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하승진, “손에 든 커피잔 보면서 ‘은퇴했구나’란 걸 느끼죠”

-한국인 최초이자 유일한 NBA 출신 “‘폭풍 2도움으로 알려진 경기가 내겐 잊지 못할 순간”

-“강압적인 훈련 분위기 변화 없인 한국 농구 발전은 없다”

-“선수 시절 승부에만 집착했던 게 유일한 후회로 남아있어”

전 전주 KCC 이지스 내국인 센터 하승진(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전 전주 KCC 이지스 내국인 센터 하승진(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광교]

각본 없는 드라마는 우승이란 결과물이 없어도 쓸 수 있습니다. 그걸 은퇴하고 나서 깨달은 게 가장 아쉬워요.

전주 KCC 이지스 전(前) 센터 하승진의 말이다.

하승진은 한국에서 태어난 농구선수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걸 경험했다. 2004년 미국프로농구(NBA) 신인선수 드래프트 46순위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 지명돼 2시즌을 뛰었다. 이후엔 밀워키 벅스로 트레이드돼 미국 도전을 이어갔다. 한국인 최초이자 유일하게 NBA 코트를 누빈 선수가 바로 하승진이다.

한국프로농구(KBL)에선 서장훈, 김주성에 이은 최고의 센터로 이름을 날렸다. 2008년 KBL 신인선수 드래프트 1순위로 KCC 유니폼을 입은 하승진은 첫 시즌부터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이끌었다. 2010-2011시즌엔 챔피언 결정전 MVP도 수상했다.

하승진은 KBL 통산 347경기에서 뛰며 평균 11.6득점, 8.6리바운드를 기록하는 등 한국인 역대 최장신 센터(221cm)에 걸맞은 활약을 9시즌 간 이어왔다.

그랬던 하승진이 5월 14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은퇴를 선언했다. FA(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취득한 하승진에게 소속팀 KCC가 재계약 의지를 보이지 않은 까닭이다. 선수 생활 막판 여러 팀을 돌아다니는 것보단 KCC 프랜차이즈 스타로 남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도 은퇴 결정에 힘을 실었다.

누구보다 찬란한 선수 생활을 보낸 하승진이 지난 나날을 돌아보며 후회되는 게 한 가지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별 과정이 매끄럽진 않았지만 9시즌을 함께한 KCC는 여전히 가족 같은 존재다. 전주 팬들이 보내준 사랑은 농구 선수 하승진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자산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승진의 마음에 아쉬움을 남긴 것일까. 엠스플뉴스가 하승진을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아직은 선수가 익숙한 하승진 “손에 든 커피잔을 보면서 ‘은퇴했구나’란 걸 느끼죠”

하승진(사진=KBL)
하승진(사진=KBL)

은퇴를 선언한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요(웃음). 은퇴하고 특별히 하는 건 없는데 더 바쁘게 지내는 거 같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선수 생활하면서 자주 만나지 못한 지인들도 보면서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이 웃고 떠들면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요.

일생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농구와 함께했습니다.

은퇴했다는 게 실감이 납니다. 농구를 정식으로 시작한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규칙적인 생활에 익숙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 나가고, 오후에 훈련하기 위해서 낮잠 자는 생활을 반복했죠. 지금도 아침에 일어나면 운동 준비하고 나가야 할 거 같아요(웃음). 하지만, 이젠 농구선수가 아니니까 늦잠을 즐기기도 합니다. 제가 또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어요.

선수 시절엔 커피를 안 마셨나요?

운동할 땐 커피를 멀리했습니다. 커피를 마시면 숙면에 방해가 되거든요. 몸 컨디션과 경기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까닭에 커피를 안 마셨죠. 지금은 자주 마셔요. 커피숍에서 아내와 함께 여유 있는 시간을 즐기기도 합니다(웃음). 손에 든 커피잔을 보면서 ‘내가 은퇴를 하긴 했구나’라는 걸 다시 한 번 느끼죠.

은퇴를 믿지 못하는 팬이 많습니다.

은퇴를 결심하는 데 고민이 많았습니다. 전주 KCC 이지스란 좋은 팀을 만나 행복한 선수 생활을 했어요. 특히나 전주 팬들을 두고 떠난다는 게 쉽지 않았죠. 제가 잘할 때나 못할 때나 응원을 아끼지 않으신 분들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긴 어려웠을 겁니다.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해요.

어떤 생각이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게 인생 아닌가요? 선수 은퇴를 선언하긴 했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선수 복귀를 할 수도 있는 거죠. 확실한 건 은퇴 과정에서 아쉬운 점이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선수 생활에 대한 미련은 없습니다. 지금 전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거든요.

하승진을 그리워하는 팬들이 서운할 수 있을 듯합니다.

농구를 사랑하는 제 마음과 열정은 여전합니다. 농구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함께한 동반자예요. 팬들이 주신 사랑도 평생 잊지 못하죠.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정식으로 농구를 시작한 겁니까.

그땐 교내 특별활동(CA) 농구반에서 친구들과 재밌게 즐겼죠. 1주일에 두 번씩 했는데 재밌었습니다(웃음). 아버지(하동기)께서 농구선수 출신이고, 누나(하은주)도 농구부 생활을 하다 보니까 친숙한 점도 있었어요. 어릴 때 농구대잔치를 좋아하기도 했고, 마지막 승부란 드라마를 보면서 농구에 더 깊이 빠져들었죠. 그러다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정식으로 농구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친구들과 즐기던 농구와 정식으로 농구부에 들어가서 시작한 농구는 어떻게 달랐습니까.

정식으로 시작한 농구는 친구들과 공을 튀기면서 노는 것과 차원이 다르게 힘들었습니다. 운동도 힘들지만, 농구부 분위기에 적응하기 어려웠어요. 제가 운동할 때만 해도 운동부는 무겁고 강압적인 느낌이 강했죠. 선·후배 관계도 엄격했습니다. 농구를 즐기기보다 ‘잘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면서 운동했죠.

어릴 적부터 키가 남달리 컸습니다.

제가 5.6kg의 우량아로 세상 밖에 나왔습니다. 부모님께선 ‘(하)승진이는 태어날 때부터 백일 지난 아기만 했다’고 해요. 뚱뚱해서 5.6kg이 아니라 그때부터 키가 큰 거였죠. 처음 한 달간은 다리가 안 펴졌데요. 안에서 너무 웅크리고 있었으니까. 돌이 지났을 땐 20kg이 넘었다고 합니다(웃음). 이런 에피소드도 있어요.

어떤 에피소드죠?

아버지 친구가 한여름에 수박을 사 들고 놀러 오셨데요. 그런데 돌 지난 아기가 수박이 장난감인 줄 알고 걸어 다니면서 가지고 놀았다는 겁니다(웃음).

어릴 적부터 신체조건이 우수한 까닭에 정식으로 농구를 시작한 이후 크게 두각을 나타냈을 거 같습니다.

그건 아니었습니다. 전 농구를 중학교 때부터 시작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기본기를 갈고닦아온 선수들과 비교해서 기본기가 떨어졌죠. 신체적인 장점은 분명 있었지만, 중학교 때까진 평범했던 거 같아요. 중학교 2학년 때 대퇴부가 골절되면서 2년을 쉬기도 했습니다. 훈련에 참여하지 못하고 쭉 쉬었죠.

농구계의 주목을 받은 건 고등학교 때부터인가요.

고등학교 1학년 때 키가 215cm였습니다. 기본기가 갖춰지면서 조금씩 두각을 나타냈죠. 2학년 때부턴 막연히 ‘미국 프로농구(NBA)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요. 물론 당시만 해도 그게 현실이 될 거란 상상은 하지 못했죠.

한국인 최초 NBA 선수 하승진 “‘폭풍 2도움’으로 알려진 경기는 자부심으로 남아있어”

하승진(사진 왼쪽)이 마이클 조던 이후 NBA 최고의 선수로 꼽혔던 코비 브라이언트(오른쪽)를 막고 있는 장면(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하승진(사진 왼쪽)이 마이클 조던 이후 NBA 최고의 선수로 꼽혔던 코비 브라이언트(오른쪽)를 막고 있는 장면(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고교 졸업 후에 막연히 생각했던 NBA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고교 졸업반 때 SFX란 에이전트 회사 직원들이 한국을 방문했어요. 그 회사에 소속된 선수로는 코비 브라이언트, 마이클 조던, 한국 프로야구 선수 이승엽 등이 있었죠. 두 분이 삼일상고 체육관으로 오셔서 제 기량을 테스트하는데 그날 컨디션이 아주 좋았습니다. 농구가 생각한 대로 풀리는 날이었죠. 바로 계약을 하고 고교 졸업을 앞두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됐습니다.

미국에서 NBA 도전을 위한 준비에 착수한 건가요.

6개월 동안 NBA 드래프트 준비를 했습니다.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어요. 팀에 소속된 게 아닌 개인 훈련만을 진행하다 보니까 어려운 적도 많았죠. 개인 기술이나 웨이트 트레이닝 위주로 훈련을 많이 했습니다. 조금 무리를 하다 보니까 드래프트를 앞두고 다리에 피로 골절이 와서 아쉬움도 있었어요. 솔직히 드래프트 전날엔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개인적으론 아쉬움이 남았지만 결과적으론 2004년 NBA 드래프트 2라운드 46순위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 지명됐습니다.

제 이름이 불렀을 땐 온몸에 소름이 돋더라고요. 전율이 느껴졌죠. 내가 NBA 선수가 됐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었습니다(웃음). 하지만, 기쁨은 잠시였죠. NBA는 예상보다 훨씬 더 힘든 무대였어요.

어떤 점에서 ‘힘들다’는 걸 많이 느꼈습니까.

제가 대학이나 프로 생활을 마치고서 NBA에 간 게 아니었습니다. 고교 졸업 전에 미국으로 건너가 준비를 한 뒤 NBA 선수가 됐죠. 고교 졸업생이 세계 최고의 선수가 모인다는 NBA로 갔으니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동료들은 제가 어린 걸 알고 잘 적응할 수 있게 많이 도와줬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승진은 한국인 최초이자 유일한 NBA 선수입니다.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지만 ‘NBA 코트를 밟았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특히나 많은 분이 ‘폭풍 2도움’이란 단어로 기억하는 프로 데뷔 두 번째 경기를 잊을 수 없어요. 뉴욕 닉스와의 경기였는데 승패는 결정된 상황이었어요. 1분 45초를 뛰었는데 정신이 없었죠. 그런 상황에서 2개의 도움을 올렸다는 게 좋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폭풍 2어시스트’라며 놀리시지만, 저한텐 잊지 못할 순간입니다(웃음).

NBA에서 13득점, 5리바운드, 1스틸을 기록한 경기도 있습니다.

신인 때 마지막 경기였습니다. LA 레이커스랑 시합이었는데 팀이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고 어린 선수에게 기회를 줬죠. 그날 제 컨디션이 유독 좋았고, 동료들도 ‘하(HA) 도와주자’고 해서 좋은 패스를 많이 줬어요. 그 경기 역시 제 농구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 가운데 하나죠.

한국인 최초 NBA 선수, KBL의 레전드가 되다

2010-2011시즌 KBL 챔피언 결정전 MVP를 수상한 하승진(사진=KBL)
2010-2011시즌 KBL 챔피언 결정전 MVP를 수상한 하승진(사진=KBL)

2008년 NBA 도전을 마무리하고 KBL 선수가 됐습니다.

운명의 팀을 만난 순간이죠(웃음). KCC에서 데뷔 시즌 우승까지 맛봤습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좋았습니다. 당시 팀을 이끌던 허 재 감독께서 자유로운 농구를 하게끔 해준 덕분에 강병현, 마이카 브랜드 등과 재밌게 경기를 한 거 같아요. 프로 3년 차(2010-2011시즌) 우승했을 때도 마찬가지고요.

KBL 데뷔 시즌부터 챔피언 결정전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등 승승장구했습니다. 하승진이 데뷔 시즌부터 쭉쭉 뻗어 나갈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 있습니까.

2015년 2월까지 KCC를 이끈 허 재 감독입니다. 많은 분이 ‘허 재 감독은 무섭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보기 드물게 선수들의 플레이 스타일을 아주 존중하는 지도자였습니다. 선수에 대한 신뢰도 대단하셨죠. 허 재 감독께서 잘 이끌어주신 덕분에 우승의 기쁨을 두 번이나 맛볼 수 있었던 거 같아요.

2011-2012시즌을 마치고선 잠시 농구 코트를 떠났습니다. 공익근무요원으로 병역을 해결하기 위해서였죠. 공익근무요원 생활을 하면서 체중감량에 엄청 신경 썼던 거로 알고 있습니다.

운동을 많이 했습니다. 농구계에서 ‘공익근무요원 생활을 하고 돌아오면 경기 감각에 문제가 있을 것’이란 예측을 뒤엎고 싶었어요. 솔직히 체중감량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체중감량 후에 하나를 느꼈죠. 나에겐 체중감량이 독이 되는구나. 몸무게가 줄어든다고 해서 제가 빨라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몸싸움에서만 밀리지.

KBL에서 9시즌을 뛰었습니다. 체중감량 이후 느꼈던 감정처럼 아쉬움을 느낀 때가 또 있을까요.

돌이켜보면 모든 경기가 아쉽습니다. 그 상황에서 이런 선택을 했다면 팀이 승리하는 데 더 큰 보탬이 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항상 하죠. 이긴 경기도 마찬가지예요. 이때 이렇게 했다면 더 많은 리바운드를 잡아내고 득점과 도움을 올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남죠. 은퇴해서 더 그런가 봐요(웃음).

일찍이 두각을 나타낸 선수답게 고교 3학년 때(2003년) 한국 농구 대표팀에도 데뷔했습니다.

처음엔 서장훈, 현주엽, 전희철 등 기라성같은 선배가 버티고 있어서 경기에 오래 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2003년 하얼빈 아시아선수권대회가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진 않아요. 배우는 데 정신이 없었죠(웃음). 하지만, 2010년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와 같은 국제대회를 누비면서 농구선수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됐죠. 대표팀은 항상 영광스러운 자리이고, 뽑아주신 것에 대해 감사함을 느낍니다. 다만.

말씀하세요.

지금은 좀 나아지긴 했지만, 제가 대표 선수로 뛸 당시엔 환경이 심각할 정도로 열악했습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지만, 자부심을 느낄 수 없는 환경에서 운동했죠. 전지훈련 가면 장신 선수들이 조그마한 모텔방에서 생활하고, 음식도 변변찮아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 비일비재했죠. 마음속으론 ‘이게 무슨 대표팀이야’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이에요.

대표팀을 향한 지원이 열악하다는 건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돼 온 문제입니다.

다른 아시아 팀만 봐도 지원 수준이 다릅니다. 예를 들면 일본은 트레이너, 매니저 등 지원 스태프만 10명이 넘어요. 우린 각각 1명씩입니다. 1명이 어떻게 12명의 선수를 관리해요.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런데도 성적이 나오길 바란다면 큰 욕심이라고 생각해요. 전 대표 선수에게 걸맞은 최소한의 대우는 해주고 성적을 기대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강압적인 훈련 분위기, 한국 농구 발전을 위해서 꼭 바꿔야 할 문화”

깊은 생각에 잠긴 하승진(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깊은 생각에 잠긴 하승진(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농구계에선 ‘한국 농구가 위기다’란 말을 습관처럼 합니다.

농구 인기가 떨어진 이유는 간단해요. 농구 말고 보고 즐길 수 있는 게 아주 많아졌죠. 극장에선 날마다 재밌는 영화가 넘쳐납니다. 스마트폰 안에선 또 얼마나 재밌는 세상이 펼쳐져요. 유튜브 영상만 봐도 시간 가는 줄 모르죠. 예전 농구대잔치 시절엔 그거 말고 볼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한국인 최초 NBA리거이고 KBL에서도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한국 농구가 변화하기 위해선 어떤 변화가 필요한 겁니까.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면서 경기력 저하가 온다는 게 농구계의 일관된 지적입니다. 어느 정도 동의해요. 경기력이 떨어지니까 관중과 시청률이 동반 하락하는 거죠. 하지만, 얼마 전까지 KBL에 오랜 기간 몸담은 선수로서 한 가지 꼭 얘기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떤 거죠?

선수들이 힘듭니다. 한국은 훈련량이 비상식적으로 많아요. 시즌 중에도 오전, 오후, 야간 하루 세 번은 기본이죠. NBA는 우리보다 일정이 빡빡한데 잔 부상 없이 한 시즌을 잘 소화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NBA는 우리처럼 훈련이 많지 않아요.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하루 딱 한 번 훈련하죠. 나머지 시간은 개인 훈련에 맡깁니다.

과도한 훈련이 경기력 저하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말입니까.

어떤 팀은 시즌 중에 새벽 훈련까지 합니다. 하루 네 번이나 훈련을 하죠. 최고의 몸 상태로 코트에 나서야 하는데 회복이 안 된 상태에서 경기를 뛰어요. 경기력 저하가 올 수밖에 없는 시스템입니다. 선수들의 경기력이 올라가려면 충분한 휴식이 보장돼야 해요. 지금처럼 선수들과의 소통 없이 강압적인 훈련 스케줄로는 장래가 어둡죠.

처음 농구를 시작했을 때 강압적인 훈련 분위기에 적응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프로에서도 마찬가지란 말인가요.

선수들 훈련할 때 표정을 보면 하나같이 어둡습니다. 웃으면 큰일 나요. ‘너 웃어? 지금이 장난하는 시간이야?’란 질책을 듣습니다. 선수들과 코칭스태프의 관계는 철저하게 수직적이죠. 성인이고 프로 선수인데 학생선수처럼 코칭스태프 눈치 보면서 훈련하고 시합에 뛰는 게 현실이에요. 유명한 선수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NBA는 분위기가 다릅니까.

NBA는 훈련 시간이 짧은 대신 그 안에 모든 걸 쏟아냅니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힘들어요. 하지만, 훈련 중 선수들의 얼굴을 보면 한국처럼 어둡지 않습니다. 재밌게 웃으면서 해요. 선수들끼리 떠들기도 하죠. 그렇다고 장난스러운 분위기는 절대 아닙니다. 똑같이 코칭스태프 지시에 따르고 때론 선수들과 소통하면서 함께 성장해 나아가는 분위기죠. 전 왜 이렇게 어두운 얼굴로 훈련해야 하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5월 24일 엠스플뉴스와의 인터뷰를 진행한 전태풍도 상당히 비슷한 얘길 했습니다.

(전)태풍이 형이랑 이런 얘기 많이 합니다. 선수들이 꾸준한 경기력을 보일 수 없는 훈련 스케줄,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선 내국인 선수들의 발전이 이뤄질 수가 없다고. 조금 심한 비유일 수 있지만, 선수들이 죄인은 아니잖아요. 프로농구 선수가 코칭스태프 기분 맞춰주려고 운동하는 거 아닌데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갑니다. 진짜 잘못된 거죠.

문화가 바뀌어야 한국 농구가 발전할 수 있다는 거네요.

선수들이 이런 시스템에서 훈련하고 시합에 나서는 데 경기력 향상을 논한다는 건 난센스죠. KBL이 팬들과의 소통을 강조하고, 마케팅에 신경 써도 한계가 뚜렷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어두운 훈련 분위기부터 바꿔야 선수들 경기력이 올라가요. 솔직히 저도 은퇴했으니까 이런 말 하는 거지, 선수 시절엔 입 밖으로 내뱉기 어려웠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줄게요.

말씀하세요.

KBL에선 기량이 아무리 뛰어난 내국인 선수도 마음대로 플레이할 수가 없습니다. NBA에서 나오는 플레이는커녕 KBL에서 뛰는 외국인 선수처럼 개인기를 선보이면 큰일 나요. 고참 선수 가운데서도 통통 튀는 어린 선수의 개성을 좋게 보지 않는 이가 대다수죠. 보고 배운 게 그거뿐이니까 그런 겁니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선 자기 스타일을 유지하는 게 매우 힘들어요.

실제로 그런 선수들을 많이 봤습니까.

후배 중에 대학 시절 아주 창의적인 선수가 있었습니다. 우리팀과 연습게임을 하는데 농구를 ‘재밌게 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죠. 하지만, 그 친구가 프로에 진출한 뒤론 주눅이 들어서 대학 시절 하던 걸 못해요. 가까운 필리핀 리그라도 진출했으면 지금보다 훨씬 크게 됐을 선수인데 안타깝죠.

얘기를 들어보니 본인도 프로 생활하면서 상처를 많이 받았을 거 같습니다.

전 그나마 다행인 게 남들이 뭐라 하건 주눅이 들지 않았습니다. 막 나가는 기질이 좀 있죠. 상처는 크게 없어요. 다만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 자신을 지켜야만 한다는 게 안타깝죠. 그게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내가 좋아서 하는 농구인데 왜 남들 눈치 보면서 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죠.

아직 제2의 인생을 설계하는 단계지만 지도자가 된다면 문화를 바꾸고 싶은 욕심이 강할 거 같습니다.

태풍이 형이랑 농담 삼아 얘기한 게 있습니다. 태풍이 형, 우리가 혹시라도 지도자가 된다면 진짜 저렇게는 하지 말자고. 성인인 프로선수에게 최대한의 자율과 휴식을 보장할 거예요. 드리블 치다가 볼 빼앗긴다? 괜찮아요. 수비 열심히 해서 다시 공격 기회 잡으면 되니까. 실수가 반복되면 벤치로 불러들여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면 돼요. 그게 성인이고 프로선수를 다루는 방식이 아닐까요.

하지만, 지도자 입장에선 성적을 내지 못하면 미래가 불투명해진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성적이 안 나면 그만두겠습니다. 성적에 집착해서 말도 안 되는 훈련하고, 관중이 좋아하지 않는 농구를 할 바엔 안 할게요. 쿨 하게. 내국인 선수 중에서도 좋은 기량을 가지고 창의적인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선수가 아주 많습니다. 그 선수들이 코트 위에서 제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지도자가 된다면 꼭 그렇게 할 겁니다.

지도자가 된다면 승리보다 과정에 집중할 것으로 생각하면 될까요.

KBL에서 뛰는 모든 선수는 농구를 사랑합니다. 저 역시 코트에 있을 때 가슴이 뛰고 팬들의 함성을 들으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죠. NBA 도전하고, KBL에서 9시즌을 뛴 이유예요. 지도자가 된다면 행복을 가장 우선할 겁니다. 이상적인 얘기일 수 있지만 웃으면서 함께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보고 싶어요.

현재 KBL 감독 가운데서도 하승진이 꿈꾸는 지도자가 없진 않습니다.

마음속으론 그분들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꼭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겉으로 표현은 못 하지만, 그런 훈련 환경을 갖춘 팀을 응원하는 선수가 예상보다 많아요. 그런 팀들이 잘 돼야 문화가 바뀔 수 있으니까.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허 재 감독께서 그런 지도자였기 때문에 제가 두 차례 우승을 거머쥐고 최고의 순간을 맞이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그래야 합니다.

허 재 감독께서 지휘봉을 잡고 있을 땐 훈련부터 즐거웠습니까.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훈련했죠. 전태풍, 강병현처럼 개성 넘치는 선수들과 농구도 재밌게 했고, 생활도 즐거웠습니다. 많은 분이 착각할 수 있는 게 자유를 외친다고 대충한다는 게 아니에요. 팀 훈련할 땐 확실히 하고, 자유 시간엔 개인 운동 착실히 해서 코트 위에서 증명해야죠. 코칭스태프를 위해서가 아니라 농구를 사랑하는 나 자신이 더 큰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요. 그런 게 우리가 프로선수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팬들 위한 기본예의고요.

“각본 없는 드라마는 결과로만 쓰이지 않습니다”

언제가 됐든 ‘감독’ 하승진을 보고 싶은 열망이 커지는 거 같습니다.

평생 해온 게 농구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도전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죠. 지도자가 된다면 선수들에게 숙제를 내주고 싶은 게 있어요. 취미생활 하나씩은 꼭 가져라. 제가 2008년부터 KBL에서 뛰면서 놀란 게 하나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선수들에게 ‘취미가 뭐야’라고 물으면 10명 가운데 9명은 ‘낮잠’이라고 답해요. 진짜 안타까운 일이죠.

농구 선수에게 낮잠은 필수인 거로 알고 있습니다.

훈련이 고되니까요. 어릴 때부터 습관입니다. 학창시절엔 새벽, 오전, 오후, 야간 훈련을 했습니다. 팀 훈련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서라도 낮잠을 자야 해요. 프로에서도 생활에 큰 변화가 없다 보니 선수들의 생활 패턴은 그대로인 거죠. NBA와 달라도 너무 달라요. 저 역시 낮잠을 즐기는 시간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취미를 만들려고 신경 썼어요.

어떤 취미가 있었습니까.

처음엔 음악에 관심이 있어서 기타를 배웠습니다. 건담 플라스틱 모델을 사서 만들어보기도 했고요. 책이나 인터넷에서 좋은 글귀를 찾아 읽는 것도 좋아하고, 쓰는 것도 즐기죠. 취미는 반복되는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고, 능률을 끌어올리는 힘이 있습니다. 낮잠이나 스마트폰 들여다보는 것 외에 진짜 취미가 필요한 이유죠.

후배들에게 또 조언하고 싶은 게 있습니까.

대중은 스포츠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 드라마가 쓰이기 위해선 ‘우승이란 결과물이 필요할까’란 의문이 들어요. 2등과 꼴찌도 충분히 드라마를 쓸 수 있습니다. 선수의 가족과 지인에겐 코트에 나선 1분이란 시간이 감동의 드라마일 수도 있죠. ‘이거다’ 싶은 예가 있어요.

어떤 거죠?

독일 축구영웅 미로슬라프 클로제(은퇴) 얘기입니다. 클로제가 이탈리아 프로축구(세리에 A)에서 뛴 2012년 9월 27일 나폴리와의 경기에서 득점에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대뜸 심판에게 다가가 양심선언을 해요. ‘저 손으로 골 넣었습니다’라고. 주심은 클로제의 득점을 취소하고 악수를 청하죠. 원정 경기였는데 팬들 모두가 기립박수를 보냈습니다.

세계 축구팬이 박수를 보낸 장면이죠.

전 그 장면이 잊히지 않아요. 전 우리 팬들도 승부에 집착하는 경기보다 때론 그런 장면을 보고 싶어 할 거로 확신합니다. 이 장면 하나를 보기 위해 다시 경기장으로 향하는 관중이 있을 거고, 누군가에겐 그 순간이 가슴 속 깊이 남아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무조건 필사적으로 이기려고 하는 게 전부가 아니란 거죠.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게 하승진은 선수 시절 승패보다 과정에 집중했습니까.

솔직하게 말해서 저 역시 승부에 집착한 선수였습니다. 그래서 더 후회돼요. 은퇴하고 순간순간을 돌아보니까 너무 좁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봤습니다. 팬들을 위해 좀 더 멋진 장면을 연출하고, 드라마를 만들어냈다면 지금보다 더 큰 사랑을 받는 선수로 남진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아요.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주려는 이유입니다.

승부에 집착하지 않는 하승진이 더 큰 선수가 됐을 것이란 확신이 있습니까.

프로선수는 하나의 상품입니다. 소비자인 팬들에게 평가받아야 해요. 클로제처럼 양심적인 플레이를 하면 세계인이 손뼉을 쳐주죠. 그렇게 하나둘 팬이 늘어나면 선수 개인의 가치도 덩달아 올라갑니다. 물론 프로선수라면 승리를 위해 나아가야 하고, 우승하면 몸값이 뛰는 게 사실입니다. 다만 그쪽으로 나아가는 방법이 달랐다면, 더 좋은 선수가 되고 많은 추억을 남기지 않았을까 아쉬운 거죠. 후배들은 나와 똑같은 후회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팬들에 받은 사랑, 농구로 보답하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

밝고 긍정적인 성격을 지닌 하승진(사진=KBL)
밝고 긍정적인 성격을 지닌 하승진(사진=KBL)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은퇴를 번복하고 선수로 한국 농구 문화를 바꿔볼 생각은 없습니까(웃음).

선수는 힘이 없습니다(웃음). 은퇴하고 더 큰 세상으로 나왔어요. 그러다 보니까 하고 싶은 게 엄청나게 많습니다. 많은 분이 추천해주시는 방송일도 해보고 싶고, 식당을 차려서 운동해볼까 하는 생각도 하죠. 선수 복귀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어요. 지금까진 한 곳만을 바라보고 폐쇄적인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부턴 더 넓은 세상에서 재밌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선수 생활은 마감했지만, 하승진은 쭉 농구인 아닙니까.

은퇴하면서 새롭게 느낀 게 있습니다. 전 제가 이토록 사랑받는 선수인지 몰랐어요. 선수 시절엔 비난도 많이 받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쉽게 접해서 우리 팬들만 좋아해 주는 선수인 줄 알았죠.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은퇴를 발표한 SNS에 댓글은 물론 전화, 문자, SNS 메시지 등 수천 통이 왔습니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감동이었고,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 꼭 전하고 싶어요.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농구에 대한 열정 못지않게 팬들 사랑도 대단한 거 같습니다.

제가 농구선수로 살아올 수 있게 만들어주신 분들이죠. 팬들이 없었다면 농구선수 하승진은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나 우리 KCC 팬들은 신인 시절부터 쭉 응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분들이죠. 그분들을 위해서라도 제2의 삶 역시 농구계에서 시작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하승진을 사랑하는 팬들에게 할 말을 많을 듯합니다.

저는 정말 복 받은 농구선수였습니다. 유니폼을 벗는 날까지 행복한 농구선수로 만들어주셨어요. 농구계를 떠나더라도 팬들께서 보내주신 사랑은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든 보답할 거고요. 아직 어떤 길로 나아갈지 정해지진 않았지만,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하승진도 관심 있게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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