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영,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한국 유일 세계선수권 3연패 달성한 유도 전설

-“유도부 학생들이 유도복을 어깨에 메고 가는 걸 보고 ‘이거다’ 싶었죠”

-“용인대 입학 제안 거절, 유도계 악역을 자처했죠”

-“꿈의 무대 올림픽, 가장 피하고 싶은 상대를 첫판에 만났습니다”

-“한국 유일 세계선수권 3연패는 큰 자부심입니다”

용인대학교 유도경기지도학과 전기영 교수(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용인대학교 유도경기지도학과 전기영 교수(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용인]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태극마크를 달고 남자 유도(86kg 이하)에 출전한 용인대학교 전기영(47) 교수는 첫판부터 강력한 우승 후보를 만났다. 상대는 그해 유럽 선수권 정상에 오른 마크 후이징가(네덜란드). 전 교수는 접전 끝 판정승(3-0)을 거두며 다음 라운드 진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결승전까지 4경기를 한판승으로 장식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전 교수는 한국 유도의 전설로 불린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여자 유도(66kg 이하) 금메달리스트이자 한국 여자 유도 최초 세계선수권 2연패(1993·1995)를 달성한 한국체육대학교 조민선 교수는 전 교수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전 세계 유도 역사에서 이런 선수가 다시 나올 수 있을까 싶은 인물입니다. 모든 유도인이 인정하는 전설, 그게 전 교수입니다.

전 교수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한국 유일 세계선수권 3연패를 달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엠스플뉴스가 전설이 인정하는 전설 전 교수를 만났다.

소년 전기영 “유도를 시작한 이유? 유도복을 어깨에 메고 가는 친구들이 아주 멋졌습니다”

전기영 교수(사진 왼쪽부터)의 어린 시절과 전 교수의 어머니(사진=전기영 교수 제공)
전기영 교수(사진 왼쪽부터)의 어린 시절과 전 교수의 어머니(사진=전기영 교수 제공)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여자 유도 금메달리스트 한국체육대학교 조민선 교수는 “유도인들이 꼽는 전설이 있다”면서 “용인대학교 전기영 교수가 그 주인공”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994년 일본 히로시마 아시아경기대회 남자 유도 금메달리스트 윤동식 역시 “전기영 교수는 모두가 인정하는 유도계의 전설”로 표현했습니다.

어릴 적 함께 땀 흘린 친구들이 좋게 이야기해준 것 같습니다(웃음). 과찬이에요. 유도의 매력에 깊이 빠져 매 순간 온 힘을 다했습니다. 그뿐이에요.

현재는 용인대학교 교수로 후배 양성에 힘쓰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국제유도연맹 심판 감독관을 맡고 있습니다. 강의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국제대회에 참가했어요. 오심을 줄이는 데 힘쓰고 있었죠. 그런데 올해는 코로나 19로 일을 못 하네요(웃음).

코로나 19로 2020년 일본 도쿄 올림픽 역시 1년 연기됐습니다.

올 초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국외로 나가는 게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국제유도연맹은 올 상반기 예정된 모든 국제대회를 취소했죠.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집중하자고 마음먹었는데 온라인 수업이란 게 쉽지 않네요. 질 높은 수업을 촬영해서 학생들을 지도한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웃음).

영상으로 학생들을 지도하고 대회에 출전할 몸을 유지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겁니까.

매트 훈련을 못 합니다. 유도를 혼자서 할 순 없어요. 한계가 없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저는 지도자입니다. 제자들이 이 시기를 잘 극복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해요. 다양한 영상이나 자료를 첨부해서 학생들이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힘쓰고 있죠. 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방법뿐인 것 같아요.

교수께선 올림픽 금메달(1996년), 세계선수권 3연패 등을 일군 유도 전설입니다. 교수께서 만약 코로나 19 시대 선수로 활동 중이라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내년 올림픽을 준비했을 것 같습니까.

조심스럽습니다. 선수 시절 이와 같은 경험을 해본 적이 없어요. 정답은 없습니다. 지도자, 선수, 체육계 관계자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대안을 찾아가는 게 좋은 것 같아요. 한편으론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어떤?

유도는 전신운동입니다. 어떤 선수든 약점이 있어요. 개인훈련 시간이 많은 걸 기회로 활용했으면 합니다. 상체가 약한 선수는 상체운동을 집중적으로 하는 식이죠. 전 세계 모든 선수가 같은 상황입니다. 이 시기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선수가 내년 올림픽에서 좋은 결과를 내지 않을까 싶어요.

체육계는 코로나 19 시대에 가장 힘든 건 동기부여를 갖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도자의 역할이 아주 중요합니다. 선수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줘야 해요.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해주면서 선수들이 더 땀 흘릴 수 있게 돕는 거죠. 우리가 희망을 품고 나아가야 선수들이 믿고 따를 수 있습니다.

전기영 교수의 어린 시절(사진=전기영 교수 제공)
전기영 교수의 어린 시절(사진=전기영 교수 제공)

제자를 향한 지속적인 관심은 유도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교수께선 평생을 유도와 함께하고 있어요. 유도와 첫 인연은 어떻게 맺은 겁니까.

유도를 처음 알게 된 건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이었어요. 안병근(71kg 이하), 하형주(95kg 이하) 선배가 금메달을 목에 건 대회죠. 상대를 가격하지 않고 제압하는 게 아주 멋졌어요. 그렇다고 상대를 가격하면서 우열을 가리는 종목이 나쁘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LA 올림픽을 보고 유도의 매력에 빠져든 거군요.

운명이란 생각을 해요(웃음). 제가 다닌 초등학교에 유도부가 있었습니다. 올림픽을 보고 유도에 빠졌잖아요. 유도부 학생들이 유도복을 어깨 위로 메고 가는 걸 보는데 감탄사가 절로 나오더라고. ‘유도를 무조건 해야겠다’가 된 거지. 유도부를 찾아가서 얘기했습니다. ‘유도가 하고 싶다’고.

유도부에 들어가는 데는 문제 없었습니까.

당시 저를 지도한 선생께서 소질이 있다는 애길 많이 했어요. 큰 문제 없이 유도를 시작했죠. 그리고 유도를 해야만 하는 한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유도를 해야만 하는 이유요?

선생께서 유도하면 중학교 수업료를 면제해준다는 거예요. 초등학교 6학년이면 어느 정도 눈치가 있습니다. 부유하지 않은 집안 사정을 안 거죠. 어머니, 아버지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릴 수 있다는 생각에 좋았어요. 집에 자랑하듯 얘기했습니다. ‘유도하면 수업료 안 내도 된다. 유도로 꼭 성공하겠다’고.

직접 경험한 유도는 어땠습니까.

힘들었죠(웃음). 유도는 반복 훈련이 많아요. 매일 똑같은 훈련을 하는 겁니다. 강도만 바뀌었죠. 날이 갈수록 올라갔습니다. 예를 들면 지난주까진 팔굽혀펴기 10개를 했는데 오늘부턴 20개를 하라는 거야. 다음날엔 30개 시키고, 한 달 뒤엔 100개를 해야 했죠.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나’란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렇게 힘든 반복 훈련을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유도복이 참 좋더라고. 유도복을 입고 매트에 서면 기분이 좋았습니다. 상대를 메칠 때의 쾌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했죠. 반대로 제가 넘어갈 땐 화가 나서 잠을 못 잘 정도였습니다(웃음). 무엇보다 어릴 땐 무작정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상대를 넘기는 횟수가 넘어가는 횟수보다 많았습니다”

고교 시절부터 태극마크를 달았던 전기영 교수(사진=전기영 교수 제공)
고교 시절부터 태극마크를 달았던 전기영 교수(사진=전기영 교수 제공)

한국 유도의 미래를 책임질 선수로 일찍 두각을 나타냈다고 알고 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우승을 맛봤습니다. 전국대회에서 1위를 차지했죠. 유도가 쉬워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은 큰데 뜻대로 풀리지 않았죠. 예상치 않은 부상으로 쉴 땐 심리적으로 아주 힘들었고요. 무슨 일을 하든 참고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하다?

힘들 때마다 ‘오늘은 이 정도만 하자’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운동하기 싫은 날도 많았죠. 그래도 했습니다. 뜻대로 풀리지 않아도 묵묵히 훈련에 집중했죠. 그럼 결과물이 나왔어요. 고교 시절엔 전국대회 6관왕을 차지했습니다. ‘하면 된다’는 걸 몸으로 느낀 거죠.

태극마크는 언제 처음 달았습니까.

고교 2학년 때였어요. 한국 대표로 국제대회에 나갔죠. 비행기 타고 일본으로 갔는데 모든 게 신기했습니다(웃음). 잊지 못할 추억 중 하나예요. 대학교 1학년 말엔 국가대표 선발전 1위에 올라 처음 태릉선수촌에 들어갔습니다. 첫날 머릿속이 복잡해서 잠을 못 잤던 기억이 나요.

이유가 있습니까.

태극마크의 무게란 게 있잖아요. 내가 과연 잘할 수 있겠냔 생각이 들었어요. 동시에 두려웠습니다. 국가대표 훈련은 이전까지 경험한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들다는 얘길 들었거든요. 훈련을 따라갈 수 있을지 걱정했습니다(웃음).

모든 운동선수의 꿈은 국가대표입니다. 좋았던 기억은 없습니까.

선수촌에서 처음 국가대표 용품을 받았을 때예요. 유도복, 훈련복 등에 국가대표 마크가 있었죠. 이게 내 것이란 사실이 아주 좋았습니다(웃음). 아무나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잖아요(웃음). 유도복 입고 거울을 한 참 봤습니다. 혼자서 많이 웃었죠. 그 순간을 나름대로 즐긴 겁니다.

태극마크를 달고 처음 나갔던 국제대회를 기억합니까.

생생하죠. 상대 선수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게 쉽지 않던 시절입니다. 코치께서 해준 말이 있어요.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 무조건 공격적으로 하라’고 했죠. 이 말이 지금도 잊히질 않아요. 가만 서 있질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틈을 찾아 공격을 시도했죠.

전기영 교수(사진 왼쪽)는 선수 시절 한판승의 사나이로 불렸다(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전기영 교수(사진 왼쪽)는 선수 시절 한판승의 사나이로 불렸다(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교수께선 고교 2학년 때 태극마크를 단 최고 유망주였습니다. 그런 교수께서 대학 진학을 앞두고 선택한 건 유도 명문 용인대가 아닌 경기대였습니다.

저 지금 용인대 교수입니다(웃음). 당시 용인대에서 제안을 받았죠. 그리고 용인대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운동 분위기를 봤어요. 고교 시절 용인대로 전지훈련 하러 자주 갔습니다. 짧게는 1주일간 훈련을 했죠. 힘들었어요. 그 기간 운동을 그만둔 친구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선·후배 관계도 엄격했어요. 쉽게 말해 강압적인 게 느껴졌습니다.

당시 운동부 분위기는 다 비슷한 것 아니었습니까.

조금씩 달랐어요. 청석고 시절 가까운 선배들이 경기대에 많았습니다. 훈련 분위기를 들었을 때 용인대보다 경기대가 낫다고 판단했어요. 개인적으로 어떤 분위기에서 운동할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용인대에서 학창 시절처럼 운동하면 버티지 못할 것 같았죠. 대학 땐 가까운 선배들과 조금이나마 즐거운 분위기에서 운동하고 싶었습니다.

많은 유도인이 “1990년대만 해도 용인대 출신이 아닌 선수가 태극마크를 달고 올림픽에 출전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대학 입학 후 첫 대회가 기억납니다. 대진표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체급별로 최소 10명 이상이 용인대인 겁니다. 첫판부터 마지막까지 쭉 용인대 선수만 상대했죠. 사실 예선에선 큰 걱정이 없었어요. 실력 차가 있었던 게 사실이거든. 문제는 준결승부터였습니다. 이때부턴 비슷한 기량의 선수가 붙는 거예요. 더군다나 준결승이나 결승에서 만나는 상대는 용인대에서 키우는 선수였죠.

어땠습니까.

힘들었죠. 당시엔 단순히 실력만으로 우열을 가리지 않았어요. 장외 승부가 있었습니다(웃음). 심판이나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의해서 승부가 결정 나는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대학 시절 제가 대회에 출전할 때마다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뭔지 아세요?

어떤 말입니까.

유도 주요 인사들이 “전기영 쟤는 용인대 제안 뿌린 놈 아닌가. 네가 얼마나 잘하는지 지켜본다”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 유도계 악역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아주 열심히 하고 좋은 경기를 펼쳐도 웃지 못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힘들었어요. 대학을 잘못 선택했나 하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체육계에 널리 알려진 유도계 파벌,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방법은 두 개였어요. 실력으로 이겨내든가 유도를 포기하던가. 학창 시절을 유도만 하면서 보냈습니다. 포기할 순 없었죠.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외부의 방해 없이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오랜 고민 끝 방법을 찾았습니다. 무조건 한판 승부를 보자.

한판으로 승부를 낸다?

코치께서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네가 살아남을 방법은 한판뿐이다. 넌 상대를 메치는 데 재능이 있다. 너라면 할 수 있다’고 했죠.

일반인과 경기하는 게 아닙니다. 한판이 말처럼 쉬운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문제죠.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어요. 난 상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훈련해야 했습니다. 실전에서 상대를 한판으로 넘기지 못하는 날엔 패배의 쓴맛을 맛봐야 했죠. 하지만, 주저앉지 않았어요. 더 땀 흘렸습니다. 솔직히 열 받았어요. 내가 상대를 메친 건 절반 주고, 상대는 한판으로 판정하니...

한판이란 게 훈련으로 체득할 수 있는 겁니까.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타고난 게 있는 것 같아요. 신체조건이나 상대를 잡고 넘기는 힘 등이 예죠. 그리고 제 신조가 있어요. ‘남과 같이해선 남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단순히 남보다 많은 땀을 흘려야 한다는 게 아니에요. 남과 다르게 생각하고 훈련하라는 겁니다.

남과 다르게 생각하고 훈련하라?

똑같은 방식으로 훈련하면 똑같은 선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만의 강점을 알고 그것을 살려야 살아남을 수 있어요. 매일 어떻게 하면 상대를 한판으로 넘길 수 있을까 연구하고 훈련했습니다. 더 좋은 선수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됐죠.

그 결과일까요. 1993년 태극마크를 달고 파리 오픈에 출전해 전기영의 이름 석 자를 확실히 각인시킵니다.

1993년 2월입니다. 지금은 파리 그랜드슬램으로 불리는 대회죠. 개인 첫 공식 대회 출전이었습니다. 거기서 금메달을 땄어요. 세계 최고 선수가 즐비한 대회에서 정상에 오른 겁니다. 더 이상 실력 외적인 요소로 저를 외면할 수 없게 만든 거죠. 이쯤 해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떤?

2020년 용인대는 훈련량만 많습니다. 이전처럼 파벌이나 엄격한 선·후배 관계 등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체벌은 상상조차 할 수 없고요.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파벌이 남아있다면 경기대 출신인 제가 용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일이 없겠죠. 다 지난 일이기 때문에 솔직히 말씀드리는 것이란 걸 강조합니다.

1994년 히로시마 AG를 앞두고 찾아든 시련, 전기영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다

용인대학교 전기영 교수(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용인대학교 전기영 교수(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1993년 파리 오픈 우승을 계기로 승승장구한 거군요.

승승장구할 줄 알았죠(웃음). 같은 해 7월엔 1991년 세계선수권 우승자인 김병주, 라이벌 윤동식을 따돌리고 국가대표 선발전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해 10월 캐나다 세계선수권에선 다시 한 번 정상에 올랐죠. 거침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1994년 일본 히로시마 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슬럼프가 왔어요. 선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습니다. 무릎 부상으로 몸이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했어요. 탈락했습니다. 사람들이 ‘뭘 해도 안 되는 시기가 있다’고 하잖아요. 평소와 똑같이 훈련하고 경기에 나서는 데 안 되더라고. 분위기를 바꿔야 했습니다.

분위기를 바꾼다?

체급 변경을 고민했어요. 고심 끝 올렸습니다. 78kg급에서 86kg급으로 바꾼 거예요. 개인적으로 새로운 도전을 아주 좋아합니다(웃음). 같은 방식을 고집하면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에요. 변화가 필요할 땐 과감하게 선택해야 한 단계 올라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죠. 제가 또 잘 먹습니다.

잘 먹는다?

많이 먹어요(웃음). 78kg급에선 대회를 앞두고 체중 감량이 필수였죠. 힘들었습니다. 체급을 바꾸면서 그 고민이 사라진 거예요.

체급을 바꾼 게 신의 한 수였군요.

1994년엔 웨이트 트레이닝에 힘을 실었어요. 몸을 키우는 데 집중했죠. 1995년부터 다시 정상으로 올라서기 시작했습니다. 1995년 일본 지바 세계선수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어요. 1993년에 이어 2연패에 성공한 거죠. 그것도 한 체급이 아닌 두 체급에서 정상에 선 겁니다. 사실 올림픽 금메달 획득 순간보다 1995년 세계선수권 정상에 섰을 때가 더 기억에 남아요.

체급을 바꾸고 정상으로 올라서는 과정이 힘들었던 거군요.

말로 표현할 수 없죠. 특히나 1993, 1995년 세계선수권 결승에서 만난 상대가 일본 유도 영웅 요시다 히데히코였습니다. 요시다는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 유도(78kg 이하)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였어요. 이 선수 역시 체급을 바꿔서 다시 한 번 정상에 도전하는 중이었죠. 그런 선수를 두 번이나 이겼습니다. 행복했어요.

유도 인생에서 잊지 못할 순간이군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울컥해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하지 못한 뒤 유도를 포기할까 고민했습니다. 뭘 해도 안 되니깐. 그 시기를 이겨내고 세계 정상에 선 겁니다. 그것도 일본 유도 영웅을 이기고. 당시 시상식에서 펑펑 울었어요. 시상대 가장 높은 위치에 서서 애국가를 듣는데 힘들었던 게 다 떠오르더라고. 눈물이 저절로 나온 거죠.

힘들었던 게 또 있습니까.

1993년 세계선수권 정상에 오르고 슬럼프가 왔습니다. 주변에서 “어린 나이에 금메달 따고 몸 관리 소홀했다”란 얘길 많이 들었어요. ‘반짝이었다’는 겁니다. 평소와 똑같이 온 힘을 다했는데... 서러웠어요. 체급을 바꾼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도 증명해야 했죠. 1995년 세계선수권 금메달은 유도 인생에서 가장 값진 메달이 아닌가 싶어요.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을 1년 앞둔 세계선수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올림픽, 자신 있었습니까.

세계선수권 2연패에 성공했습니다. ‘올림픽 금메달은 전기영의 것’이란 얘길 많이 들었죠(웃음). 부담보단 자신이 있었습니다. 체중을 바꾸고 유도가 더 쉽게 느껴졌거든요.

유도가 더 쉽게 느껴졌다?

78kg급 선수들은 빨랐어요. 스피드가 있었습니다. 근력도 좋았죠. 86kg급 선수들은 달랐어요. 근력은 좋은데 스피드가 떨어졌습니다. 내 스피드가 빛을 발한 거예요. 업어치기가 이전보다 잘 됐습니다. 장기인 한판승 확률을 높인 거죠. 예전보다 큰 사람들을 업어치는 겁니다. 예전보다 짜릿한 감정을 느끼면서 자신감이 붙었죠. 누구랑 붙든 이길 것 같았습니다(웃음).

“꿈의 무대 올림픽, 제일 피하고 싶은 상대를 첫판에 만났습니다”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전기영 교수(사진 맨 왼쪽에서 두 번째)(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전기영 교수(사진 맨 왼쪽에서 두 번째)(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1996년 미국 땅에 처음 발 디뎠을 때를 기억합니까.

미국 땅에 발을 내디딘 건 이때가 처음이었어요. 날씨가 몹시 더웠지만 그늘에선 시원했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하지만, 미국에 관광하러 간 게 아니잖아요. 여유가 없었죠. 태극마크를 달고 미국으로 왔습니다. 국민께 금메달을 선물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부담이 엄청났습니다.

‘금메달이 확실하다’란 여론이 부담스러웠던 거군요.

이겨내려고 했어요. 대회 이튿날에 경기가 있다는 것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일찍 경기 마치고 올림픽을 즐기자’는 생각을 했죠. 몸이 가벼웠습니다. 그런데 대진 추첨을 마치고 문제가 생겼죠.

문제요?

올림픽에서 꼭 피하고 싶은 선수가 있었어요. 1996년 유럽선수권 정상에 오른 마크 후이징가(네덜란드)였죠. 강적이었습니다. 이 선수만 만나지 않으면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죠. 그런데 대진 추첨을 마치고 돌아오는 감독님 표정이 너무 안 좋은 겁니다. 얼굴 보고 알았죠. 후이징가를 만났구나.

후이징가가 어떤 선수였는지 더 들어볼 수 있습니까.

1996년 2월 독일 대회에서 1승 1패를 주고받았어요. 처음엔 제가 한판승으로 이겼습니다. 1주일 후 다시 만나선 판정패했어요. 한판으로 이긴 것보다 판정패로 패한 게 자꾸 떠올랐습니다. 올림픽 결승전보다 첫 경기가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참고로 이 선수는 4년 뒤 시드니 올림픽에선 금메달을 목에 겁니다(웃음).

전기영을 긴장하게 한 올림픽 첫 경기, 어땠습니까.

생생히 기억납니다. 업어치기로 후이징가의 허를 찔러 유효를 따냈죠. 하지만, 후이징가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곧바로 안다리걸기로 유효를 빼앗았어요.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공격적인 경기 운영을 이어갔습니다. 3-0 판정승으로 이겼죠. 조금이라도 방심했다면 패할 수 있는 경기였어요.

첫판에서 가장 강한 상대를 만났습니다. 2라운드부턴 조금 수월했습니까.

첫판을 제외한 전 경기(4)를 한판으로 이겼습니다(웃음). 결승전에선 우즈베키스탄의 가자 아르멘 바그다사로프를 만났어요. 우즈베키스탄 최초 올림픽 메달리스트(1996)인 선수죠. 경기 시작 20초 만에 절반을 땄습니다. 상대가 흔들리는 게 보인 종료 57초 전엔 업어치기로 경기를 끝냈어요. 한판이었습니다.

세계선수권에 이어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제가 운동하던 시절엔 많은 운동선수의 꿈이 같았습니다.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거는 거였죠.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웃음). 아주 좋았어요. 지금도 많은 분이 올림픽 금메달 획득의 순간을 이야기합니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는 건 아주 감사한 일이죠.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유도 선수로 이룰 수 있는 건 다 이뤘어요.

아닙니다. 세계선수권 3연패 도전이 남았죠(웃음).

“한국 유일 세계선수권 3연패, 자부심입니다”

용인대학교 전기영 교수(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용인대학교 전기영 교수(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을 마치고 세계선수권 3연패에 도전한 겁니까.

한국에 유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많았습니다. 세계선수권 2연패는 한국체육대학교 조민선 교수(1993·1995)와 제가 달성했죠. 유도 선수라면 나만이 가진 기록을 남기고 싶었어요. 그게 세계선수권 3연패였습니다.

쉴 틈 없이 훈련에 매진한 거군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은 4년을 기다려야 했어요. 먼 미래였죠(웃음). 세계선수권은 1년 뒤인 1997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습니다. 뚜렷한 목표가 있는 까닭에 훈련에 매진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세계선수권 3연패에 성공했습니다. 고비가 있었지만 두 차례 세계선수권과 올림픽 금메달의 경험을 살려 이겨냈어요.

한국 유일 세계선수권 3연패 기록 보유자입니다.

자부심입니다. 1993년 대회부터 3연속 우승했어요. 2년에 한 번 열리는 세계대회에서 3연속 우승한 겁니다. 꾸준한 기량을 유지했다는 증거죠. 지금도 힘들 때마다 당시를 떠올려요. 포기하고 싶은 힘든 훈련을 꾹 참았습니다. 그리고 성과를 냈죠. 그것도 해냈는데 무슨 일을 못 하겠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웃음).

세계선수권 3연패를 달성했습니다. 올림픽 2연패엔 욕심이 없었습니까.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도전에 대한 생각이 있었죠. 그런데 1997년 파리 세계선수권을 마치고 초심을 잃은 게 느껴졌어요(웃음). 올림픽엔 나갈 수 있겠지만 좋은 성적을 장담할 수 없다는 걸 안 거죠. 그렇게 선수 시절을 끝내고 싶지 않았어요. 박수 칠 때 떠나고 싶었습니다.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았고요.

해보고 싶은 게 많았다?

1997년 세계선수권을 마치고 제2의 인생을 설계하기 시작했어요. 경기대 체육학과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한 거죠. 유도 종주국 일본에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실제로 1999년 3월 은퇴 후 바로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8개월간 일본어 공부하고 현지 팀에서 코치 수업을 받았죠. 그때가 아니면 못할 거란 생각에 행동으로 옮긴 겁니다.

1997년이 아닌 1999년에 은퇴한 겁니까.

소속팀 마사회에서 조금 더 선수 생활을 한 뒤 은퇴했습니다. 26살이었어요. 주변에서 “왜 그렇게 빨리 은퇴하느냐”면서 “생각을 바꾸라”고 했죠. 후회는 없습니다. 이기는 횟수보다 패하는 날이 늘던 때예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나갔다고 해도 전 대회처럼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을 겁니다.

이른 은퇴를 후회하지 않는다?

은퇴 후 하고 싶었던 것에 도전했어요. 일본에서 공부한 뒤엔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았죠. 박사과정을 마무리한 후엔 교수가 됐습니다. 그 선택 덕분에 지금까지 행복한 삶을 살고 있어요. 무엇보다 선수 시절 많은 걸 이뤘습니다. 더 바라면 욕심 아닐까요(웃음).

후배 양성에 힘쓰고 있는 용인대학교 전기영 교수(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후배 양성에 힘쓰고 있는 용인대학교 전기영 교수(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교수로 후배 양성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지도자의 눈으로 본 선수 전기영을 평가해줄 수 있습니까.

운동하면서 ‘타고난 천재’란 소릴 많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타고난 재능이 없진 않아요. 인정합니다. 다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내가 가진 재능을 살리기 위해 죽자 살자 운동했습니다. 재능에 노력을 더한 선수였다고 평가해요. 그래서 세계선수권 3연패와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다고 보고요.

제2의 전기영을 꿈꾸는 후배가 많습니다.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조심스럽지만 이 이야기를 꼭 해주고 싶어요. 한국에 유도 선수 100명이 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모든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딸 순 없어요. 현재의 실력과 성장 가능성 등을 두루 분석해서 현실적인 목표를 잡고 운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발전할 수 있어요. 시대가 변했습니다.

시대가 변했다?

제가 운동하던 시절 대중은 1등만 기억했어요. 모든 선수가 세계 최고를 꿈꾸며 운동했습니다. 지금은 달라요. 100명 가운데 95명은 올림픽이 아닌 다른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환경입니다. 선수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어요. 국제 심판이나 연맹 등에서 일할 수도 있죠. 선수가 유도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지도자의 역할인 것 같아요.

교수께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바람이에요. 내가 하는 일이 쭉 재밌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현재 삶에 만족하다 보니 두려울 때가 있어요. ‘이 행복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하는 걱정이죠. 평생 유도와 함께하고 싶습니다. 이거 하나면 충분할 것 같아요. 유도는 내 운명이니까.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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