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이 세 번 변하는 시간 30년, 그동안 김준호의 몸은 점점 진화했다(사진= 엠스플뉴스 강윤기 기자)
강산이 세 번 변하는 시간 30년, 그동안 김준호의 몸은 점점 진화했다(사진= 엠스플뉴스 강윤기 기자)

[엠스플뉴스]

피트니스가 핫하다. 건강하게 몸을 가꾸고 싶어하는 이가 늘면서 피트니스 산업은 그 어느때보다 인기다. 무엇보다 직업 보디빌더가 되고 싶은 이가 증가하고 있다. 이들이 가장 닮고 싶은 ‘보디빌딩의 살아있는 전설' 김준호를 엠스플뉴스가 만났다.

‘역대 최연소 미스터코리아, 최연소 세계선수권 75kg급 우승, 대한민국 최초 IFBB(국제보디빌딩연맹) PRO 자격 획득, 2년 연속 미스터 올림피아 출전권 획득’

보디빌더 김준호가 34년 동안 이뤄낸 업적이다. 김준호를 빼고 대한민국 보디빌딩을 논할 수 없을 만큼 김준호는 보디빌딩 업계의 살아있는 역사다. 김준호는 16세에 보디빌딩을 시작해 1년 6개월만에 미스터 코리아 학생부 정상에 올랐다. 그 후 1991‧92년 미스터 코리아 우승, 1991‧92년 아시아 선수권 2연패, 1997년 세계선수권 75kg급 챔피언 등 김준호는 15년 동안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승승장구하던 김준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1999년, 몸담고 있던 대한보디빌딩협회를 나와 독자 노선을 구축하면서 협회는 김준호의 선수 자격을 박탈했다. 대회에 참가할 수 없었던 세월만 무려 15년. ‘포기’라는 단어를 가장 싫어한다는 김준호가 인고의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보디빌딩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었다.

김준호가 대표로 있는 머슬 아카데미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수많은 트로피였다. 양쪽 벽면을 다 채우고 자리가 없어 정수기 위에 올려진 트로피를 보며 김준호가 살아온 발자취가 필름처럼 지나갔다.

김준호는 현재 보디빌더와 피트니스 센터 대표 그리고 본인 이름을 건 대회 운영까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34년 보디빌더로서의 삶과 최근 몇 년 사이 대중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피트니스 산업 이야기를 ‘엠스플뉴스’가 김준호에게 직접 들었다. 인터뷰는 6월 16일 김준호 선수가 운영하는 머슬 아카데미에서 진행됐다.

‘촉망받는 보디빌더로 승승장구 한 15년’

1988 최연소 미스터 코리아 등극, 나이 만 20세 (사진=김준호)
1988 최연소 미스터 코리아 등극, 나이 만 20세(사진=김준호)


지금 몸을 보면 어렸을 때도 몸이 좋았을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오히려 마르고 소극적이었어요(웃음). 처음 시작한 16살엔 평범한 일반 학생이었는데 그 누구도 제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보디빌더가 될 거라고 생각 못 했습니다. 처음 아버님의 권유로 헬스클럽에 가게 됐어요. 처음에 들지 못했던 무게를 다시 도전해서 성공했을 때 그 성취감이 짜릿했습니다. 그 뿌듯함 때문에 보디빌딩의 매력의 매력에서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 같아요(웃음)

30년 전입니다. 운동할 당시에 환경은 어땠습니까.

제가 처음 운동 시작했을 땐 대한보디빌딩협회가 없었습니다. ‘보디빌딩’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육체미’라는 용어를 사용했어요. 식단이나 운동 정보를 알아볼 곳이 없어 주먹구구식으로 닥치는 대로 했습니다.

체계적으로 운동을 배울 곳이 있었나요.

아버님이 처음 6개월 정도 알려주셨어요. 그러다 우연히 머슬앤피트니스라는 잡지를 봤는데 거기서 제대로 된 운동 정보를 처음 접했습니다. 그 책을 통해 ‘분할법’을 배웠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운동을 정확히 하게 된 전환점이 됐습니다.

운동 시작한 지 얼마안 돼 우승하면서 촉망받는 선수가 되셨는데요.

1985년에 운동을 시작했는데 다음 해 미스터 코리아 학생부에서 우승했습니다. 우리 가족 누구도, 심지어 나도 내가 빨리 두각을 나타낼지 몰랐죠(웃음)

(당연한 얘기겠지만) 정말 운동 열심히 하셨나 봅니다(웃음)

많은 이가 몸을 만들려면 식단 관리가 중요하다고 믿어요. 하지만 그것 보다 본인 몸을 잘 알고 끊임없이 더 나은 ‘운동법’을 찾는 게 더 중요합니다. 특별한 음식을 먹고 특별한 운동을 해야 특별한 몸이 되는 게 아니에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꾸준하게 ‘실천’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많은 대회에서 우승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 있나요.

(고민 없이) 1997년도 체코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입니다. 보디빌딩은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 종목이 아니라 대한체육회에서 인정해주는 대회가 바로 세계선수권이었어요. 유럽에서 당시 만 28세에 78kg 체급에서 우승했는데 당시 최연소 나이였습니다. 유럽인을 상대로 신체적인 한계를 이겨내고 우승했을 땐 ‘이제 세계무대에서 뛰고 싶다’라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인생에 장애물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15년 공백동안 보디빌딩에 대한 열정이 더 깊어졌죠’

15년 공백기에 김준호는 '기회는 조건을 갖춘 자에게 찾아온다'라고 믿었다(사진= 엠스플뉴스 강윤기 기자)
15년 공백기에 김준호는 '기회는 조건을 갖춘 자에게 찾아온다'라고 믿었다(사진= 엠스플뉴스 강윤기 기자)

그 일이라면, 15년 동안 대회에 나가지 못했던 시간을 말하는 건가요.

네. 1999년에 대한보디빌딩협회에서 나왔습니다. 제명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고 더 큰 무대에서 ‘나만의 것’을 만들고 싶었어요. 하지만 협회를 나오면서 15년 동안 단 하나의 무대도 밟지 못했습니다.

선수가 나갈 무대가 없다는 게 상상이 안 가는데요, 그때 심정이 어땠나요.

(잠시 침묵했다가) 선수로서 출전할 수 있는 대회가 없다면 대부분 선수 생활을 포기할 거예요. 전 근데 포기하기 싫더라고요. ‘조건을 갖춘 자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조건을 갖추지 않는다면 기회를 얻을 수 없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15년을 악착같이 몸을 가꾸면서 제 갈 길 갔죠.

정말 힘든 시간이었을 것 같은데요.

사실 협회를 나올 때 두려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세상에 날 믿어주는 이가 한 명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게 지금의 아내예요. 아내 덕분에 그 힘든 시기를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항상 헌신하는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요.

공백기에 몸을 어떻게 유지했나요.

머슬 아카데미 제자들 덕분입니다. 목표가 없으니 나태해질 수 있었지만, 내 이름을 보고 내게 수업 듣는 제자를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죠. 2015년 미스터 올림피아에 나갈 때 옆을 5년 동안 지켜온 제자가 보낸 문자에 감동한 적 있습니다. ‘단 하루도 선생님이 운동을 게을리하는 걸 본 적 없다. 꼭 좋은 성적 있을 거다’ 라는 짧은 문자였는데 큰 울림이었어요. 제자를 봐서라도 버텨야겠다고 생각했죠.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결국, 좋은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2013년 영국 리버풀에서 열린 NABBA 대회로 복귀했습니다. 복귀하면서 ‘내 몸이 아직 죽지 않았구나’ 싶었어요. 보디빌딩, 나아가서 피트니스의 시장을 더 넓히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게 됐습니다. '내가 제일 잘할 방법이 뭐가 있을까' 하다가 제 이름을 건 대회를 만들게 됐습니다.

‘대한민국 피트니스 저변확대에 기여하고싶습니다’

2017 김준호 클래식. 피트니스 저변 확대에 기여하고 싶은 꿈을 펼쳤다(사진= 김준호)
2017 김준호 클래식. 피트니스 저변 확대에 기여하고 싶은 꿈을 펼쳤다(사진= 김준호)

어떤 계기로 우리나라 최초로 선수 이름을 건 대회를 만들었나요.

IFBB에서 주는 ‘프로 보디빌더’ 자격을 받고 꿈이 생겼습니다. 다른 이해관계가 얽힌 게 아닌 '선수가 선수를 위한 대회를 만들자'는 게 첫 번째 슬로건이었죠. 2016 김준호 클래식을 작년에 처음 개최하면서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아널드 클래식’처럼 세계적으로 만들고 싶은 게 꿈입니다.

‘김준호 클래식’을 통해 어떤 가치를 만들고 싶은가요.

피트니스 업계의 저변확대에 일조하고 싶어요. 대한민국 국가대표로서 하나의 이정표를 만들고 싶습니다. 뭐든 개척자는 힘든 법이지 않습니까(웃음) 후배 보디빌더가 ‘보디빌딩, 정말 할만하다’라고 느끼게 해주고 싶습니다. ‘이 멋진 운동 계속하자’라고 느끼면 더할 나위 없이 뿌듯할 것 같네요.

보디빌딩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것 같습니다. 김준호에게 보디빌딩이랑 어떤 의미인가요.

일반 사람은 시선을 끌고 노출을 위한 운동으로 생각할 것 같네요(웃음) 하지만 저에게 보디빌딩은 인생입니다. 제 ‘전부’죠. 전 사실 보디빌딩만 하면서 살고 싶어요. 주변에서 저를 애처가라고 하는데 전 ‘보디빌딩만큼 아내를 사랑합니다’ 그게 가장 행복한 결론 아닐까요(웃음)

요즘 대중이 몸매 가꾸기에 열을 올립니다. 피트니스 산업이 예전보다 성장했다고 느끼나요.

이 업계에 있으면 피부로 체감할 수 있어요. 보디빌딩과 피트니스는 범주의 차이일 뿐 그 맥락은 일맥상통합니다. 다양한 대회가 생기고 그로 인해 좋은 선수가 발굴되죠. 예전보다 종목이 다양하고 세분됐습니다. 대회의 이런 노력이 피트니스 업계에 영향을 미치죠. 전 다양한 많은 대회가 피트니스 시장을 확장하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피트니스를 하고 싶은 이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

운동은 자신과 싸움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자신을 시험해볼 기회가 많지 않아요. 몸을 만드는 시험을 성공한다면, 그 몸으로 인해 생기는 자신감은 엄청날 겁니다.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론이라고 생각해요. 이 글을 읽고 있는 많은 이가 꼭 노력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손보련 기자 blossom4sbr@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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