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숙현 선수 사망에 인권위 특조단 늑장대응 논란…7개월 지나 뒷북 권고

-인권위, 레슬링 지도자 성추행 사건도 제대로 조사 않고 뭉갰다…해명 요구엔 ‘2차 피해’ 핑계

-진정인, 피해자 한 차례 조사 외엔 추가 조사 안 해 "사건 종결된지도 몰랐다"

-체육계 "스포츠계에서 인권위는 '인권의 최후의 보루'가 아닌 대한체육회 복사판"

체육인들은 묻는다. “국가인권위 스포츠 특조단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느냐“고. “스포츠 인권 향상을 위한 조직인지, 아니면 인권위 수장의 치적을 위한 곳인지“(사진=엠스플뉴스)
체육인들은 묻는다. “국가인권위 스포츠 특조단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느냐“고. “스포츠 인권 향상을 위한 조직인지, 아니면 인권위 수장의 치적을 위한 곳인지“(사진=엠스플뉴스)

[엠스플뉴스]

인권의 최후 보루.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폭행, 성폭력, 가혹 행위에 시달리는 스포츠 선수들에게 인권위는 이름으로만 존재할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기구나 마찬가지였다.

최후의 수단으로 인권위 문을 두드리고도 도움을 받지 못한 피해자는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 국가대표 출신 고 최숙현 선수 한 명만이 아니었다. 인권위가 지난해 레슬링 대표팀 감독의 성추행 사건 진정을 접수하고도 제대로 된 조사 없이 사건을 종결 처리한 것으로 엠스플뉴스 취재 결과 드러났다.

2017년 터진 레슬링 감독 성추행 사건…"외부로 알려지면 진천 선수촌에 못 들어올 수 있다고 협박 받았다" 증언

레슬링계에서 터진 성추행 사건을 인권위는 제대로 들여다 보지도 않았다. 체육인들은 “우리에게 인권위는 인권의 최후의 보루가 아닌 대한체육회의 복사판일 뿐“이라며 분개하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레슬링계에서 터진 성추행 사건을 인권위는 제대로 들여다 보지도 않았다. 체육인들은 “우리에게 인권위는 인권의 최후의 보루가 아닌 대한체육회의 복사판일 뿐“이라며 분개하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인권위가 문화체육관광부, 교육부, 여성가족부와 함께 스포츠인권특별조사단(특조단)을 출범한 건 2019년 1월.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 선수의 성폭력 피해 폭로를 계기로 체육계 미투가 확산하자, 인권위는 ‘철저한 실태조사와 재발 방지에 앞장서겠다’며 특조단을 만들었다.

특조단이 꾸려지자 오랫동안 폭력과 인권침해에 숨죽였던 체육계 피해자들은 “인권위라면 믿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반응을 보이며 큰 기대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엠스플뉴스 취재 결과 인권위 특조단의 활동이 권고 등 실제 구제조치로 이어진 사례는 극히 일부에 그쳤다. 대부분은 해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묻혔다. 여자 레슬링 국가대표팀 감독 A 씨의 선수 성추행 사건이 대표적이다.

엠스플뉴스 취재 결과 A 감독의 성추행 의혹은 2017년 11월 진행한 국가대표 선수 국외 전지훈련에서 불거졌다. 당시 A 감독은 훈련 중 기술 지도를 빌미로 다수 여자 선수에게 불필요한 신체접촉을 해 물의를 빚었다.

레슬링 관계자는 사건에 대해 피해 선수 대부분이 10년 이상 레슬링에 몸담은 베테랑이다. 지도자의 신체 접촉 목적이 가르침이었는지, 불순한 의도였는지는 단번에 알아챌 수 있다”고 강조했다.

참다못한 선수들은 A 감독의 성추행 사실을 대한체육회 선수인권위원회에 알렸다. 하지만 대한체육회는 적정한 조처를 하지 않은 채 시간만 끈 것으로 확인됐다. 나중엔 남녀 대표팀을 총괄 관리하는 B 감독이 사건 해결을 맡긴 것으로 알려졌다.

B 감독은 피해자 보호와 진실 규명 대신 A 감독을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익명을 요구한 제보자는 B 감독이 ‘이렇게 하면 앞으로 (진천) 선수촌에 입촌 못 한다. 사건이 외부로 알려지면 큰 일’이라고 위협했다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대회 출전에 사활을 건 선수들로선 B 감독의 협박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고 폭로했다.

인권위 조사관, 가해자-참고인 조사 생략하고 조사 중단…해명 요구엔 ‘2차 피해’ 핑계

인권위 특조단은 레슬링 성추행 사건과 관련해 시종일관 “2차 피해“를 내세우며 입을 닫았다. 그러나 피해자와 참고인 조사는 했는지, 진정된 사건 조사가 왜 더딘지, 조사가 중단됐다면 왜 중단됐는지는 2차 피해와는 무관한 사안이다(사진=엠스플뉴스)
인권위 특조단은 레슬링 성추행 사건과 관련해 시종일관 “2차 피해“를 내세우며 입을 닫았다. 그러나 피해자와 참고인 조사는 했는지, 진정된 사건 조사가 왜 더딘지, 조사가 중단됐다면 왜 중단됐는지는 2차 피해와는 무관한 사안이다(사진=엠스플뉴스)

한동안 묻혔던 성추행 사건은 지난해 인권위 특조단 출범을 계기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A 감독의 성추행 의혹이 인권위 특조단에 전달된 것이다. 당시 레슬링 관계자는 “‘체육계 폭력을 뿌리 뽑겠다’는 목표로 출범한 특조단에서 철저한 조사를 통해 사건 진상을 밝혀내고 가해자에 대한 징계를 대신해줄 것으로 믿는다”며 큰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레슬링계의 이런 기대는 이뤄지지 않았다. 레슬링 관계자는 인권위 조사관이 형식적인 조사만 두 차례 하고는 더는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진정인과 피해 선수 1명만 각각 한 차례씩 만나고 가해자에 대한 조사는 일체 하지도 않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인권위 한 조사관은 “진정이 접수되면 우선 진정인을 만나 주장을 들어보고 피해자와 가해자, 참고인을 만나 얘기를 듣는 절차를 거친다. 기관이 대상일 경우 공문을 보내 서류를 받아보기도 한다”며 “모든 절차가 원활하게 진행됐을 때 사건 종결까지 짧아도 3개월 이상 걸린다”고 밝혔다.

과연 그럴까. 취재 결과 레슬링 성추행 사건을 맡은 인권위 조사관은 가해자와 참고인 면담 절차를 생략하고 조사를 중단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 관련해 레슬링 관계자는 인권위 쪽에서 첫 피해자 면담 당시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머뭇거렸다는 핑계를 댔다. 그 후 아예 연락조차 없었다체육계 성폭력 사건은 특성상 피해자가 입을 열기 쉽지 않은 구조다. 그런데 인권위에선 피해자의 마음을 열어 증언을 끌어내고, 다양한 참고인의 목소리를 들어보려는 노력도 없이 대충 끝냈다. 사건이 종결됐는지도 지금 알았다. 사건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처음부터 없던 것이라고 분개했다.

이와 관련 특조단 김현수 단장은 엠스플뉴스와 통화에서 “구체적인 개별 사건 내용까지 일일이 파악하기는 어렵다. 조사관 본인에게 듣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조사관에게 책임을 넘겼다.

그러나 해당 사건 조사를 맡은 조사관 C 씨는 “피해자가 2차 피해를 볼 수 있으므로 아무것도 답변할 수 없다. 성폭력 사건은 진행 중인 사건도 종료된 사건도 어떤 내용도 알려줄 수 없다”며 답변을 거부했다.

인권위 조사가 절차에 따라 이뤄졌는지를 따지는 건 피해자의 2차 피해와 전혀 무관하다. 레슬링 관계자는 “인권위의 무신경한 대처는 이미 성폭력 피해와 레슬링 협회의 행태로 상처 입은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었다”며 “피해자들의 호소를 외면한 인권위가 2차 피해를 운운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라고 일갈했다.

최숙현 선수 사망에 인권위 ‘늑장대응’ 비판…인권위 특조단 무용론도

지난해 10월 '학생선수 기숙사 실태조자 결과보고 토론회'에서 인사말을 하는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 최 위원장은 의욕적으로 스포츠 특조단을 발족했지만, 성과는 미미하다. 체육계는 “인권위의 각종 실태조사는 대부분 외부 용역으로 이뤄졌고, 사건조사 역시 제대로 진행된 게 없다“며 목소릴 높이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지난해 10월 '학생선수 기숙사 실태조자 결과보고 토론회'에서 인사말을 하는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 최 위원장은 의욕적으로 스포츠 특조단을 발족했지만, 성과는 미미하다. 체육계는 “인권위의 각종 실태조사는 대부분 외부 용역으로 이뤄졌고, 사건조사 역시 제대로 진행된 게 없다“며 목소릴 높이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인권위가 책임을 미룬 사이 고 최숙현 선수는 두 차례 인권위 진정을 냈지만 아무 소득을 얻지 못했고, 6월 26일 짧은 생을 마감했다.

늦장대응과 무성의한 일 처리로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는 인권위의 행태에 체육계와 시민사회에선 ‘인권위 특조론 무용론’이 제기된다. 지난 8일엔 체육시민연대, 스포츠인권연구소 등 35개 시민단체는 공동성명을 내고 “인권위가 특조단을 구성했지만, 최 선수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고 목소리를 냈다.

이들은 “인권위가 국가인권옹호기관이자 스포츠인권특별조사단이 있는 국가기관으로서 선수들의 인권보호를 최선으로 여겨야 함에도 안이한 판단을 했다”며 “인권위의 권고 지연은 절실하게 조사와 피해구제, 책임자 처벌을 기대했던 스포츠선수들의 간절한 바람을 저버리는 행위라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라고 비판했다.

배지헌, 이근승 기자 jhpae117@mbcplus.com

저작권자 © 스포츠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 후원하기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