스트라이커 김재한, 1970년대 최전방 책임진 ‘레전드’

-“고(故) 호세 아우구스토 토레스가 내 롤 모델이었다”

-“손흥민 볼 때마다 (차)범근이 선수 시절 떠올라”

-“호주와 마지막 승부 벌인 1974년 서독 월드컵 예선이 평생의 한으로 남았다”

-“여생? 하루하루 축구 즐기면서 살아야지”

한국 축구 대표팀 레전드 스트라이커 김재한(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한국 축구 대표팀 레전드 스트라이커 김재한(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

찼다 찼다 차범근 센터링 올렸다. 떴다 떴다 김재한 헤딩슛 골인

1970년대 학생들은 이 노래를 즐겨 불렀다. 동요 종이비행기를 개사한 노래로 따라 부르기가 쉬웠다.

차범근의 센터링을 하늘 높이 날아 헤더골로 연결하는 주인공. 김재한(74)은 1970년대 한국 축구 대표팀의 전방을 책임진 스트라이커다. 평범한 스트라이커가 아니다. 179cm 차범근이 장신 공격수로 불리던 시절 191cm 키로 공중볼을 장악한 원조 장신 스트라이커다.

1970년대 한국 축구 대표팀엔 ‘전설’들이 포진했다. 이회택(A매치 81경기 21득점), 박이천(88경기 36득점), 차범근(136경기 58득점), 김진국(97경기 27득점), 이차만(50경기 6득점), 허정무(103경기 30득점), 조광래(100경기 15득점) 등 한 시대를 풍미한 레전드가 호흡을 맞췄다. 이 시대 전방을 책임진 스트라이커가 김재한(58경기 33득점)이다.

엠스플뉴스가 25살이었던 1972년 처음 태극마크를 달고 1979년까지 한국의 전방을 책임진 김재한을 만났다. 지금부터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국 ‘원조’ 장신 스트라이커 김재한 “고(故) 호세 아우구스토 토레스가 내 롤 모델이었지”

김재한은 큰 키와 높은 점프력을 앞세워 매 경기 공중볼을 장악했다(사진=김재한 제공)
김재한은 큰 키와 높은 점프력을 앞세워 매 경기 공중볼을 장악했다(사진=김재한 제공)

선수 시절 장신 스트라이커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은퇴 후엔 한국주택은행 축구단 감독과 대한축구협회(KFA) 상근 부회장 등을 거쳤습니다. 최근엔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방콕이지. 코로나19로 어딜 갈 수가 없어(웃음). 생활체육 하시는 분들과 어울리고 원로 축구인 모임에서 이야기 나누는 게 낙인데 참 아쉬워요.

1970년대 학생들 사이에선 ‘찼다 찼다 차범근 센터링 올렸다. 떴다 떴다 김재한 헤딩슛 골인’이란 노래가 인기였습니다. 동요 종이비행기를 개사한 노래로 당시 김재한이란 선수가 어떤 존재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옛날얘기지. 이회택, 김진국 등 1970년대 태극마크를 달고 활약한 우리 세대는 지는 해야(웃음). 지금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월드컵 세대가 중심이에요.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한 차범근, 허정무부터 2002년 한-일 월드컵 세대인 황선홍, 최용수, 김남일 등 훌륭한 친구가 많잖아. 우린 뒤에서 응원하는 역할에 충실해야지(웃음).

평생 축구인으로 살아왔습니다. 현장이 그립진 않습니까.

지금 우리 세대가 나서면 큰일 나요. 후배들이 뜻을 펼칠 수 있게 지켜봐야지. 그 친구들은 컴퓨터 세대야.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전술, 전략을 짠다고. 선수 시절엔 월드컵, 올림픽 등 큰 무대를 경험했습니다. 세계 최고 선수가 즐비한 유럽 리그 경험자도 많아요. 우린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웃음).

후배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지금도 축구가 아주 좋아요. 인생의 전부지. 우리는 운동장에 나가야 가치가 있어(웃음). 운동장 밖에선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인이에요. 푸른 잔디 위에 서야 생기가 돋습니다.

축구가 왜 그렇게 좋습니까.

축구를 안 했어 봐. 김재한이란 사람을 누가 알아주겠어요. 1947년 경상북도 금릉군(1995년 김천시로 통합)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그때가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라고. 시골에서 축구를 시작해 부모님의 자랑이 되고 대학까지 나왔습니다. 실업팀에 입단해 태극마크까지 달았죠. 은퇴 후 은행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축구 때문입니다. 애착이 안 갈 수가 없지.

인생의 전부인 축구, 첫 인연은 어떻게 맺었습니까.

어릴 때 놀게 뭐가 있나. 학교 운동장에 자그마한 골대 하나 두고 뛰어놀았지. 주말엔 논두렁에서 고무공 차고 놀았어요(웃음). 요즘 친구들은 이해 못 할 겁니다. 재밌는 게 얼마나 많아. 휴대전화만 봐도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잖아.

본격적으로 축구 선수를 꿈꾸기 시작한 건 언제입니까.

축구부 생활을 한 건 중학교 때부터예요. 그런데 1960년대 시골 학교에 체계적인 시스템이 있었겠나. 그렇게 축구를 하다가 ‘좀 더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싶다’는 생각에 전학을 갑니다.

어디로 갔습니까.

대구 성광고등학교로 갑니다(웃음). 이 선택이 내 인생을 바꿨어.

인생을 바꿨다?

학창 시절엔 도드라진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냉정히 대학교에 갈 실력이 안 됐어요. 그러던 중에 실업팀 제일모직 축구단에서 배울 기회가 생깁니다. 대구 제일모직 공장 안에 운동장이 있었어요. 겨울마다 전지훈련을 온 거지. 성광고랑 연습경기를 하는데 당시 제일모직 안종수 코치께서 나를 눈여겨 본 거야. 내가 실력은 부족하지만 피지컬이 좋았거든.

한국 축구 대표팀 레전드 스트라이커 김재한(사진 맨 왼쪽에서 두 번째)(사진=김재한 제공)
한국 축구 대표팀 레전드 스트라이커 김재한(사진 맨 왼쪽에서 두 번째)(사진=김재한 제공)

한국 장신 스트라이커의 원조입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3위를 기록한 포르투갈에 고(故) 호세 아우구스토 토레스란 191cm 스트라이커가 있었어요. 프로 통산 374경기에서 뛰며 217골을 터뜨린 레전드입니다. 국가대표팀에선 14골(33경기)을 기록했죠. 당시 월드컵에서도 3골을 터뜨리며 포르투갈의 준결승 진출에 앞장섰어요.

이 선수가 롤 모델이었던 겁니까.

토레스는 세계 축구 전설 고 에우제비오와 포르투갈 전방을 책임졌습니다. 에우제비오가 폭발적인 스피드와 섬세한 드리블, 탁월한 슈팅력 등을 자랑했다면, 토레스는 전방에서 상대 수비수와 싸울 수 있는 정통 스트라이커였어요. 제일모직에서 날 보고 토레스처럼 키워보자 한 거지.

제일모직에 입단한 거군요.

실업팀에 입단할 실력은 아니었어요. 서울에 있는 대학팀 들어가는 것도 힘들었다니까(웃음). 1년 동안 연습생으로 제일모직과 함께했습니다. 그러면서 기량이 많이 늘었지. 이후 건국대학교에 입학했어요.

지금은 K리그 산하 유소년 팀에서 성장하는 선수가 많습니다. 이 선수들은 체계적인 훈련과 관리를 받으면서 성장하고 있어요. 학창 시절 어떤 훈련을 받으면서 성장했습니까.

운동량이 어마어마했지(웃음). 새벽, 오전, 오후 기본 훈련이 하루 세 번이었어. 당시 감독, 코치는 학생선수들이 힘들어야 흐뭇해하곤 했어요. 종일 운동시켜야 자기 마음이 편해지는 거지. 지금처럼 AFC(아시아축구연맹) 코칭스쿨 받고 라이센스 따야 하는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또 선배들의 지원도 엄청났어요.

선배들의 지원이요?

1960년대 학교 축구부에 무슨 돈이 있겠어. 사회생활하고 있는 선배들이 밥 먹는 것부터 유니폼까지 많이 챙겨줬습니다. 당시엔 학교 이름 알리는 게 중요했거든. 대회에서 우승 못 하면 감독, 코치에게 혼나는 것보다 선배들 보는 게 무서웠어(웃음).

운동이 힘들어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습니까.

절대 포기 못 하지. 운동 그만두면 건달 되는 거야. 축구를 시작한 순간부터 공부를 제대로 안 했으니까. 내가 그만두고 싶어도 부모님이 포기 못 하도록 꽉 잡아줬습니다(웃음). 태극마크는 달지 못해도 실업팀은 가야 했죠. 그래야 지도자라도 할 거 아니야.

축구에만 집중한 게 국가대표 공격수로 성장한 비결이군요.

건국대를 졸업하고 실업팀 제일모직에 입단했어요. 대학 진학이 어려운 나를 키워준 팀이니까 고민하지 않았지. 그때부터 경기력이 확 좋아졌습니다. 신체조건이 워낙 좋으니까 크로스 올라오면 한 골이었지. 공중볼 다툼에선 적수가 없었어. 그러던 중 제일모직이 1972년 해체되면서 한국주택은행 축구단으로 둥지를 옮깁니다. 그리고 6개월 후 태극마크를 달죠.

“호주와 마지막 승부 벌인 1974년 서독 월드컵 예선이 평생의 한으로 남았다”

1973년 10월 28일 호주 시드니에서 펼쳐진 서독 월드컵 예선 호주전에서 김재한이 회심의 슈팅을 시도하고 있다(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1973년 10월 28일 호주 시드니에서 펼쳐진 서독 월드컵 예선 호주전에서 김재한이 회심의 슈팅을 시도하고 있다(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태극마크는 모든 선수의 꿈입니다.

높이와 힘을 앞세운 포스트 플레이로 한국주택은행 축구단의 4관왕에 앞장섰어요. 그리고 1972년 7월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를 앞두고 한국 축구 대표팀의 호출을 받았죠. 당시 25살이었습니다. 꿈같았어요. 시골 논두렁에서 볼 차던 꼬마가 태극마크라니(웃음). 당시 멤버가 어마어마했습니다.

어떤 선수들과 손발을 맞췄습니까.

이회택, 박이천, 차범근, 김진국, 이차만, 허정무 등과 1979년까지 국가대표팀에서 호흡을 맞췄어요. 축구가 참 재밌었습니다. 태극마크를 달고서도 포스트 플레이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어요. 크로스 올라오면 다 내 볼이었지(웃음). 전방에서 골을 많이 넣었어요.

1972년 태극마크를 달면서 축구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한 거군요.

고 호세 아우구스토 토레스처럼 플레이했습니다. 전방에서 상대 수비와 끊임없이 싸워주고 크로스 올라오면 직접 해결하거나 머리로 공을 떨궜죠. 그러면 민첩한 이회택 선배나 (차)범근이가 해결사 역할을 했어요.

이회택, 차범근은 한국 축구사에서 최고의 레전드로 불립니다. 당시 이 선수들의 기량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태극마크를 단 선수들은 한 가지 특징이 있어요. 나는 포스트 플레이가 강점이었지. 이회택 선배는 드리블을 시작하면 고무줄을 당겼다가 탁 놓는 느낌이었어요. 상대 수비를 요리조리 피해 득점을 만들었습니다. 빠르고 결정력이 탁월했죠. 범근이는 설명이 필요한가. 지금도 독일에서 ‘차붐’하면 알아주잖아.

한국 최고 선수가 모인 대표팀에서도 차범근은 달랐습니까.

범근이가 당시 막내였는데 ‘저런 놈이 다 있나’ 했다니깐(웃음). 일단 엄청나게 빨랐어. 고 서말구를 알아요? 1970년대 한국 육상을 대표한 선수입니다. 범근이가 서말구랑 100m 달리기를 붙었어. 범근이가 이길 것 같아서 선배들이 붙인 거지. 1974년 이란 테헤란 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태릉선수촌에서 훈련할 때였습니다.

누가 이겼습니까.

50m까진 정말 팽팽했습니다. 팀원들이 “여기서 범근이가 이기면 육상 대표로 차출되는 거 아니냐”고 얘기했죠. 그러나 범근이가 졌어요. 50m 이후 범근이는 조금씩 쳐지더라고. 서말구는 육상 선수답게 속도가 점점 붙었습니다. 하지만, 차이가 크진 않았어요. 범근이가 당시 100m를 11초에 주파했으니까. 당시 한국의 100m 기록이 10초 34였어요. 범근이가 육상 했으면 역사가 바뀌었을 겁니다(웃음).

차범근은 독일 분데스리가에서도 레전드로 꼽힙니다. 축구는 얼마나 잘했던 겁니까.

지금 손흥민이 보면 범근이 선수 시절 생각이 많이 나. 둘이 정말 비슷해. 빠르고 해결사 능력이 있지. 볼을 잡으면 무언가 보여줄 것 같은 기대감 있잖아(웃음). 유럽에서 인정받으려면 결국 골을 넣을 줄 알아야 해. 그래서 범근이랑 손흥민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게 아닌가 싶어요.

1970년대 한국의 전방을 책임진 명 스트라이커 아니었습니까.

두 친구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웃음). 나는 결정적으로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겨뤄보질 못했어요. 월드컵이란 무대를 꼭 밟아보고 싶었는데... 범근이는 선수 시절 말미인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을 뛰어봤잖아. 손흥민은 2014년 브라질 월드컵부터 두 대회 연속 출전했고.

1970년대 태극마크를 달고 호흡을 맞춘 차범근(사진 맨 왼쪽부터), 박이천, 김재한(사진=김재한 제공)
1970년대 태극마크를 달고 호흡을 맞춘 차범근(사진 맨 왼쪽부터), 박이천, 김재한(사진=김재한 제공)

한국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이후 32년간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습니다.

월드컵 본선에 나가는 게 쉽지 않았어요. 아시아에 배정된 월드컵 본선 티켓이 한 장도 안 됐어.

한 장도 안 됐다?

지금은 4.5장이죠? 우리 땐 0.5장이었어요. 아시아 예선에서 1위를 한 뒤에 다른 대륙 1위와 붙었습니다. 보통 우리와 같이 0.5장이 배정된 오세아니아 지역 1위와 대결을 벌였죠. 1974년 서독 월드컵 예선이 참 아쉬워요. 지금도 그날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1974년 서독 월드컵 예선이요?

1973년 우리가 아시아 예선 1위를 차지해요. 그리고 오세아니아 예선 1위에 오른 호주를 만납니다. 딱 한 장의 월드컵 본선 진출권을 두고 붙은 거죠. 당시 플레이오프는 홈앤드어웨이로 치러졌어요. 1차전은 1973년 10월 28일 호주 시드니에서 열렸습니다.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플레이오프가 너무 아쉬우니까(웃음). 우리가 시드니 원정에서 0-0으로 비겨요. 20년 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이 가까워진 거지. 같은 해 11월 10일 한국 축구의 성지였던 동대문운동장에서 2차전을 치릅니다. 내가 선제골을 넣었어요. 이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고재욱이 추가골까지 터뜨렸어요. 전반전을 2-0으로 마치죠. 그때만 해도 서독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1974년 서독 월드컵 본선행을 확신한 거군요.

우린 경험이 너무 없었어. 관중들이 들썩이니까 흥분한 거야. 감독이 추가골 넣으려고 라인을 올린 거지. 그러다가 역습으로 2골을 허용합니다. 경기가 2-2로 끝나요. 다 잡은 경기를 비긴 거죠. 허탈했습니다.

1, 2차전을 모두 비겼습니다.

당시엔 원정 다득점 우선 원칙이 없었어요. 3일 뒤인 1973년 11월 13일 제삼국인 홍콩에서 마지막 대결을 벌였습니다. 0-1로 패했어요.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한 거죠. 그 뒤로 홈에서 열린 호주전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후반전에 여유롭게 경기를 운영했다면 충분히 이겼을 거예요. 이기든 지든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들과 월드컵 본선에 도전하고 싶었는데... 아쉬워.

당시 호주 전력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지금이랑 아주 흡사해요(웃음). 선수들의 신체조건이 달랐죠. 당시엔 그런 선수들이 낯설었어요. 유럽 선수들과 경기해본 적이 없으니까. 우리가 호주 선수들과 부딪치면 휙 나가떨어졌어요. 힘에서 완전히 밀린 거지.

한국 축구 대표팀 원조 장신 스트라이커 김재한(사진 맨 오른쪽에서 두 번째)(사진=김재한 제공)
한국 축구 대표팀 원조 장신 스트라이커 김재한(사진 맨 오른쪽에서 두 번째)(사진=김재한 제공)

김재한은 힘과 높이를 앞세운 스트라이커였습니다. 호주 선수와 몸싸움에서 밀렸던 겁니까.

돌덩이랑 부딪친 것 같았어. 튕겨 나갔지. 당시 한국과 자주 붙었던 말레이시아, 미얀마 등과 차원이 달랐어요. 외계인인 줄 알았다니까(웃음). 특히나 호주에서 가장 크고 힘 좋은 선수가 나를 막았어요.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하는데 힘들었지. 우리가 1, 2차전에서 팽팽하게 싸웠다는 건 기술과 정신력에서 밀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신체조건이 축구에선 아주 중요한 거군요.

2002년 한-일 월드컵 성공 비결은 다른 게 아닙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은 한국의 약점을 정확히 파악했어요. 레이몬드 베르하이엔 피지컬 코치를 영입해 선수들의 체력을 키웠죠.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또 동남아시아 선수들을 예로 들어볼게요. 이 친구들은 1970년대도 기술이 아주 좋았습니다.

동남아시아 선수들이요?

말레이시아나 미얀마가 예전엔 축구를 잘했어요. 우리가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지. 하나같이 빠르고 기술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런 팀을 우리가 이길 수 있었던 건 신체조건에서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피지컬이 축구에선 정말 중요해. 나도 신체조건이 좋아서 빛을 본 사례잖아(웃음). 한국이 중동 축구에 약한 게 피지컬이란 생각을 해요.

한국은 ‘중동의 강호’ 이란(8승 9무 13패), 사우디아라비아(4승 7무 5패)에 상대 전적에서 밀립니다. ‘중동의 다크호스’ 쿠웨이트(12승 4무 8패)는 한국의 천적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걔들은 유럽이야(웃음). 몸이 달라. 우리도 이란이나 사우디아라비아와 붙으면 힘들었어요. 중동에서 강호로 불리는 팀들을 보면 신체조건이 우수한데 기술까지 좋습니다. 당시엔 지금처럼 상대팀 정보가 많지도 않았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붙으니 더 어려웠죠.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시아에서도 쉬운 팀이 없었습니다. 숙명의 라이벌 일본도 마찬가지였죠.

일본이요?

일본전은 무조건 이겨야 했습니다. 선수들의 부담이 컸죠. 또 당시 일본엔 전설적인 인물이 있었어. 가마모토 구니시게란 선수였지. 가마모토는 1968년 멕시코 시티 올림픽에서 7골을 넣으며 득점왕에 올랐습니다. 일본은 가마모토의 활약을 앞세워 동메달을 땄죠. 일본이 우리(2012년 런던 올림픽 동메달)보다 올림픽 메달 획득이 빨랐어요.

한국은 일본과 전적(41승 23무 14패)에선 압도적인 우위에 있습니다.

한국 선수들은 일본을 만나면 없던 힘까지 발휘합니다. 이길 수밖에 없죠(웃음). 하지만, 일본전은 늘 부담이 컸어요. 우리가 일본에 패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죽을 각오로 경기장에 나갔어요.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다시 만난 호주, 또다시 김재한의 꿈을 가로막다

1976년부터 1977년까지 홍콩 리그에서 뛰었던 김재한(사진 오른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1976년부터 1977년까지 홍콩 리그에서 뛰었던 김재한(사진 오른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1976년부터 1977년까진 홍콩 리그에서 뛴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엔 국외로 진출하는 게 흔치 않았던 시절입니다.

홍콩은 세미 프로리그를 운영했어요. 홍콩 리그에 유럽 선수가 많았죠. 유럽 선수들과 붙어볼 기회가 적었던 축구 인생에 큰 경험이었습니다. 프로 리그를 어떤 식으로 운영하는지도 알 수 있었죠. 한국엔 실업팀만 있던 때니까.

홍콩 리그엔 어떤 계기로 진출한 겁니까.

예나 지금이나 홍콩은 축구를 잘하는 팀이 아니에요(웃음). 처음엔 큰 관심이 없었지. 그러던 중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서 홍콩과 붙었는데 우리 선수들의 활약이 좋았던 거야. 몇 팀에서 우리 선수들에게 영입 제안을 한 거지. 변호영 골키퍼를 시작으로 여러 선수가 홍콩으로 갔어요. 나를 포함해 박이천, 이회택 등이 홍콩 세미 프로리그에서 뛰었죠.

홍콩에서 두 시즌을 뛴 뒤 한국주택은행 축구단으로 복귀합니다.

평생의 꿈인 월드컵 본선에 나가고 싶었어. 홍콩 팀(세이코)에서 월드컵 예선을 앞두고 A매치 차출을 거부한 거야. 지금이야 FIFA(국제축구연맹)에서 의무적으로 국가대표팀에 선수를 보내주게 하지만 그땐 그런 게 없었어요. 나는 솔직히 FIFA가 뭐 하는 곳인지도 몰랐어(웃음). 팀에서 월드컵 예선 이틀 전에 보내주겠다는데 어떡하나. 계약을 해지하고 나왔지.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본선 도전이 시작된 거군요.

한국이 이스라엘, 일본, 북한(기권)과 속한 조별 예선에서 1위를 차지하며 최종예선에 올랐습니다. 한국, 이란, 쿠웨이트, 홍콩 그리고 오세아니아 호주가 경쟁을 벌였죠. 본선으로 갈 수 있는 티켓은 딱 한 장이었어요. 우린 첫 경기였던 홍콩 원정에서 범근이의 결승골(1-0)로 이겼습니다. 출발이 좋았죠. 문제는 1974년 서독 월드컵 본선 진출을 가로막은 호주였어요.

아.

호주 시드니 원정에서 1-2로 진 거야. 범근이가 선제골을 넣었는데 후반에 2골을 내주면서 무너졌지. 한국이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패한 건 이 경기가 유일해요.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호주와 2차전에선 0-0으로 비겼습니다. ‘난적’ 이란과 두 차례 경기에선 0-0(홈), 2-2(테헤란 원정) 무승부를 기록했죠. 참 아쉬운 게 우리를 이긴 호주가 최종예선 5개팀 가운데 4위를 기록했단 겁니다.

4위요?

한국은 3승 4무 1패로 최종예선 2위를 기록했어요. 1위는 이란이었습니다. 이란이 호주에 강했거든. 이란은 호주를 홈과 원정에서 각각 1-0으로 이겼어. 그렇게 이란이 6승 2무를 기록하면서 아르헨티나로 향했습니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이 이란의 첫 본선 도전이었습니다. 호주전만 생각하면 참... 아쉬워(웃음).

결국 월드컵 본선 도전의 꿈을 이루지 못한 거군요.

그 당시 동대문운동장의 분위기는 아주 뜨거웠어요. 90분 내내 선수들과 함께 뛰었죠. 라디오 중계를 들으면서 한국의 승리를 기원한 분도 많았습니다. 국민 성원에 보답하지 못해 죄송해요. 좋은 선수들과 월드컵에 도전하지 못한 아쉬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31살의 젊은 나이에 유니폼을 벗었습니다.

부산에서 열린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 홍콩전(5-2)을 마치고 국가대표팀에서 물러났어요. 31살이었죠. 그때만 해도 엄청나게 많은 나이였습니다. 후배들이 “아직도 축구하느냐”면서 놀렸지(웃음). 태극마크를 반납하고 한국주택은행 축구단에서 2년을 더 뛴 뒤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월드컵은 인생에서 어떤 의미입니까.

평생의 한(恨)이지. 자랑스러운 후배들이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일구고,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회에선 원정 첫 16강 진출에 성공했습니다. 누구보다 기뻐했던 게 사실이에요. 그런데 한편으론 아쉽더라고. 꿈의 무대를 직접 밟아보지 못했으니까. 후배들은 모를 거야. 우리 세대가 월드컵 본선 진출을 얼마만큼 원했는지. 평생의 소원이었어요.

“하루하루 축구를 즐기는 게 마지막 꿈”

한국 축구 대표팀 레전드 공격수 김재한(사진 맨 왼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한국 축구 대표팀 레전드 공격수 김재한(사진 맨 왼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1979년 선수 생활을 마감했습니다. 은퇴했을 때 감정을 기억합니까.

아쉬웠지. 더 뛰고 싶었어요. 전북 현대 이동국을 보면 참 부럽습니다. 마흔이 넘어서도 선수 생활을 이어가잖아. 지금은 축구 선수가 직업이니까 가능한 거지. 우리 땐 지금처럼 큰돈을 벌지 못했어요. 국가대표팀 지원도 열악할 때입니다. 그래서 은퇴 후엔 돈 버는 데 집중했죠.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할 것 아니야(웃음).

1980년부터 1989년까지 한국주택은행 축구단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했습니다. 지도자의 눈으로 본 김재한은 어떤 선수였습니까.

아주 성실했던 선수(웃음). 자부심이 있습니다. 내가 한국에서 포스트 플레이를 처음 보인 선수가 아닐까 싶어요. 내 뒤로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한 192cm 김용세가 있었지. 이후 최순호, 김신욱이 장신 스트라이커 계보를 잇지 않나 싶어요. 최근엔 오세훈이 눈에 들어오더라고.

지난해 폴란드 U-20 월드컵 준우승 주역 오세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축구를 아주 잘해. 6월 13일 상주 상무와 포항 스틸러스 경기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오세훈이 그날 멀티골을 기록했어요. 키(193cm)가 큰데 몸이 아주 부드러워. 기본기도 탄탄합니다. 볼을 가슴으로 받아낸 뒤 돌아서면서 슛하는 게 쉽지 않은데 그걸 해내더라고. 공을 다루는 능력이 나와는 차원이 달라. 선배로서 조언해주고 싶은데 할 게 없을 정도야(웃음).

K리그 경기를 꾸준히 챙겨보는 겁니까.

축구는 삶이니까. 특히나 장신 스트라이커 계보를 잇는 선수들을 보면 애정이 가지. 축구는 질리지 않는 거 같습니다. 은퇴 후 지도자 생활을 10년 하고 은행원으로 근무했어요. 2년 만에 지점장 달고, 영업부 부장까지 올랐지. 선수 때처럼 사회생활도 성실하게 했던 것 같아요. 이후엔 KFA 상근 부회장으로 한국 축구 발전에 조금이나마 이바지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축구 선수의 길을 선택할 겁니까.

고민할 필요 있나. 당연히 해야지. 그땐 월드컵에 꼭 나갈 거야(웃음).

평생의 꿈인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진 못했지만 많은 걸 이뤘습니다. 은퇴 후엔 은행원과 축구 행정가로 성과를 냈습니다. 더 이루고 싶은 꿈이 있습니까.

이 나이에 무슨 꿈이 있겠어. 그저 하루하루 축구를 즐기고 싶어요. 과거 동료들과 만나면 시간이 빠르게 갑니다. 축구 이야기에 푹 빠지는 거죠. 가끔 K리그나 국가대표 경기도 함께 봐요. 경기가 끝나면 토론합니다. 하지만, 일선에 나설 일은 없을 거예요. 월드컵 세대뿐 아니라 정정용(서울 이랜드 FC), 김학범(한국 U-23 축구 대표팀) 등 공부하는 지도자가 넘칩니다. 이 친구들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응원하는 게 우리 역할이야.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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