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C 안양 황문기, 올여름 포르투갈 5년 생활 마무리하고 한국 돌아왔다

-“유럽 프로팀 입단 테스트 기회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처음엔 동양인을 향한 편견과 시선이 가장 힘들었다”

-“아버지의 한 마디가 한국 복귀 결심하게 했다”

-“포르투갈에선 경기 후 가족들과 이야기 나누는 동료들이 가장 부러웠다”

FC 안양 미드필더 황문기(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FC 안양 미드필더 황문기(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

6월 26일 FC 안양 중원에 새 얼굴이 등장했다. 올 시즌 후반기 17경기 2골. 포르투갈에서 프로에 데뷔해 5시즌을 뛴 황문기(23)다.

황문기는 일찌감치 축구계 눈을 사로잡은 재능이다. 2012년 AFC(아시아축구연맹) U-16(16세 이하) 챔피언십에선 황희찬, 황인범 등 현 한국 축구 대표팀 선수와 호흡을 맞췄다.

울산 현대고를 졸업한 후엔 대학 진학 대신 유럽 도전을 선택했다. 이적 제안이 있었던 건 아니다. 2015년 포르투갈 프리메이라리가(1부) 소속 아카데미카 드 코임브라 입단 테스트 기회였다.

황문기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미드필더 전 지역을 소화할 수 있는 멀티 능력과 경기 운영, 볼 배급 등의 강점을 살려 정식 계약을 맺었다.

우여곡절(迂餘曲折)이 많았다. 황문기는 팀 유일 동양인이었다. 한 선수는 연습 중 공과 상관없는 지역에서 황문기의 다리를 걷어찼다. 이유는 없었다. 팀 감독에겐 “동양인은 이 정도 수준밖에 안 되느냐”는 말까지 들었다. 감독은 ‘농담’으로 치부했지만 황문기에겐 평생 잊지 못할 상처로 남았다.

황문기는 프로 데뷔 시즌(2015-2016) 2경기 출전에 그쳤다. 그라운드 안팎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19살에 맞이한 2년 차 시즌부터 조금씩 경쟁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2시즌 연속 20경기 이상을 뛰었다. 3월 코로나19로 2019-2020시즌이 중단되기 전까진 16경기에 출전해 1골을 기록했다.

포르투갈 리그에서 버티고 버티던 황문기가 팀과 계약을 해지하고 K리그2 안양 입단을 선택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엠스플뉴스가 황문기를 만났다.

- 18살에 유럽 도전 선택한 황문기 “포르투갈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황문기(사진 왼쪽)는 포르투갈 리그에서 프로에 데뷔해 5시즌을 뛰었다(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황문기(사진 왼쪽)는 포르투갈 리그에서 프로에 데뷔해 5시즌을 뛰었다(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10월 31일 K리그2 26라운드 대전하나시티즌전이 11월 17일로 밀렸습니다. 대전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까닭입니다.

27일 밤 대전 A 선수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K리그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건 처음이에요. 깜짝 놀랐죠. 28일 오후 훈련을 마친 후엔 대전전이 2주 밀린 걸 확인했습니다. 구단에선 코로나19 예방을 다시 한 번 강조했어요. 선수들과는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잃지 말자고 이야기했습니다.

올 시즌 K리그는 코로나19로 예년과 다른 점이 많습니다. 69일 늦게 시즌을 시작했고 경기 수가 줄었어요. K리그1은 예년과 달리 27라운드(기존 38라운드)만 치르죠. K리그2도 36라운드에서 27라운드로 바뀌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무관중 경기였습니다. 18살에 프로에 데뷔해 무관중 경기는 처음 경험해봤어요. 텅 빈 안양종합운동장에서 뛰다 보면 ‘여기가 우리 홈구장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죠. 무관중 경기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합니다. 올 시즌 남은 2경기를 포함해 쭉 관중과 함께하고 싶어요.

6월 26일 FA(자유계약선수)로 FC 안양에 입단했습니다. 2019-2020시즌까진 포르투갈 리그에서 뛰었습니다.

울산 현대 유소년팀인 현대고를 졸업하자마자 포르투갈로 건너갔습니다. 당시 18살이었어요. 무서운 걸 몰랐죠(웃음).

애초부터 유럽 진출을 계획했던 겁니까.

울산엔 자리가 없었어요(웃음). 대학 진학을 고민하던 중 고교 시절 은사님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은사님은 “포르투갈에 도전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죠. 한국에서 프로축구 선수를 꿈꾸는 학생선수는 비슷할 거예요. 세계 최고 선수가 즐비한 유럽 리그는 동경의 대상입니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어요. “꼭 가고 싶습니다”를 외쳤죠.

포르투갈 프로팀에서 입단 제안을 받은 겁니까.

포르투갈 1부 리그 아카데미카 드 코임브라 입단 테스트였습니다. 솔직히 아카데미카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어요. 2014년 11월 포르투갈로 떠나기 전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정보를 수집했죠(웃음).

1887년 창단한 코힘브라에서 프로에 데뷔한 황문기(사진 오른쪽)(사진=코임브라)
1887년 창단한 코힘브라에서 프로에 데뷔한 황문기(사진 오른쪽)(사진=코임브라)

어떤 팀이었습니까.

1887년 창단한 팀이에요. 역사가 아주 깊습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루이스 피구와 포르투갈 축구 대표팀 중심에 섰던 세르지우 콘세이상이 코임브라 유소년팀에서 성장했어요. 콘세이상은 감독(2013.04~2014.06)으로 팀을 이끌기도 했죠. 2010년 FC 서울의 리그 우승을 이끈 넬루 빙가다(1982-1983·2005~2007), 안드레 비야스(2009.10~2010.06) 감독도 코임브라 지휘봉을 잡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팀에 입단할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어요(웃음).

그렇게 포르투갈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겁니까.

부푼 꿈을 안고 떠났죠. 포르투갈에 도착했을 때부터 가슴이 터질 것 같았어요. 입단이 불확실한 상황이었지만 유럽 리거가 된 것 같았죠(웃음).

코임브라의 첫인상은 어땠습니까.

머릿속엔 어떻게든 이 팀에 입단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웃음). 그렇게 코임브라 U-19 팀에서 2주간 입단 테스트를 받았습니다. 솔직히 어렵진 않았어요.

어렵지 않았다?

포르투갈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같은 선수가 즐비할 줄 알았어요(웃음).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감이 붙었어요. 한국 선수들과 경쟁할 때보다 편했습니다. 문제는...

문제는?

팀에 동양인은 저뿐이었어요. 코임브라 U-19 선수들도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패스를 안 주는 거예요(웃음). 어떤 선수는 아무 이유 없이 제 다리를 걷어차기도 했습니다. 공이 없는 상태에서 다리를 걷어차인 건 처음이었어요. 욱했죠.

어떻게 했습니까.

싸우진 않았어요. 화를 주체하지 못하면 손해 볼 것 같았죠. 공을 가진 것도 아닌데 왜 내 다리를 걷어찼냐고 따졌어요. 물론 포르투갈어로 이야기한 건 아닙니다. 한국어와 몸짓을 섞어서 의사를 전달했죠(웃음). 사과를 받았습니다. 불합리한 일을 당했을 땐 확실한 의사 표현이 중요하다는 걸 느꼈죠.

기량을 보일 시간이 길지 않았습니다.

코임브라에서 성장 가능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적극적으로 임한 게 좋은 결과로 이어졌죠. 처음엔 U-19 팀과 계약을 맺었어요. U-19 팀에서 좋은 기량을 보이면 언제든지 성인팀에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엄청나게 큰 동기부여였죠.

동기부여?

U-19 팀 훈련장엔 늘 한둘이 부족했어요. 팀에서 에이스로 불리는 선수들이 빠진 겁니다. 성인팀으로 간 거예요. 그들은 1군에서 훈련하고 경기 출전 기회까지 잡을 수 있었죠. 저도 기량만 증명하면 포르투갈 1부 리그에서 뛸 수 있었던 겁니다. 감독, 코치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운동에만 매진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어요.

운동에만 매진한 결과 성인팀 계약을 맺은 거군요.

2015-2016시즌을 앞두고 1군에서 출전 기회를 잡았습니다. 프리시즌 경기에 출전해 좋은 평가를 받았죠. 그리고 코임브라 성인팀과 정식 계약을 맺었습니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어요(웃음). 포르투갈 1부 리그 팀에 입단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죠.

- “동양인을 향한 편견과 시선이 가장 힘들었다” -

FC 안양 미드필더 황문기(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FC 안양 미드필더 황문기(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입단 테스트를 통과해 포르투갈 1부 리그 팀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때부터 진짜 시작이었습니다. 첫 시즌은 매우 힘들었어요. 훈련장에서 죽을힘을 다해도 경기 출전 명단에 들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동양인을 향한 시선이 저를 힘들게 했어요.

동양인을 향한 시선이요?

이런 일이 있었어요. 감독이 뜬금없이 “동양인은 이 정도 수준밖에 안 되느냐”는 말을 했습니다. 당황했어요. 훈련장에서 온 힘을 다했습니다. 실수나 잘못을 한 것도 아니었어요. 감독이 그 말을 내뱉은 순간 동료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훈련 끝나고 왜 그런 말을 했느냐고 물어보니 ‘장난이었다’는 대답이 돌아왔어요. 비참했습니다.

아.

솔직히 화를 내고 싶었어요. 감독이지만 선을 넘어선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말이 통하질 않으니 의사 표현에 한계가 뚜렷했어요.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통화하면서 화를 삭이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18살에 겪은 일입니다. 아주 어린 나이예요.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습니까.

한국으로 돌아가면 저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비웃을까 싶었어요. 한국 복귀는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능력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죠. 특히나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황)문기야, 우린 네가 자랑스럽다. 잘하고 있다”는 말을 매일 했습니다.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했어요.

코임브라 성인팀과 계약까진 순탄했지만 이후 힘든 시간이 있었습니다. 유럽에서의 첫 시즌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습니까.

2015-2016시즌 리그 1경기 출전에 그쳤습니다. 컵대회에서도 1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죠.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어요. 버티면서 이겨내겠다고 수백 번을 다짐했으니깐. 훈련장에서 구슬땀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기회를 잡았죠.

훈련에 매진한 것 외에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코임브라가 2015-2016시즌 2부 리그로 강등됐어요. 베스트 11 가운데 10명이 팀을 떠났습니다. 주전으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어요. 새롭게 지휘봉을 잡은 코스티냐 감독님도 제 능력을 인정해줬습니다. 프리시즌에서 주전으로 뛰면서 자신감이 붙었죠. 2년 차 시즌 로테이션 멤버로 20경기에 출전해 1골 1도움을 기록했습니다.

2016-2017시즌 활약에 힘입어 계약을 연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계약을 2년 연장했습니다. 힘든 시기를 이겨내면서 얻은 성과였어요. 뿌듯했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었죠. 포르투갈에서 5년이나 생활할 수 있었던 계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만약 2년 차 시즌에도 자릴 잡지 못했다면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포르투갈에서 5년간 생활했습니다. 어느 해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2018-2019시즌입니다. 직전 시즌 20경기에 출전해 3도움을 올렸어요. 로테이션 멤버로 활약을 이어갔죠. 2018-2019시즌엔 달랐습니다. 시즌 초반 감독님이 바뀌면서 경기 출전에 어려움을 겪었어요. U-23 팀에서 뛰는 시간이 많았죠. 새 감독님은 선 굵은 축구를 추구했습니다. ‘선 수비 후 역습’ 전술이었죠. 저는 중원에서 패스로 경기를 풀어가는 데 익숙했어요. 2018-2019시즌은 10경기 출전에 그쳤습니다.

- “안양 출신으로 FC 안양 선택은 당연한 것” -

황문기는 안양에서 축구를 시작해 프로축구 선수의 꿈을 이뤘다(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황문기는 안양에서 축구를 시작해 프로축구 선수의 꿈을 이뤘다(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5년 차 시즌(2019-2020) 로테이션 멤버로 돌아왔습니다. 16경기에 출전해 1골을 기록했어요. 그런데 시즌을 마치기 전 한국 복귀를 결정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3월 코로나19로 유럽 모든 리그가 중단됐습니다. 정상적인 팀 훈련도 소화할 수 없었죠. 집에서 운동하면서 시즌 재개를 기다리던 중에 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어떤?

아버지가 “코로나19로 걱정이 크다”면서 “이젠 네가 공차는 걸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건 처음이었어요. 늘 “잘하고 있다”고 “응원한다”는 말만 하셨죠. 코로나19로 생각할 시간이 많았어요(웃음). 처음으로 한국 복귀를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죠.

한국 복귀였군요.

저를 냉정하게 평가해봤어요. 유럽에서 5년간 버티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확고한 주전으로 뛴 시즌은 없었어요. 한 시즌 팀 경기 일정의 절반만 소화하는 로테이션 멤버였습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외로움도 컸고요.

외로움이요?

훈련하고 경기에 나서는 것 외엔 집에 있는 시간이 길었어요. 한국 예능 프로그램이 유일한 친구이자 취미였습니다. 몸을 다쳤을 땐 특히 더 힘들었어요. 종일 혼자 있을 때가 많았죠. K리그에서 뛸 수 있는 팀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FC 안양을 선택했습니다.

안양에서 영입 제안이 왔습니다. 고민하지 않았어요. 제가 안양초등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했습니다. 중학교 때까지 안양 생활을 이어갔죠(웃음). 가족이 있는 가평과의 거리가 크게 멀지도 않고요. 코임브라와 계약을 해지하고 6월 26일 안양에 입단했습니다.

포르투갈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해 5시즌을 치렀습니다. K리그는 올해가 처음입니다. 어떻습니까.

포르투갈에선 K리그를 챙겨보기가 어려워요. 틈틈이 하이라이트를 챙겨본 게 다였죠.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웠습니다.

어려웠다?

포르투갈 리그가 중단된 후 공식 경기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정상적인 훈련도 어려웠죠. 한국으로 돌아와선 2주간 자가격리를 했어요. 경기에 뛸 몸을 만드는 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경기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선수들의 기량도 우수했어요. 포르투갈 선수들과 비교해도 뒤처지는 게 없었죠. 프로 데뷔 시즌이란 마음으로 몸 상태를 끌어올리는 데만 집중했습니다.

올여름 이적 시장에서 안양에 합류해 17경기 출전 2골을 기록했습니다.

김형열 감독님이 기회를 준 덕분입니다. 감사해요. 안정적으로 경기에 출전하면서 K리그2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 부족한 게 많지만, 지금보다 좋은 경기력을 보일 수 있게 땀 흘려야죠(웃음).

포르투갈에서와 달리 가족이 곁에 있습니다.

포르투갈에선 경기 후 구단 버스에 가장 먼저 올랐습니다. 사인이나 사진 촬영을 요청하는 팬 외엔 저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었죠. 동료들은 달랐어요. 가족과 이야기를 나눈 후 버스에 올랐죠. 부러웠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 가장 좋은 건 언제든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거예요. 가족은 포르투갈 생활을 마무리하고 돌아온 걸 후회하지 않는 이유기도 하죠.

아직 23살입니다. 이뤄야 할 게 많은 선수죠. 안양에 입단하면서 이것만큼은 꼭 이루겠다고 다짐한 게 있습니까.

구단 모든 분에게 ‘복덩이’로 불리고 싶어요. 코칭스태프, 동료, 프런트, 팬 모두가 “황문기 영입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잘하겠습니다. 유럽에서의 경험을 살려서 팀이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고 싶어요. 올해 플레이오프 진출엔 실패했지만, 이전보다 나아진 경기력으로 시즌을 마칠 겁니다. 내년엔 당연히 K리그1 승격을 향해 나아갈 거고요. 그러다 보면 태극마크를 달고 뛸 기회가 오지 않을까요(웃음).

태극마크요?

한국 U-16 대표팀에서 황희찬, 황인범 등과 뛴 경험이 있습니다. 2016년 브라질 리우 올림픽 예선 직전엔 신태용 감독(현 인도네시아 축구 대표팀)님의 부름을 받아 U-23 축구 대표팀에서 훈련했죠. 이후 태극마크와 인연을 이어가지 못했어요. 국가대표는 모든 선수의 꿈입니다. 매일 월드컵에 출전하는 걸 상상하죠(웃음). 거침없이 나아가겠습니다.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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