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펜싱 아카데미 설립한 ‘땅콩 검객’ 남현희

-“은퇴 후 진로 고민 많았다…펜싱 저변 확대 목표”

-“국내용 평가절하, 펜싱 계속하는 자극제” 편견과 싸워 이긴 남현희

-“다시 선수 시절 돌아간다면? 학업 병행해야죠”

펜싱 스타 남현희가 자신의 이름을 건 펜싱 아카데미를 오픈했다(사진=엠스플뉴스 김도형 기자)
펜싱 스타 남현희가 자신의 이름을 건 펜싱 아카데미를 오픈했다(사진=엠스플뉴스 김도형 기자)

[엠스플뉴스]

땅콩 검객. 전 국가대표 펜싱 스타 남현희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별명이다.

154cm 작은 키에서 오는 불리함과 국내용 선수라는 편견을 이겨내고 26년간 선수로 활약하며 99개의 메달을 목에 걸기까지, 그가 흘린 땀과 눈물이 ‘땅콩 검객’ 네 글자에 모두 담겨 있다.

남현희가 걸어온 길은 곧 한국 여자 펜싱의 역사다. 남현희는 한국 여자 펜싱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다. 올림픽에 네 번 출전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은메달,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시안게임에선 수영의 박태환, 볼링의 유서연과 함께 최다인 6개 메달을 따냈다. 키가 작아서 안 된다고 했지만, 유럽 선수들과 싸워도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아이를 낳아서 안 된다 했지만 출산 후에도 남현희는 대표팀 에이스였다.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는 편견도 실력으로 깨뜨렸다.

지난해를 끝으로 은퇴한 남현희는 이제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서울 강남구에 ‘남현희 인터내셔널 펜싱 아카데미’를 열고 펜싱 보급과 후배 양성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펜싱만이 줄 수 있는 묘미를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후배들에게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남현희의 얘기에 엠스플뉴스가 귀를 기울였다.

“펜싱 저변 확대 목표…후배들에게 새로운 길 만들고 싶어”

현역 시절 남현희가 승리를 확정짓고 환호하는 장면(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현역 시절 남현희가 승리를 확정짓고 환호하는 장면(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선수 남현희에서 이제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펜싱 아카데미 대표가 됐습니다. 은퇴 후에 대한 고민이 많으셨을 텐데, 선택은 펜싱 아카데미였습니다.

사실 은퇴 이후를 처음 고민하기 시작한 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부터예요. 그때부터 언제쯤 은퇴해야 할지, 은퇴한 뒤 뭘 할 수 있을지 대단히 많은 고민을 하면서 선수 생활을 해왔어요.


보통 펜싱 선수들은 은퇴한 뒤에 무슨 일을 하나요? 언뜻 생각하기엔 지도자 외엔 마땅한 진로가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저도 메달리스트이고, 선수 생활을 굉장히 오래 했잖아요. 그런데도 막상 은퇴할 때까 되니까 엘리트 분야에서 생계를 유지할 만한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어요. 선수 생활이야 저도 원하고 주위에서도 요청해서 길게 할 수 있었지만 선수 생활 이후는 저 혼자 스스로 찾아가야만 했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환경이구나 생각했죠.


아카데미가 잘 되면 앞으로 후배 펜싱 선수들에게도 새로운 길이 생기는 셈입니다. 누군가의 롤모델이 될 수 있다는 건 참 멋진 일입니다.

우선은 펜싱 저변확대를 목표로 삼고 있어요. 펜싱이 유럽에선 인기 스포츠이고, 미국에서도 아이비리그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종목 가운데 하나로 많은 선수가 하고 있거든요. 펜싱이 국내에서도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단 생각을 늘 해왔는데, 지금이 그 기회인 것 같아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펜싱 인구가 점점 늘어나면 펜싱 후배들이 지도자로서 생계를 유지할 만한 자리도 점점 늘지 않을까요?


최근 강남지역 학부모 사이에 펜싱 조기교육 열기가 뜨겁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정보에 밝은 분들 사이에 펜싱을 하면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 진학에 유리하다는 사실이 조금씩 알려지는 단계인 것 같습니다. 그보다 저는 학생들이 펜싱을 통해 운동도 하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사귈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요. 미국 학교 3곳과 MOU(업무협약)를 맺은 것도 그래서입니다. 방학 때는 미국 학생들과 저희 학생들이 서로 오가면서 교류하기로 돼 있어요. 함께 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영어에 노출되고, 친구도 사귀면 앞으로 살아가는 데 굉장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각종 드라마나 영화의 영향일까요. 국내에선 아직 펜싱 하면 부유층 자제들이나 하는 스포츠란 선입견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많은 분이 고급 스포츠라고 알고 계시는 건 사실이에요. 아무래도 펜싱 장비가 상대적으로 고가라고 느껴지다 보니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펜싱화 같은 경우 20만 원 후반대기 때문에 선뜻 구입하기는 부담스러울 수 있죠. 그래서 처음 하는 분들이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도록 장비 같은 경우는 대여를 해드리고 있어요. 신발 같은 경우 기초 단계일 때는 운동화를 착용하도록 권하고 있고요. 러닝할 때 신는 운동화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괜찮은가요.

펜싱을 배워보고 싶어서 찾아왔다가 해보니 적성에 안 맞을 수도 있고, 부모님은 시키려 하는데 자녀가 싫다고 할 수도 있잖아요. 모든 스포츠는 본인이 좋아해서 할 때 성과가 나옵니다. 억지로 시키는 건 별로 권하고 싶지 않아요.

아이비리그 대학 진학 말고, 일반인이 펜싱을 배우면 좋은 점은 어떤 게 있을까요.

(활짝 웃으며) 많죠. 펜싱은 전신운동이고, 낮은 기마 자세를 취해야 하기 때문에 하다 보면 허벅지 근력이 굉장히 좋아집니다. 여성분들은 다이어트에 효과적이고요, 허벅지가 강해지니까 남성분들에게도 좋습니다. 노인도 할 수 있어요. 미국에는 60대 이상을 위한 베테랑 대회가 따로 열릴 정도로 펜싱이 활성화돼 있습니다.

‘키가 작아서’ ‘결혼해서’ ‘나이가 많아서’ 남현희는 편견과 싸웠다, 그리고 이겼다

엠스플뉴스와 인터뷰하는 남현희 대표(사진=엠스플뉴스 김도형 기자)
엠스플뉴스와 인터뷰하는 남현희 대표(사진=엠스플뉴스 김도형 기자)


옛날얘기를 좀 해볼까요. 처음 운동을 시작할 땐 펜싱이 아닌 육상 선수였다고 들었습니다.

육상부는 아니었고요, 초등학교 6학년 말쯤에 잠깐 육상대회에 출전했었어요. 워낙 운동 자체를 좋아했어요. 학교에서 구기운동 할 때 친구들이 공만 잡으면 다 저한테 패스할 정도였어요. 항상 마지막은 제게 맡기곤 했죠. 그러다 성남여중에 진학했는데 학교에 운동부가 육상부와 롤러스케이트부, 펜싱부가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육상이 제일 친숙하잖아요. 처음엔 육상부 선생님께 찾아갔죠.


해보니까 어떻던가요.

막상 시작하니 즐기는 운동이 아닌, 시켜서 하는 운동을 하게 됐어요. 육상도 키가 커야 유리하더군요. 다리가 길면 나가는 폭도 넓어지니까 그만큼 유리한데, 키 작은 제가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죠. 그런데 또 자존심이 있다 보니, 제가 하겠다고 해서 시작해 놓고 그만두겠다는 말을 먼저 못하겠더라고요.


그러다 펜싱으로 방향을 틀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체육 선생님이 펜싱부 감독님이었어요. 체육 시험 시간에 멀리뛰기를 하는데, 제가 우리 반 51명 중에 제일 멀리 뛴 거에요. 키순서는 앞에서 두 번째인데 멀리뛰기는 제일 멀리 뛰니까 선생님 눈에 띈 거죠. 선생님 말씀이 ‘펜싱 동작 중에 ‘런지’라고 다리를 찢는 동작이 있는데 그걸 잘할 것 같다. 펜싱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하시더군요. 바로 펜싱으로 옮겼죠(웃음).

펜싱은 할 만했습니까.

기본기 배우다 보니 금세 3개월이 지났고, 좀 질릴 만 할 때쯤 펜싱 검을 손에 쥐게 됐어요. 제가 키는 작아도 발이 빠르다 보니까 가능성이 있겠다 싶었고, 실전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서 펜싱을 계속하게 됐어요.

펜싱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나요.

일단 새하얀 도복이 마음에 들었고, 검을 들고 한다는 점에서 고급스러운 스포츠란 느낌을 받았어요. 또 어려서부터 단체전 때면 거의 항상 마지막 주자 역할을 맡곤 했는데, 펜싱 단체전은 마치 이어달리기처럼 마지막 선수 하기에 따라 승패가 결정될 때가 많거든요. 그런데 제 활약으로 역전해서 이기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 희열 때문에 검을 놓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시작한 선수 생활이 무려 26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원동력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어릴 적부터 ‘남현희는 국내용이지 국제용 선수는 아니다’란 말을 수없이 들었어요. 국제무대를 향한 목표의식을 갖게 된 계기였죠. 제가 포기를 잘 안 하는 성격이거든요.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면 ‘해보지도 않았는데 왜 그렇게 얘기하지?’란 생각부터 들어요. 일단 부딪혀 보는 거죠.

온갖 편견을 이겨내고 선수로서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작년 39살에 은퇴할 때까지 남들이 ‘안 된다’고 한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이뤄냈습니다. 결혼하고 출산한 뒤에도 ‘여자는 복귀하기 힘들다’ 했지만 복귀했고, 선수활동 하면서 이런저런 부상도 많았지만 이겨냈고요. 나이가 너무 많다고 했지만 막상 대회에 나가면 대표팀 단체 4명 중에 1, 2순위를 유지했습니다. 여러 고비를 비교적 잘 넘겼다고 생각합니다.

펜싱을 잘 몰라서 하는 질문인데요. 키가 작으면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불리한 건가요?

경기가 길게 이어질 때 체력적으로 불리한 점이 있어요. 가령 상대가 전진과 후퇴를 10번 정도 할 때, 저는 상대보다 훨씬 많은 횟수를 움직여야 하거든요. 전술적으로 봐도 키 큰 친구들은 검을 뻗고 도망가는 동작을 할 수 있는데, 전 그런 동작은 아예 배제해야 했어요. 같이 뻗으면 제가 불리하니까, 그보단 타이밍을 뺏으려고 노력해야 했죠. 상대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공격을 시도하거나, 빠르게 움직이면서 틈새를 공략하는 전략을 사용했어요.

몸에 맞는 펜싱 장비가 없어서 애를 먹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저더러 예민하다고도 하고, 장비 핑계 대지 말라는 말도 했어요. 하지만 어느 종목이든 본인 몸에 꼭 맞는 장비를 착용해야 최고의 결과를 얻을 수 있잖아요. 유럽에서 수입해온 펜싱 장비를 쓰다 보니 불리한 점이 많았어요. 피스톨(손잡이) 부분만 해도 유럽 선수들 손 크기에 맞춰 제작한 거라 제 손에 잘 맞지 않았고요, 발에 맞는 운동화가 없어서 양말을 두 켤레 신고 깔창도 겹쳐 신어야 했어요.

제일 작은 펜싱화 사이즈가 어느 정도입니까.

220mm부터 나오는데, 제 발 사이즈가 213mm에요. 펜싱화는 다른 운동화에 비해 좀 더 크게 나오고요. 엄지발가락 앞에 7cm나 빈 공간이 생기는 거죠. 제가 현역 시절 ‘빠르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실은 선수 생활 내내 ‘운동화만 발에 맞으면 더 빠를 수 있는데’ 아쉬움을 갖고 있었어요. 몸을 뻗었다 들어올 때 펜싱화 앞으로 한번 힘을 줘서 찍고 들어와야 하는데,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펜싱은 유럽과 미국 세가 강한 종목입니다. 그러다 보니 국제대회만 나가면 판정 때문에 손해를 보는 일도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

선수 생활 초기엔 그런 면이 있었는데, 2008년부터 비디오 판독이 도입되면서 좀 나아졌어요. 그보다 제가 국제대회에 나가서 느끼는 어려움은 다른 데 있었어요.

어떤 건가요.

펜싱에서 경기하는 건 선수지만, 뒤에 있는 코치들의 도움도 무시할 수 없어요. 선수가 경기에 몰입하느라 놓치는 부분을 뒤에서 잘 캐치해서 알려주는 코치 역할이 중요합니다. 유럽 선수들과 대결할 때면 항상 2대 1로 경기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유럽 선수들은 올림픽 메달리스트 출신의 경험 많은 코치들과 함께 나오거든요. 그런데 제 경우엔 제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많았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 물어봐도 답변을 듣기 어렵고, 제가 ‘이렇게 해보겠다’ 해서 그대로 하는 형태였어요. 그러다 한 포인트 차로 지는 결과가 나오면, 나도 외국인 코치에게 배웠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후배 선수들은 참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남현희라는 메달리스트 출신 지도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펜싱 기술도 있지만, 제가 선수 활동하면서 느낀 노하우가 후배들에게 다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요. 외부 행사 때문에 자리를 비울 때만 제외하고는 항상 아카데미에 상주하면서 선수들을 봐주고 있습니다. 아직 이름을 말하긴 조심스러운 단계지만, 한번 키워보고 싶은 친구도 두 명 정도 있어요.

“다시 펜싱 시작할 때로 돌아간다면? 공부와 펜싱 병행해야죠”

2014 인천 아시아경기대회 여자 펜싱 단체전 금메달을 차지한 남현희. 사진 왼쪽부터 전희숙, 김미나, 오하나, 남현희 순(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14 인천 아시아경기대회 여자 펜싱 단체전 금메달을 차지한 남현희. 사진 왼쪽부터 전희숙, 김미나, 오하나, 남현희 순(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지난해 말 선수 은퇴를 발표했습니다. 아쉬운 마음과 후련한 마음 중에 어느 쪽이 더 컸습니까.

선수 은퇴 자체는 후련한 마음이었어요. 제가 선수 생활을 이렇게 오래 할 줄도 몰랐고요.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대회(아시안게임) 끝난 뒤 바로 은퇴하지 않고 2020년 도쿄올림픽 출전을 준비한 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에 도전하기 위해서였어요.

IOC 선수 위원이요.

처음 제안을 받은 건 2008년부터였어요. 그때만 해도 IOC 위원은 그 일을 더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고사했죠. 하지만 선수생활을 계속하면서 여러 불합리한 일과 불이익을 겪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죠. IOC 위원을 하려면 선거 직전 올림픽 출전권 획득이 필수였고, 그래서 올림픽 대표 선발전을 준비하게 됐습니다. 아쉽게도 기회가 없었지만요.

국제대회에서 총 99개의 메달을 획득했지만, 끝내 올림픽 금메달은 목에 걸지 못했습니다. 아쉽지 않으세요.

운동선수로서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있죠. 한때는 잠시나마 어리석은 생각도 했어요. 누구는 슬렁슬렁 운동해도 갑자기 금메달이 다가오는데, 왜 나는 죽어라 해도 안 될까 생각도 했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무리 죽어라 운동해도 안 되는 친구들도 많이 있잖아요. 그에 비해 전 열심히 운동한 만큼 보상을 받았어요. 제가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시는 그런 생각을 안 하게 됐죠.

만약 다시 펜싱을 처음 시작했을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을 바꾸고 싶으세요.

(잠시 생각한 뒤) 저라면 공부와 펜싱을 병행할 것 같아요. 지금 아카데미에 오는 친구들에게도 항상 얘기합니다. 펜싱도 인생의 일부분이고, 결국엔 사회생활로 나아가야 한다. 선수생활 하는 동안 준비가 돼 있어야 사회에 나가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요. 너무 나처럼 펜싱 하나에만 몰입하면 나중에 힘들어진다. 미리미리 준비하라고 조언하죠.

좋은 생각입니다.

좀 힘들더라도 공부와 운동을 병행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아카데미에 미국 학생들도 오거든요. 그 친구들은 운동하다가도 쉬는 시간에는 자기들 공부를 합니다. 그런 모습을 한국 친구들이 보고 느끼는 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언론 인터뷰나 TV 출연에 굉장히 적극적인 편입니다. 펜싱 대중화에 앞장서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나요.

저란 사람을 알리는 건 부끄럽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야죠. 어릴 때부터 ‘누군가 펜싱을 널리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제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열심히 활동하고 좋은 이미지를 가져가면 그만큼 펜싱을 많은 분께 알릴 수 있잖아요. 그래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면 흔쾌히, 성실하게 임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펜싱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으세요.

펜싱만이 주는 묘미가 있어요. 끊임없이 고비가 찾아오고, 그 고비를 넘기면 또 다른 고비가 찾아온다는 점에서 인생과도 닮은 점이 있거든요. 살면서 찾아오는 여러 고비를 잘 헤쳐나가는 힘을 펜싱을 통해서 얻습니다. 그래서 26년째 펜싱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웃음).


배지헌 기자 jhpae117@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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