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성, 1988년 서울 패럴림픽부터 2008년 베이징까지 한국 장애인 양궁 간판으로 활약한 ‘레전드’

-“푸른 잔디 위 활시위를 처음 당길 때 느낌 잊을 수 없습니다”

-“올림픽 금메달 꿈꾸던 시기의 교통사고, 삶을 포기하고 싶었죠”

-“장애인을 가로막는 건 ‘장애’가 아닌 ‘장애가 있다’는 인식입니다”

-“비장애인, 장애인 선수가 함께 땀 흘리는 실업팀 만들고 싶어”

한국 장애인 양궁 영웅으로 평가받는 안태성(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한국 장애인 양궁 영웅으로 평가받는 안태성(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화성]

1977년 제6회 전국소년체육대회. 중학교 3학년 안태성은 양궁 남자개인전 50m에서 316점을 쐈다. 종전 한국 신기록인 315점을 뛰어넘는 기록이었다. 활시위를 당긴 지 3년 만에 일군 성과. 안태성은 올림픽 금메달을 꿈꾸기 시작했다.

1978년 3월 안태성은 불의의 사고로 꿈을 잃었다. 새벽 운동 중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리고 장애판정을 받았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를 꿈꾼 안태성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안태성은 활을 놓지 않았다. 남들보다 더 땀 흘리며 1988년 서울 올림픽 출전을 준비했다. 국가대표 최종선발전까지 갔다. 하지만, 기적은 없었다. 안태성은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하며 태극마크를 달지 못했다.

전화위복(轉禍爲福). 1988년 서울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을 마치고 걸어 나오는 안태성을 누군가 불러 세웠다. 당시 패럴림픽 조직위원회 소속이던 현 한국체육대학교 한민규 교수였다. 한 교수는 장애인 올림픽이 따로 있다면서 패럴림픽 출전을 제안했다. 안태성이 장애인 체육 레전드의 길로 들어선 계기다.

안태성은 1988년 서울 패럴림픽부터 2008년 베이징 대회까지 20년간 한국 장애인 양궁의 간판으로 활약했다. 금메달 4개, 동메달 2개를 땄다. 은퇴 후엔 후배 양성에 집중했다. 2017년엔 한국 장애인 지도자 최초 국외 파견을 나갔다. 엠스플뉴스가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푸른 잔디 위 활시위를 처음 당길 때 느낌 잊을 수 없다.”

중학교 3학년 안태성은 양궁계 눈을 사로잡은 대형 유망주였다(사진=엠스플뉴스)
중학교 3학년 안태성은 양궁계 눈을 사로잡은 대형 유망주였다(사진=엠스플뉴스)

화려한 경력을 자랑합니다. 1988년 서울 패럴림픽부터 2008년 베이징 대회까지 한국 장애인 양궁 대표팀 간판으로 활약하면서 금메달 4개, 동메달 2개를 목에 걸었습니다.

다 지난 얘기죠(웃음). 운동만 할 수 있는 선수 때가 그리워요. 양궁을 처음 시작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 데 시간 참 빠릅니다.

양궁과 첫 인연은 어떻게 맺었습니까.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습니다. 방과 후 친구들과 축구하거나 탁구 치는 게 일상이었어요.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었죠. 양궁은 중학교 입학 후 처음 접했습니다. 학교에 양궁부가 있었어요. 체육 선생께서 “운동에 소질이 있다. 양궁 한 번 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해서 시작했죠.

방과 후 축구나 탁구를 즐기던 소년이었습니다.

양궁이 정확히 어떤 스포츠인지 모르고 시작했어요. 생소한 스포츠라서 호기심이 생겼죠. 그렇게 양궁부에 들어갔는데 활을 안 주는 겁니다. 3개월 동안 체력 운동만 죽어라 했죠. 속으로 ‘내가 이러려고 양궁부에 들어왔나’라면서 매일 후회했습니다(웃음).

체력운동이요?

매일 러닝하고, 팔굽혀펴기, 복근 운동을 반복했어요. 양궁이 축구처럼 많이 뛰는 스포츠는 아니지만 강인한 체력을 요구합니다. 그래야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거든요.

기초 체력을 다지고 처음 활 잡았을 때를 기억합니까.

솔직히 체력훈련은 재미가 없었어요. 지루했죠. 양궁은 달랐습니다. 고요한 푸른 잔디 위에서 활을 잡았어요.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기분이 좋더라고. 과녁 정중앙을 맞히는 횟수가 늘면서 재미를 더했죠. 매일 잠자리에 들 때마다 아침부터 활 쏠 생각에 설렜습니다(웃음).

두각을 나타낸 건 언제부터입니까.

1977년 제6회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한국 신기록을 세웠어요. 남자개인전 50m에서 316점을 냈습니다. 종전 한국 기록이 315점이었어요. 활시위를 당긴 지 3년 만에 성과를 낸 겁니다. 그때부터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훈련하기 시작했어요.

올림픽이요?

고교 입학 전까진 평범한 학생선수였어요. 남들처럼 올림픽 금메달을 꿈꾼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고교 입학 3개월 차에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새벽 운동 중에 무릎을 심하게 다쳤죠. 해 뜨기 전부터 러닝을 뛰었습니다. 어두컴컴해서 운전자가 저를 못 본 거예요.

아.

왼쪽 무릎뼈 3.5cm 잘라냈습니다. 그리고 장애 판정을 받았죠.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솔직하게 말하면 죽고 싶었죠. 전 누가 시켜서 운동하지 않았어요. 양궁을 처음 접한 순간부터 아주 재밌었습니다. 팀 훈련이 끝나면 하루도 빠짐없이 개인 운동을 했죠. 1977년 전국소년체전 후엔 올림픽에 나선 안태성을 매일 상상했고요.

그 시기를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삶이 절망으로 가득할 때 아내를 만났어요. 장애 판정을 받은 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준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내 덕분에 양궁을 포기하지 않았죠. 그렇게 일반 선수들과 경쟁을 이어갔습니다. 1986년부턴 태극마크를 달고 2년 뒤 서울에서 열릴 올림픽 출전을 꿈꿨죠. 남들보다 훨씬 많은 땀을 흘렸어요. 메달을 떠나서 꼭 나가고 싶었거든.

꿈을 이뤘습니까.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당시엔 국가대표 선발전을 태릉선수촌 연병장에서 했어요. 마지막 도전이란 각오로 온 힘을 다했지만 태극마크를 다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렇게 고개를 푹 숙이고 대회장을 돌아서 나오는 데 누가 부르는 거예요.

“1988년 패럴림픽 금메달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안태성은 1988년 서울 패럴림픽부터 2008년 중국 베이징 패럴림픽까지 한국 장애인 양궁의 간판으로 활약했다(사진=엠스플뉴스)
안태성은 1988년 서울 패럴림픽부터 2008년 중국 베이징 패럴림픽까지 한국 장애인 양궁의 간판으로 활약했다(사진=엠스플뉴스)

1988년 국가대표 선발전을 마친 뒤 안태성을 부른 사람은 누구입니까.

한국체육대학교 한민규 교수(당시 패럴림픽 조직위원회 소속)였습니다. 교수께서 “실력이 출중하다”면서 “장애인 올림픽이 따로 있다. 출전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죠. 장애인 양궁과 첫 인연을 맺은 겁니다.

일반 선수들과 올림픽 출전을 다투는 실력자였습니다.

솔직히 장애인 양궁에선 적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만하지 않았어요. 은퇴 날까지 일반 선수들과 경쟁한다는 마음으로 온 힘을 다했죠. 패럴림픽에서 금메달을 4개나 목에 건 이유입니다.

1988년 서울 패럴림픽에서 2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땄죠. 금메달은 세계에서 딱 한 명만 목에 걸 수 있습니다. 좋았어요. 그런데 한편으론 아쉽더라고. 장애인 체육으로 넘어오지 않고 일반 선수들과 경쟁을 이어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올림픽 문턱까지 진입했습니다. 1988년 국가대표 선발전이 자꾸 떠올랐죠. 복잡했습니다(웃음).

1996년 미국 애틀랜타 패럴림픽에선 금메달(단체전), 동메달(개인전)을 획득했습니다.

1991년부터 선수와 지도자 생활을 병행했어요. 학생 선수들을 가르치면서 틈틈이 운동했죠. 쉽진 않았습니다. 지도자의 일이 많아요. 가르치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선수 한 명 한 명 관찰하고 관리해야 하죠. 제자가 심리적으로 흔들릴 땐 친구 역할을 해야 합니다. 개인 운동은 패럴림픽 대표 선발전 이후 합숙 훈련할 때 몰아서 했던 것 같아요(웃음).

그런 상황에서 메달을 추가한 거군요.

활을 잡으면 몸이 기억했습니다. 훈련할수록 감각이 빠르게 돌아왔죠. 무엇보다 양궁의 재미를 잊어본 적이 없어요. 활만 보면 설레는 첫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는 거죠. 그렇게 2000년 호주 시드니 패럴림픽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추가했습니다. 2004년 그리스 아테네 패럴림픽에선 동메달을 땄죠. 2008년 중국 베이징 패럴림픽에선 처음으로 메달을 못 땄어요.

이유가 있습니까.

장애인 체육으로 넘어와서 목표로 잡은 게 있어요. 50살 넘어서까지 선수로 뛰고 싶었습니다. 몸 관리를 잘하면 충분히 할 수 있다 믿었죠. 2004년 아테네 대회에 출전했을 때가 42살이었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코칭스태프와 비슷한 나이다 보니 문제점을 지적해주는 사람이 없었죠. 선수들과 코칭스태프 모두 불편한 점이 있었던 겁니다.

경험이 풍부한 선수였습니다. 코칭스태프의 도움이 꼭 필요한 겁니까.

무조건 필요하죠. 선수 혼자서 큰 대회를 준비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옆에서 잘못된 자세를 비롯한 문제점을 잡아줄 수 있는 코치가 필요합니다. 결국 2008년 베이징 패럴림픽을 마치고 은퇴를 결심했어요. 지도자로 후배 양성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은 겁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활을 잡았습니다.

세월이 참 빨라요(웃음). 우린 선수 시절이 인생의 황금기입니다. 다신 선수로 뛸 수 없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컸죠. 시원섭섭했습니다.

“양궁 지도자보다 인생 선배가 되고 싶어”

한국 장애인 지도자 최초 국외 파견을 다녀온 안태성(사진 맨 오른쪽)(사진=엠스플뉴스)
한국 장애인 지도자 최초 국외 파견을 다녀온 안태성(사진 맨 오른쪽)(사진=엠스플뉴스)

1991년부터 선수와 지도자 생활을 병행했습니다. 은퇴 후 달라진 게 있습니까.

지도자는 늘 고민을 안고 삽니다. 선수는 자기만 잘하면 문제가 없어요. 지도자는 다르죠. 제각각인 선수들을 챙겨야 해요. 뛰어난 선수는 물론 실력이 조금 뒤처지는 이도 신경 써야 합니다. 지도자는 어렵고 힘든 것 같아요(웃음).

지도자 29년 차입니다. 유독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습니까.

모든 선수가 똑같이 소중합니다(웃음). 한 선수를 꼽긴 어려운데... 여주여자고(현 세종고) 양궁부 코치로 있을 때였습니다. 소녀 가장인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는 늘 고개를 숙이고 다녔습니다.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인지 자신감이 없었죠. 양궁을 시작한 뒤로 바뀌었어요.

바뀌었다?

좋은 성적을 낸 건 아니에요. 하지만, 성격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양궁을 시작한 뒤로 웃는 날이 늘었어요.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배려할 줄 아는 학생이 됐죠. 그 친구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기억에 남아요.

선수를 지도하면서 특별히 강조하는 게 있습니까.

다른 지도자와 같을 것 같아요. 결과는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건 없어요. 아무리 힘들고 지겨워도 꾸준한 사람이 장래에 웃습니다. 제가 경험한 걸 많이 이야기해주는 것 같아요. 선수들이 흥미로워할 이야기는 아니죠. 지도자나 선배에게 많이 듣는 소리기도 하고요(웃음).

2017년 한국국제협력단(KOICA) 장애인체육 분야 자문으로 캄보디아 파견을 다녀왔습니다. 한국 장애인지도자가 국외로 파견을 나간 최초의 사례입니다.

양궁의 씨앗을 뿌리고 왔죠.

씨앗이요?

캄보디아에선 양궁 장비를 구하기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캄보디아 파견 전 워크숍을 다녀온 뒤 장비를 구매한 이유죠. 그걸 챙겨서 캄보디아로 건너갔습니다.

어땠습니까.

솔직히 힘든 점이 많았어요. 학생들이 운동을 꾸준히 안 나왔습니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스포츠에 시간을 투자할 여유가 없어요. 학생부터 어른까지 일을 하죠. 한국의 1960년대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해결책이 있었습니까.

사비를 털어서 운동하는 선수들에게 용돈을 줬어요. 목표를 달성한 선수에겐 보너스까지 챙겨줬습니다(웃음). 한국 장애인 지도자 최초로 국외로 나왔는데 그냥 돌아갈 순 없잖아요.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캄보디아에 15개월 있었는데 배운 게 참 많아요.

배웠다?

그 친구들은 작은 것에 감사하더라고. 음식이나 스포츠용품 등을 나눌 때 전해지는 감정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선수들과 생활하면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한층 더 성숙해진 것 같아요. 캄보디아에 다녀온 뒤로 안 입는 옷이나 골프용품 등을 버리지 않고 모읍니다. 코로나 19가 잠잠해지면 캄보디아 친구들에게 가져다줄 계획이죠(웃음).

“비장애인, 장애인 선수가 함께 땀 흘리는 실업팀 만들고 싶어”

안태성 감독이 이끈 한국 장애인 양궁 대표팀(여자)은 2012년 영국 런던 패럴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사진=엠스플뉴스)
안태성 감독이 이끈 한국 장애인 양궁 대표팀(여자)은 2012년 영국 런던 패럴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사진=엠스플뉴스)

선수, 지도자로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더 이루고 싶은 게 있습니까.

많죠(웃음).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에요. 가끔 일상생활이 힘들어 집에 머무는 장애인을 만납니다. 그분들에게 운동을 권유해요.

이유가 있습니까.

고교 시절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장애인으로 살 것이란 건 상상조차 못 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삶을 포기할까를 고민했었죠. 그때 느낀 게 있어요. 사람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바뀔 수 있습니다. ‘장애인이 스포츠를 즐길 수 없다’는 법은 세상에 없어요. 누구든 즐길 수 있는 게 스포츠입니다. 그리고 도전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도전이요?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을 가로막는 건 ‘장애’가 아닙니다. ‘장애가 있다’는 인식이 장애인을 움츠러들게 해요. 그걸 이겨낼 수 있는 건 나뿐입니다. 누가 대신해줄 수 없어요. 많은 장애인이 밖으로 나와서 사람들과 어울렸으면 합니다. 그리고 관심 있는 분야가 있으면 도전했으면 해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으면 합니다.

많이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아직 멀었습니다(웃음). 꼭 이루고 싶은 꿈 하나가 있어요. 멋진 실업팀을 만드는 겁니다.

멋진 실업팀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훈련하고 동등하게 대우받는 실업팀을 만들 겁니다. 한국엔 아직 이런 팀이 없죠. 지도자 생활 초창기 장애인이란 이유로 월급이 일반 지도자보다 적었어요. 일반 지도자는 30만 원 받고, 저는 25만 원을 받았죠. 똑같은 시간 일하는 데 월급을 달랐던 겁니다.

아.

그 월급이 머릿속에서 잊히질 않더라고. 많은 분이 이거 하나는 꼭 알아주셨으면 해요. 지금도 청춘을 바쳐 땀 흘리는 장애인 선수들이 있습니다. 그 선수들은 올림픽을 준비 중인 선수들과 다를 게 없어요. 태극마크를 달고 세계 최고를 향해 나아가려는 꿈을 가진 똑같은 선수입니다. 그들이 함께 어울리는 팀, 꼭 만들겠습니다(웃음).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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