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스플뉴스]
# “전명규 교수님이나 제가 가해자가 아니고, 오용석 선생님이 가해자인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강원도청 소속 스피드 스케이터 이진영의 주장은 그랬다.
이진영은 2013년 12월 이탈리아 트렌티노에서 열린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 한국 대표팀 선수로 출전했다. 이진영은 이 대회에서 5,000m 3위, 10,000m 2위의 좋은 성적을 냈다. 대회 마지막 경기인 단체팀 추월에 출전해 금메달을 딴다면 금, 은, 동을 모두 목에 걸 수 있었다. 하지만, 팀 추월 주전 선수 3명 외 후보 선수로 뽑힌 건 이진영이 아닌 다른 선수였다.
이진영은 대회가 끝나고, 대한빙상경기연맹에 낸 진정서에서 ‘(대표팀 오용석 감독이) 저의 컨디션이나 몸 상태에 대해 어떤 점검이나 의견을 묻지 않았다’며 ‘저는 000 선수보다 경기력이 우위에 있고, 대회에서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제가 포함될 것으로 기대했다’고 밝혔다.
기대가 무너지자 이진영은 한국체대 출신의 대표팀 최00 코치를 통해 오 감독에게 항의했다. 항의를 접한 오 감독은 이진영과 000 선수를 제외한 채 주전 선수 3명으로만 팀 추월 경기를 치렀다. 결과는 금메달.
이진영은 진정서에서 ‘4명까지 한 팀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팀은 1명이 입상 기회를 놓치는 결과를 초래했다’며 ‘부디 저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 이진영으로선 충분히 억울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진영은 진정서에서 ‘너무 많은 고민’과 ‘너무 많은 방황’ 등을 언급하며 팀 추월 제외로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털어놨다. 하지만, ‘내가 억울한 것’과 ‘그 억울함을 푸는 방식이 공정하지 않은 것’은 별개의 문제일지 모른다.
엠스플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이진영은 “트렌티노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단체팀 추월에서 제외돼 어머니한테 전화해 ‘너무 억울하다’고 했다. 어머니와 이야기하다가 제가 한국체대 학생이고, 전명규 교수님이 스승이라, 전 교수님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도와달라’고 했다”며 “전 교수님이 먼저 (진정서 작성을) 권유한 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소속대학 교수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담당 교수와 상의하는 건 더 자연스럽다. 하지만, 당시 전명규 교수는 이진영의 대학 스승임과 동시에 빙상연맹 부회장이었다.
이진영이 진정서를 냈던 2014년 빙상연맹 정관에 보면 부회장은 ‘회장의 직무 수행이 곤란할 때 그 직무를 대행’하는 실질적인 연맹의 2인자다. 빙상연맹 이사회나 상벌위원회에 부회장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진영은 자신의 스승에게 억울함을 호소할 때 스승이 빙상연맹 부회장이라는 사실도 상기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진영은 “전 교수님이 빙상연맹 부회장인 걸 몰랐다”고 했다. 당시 빙상계에서 막강한 힘을 휘두르던 전 교수가 빙상연맹 부회장인 걸 몰랐다는 건 납득하기 힘든 주장이다.
설령 이진영이 몰랐다고 치자. 그렇다면 전 교수라도 자신의 위치를 알았어야 했다. 제자가 억울함을 호소하고, 그 억울함이 타당하다고 해도 전 교수는 자신의 위치가 ‘빙상연맹 부회장’이었음을 잊어선 안 됐다.
하지만, 어땠는가. 이진영의 진정서를 작성한 건 이진영이 아니라 전 교수의 조교였다. 그것도 전 교수의 지시에 의해서였다. 엠스플뉴스가 입수한 2013년 12월 27일 이메일에 보면 전 교수의 조교는 서울여대 체육학과 J 교수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선수가 글쓰기가 부족하여 제가 상황을 조합해 글을 작성하였다’고 밝혔다.
특히나 ‘지금 진행하는 상황은 저와 당사자인 선수 본인, 전명규 교수님 이렇게 세 명이서만 알고 준비하고 있습니다…서로가 조심해야 하는 상황입니다‘라는 표현으로 진정서 작성에 전 교수가 개입돼 있음을 명확히 했다.
자,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왜 선수, 조교, 전 교수만 알고 준비했던 것일까. 왜 서로가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었을까. 이유는 간명하다. 전 교수가 한국체대 교수 이전에 빙상연맹 부회장이었기 때문이다. 자기 제자의 억울함을 풀어줘야 하는 ‘한국체대 교수’보다 빙상계 전체의 시각으로 모든 문제를 다뤄야 하는 ‘부회장’ 임무가 더 우선한다는 걸 알았던 까닭이다.
진정서 작성에 참여했던 전 교수의 조교 출신 인사는 “혹여 이 문제에 깊숙이 관여했다가 ‘직권 남용’이란 소릴 들을 수도 있어 전 교수는 처음부터 ‘이진영 진정서’를 은밀히 작성하도록 지시했다”고 밝혔다.
# 이진영은 엠스플뉴스에 “어느 조교가 진정서를 작성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전명규 교수와 관련해서도 “전 교수님이 먼저 (진정서 작성을) 권유한 게 아니”라는 말로 진정서와 전 교수의 관계가 밀접하지 않을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하지만, 아니다. 엠스플뉴스가 추가로 입수한 ‘이진영 이의제기서’엔 전 교수가 친필로 여기저기 문구를 손 본 흔적이 남아 있다. 전 교수가 '이진영 진정 과정'을 주도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여기까지도 ‘제자를 염려하는 스승의 안타까움이 부회장이란 공적 직함의 무거움보다 우선할 수도 있지 않으냐’는 온정적 시선이 존재할 수 있다. 백번 양보해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다른 대학 체육학과 교수가 이진영의 진정서 작성에 참여하고, 이 교수가 이진영이 ‘처벌해달라’고 요구한 지도자의 징계를 결정하는 빙상연맹 상벌위원이었다면, 과연 이때도 온정적 시각이 존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이진영의 진정서 초안을 작성한 전 교수의 조교는 전 교수의 지시로 ‘글을 잘 쓰는’ 서울여대 체육학과 J 교수에게 초안을 보냈다. J 교수는 진정서를 수정, 검토한 뒤 다시 전 교수의 조교에게 ‘완성된 진정서’를 보냈다. J 교수의 손을 거친 진정서는 더 정교화됐다는 후문이다.
이 진정서를 이진영은 빙상연맹 우편함에 꽂았고, 빙상연맹은 진정서를 바탕으로 오용석 감독 상벌위원회를 열었다. 오 감독은 “시나리오대로 척척 진행되는 인상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상벌위에서 오 감독은 “이진영이 팀 추월 전날 10,000m에 출전해 피로가 누적됐으리라 판단해 서00 선수를 선발한 것”이라며 “팀 추월 선발 선수 3명을 제외한 후보 선수 선정은 감독이 결정권이 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팀 추월 선발 선수 3명이 모두 한국체대 소속였는데 단국대 선수 한 명을 후보로 뽑았다고 그게 어떻게 편파 선발이 될 수 있느냐'는 항변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벌위는 오 감독에게 자격정지 6개월의 중징계를 내렸다.
오 감독이 변호사를 구해 대한체육회에 항소해 징계는 ‘경고’로 그쳤지만, 오 감독은 “생각하기도 싫은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털어놨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게 서울여대 체육학과 J 교수다. J 교수가 전 교수와 절친해 전 교수 제자의 진정서를 검토해줬다면 그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J 교수는 전 교수의 지인 이전에 당시 빙상연맹 상벌위원이었다. 엠스플뉴스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오 감독에게 ‘자격정지 6개월’의 중징계를 내렸던 상벌위원회엔 J 교수도 포함돼 있었다.
‘누군가를 처벌할 목적’으로 비밀리에 작성된 진정서를 검토해준 교수가 ‘그 누군가를 처벌할 목적’으로 구성된 상벌위원회의 위원이었다는 것. 한마디로 수능 출제자가 출제 준비하면서 족집게 과외를 하고, 변호사가 판사까지 겸한 꼴이다. 체육의 기본이념인 ‘페어플레이’를 체육학과 교수가 짓밟은 셈이다.
이진영은 “서울여대 J 교수가 진정서를 검토해주고, 수정해준 사실이 있느냐”는 질문에 “기억이 난다”면서도 “하지만, 그분이 상벌위원인지는 몰랐다”고 주장했다.
# 이진영은 억울했을 것이다. 그는 지금도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오 감독의 선수 기용 행위에 대해선 이진영의 억울함이 유효할지 모른다. 하지만, 억울함을 푸는 과정만 본다면 이진영은 억울할 게 없다. 아니 그 반대다.
이진영은 ‘몰랐다’고 주장하지만, 진정서를 낼 당시 전명규 교수는 빙상연맹 부회장이었고, 또 ‘몰랐다’고 강변하지만, 진정서를 수정, 검토해준 서울여대 J 교수는 빙상연맹 상벌위원이었다. 이진영이 알았건 몰랐건 그의 뒤엔 오 감독을 징계로 이끌 막강한 힘을 가진 두 이가 버티고 있었다.
‘내 억울함, 내 제자의 억울함, 내 지인 제자의 억울함을 풀겠다’고 공정하지 않은 방법으로 다른 사람을 억울한 처지에 빠트린다면 그건 더는 진정이나 민원이 아니라 모함으로 비칠 수도 있는 일이다.
이진영은 2014년 3월 6일 문화체육관광부 스포츠공정위원회에 보낸 ‘피민원인 답변에 대한 의견서’에서 이렇게 썼다.
‘대한민국 대표팀의 성적보다는 본인이 소속(단국대학교)된 선수(000)의 입상실적에만 눈이 어두워 공정한 선수 선발에 대한 지도자의 책무를 소홀히 하였다고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모든 의혹에 대해 명확하고 철저한 진상규명이 조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또한 진상규명을 위한 피민원인이 잘못이 있다면 엄격한 처벌을 요구합니다. 다시는 저와 같은 피해자가 없었으면 합니다.’
많은 빙상인이 지금 요구하는 게 이것이다. 빙상연맹은 부회장과 상벌위원이 개입된 ‘이진영 진정서’를 재조사해야 한다. 이를 통해 당시 상벌위원과 부회장이 공정한 상벌에 대한 책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는지, 불필요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는지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이진영 진정서’와 관련한 모든 의혹에 대해 명확하고 철저한 진상규명을 통해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 그것이 불공정한 과정을 통해 피해를 보는 이들을 막는 방지책이자 혹여 있었을지 모를 ‘진짜 억울한 징계자’나 '진짜 처벌받아야 하나 슬며시 빠져나간 자들'이 누군지 찾아내는 길이기 때문이다.
서울여대 J 교수는 2016년 빙상연맹이 스포츠공정위원회를 만들었을 때도 공정위원으로 참가한 사실이 밝혀졌다. J 교수가 상벌위원, 공정위원으로 있었을 당시의 모든 징계를 전수조사해야 하는 이유다.
엠스플뉴스는 최근 빙상연맹 상벌에 관여한 이가 '교수 임용과 관련해 도움을 준 대가'로 고가의 명품을 받았다는 제보를 입수한 터다. 이와 관련해 계속 취재를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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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섭, 박동희 기자 dhp1225@mbcplu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