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스피드 스케이터였던 이00 선수와 전명규 한국체대 교수(사진 오른쪽 하단)
베테랑 스피드 스케이터였던 이00 선수와 전명규 한국체대 교수(사진 오른쪽 하단)

- 전명규 기획·연출, 베테랑 유명 스케이터를 ‘타락한 영웅으로 만들어라’

- 평창 올림픽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 코치, 음해 문서 작성에 참여한 정황 발견

- “교수님은 자신을 치고 올라올 것 같은 빙상인들을 극도로 경계했다.”

- 이00 선수 “현역 시절 교수님이 날 미워한다는 생각에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려”

‘대중은 어렵게 바닥에서 정상까지 오른 사람들의 성공담에 열광한다. 하지만, 대중이 이보다 더 열광하는 건 정상에서 바닥으로 추락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미국 토크쇼 진행자 래리 킹의 말이다.

한국체육대학교 전명규(현 대한빙상경기연맹 부회장) 교수는 래리 킹의 말을 직접 현실에 적용한 이다. ‘정상에서 바닥으로 추락한 사람의 이야기’를 많은 대중에게 전달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문제는 ‘영웅의 추락담’을 기획·연출한 이가 전 교수 자신이라는 데 있다. 그리고 결심의 동기가 ‘누군가를 제거’ 하기 위해 나왔다는 데 있다. 전 교수가 기획·연출까지 담당한 이 추락담의 주인공은 전(前) 스피드 스케이터 국가대표 이00이다.

음해 프로젝트, ‘국민의 영웅으로 부각되는 한 빙상 선수의 타락’

엠스플뉴스가 입수한 '이00 선수 음해 문서'가 담긴 이메일(사진=엠스플뉴스 이동섭 기자)
엠스플뉴스가 입수한 '이00 선수 음해 문서'가 담긴 이메일(사진=엠스플뉴스 이동섭 기자)

엠스플뉴스는 2014년 4월 23일 한국체대 전명규 교수에게 전달된 한 통의 이메일을 입수했다. 이메일엔 ‘00선생님 친구분이 작성했습니다. 검토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짧은 내용만 담겨 있었다.

이것만 봐선 이메일의 정체를 알기 어려웠다. 정작 이 이메일이 왜 전 교수에게 전달됐는지 알려주는 단서는 첨부파일에 있었다. 첨부파일의 제목은 ‘국민의_영웅으로_부각되는_한_빙상선수의_타락[1].hwp’.

글은 “꽤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선수의 열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나라의 영웅입니다. 정말 멋지십니다.” 같은 찬사로 시작한다.

하지만, 찬사도 잠시. 글은 갑자기 ‘이 선수가 정말 최선을 다하고 노력의 결실을 맺는 노력형 인간이라면 후배들도 박수치며 응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빙상계에서는 국민이 응원하는 한 선수의 추악함에 두 손 두 발을 들 정도입니다’라는 거친 표현으로 반전을 시도한다.

'이00 선수 음해 문서' 본문 내용(사진=엠스플뉴스 이동섭 기자)
'이00 선수 음해 문서' 본문 내용(사진=엠스플뉴스 이동섭 기자)

이후 글은 대표팀에서 이00 선수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코치·동료들에게 어떤 실수를 했는지와 같은 일방적인 폭로로 이어진다.

폭로를 끝낸 후 글쓴이는 ‘본인을 포장하기 위해 눈물을 흘리는 가식적인 모습을 보니 어이가 없습니다’ ‘본인이 돋보이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 자라는 새싹을 짓밟으며 지켜오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라는 극단적 표현으로 이00 선수를 힐난한다.

글은 ‘추악한 한 인간의 거짓 행동에 박수를 치는 동안 짓밟힌 어린 선수들의 성장에 많은 응원과 격려를 한 번쯤 해보는 건 어떨지…이 선수의 경기를 보며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로 끝을 맺는다.

엠스플뉴스 ‘이00 선수 음해 문서’ 단독 입수. 음해 문서 작성에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 코치도 참여한 정황 발견

'이00 선수 음해 문서' 마지막 내용(사진=엠스플뉴스 이동섭 기자)
'이00 선수 음해 문서' 마지막 내용(사진=엠스플뉴스 이동섭 기자)

엠스플뉴스는 누가 문서 작성을 ‘지시’했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문서의 내용보다 문서를 쓴 의도에 집중했다. 처음부터 누군가를 음해할 목적으로 쓴 글이라면 글의 사실 여부를 다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00 선수 음해 문서’ 작성 과정을 잘 아는 빙상인 A 씨는 엠스플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배후에 전명규 교수가 있었다’고 폭로했다.

전 교수님이 작성을 지시한 게 맞다. 전 교수 측근들이 (음해) 자료를 모았고, 모인 자료를 김00 코치 친구에게 넘겨 한편의 글로 정리하도록 부탁했다.

여기서 잠시 주목할 이름이 있다. 김00 코치다. 김00 코치는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 여자 대표팀 코치로 활약했다. 이상화, 박승희, 노선영, 김보름, 박지우, 김민선 등으로 구성된 스피드 스케이팅 여자 대표팀을 이끈 지도자가 바로 김 코치다.

과연 김 코치는 이 음해 문서 작성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했을까. 엠스플뉴스는 김 코치의 이야기를 듣고자 연락을 취했다. 김 코치는 문서에 대해 “기억이 없다”는 말을 반복하다가 "지금 병원이라, 통화할 수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김 코치 또래의 빙상인들은 “현역 시절엔 이00 선수와 김 코치 관계가 좋았다”며 “고려대 출신의 이00 선수와 대학은 달랐지만, 김 코치가 빙상 1년 선배인 이00 선수를 잘 따랐다”고 회상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김 코치는 ‘잘 따랐던 선배’ 이00 선수의 음해 문서 작성에 이름을 올린 것일까.

엠스플뉴스 취재에 응한 많은 빙상인은 김 코치를 “대표적인 전명규 사람”으로 지목했다. “김 코치가 문서 작성에 관여했다면, 전적으로 전 교수의 오더 때문이었을 거다. 절대 ‘갑’인 전 교수의 명령을 절대 ‘을’인 김 코치가 거역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빙상인 B의 판단이다.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출신의 김 코치는 전 교수의 한국체대 제자다. 2004년엔 ‘쇼트트랙스피드스케이팅의 새 출발기법에 대한 기술동작 분석’이란 논문을 전 교수와 함께 쓰기도 했다.

지도자로 변신한 뒤에도 김 코치는 전 교수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왔다는 게 많은 빙상인의 증언이다.

한 빙상 관계자는 “김 코치가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 코치가 됐을 때 ‘전 교수의 영향력으로 됐다’는 소문이 파다했다”며 “그래선지 올림픽에서 ‘팀 추월 사태’가 벌어졌을 때도 김 코치는 사태를 바로잡는데 최선을 다하기보다 묵묵부답으로만 일관했다”고 비판했다.

베테랑 스케이터를 음해하려 했던 전명규. “교수님은 자신을 치고 올라올 것 같은 빙상인들을 극도로 경계했다.”

전직 스케이터 이00 씨가 질주하는 장면. 현역 시절 그를 괴롭힌 건 기록에 대한 압박이나 메달 부담이 아닌 '심증은 가나 물증은 없는' 빙상계 거대권력이었다
전직 스케이터 이00 씨가 질주하는 장면. 현역 시절 그를 괴롭힌 건 기록에 대한 압박이나 메달 부담이 아닌 '심증은 가나 물증은 없는' 빙상계 거대권력이었다

연일 자신을 둘러싼 각종 의혹이 불거지자 전명규 교수는 외부와의 접촉을 피한 채 은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엠스플뉴스는 문서 작성 의도를 묻고자 전 교수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엠스플뉴스 취재진과 만난 빙상인들은 "전 교수가 조교 명의의 '차명폰'을 주로 쓴다"며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음해 문서 작성 과정을 소상히 아는 D 씨는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 전 교수가 이00 선수를 음해하려 했던 게 아니”라고 밝혔다.

2014년까지 이00 선수는 현역이었다. 빙상계의 절대권력자였던 전 교수님과는 파워게임을 할 상대가 아니었다. 다만, 교수님이 이00 선수를 싫어했던 게 문제였다.

30대 중반의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스케이터 이00 선수가 고분고분하지 않은 걸 기분 나빠했다. 이00 선수의 어머니가 피겨 스케이터 출신의 ‘대선배’라는 것도 교수님에겐 부담이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교수님은 자신을 치고 올라올 것 같은 빙상인들을 극도로 경계했다.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올림픽 6회 출전’이란 대기록을 세운 이00 선수야말로 교수님 입장에선 ‘더 자라기 전에 쳐야할 예비 정적’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00 선수를 음해할 목적으로 문서 작성을 지시했고, 결국 완성된 문서가 ‘국민의 영웅으로 부각되는 한 빙상선수의 타락’이었다.” D 씨의 증언이다.

전 교수는 누군가를 제거할 때 주로 두 가지 방법을 썼다. 익명으로 민원을 제기하거나 괴문서를 만들어 이를 대중이 알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4월 8일 엠스플뉴스는 ‘[단독 입수] 전명규가 만든 '파벌 싸움' 프레임…기사 내용·방향까지 설계했다’ 제하의 기사를 통해 전 교수가 특정인을 음해하는 여론 조성을 어떻게 기획하고, 어떤 방식으로 언론 보도 내용과 방향을 직접 설계했는지 자세히 보도했다.

‘이00 선수 음해 문서’는 2년 뒤인 2016년. '빙상 관계자'들의 입을 통해 활자화되면서 대중에 알려졌다.

+ 취재 후 : 음해 문서와 기사의 당사자인 이00 씨는 “현역 시절 누군가가 계속 날 주저앉히려 한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누가 무슨 이유로 그러는진 알지 못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역 시절 전 교수님이 날 미워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마다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분과 내가 사는 길이 다를 뿐’이란 생각으로 버텼다. 그런 와중에 최근 ‘2014년 날 음해하려고 전 교수님 측이 문서를 만들었다’는 얘길 듣고 깜짝 놀랐다.

원래 스피드 스케이팅은 기록경기라, 파벌은 고사하고, 반목 같은 것도 거의 없는 깨끗한 종목이었다. 음해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던 게 전 교수님이 영향력을 넓혀가면서, 그분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면서 선수들 사이에 불만이 싹트고, 보이지 않는 반목마저 생겼다. 솔직히 지금도 그분을 미워하진 않는다. 우리 빙상계가 합심해 더욱 깨끗한 빙판을 후배들에게 물려줄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렇게 되도록 우리 빙상인들이 모두 힘을 합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동섭, 박동희 기자 dinoegg509@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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