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16강 주역 김정우, FIFA가 인정한 한국 최고의 선수

-3월부터 지도자 생활 시작한 김정우 “‘선수 때가 좋았다’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소년의 남달랐던 축구 열정 “쉬는 시간 종이 울릴 때마다 공들고 뛰어나갔죠”

-“2010년 WC 16강전, 수아레스 슈팅이 내 발에 스치지 않았다면...”

-“매일같이 온 힘을 다했던 선수 시절, 후회는 없습니다”

인천 대건고등학교 축구부 김정우 감독(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인천 대건고등학교 축구부 김정우 감독(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인천]

꿈을 키워줄 수 있는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제자들이 박지성, 손흥민의 뒤를 잇는 선수가 된다면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16강 진출 때 못잖은 행복을 느낄 거 같아요.

전 한국 축구 대표팀 미드필더 김정우의 말이다.

김정우는 한국 축구의 전설로 불린다. 201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월드컵 16강 진출에 앞장선 까닭이다. 한국이 원정에서 16강에 진출한 건 2010년 대회가 처음이었다. 당시 FIFA(국제축구연맹)는 김정우는 박지성, 박주영과 함께 한국의 핵심 선수라며 데 로시(이탈리아), 마르크 판 보멀(네덜란드)과 함께 대회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김정우는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공식 선수 랭킹인 캐스트롤 인덱스에선 한국 선수 가운데 가장 높은 52위를 기록했다. 주장 박지성(65위), 대회 2골을 기록한 이청용(71위)보다 순위가 높았다.

2003년 K리그 명가 울산 현대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김정우는 두 차례의 올림픽(2004·2008)과 2010년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뛴 경험도 있다.

이렇듯 선수로 익숙한 김정우가 3월부터 제2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2016년 선수 은퇴 후 축구계를 떠났던 김정우는 K리그1 인천 유나이티드 유소년팀인 대건고등학교 축구부 지휘봉을 잡고 한국 축구의 미래를 키우고 있다.

김정우는 선수 땐 나만 잘하면 됐다감독이 쉬운 게 아니라고 말했다. 엠스플뉴스는 A매치 71경기에서 뛰며 6골을 기록한 대건고 김정우 감독을 만나 자세한 얘기를 들어봤다.

지도자로 새 출발 알린 김정우 감독 “‘선수 때가 좋았구나’란 걸 느끼고 있습니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2차전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리오넬 메시(사진 오른쪽)를 막고 있는 김정우(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2차전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리오넬 메시(사진 오른쪽)를 막고 있는 김정우(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김정우,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이후 축구계가 가장 그리워한 이름입니다.

벌써 9년이 지났습니다. 제가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은 김정우가 어떤 선수였는지 몰라요(웃음).

한동안 축구계에서 소식이 뜸했습니다.

2016년 여름 십자인대 부상으로 유니폼을 벗은 뒤 축구계를 떠나 있었죠(웃음). 선수 시절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까닭에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인천 유나이티드 유소년팀인 대건고등학교 축구부에서 연락이 왔어요. 고민 끝 3월부터 지휘봉을 잡고 학생선수들을 가르치고 있죠.

선수 시절 인연을 맺지 못한 인천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고향이 인천입니다(웃음). 축구 선수의 꿈을 이곳에서 키우기 시작했어요. 마음속으론 ‘지도자 생활 시작도 여기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월드컵, 올림픽, 아시아경기대회 등 선수로 뛰며 경험한 것들을 아이들과 공유하면 뜻깊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인천은 축구 유망주의 산실로 불립니다(웃음). 한국 축구의 미래를 책임질 이강인, 이승우, 김정민 등이 인천 출신이에요. 현재 인천에서 뛰고 있는 김진야, 최고의 유망주로 꼽히는 정우영은 대건고 출신이죠.

실제로 학생선수들의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한 거 같습니다. 무언가를 가르쳐주면 스펀지처럼 빨아들이죠. 이해력과 기술이 제 어릴 적과는 차원이 달라요(웃음).

얼마 전까지 선수로 뛰었던 젊은 감독입니다. 감독께서 축구 선수를 꿈꾸던 시절과 많은 게 다를까요.

축구 환경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변했죠. 제 고교 시절만 해도 잔디에서 볼 차는 건 상상도 못 했어요. 흙먼지 휘날리며 맨땅에서 훈련했습니다. 대회에 나가면 인조 잔디를 밟아볼 수 있었죠. 천연 잔디가 아니어도 마냥 좋았던 시절입니다(웃음). 지금 아이들은 훈련을 인조 잔디에서 하죠. 맨땅에서 연습하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대가 왔습니다.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지 4개월이 지났습니다. 선수 시절엔 느끼지 못한 어려움이 있을 거 같아요.

많죠(웃음). 선수 땐 나만 잘하면 됐습니다. 감독, 코치께서 특별한 지시가 없어도 몸 관리 철저히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요. 하지만, 지도자는 남을 잘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팀 전체를 챙겨야 하죠. 지휘봉을 잡은 지 얼마 안 됐지만 ‘선수 때가 좋았구나’라고 느끼곤 합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게 있을까요.

의사소통입니다. 살아온 환경과 시대가 다른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게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어려워요. 지도자가 되면서 이 두 가지만은 꼭 지키자고 다짐한 게 있어요. 하나는 학생선수들이 말을 안 듣는 날이 있어도 절대 강압적인 지도자가 되지 말자는 겁니다.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서로 양보하고 절충안을 찾아가죠.

남은 하나는 무엇입니까.

훈련은 항상 즐거워야 한다는 겁니다. 선수 시절에 크게 느낀 게 있어요. 이 훈련을 왜 하는지 모르고 억지로 하게 되면, 기량 향상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걸 왜 하는지 알고 즐거운 마음으로 훈련해야 성장할 수 있죠. 그렇게 축구에 재미가 붙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개인 훈련에 몰두하는 자신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한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죠?

즐거운 훈련을 강조하다 보면 분위기가 장난식으로 흐를 때가 있습니다. 학생선수들이 하나같이 착하고 기본적인 틀은 지키는 데 가끔 저를 혼란에 빠뜨릴 때가 있죠(웃음).

소년 김정우의 남달랐던 축구 열정 “쉬는 시간 종이 울릴 때마다 공들고 뛰어나갔죠”

지금도 축구가 가장 좋다고 말하는 대건고 김정우 감독(사진 맨 오른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지금도 축구가 가장 좋다고 말하는 대건고 김정우 감독(사진 맨 오른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보내고 지도자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축구인으로서 평생을 살아갈 가능성이 커졌어요(웃음). 인생의 동반자인 축구와의 첫 인연은 언제였습니까.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아요(웃음).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볼 차는 걸 아주 좋아했습니다. 학교는 친구들과 공 차러 가는 곳이었죠. 아침 일찍 등교해서 축구하고, 쉬는 시간마다 공 가지고 나가서 뛰놀았어요. 선생님보다 수업에 늦게 들어와 혼나는 게 일상이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수업을 마치고서도 축구를 했죠.

정식으로 축구를 시작한 건 언제였는지 기억합니까.

축구부가 없는 효성초교에서 매일같이 공을 차는 데 부평초교 코치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어요. 그때가 초교 5학년 때였습니다. 축구가 재미있었기 때문에 고민조차 하지 않았죠. 부모님께선 처음엔 축구부에 들어가는 걸 반대했지만 이겨냈습니다(웃음). 그렇게 부평초교 축구부에서 본격적인 축구 선수의 삶을 살기 시작했죠.

어릴 적부터 남다른 축구 열정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친구들과 걱정 없이 뛰놀던 때와 축구부에서 운동하는 건 많은 게 달랐을 거 같아요.

제 성격이 조용한 편이에요. 감독, 코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거 말없이 잘 따르는 모범생 스타일이죠(웃음). 축구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당시엔 축구가 아주 좋아서 별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던 거 같아요. 축구부에서 하는 축구가 크게 다르다거나 힘들다고 느낀 적은 없었죠.

선수 시절 미드필더 전 지역은 물론이고 스트라이커와 수비수까지 맡을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였습니다. 학창 시절엔 주로 어떤 포지션을 맡았습니까.

스트라이커와 리베로를 오갔습니다. 정식으로 축구를 시작한 때부터 최전방 공격수와 최후방 수비수를 오간 게 다양한 포지션을 오갈 수 있는 자양분이 된 거 같아요(웃음). 그런데 제 학창 시절이 마냥 순탄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고교 입학 때까진 체격이 왜소해서 힘든 점이 많았거든요.

키가 184cm입니다. 왜소함과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고교 진학을 눈앞에 두고 출전한 대회에서 발목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깁스를 한 채로 고교에 진학했죠. 첫 두 달은 아무것도 못 했어요. 하루빨리 실력을 보여주고 싶은데 훈련을 못 하니까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잘 먹고 푹 쉰 덕분인지 키가 10cm나 자란 겁니다. 그리고선 깁스를 풀고 복귀했더니 많은 게 달라졌죠.

어떤 게 달라졌습니까.

키가 크면서 힘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이전까진 슈팅을 시도하면 힘없이 굴러가는 게 많았는데 이젠 쭉쭉 뻗어 나가는 거죠. 장거리 패스도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게 됐고요(웃음). 덩치 큰 선수들과의 경합에서 이기는 날도 늘었죠. 몸싸움이 필수인 축구입니다. 신체조건이 중요하다는 걸 확실히 느꼈죠.

고려대학교에선 일찍부터 한국 축구 대표팀에서 활약한 차두리, 이천수 등과 호흡을 맞췄습니다. 대학 시절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까.

자유가 있는 곳이죠(웃음). 고교 시절까진 감독, 코치께서 많은 걸 도와주세요. 하지만, 대학은 어떤 선택이든 스스로 해야 하고 선택 역시 본인의 몫입니다. 프로 진출을 앞둔 시기이다 보니까 선수들 스스로가 몸 관리를 철저히 했고요. 프로 진출에 앞서 자기관리 법을 많이 배운 거 같습니다.

“프로는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냉정한 곳이었다”

성남 일화 천마(성남 FC의 전신) 시절 김정우(사진 오른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성남 일화 천마(성남 FC의 전신) 시절 김정우(사진 오른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03년 고려대를 중퇴하고 프로에 입문했습니다. K리그 최고 명문 가운데 하나인 울산 현대 유니폼을 입었어요.

어리바리하던 시절이었죠(웃음). 처음 울산에 합류한 날을 잊을 수가 없어요. 팀에 들어갔는데 TV에서만 보던 선수들이 있는 겁니다. 인천 유나이티드 유상철 감독님, 김도균 선배, 후배지만 특출 난 기량을 자랑했던 이 호 등 제 포지션만 봐도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과 훈련한다는 게 꿈같으면서도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란 걱정이 컸죠.

평생 꿈인 프로축구 선수가 됐습니다. 아마추어 시절과 크게 달랐던 게 있을까요.

대학 때까진 부족 점을 채울 시간이 있었어요. 감독, 코치, 선·후배 도움을 받아서 발전을 거듭했죠. 하지만, 프로는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상상 이상으로 냉정한 곳이란 걸 느꼈어요. 지금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출전 기회조차 잡지 못하는 선수가 수두룩하죠. 그렇게 1년이 지나면 수준급 선수들이 새로이 들어옵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소리소문없이 사라질 수 있는 곳이 프로예요.

절실함을 안고 뛴 덕분일까요. 성공적인 프로 첫 시즌을 보냈을 뿐 아니라 2003년 한국 축구 대표팀에도 데뷔했습니다.

시작부터 순탄했던 건 아닙니다. 시즌 개막하고서 한 두 경기를 뛰었는데 경기 템포가 달랐어요. 대학 시절과는 달리 공·수 전환 속도가 아주 빨랐고, 기술과 노련미를 겸비한 선수들이 많았죠. 그렇게 슬럼프가 찾아왔고, 2군으로 내려가게 됐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2군으로 내려간 게 큰 도움이 된 거 같아요.

2군에서 한 단계 올라선 계기가 있었나요.

정확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부산 아이파크 원정 경기였습니다. 그날 제가 수비해야 할 선수가 콜롬비아 출신 하리였어요. 빠른 발과 개인기가 강점인 선수로 재활 과정을 거치고 있었죠. 그 선수를 90분 내내 따라다니면서 많은 걸 깨우쳤습니다.

어떤 걸 깨우쳤습니까.

전 대학 때까지 공격에 치중한 선수였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수비에 대한 중요성을 알지 못했어요. ‘공격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있었죠. 하지만, 하리를 집중적으로 수비하면서 ‘이게 프로에서 살아남을 방법이구나’란 걸 알았습니다. 상대를 압박해 공격 속도를 늦추고, 공을 빼앗아 전방으로 연결하는 등 단점을 개선해야만 한 단계 올라설 수 있다는 걸 느꼈죠. 그렇게 수비력을 개선하면서 1군에서 뛰는 시간이 늘어났고, 큰 어려움 없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1군 무대에서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한국 축구 대표팀에도 데뷔했습니다.

A매치 데뷔전이 꽤 강렬했습니다(웃음). 2003년 10월 19일 ‘2004년 AFC(아시아축구연맹) 아시안컵’ 2차 예선 베트남 원정이었어요. 그때 한국이 0-1로 졌습니다. 지금도 축구계에서 회자되는 ‘베트남 쇼크’였죠.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진출로 축구계 기대가 커진 상황이라서 베트남전 패배는 충격이 컸던 거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결과와 관계없이 A매치 데뷔전은 남달랐을 거 같아요.

처음 울산에 입단했을 때보다 신기한 게 많았죠(웃음). 불과 1년 전 세계 대회 4강을 이뤄낸 선배들과 볼을 차는 게 꿈 같았어요. 데뷔전은 아쉬움이 많았지만, 내가 이 선수들과 같이 호흡한다는 게 아주 좋았습니다. 한편으론 이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더 땀 흘려야겠다고 다짐했죠. 평생 꿈인 붉은 유니폼을 한 번 입고 벗을 순 없었거든요.

A매치에 데뷔한 김정우가 처음 경험한 메이저 대회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었습니다.

(이)천수 형, (조)재진이 형 등 한 살 위 선배들과 재미있게 축구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23세 이하 최고의 선수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빠르게 성장하는 걸 느꼈죠. 그 결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본선 조별리그 2차전 멕시코와의 경기에선 결승골도 넣었습니다. 작은 월드컵으로 생각하는 올림픽 8강 진출에 힘을 더할 수 있어서 감사했고요.

축구계에선 올림픽을 크게 쳐주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FIFA(국제축구연맹) 주관 대회가 아닌 까닭에 유럽에서 뛰는 선수들은 출전이 어렵기도 하고요.

제가 올림픽을 두 번 뛰었습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선 그리스를 만났고, 2008년 베이징 대회에선 이탈리아와 붙었죠. 특히나 이탈리아엔 세바스티안 지오빈코, 주세페 로시 등 당대 최고의 유망주가 포함됐어요. 아시아나 남미와 달리 유럽은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고 하지만, 직접 뛰면서 최고의 23세 이하 선수들이 출전한다는 걸 느꼈죠.

올림픽을 두 차례 뛰었습니다. 이 대회가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FIFA 주관 대회는 아니지만, 올림픽은 월드컵 못지않은 세계인의 축제라고 불립니다. 이런 대회에 출전하는 건 대단한 경험이죠.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말리전(3-3)에선 이런 걸 느꼈어요. 솔직히 잘 모르는 선수들인데 직접 부딪혀보니 보통 실력이 아닌 겁니다. ‘세상은 넓고 축구 인재는 많다’는 걸 크게 느꼈죠. 기회가 된다면 큰 대회는 무조건 뛰는 게 좋습니다.

또 한 번의 성장을 불러온 J리그 진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본선 조별리그 2차전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터뜨린 김정우(사진 왼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본선 조별리그 2차전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터뜨린 김정우(사진 왼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올림픽을 다녀온 뒤 한층 성장한 기량을 뽐내며 울산 현대의 우승(2005시즌)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선 J리그 나고야 그램퍼스로 이적했어요.

축구 선수 김정우를 한 단계 성장시킨 선택이었습니다. 프로 데뷔 후 공격보단 수비에 무게 중심을 뒀어요. 하지만, J리그에선 대학 시절처럼 공격에 힘을 실었죠. 그동안 잊고 있던 공격 본능을 깨우기 시작하니까 축구가 재밌더라고요. K리그에서 배운 수비력에 공격력이 더해지면서 제 가치를 높일 수 있었죠.

멀티 플레이어로 불리는 선수에겐 늘 따라붙는 꼬리표가 있습니다.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지만 특출 난 강점은 찾을 수 없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웃음). 공격과 수비를 오가면서 기본은 했을 수 있지만, 어릴 적부터 한 포지션에서 뛰어온 선수들과 비교하면 부족한 게 보였던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어떤 포지션에서 뛰든 감독께서 원하는 걸 그라운드 위에서 보여주기 위해 온 힘을 다했습니다. 다양한 포지션을 경험하면서 변수에 대응할 수 있는 나만의 강점도 생겼고요(웃음).

국외에서 생활한 건 J리그 진출 때가 처음입니다. 문화적으로도 큰 차이가 있었을 거 같아요.

처음 J리그에 갔을 땐 매우 놀랐던 게 있습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볼게요. 한국에선 프로축구 선수와 국가대표가 받는 대우가 약간 다릅니다. 하지만, 나고야에선 국가대표가 받는 대우를 똑같이 받았죠. 한국에 있을 때보다 높은 대우를 받는다고 느꼈어요.

구체적인 예를 들어줄 수 있을까요.

아주 체계적이었습니다. 한국에선 원정 경기가 있을 때 출발 시간만 알려줬어요. 도착 시간은 선수들이 알아서 예상했죠. 나고야는 출발 시간은 물론이고 도착 시간과 향후 일정까지 빼곡히 짜여 있었습니다. 훈련장엔 항상 팬들이 있었고, 매일같이 함께 호흡한다는 게 새롭게 다가왔죠. 무엇보다 제일 좋았던 건 경기 당일 분위기였습니다.

경기 당일 분위기요?

홈이든 원정이든 관중이 꽉 찬 경기장에서 뛰었어요. 솔직히 관중이 적으면 ‘연습경기를 뛴다’는 착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긴장감이 떨어지는 거죠. 하지만, 함성으로 가득 찬 곳에서 뛰면 내가 가진 능력의 100% 이상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거예요. 항상 그런 분위 속에서 경기를 치렀죠.

이렇게 일본에서 성장을 거듭했지만, 2006년 독일 월드컵 최종명단엔 들지 못했습니다.

선수 시절 가장 아쉬운 순간 중 하나죠. 2006년 독일 월드컵 최종 명단에서 탈락한 뒤 한동안 많이 힘들었습니다. 뛰고 싶은 마음이 아주 컸거든요. 2006년 1, 2월에 홍콩과 미국에서 전지훈련을 했습니다. 전 소속팀에서 차출을 허락해주지 않은 까닭에 미국 전지훈련엔 동행하지 못했어요. 미국 전지훈련까지 함께했다면 내 능력을 보일 시간이 많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죠.

2003년 프로 데뷔 후 거칠 것 없이 내달리던 축구 인생의 첫 시련이었습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최종 명단에서 떨어지고 다짐했습니다. ‘2010년엔 무슨 일이 있어도 월드컵에 나가겠다’고. 이 마음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어요. 지금 생각하면 2006년 독일 월드컵 최종 명단 탈락이 한층 더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된 거 같습니다(웃음).

2007시즌을 마친 뒤 FA(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취득해 성남 일화 천마(성남 FC의 전신)로 이적했습니다.

사실 유럽에 도전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았죠(웃음). 최종적으로 성남 유니폼을 입었는데 후회는 없습니다. 첫 시즌을 치르고 나서 신태용 감독님을 만난 게 큰 도움이 됐거든요. 솔직히 2008시즌을 마치고 또다시 이적을 고민하던 찰나에 신 감독께서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말을 했죠?

신 감독께서 대뜸 ‘너 언제까지 이인자 할 거야?’라고 말했어요. 당시 한국 축구 대표팀을 꾸준히 오갔던 때였기 때문에 속으로 ‘내가 이인자야?’ 했었죠.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현재에 만족하지 말고 더 정진하라는 뜻으로 한 말이란 걸 알게 됐습니다.

신 감독의 속내를 알아차린 계기가 있었습니까.

신 감독께서 제게 주장을 맡겼어요. 프로팀에서 처음 맡는 주장이었죠. 제 성격이 내성적입니다. 하지만, 주장을 맡으면서 말수가 많아지고, 책임감이 생겼죠. 프리킥을 잘 차는 편이 아닌데도 감독께선 ‘네가 차’라며 연습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저보다 잘 차는 선수 많습니다’라고 하면 ‘못 넣어도 괜찮으니까 해봐’라며 신뢰를 보내줬어요. 그렇게 자신감이 불어나기 시작했고, 또 한 번의 큰 성장을 이룰 수 있었죠.

2009년 11월엔 입대(상주 상무)했습니다. 월드컵이 7개월가량 남은 상황에서 입대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거 같아요.

솔직히 프로에 있을 때보단 몸 관리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상주도 군대이다 보니까 신경 써야 할 게 많았거든요(웃음). 그럴 때마다 2006년 월드컵 최종 명단 탈락 이후 다짐을 떠올렸어요. 한국에서 태어난 남자라면 병역은 피할 수 없는 만큼 주어진 상황에서 온 힘을 다하자고 마음을 다잡았죠.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떠올린 김정우 “수아레스 슈팅이 내 발에 스치지 않았다면...”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16강전 우루과이와의 경기에서 루이스 수아레스(사진 오른쪽)에게 태클을 시도 중인 김정우(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16강전 우루과이와의 경기에서 루이스 수아레스(사진 오른쪽)에게 태클을 시도 중인 김정우(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군대에서도 몸 관리를 철저히 한 덕분일까요. 4년 전과 달리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최종 명단엔 포함됐습니다.

최종 명단이 발표되기 전까지 ‘월드컵에 가겠다’는 확신이 없었어요.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의 기억 때문인지 늘 불안했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죽을힘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뛰어다닌 게 좋은 결과로 이어졌던 거 같습니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선 원정 대회 첫 16강 진출이란 대업을 달성했습니다. 한 순간도 잊지 못할 거 같아요.

지금도 생생하죠. 4년 전 다짐을 이루고 나서 생각한 게 있습니다. ‘겸손한 자세 잃지 말고 죽을힘을 다해 뛰자’였죠. 무언가를 보여주겠다는 생각보단 최대한 쉽게 하려고 했습니다. 압박과 수비에 힘쓰면서 공격 전개는 눈에 보이는 대로 빠르게 하려고 했죠. 그렇게 첫 경기 그리스전 승리에 힘을 보태니까 좋더라고요. ‘축구 선수 하길 잘했다’ 싶었죠(웃음).

그보다 더 최고의 순간은 원정 첫 16강 진출을 확정한 본선 조별리그 3차전 나이지리아와의 경기 아닌가요(웃음).

‘하늘을 난다’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했죠.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웃음). 2차전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1-4로 대패했지만 팀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주장인 (박)지성이 형을 중심으로 후회 없이 뛰면 결과는 저절로 따라올 거로 믿었어요. 그렇게 16강 진출을 일궈내는 데 보탬이 될 수 있어 아주 감사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떠나질 않네요.

사람 욕심이란 게 끝이 없어요. 16강 진출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지만, 내심 우루과이를 잡고 8강에 올라갔으면 하는 기대가 컸거든요.

(긴 한숨). 루이스 수아레스만 생각하면 지금도 잠이 깨요. 당시 멀티골을 기록하며 우리의 도전을 막아서는 데 앞장섰죠. 그런데 그 마지막 골이 제 발에 살짝 닿았어요. 발에 맞춰서 공을 내보내려고 했는데 비가 와서인지 뜻대로 되지 않았죠. 그 슈팅이 제 발을 스친 순간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생각이죠?

수아레스가 슈팅한 게 제 발에 맞고 바로 뒤를 돌아봤죠. 궤적을 봤을 때 골대를 맞출 거 같았어요. 이후가 문제였죠. 골대를 때린 공이 안쪽으로 향하느냐 바깥쪽으로 나가느냐. 그런데 그게 골문 상단 구석을 정확히 때리더라고요. 그때 수아레스의 슈팅을 막아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텐데 너무 아쉽습니다.

그래도 한국 축구 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당시 중원 사령관으로서 본 대표팀의 최대 강점은 무엇이었나요.

분위기죠. 특히나 지성이 형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똑같이 느꼈을 거예요. 당시 세계 최고의 구단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인데도 대표팀에 갓 들어온 신인 선수처럼 뛰었습니다. 공·수를 쉴 새 없이 오가고, 해결사 역할까지 했죠. 훈련장에서도 가장 솔선수범하면서 팀을 이끌었어요. 말보단 행동으로 메시지를 전하고, 팀을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힘이 있었죠.

“매일같이 온 힘을 다했던 선수 시절, 후회는 없습니다”

대건고 김정우 감독(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대건고 김정우 감독(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2011시즌엔 스트라이커로 변신해 놀라운 성과를 냈습니다. 상주 상무 유니폼을 입고 총 18골을 넣었어요. 리그(15골)에선 득점 3위에 이름을 올렸죠.

‘할 수 있다’는 믿음과 자신감인 거 같습니다. 초교 시절 이후 처음 맡는 포지션이었지만 재미있게 했어요. 리그 개막전부터 득점포를 가동하며 상승세를 타기도 했죠. 동료들도 득점으로 이어질 수 있는 좋은 패스를 많이 연결해줬고요. 프로 생활하면서 가장 많은 득점을 기록한 시즌인 까닭에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웃음).

전역 후엔 전북 현대를 거쳐 중동에 진출했습니다.

UAE 리그에서 뛰었습니다. 두바이에서 생활했는데 불편한 거 없이 축구에만 매진할 수 있었죠. 그곳엔 여행객들이 아주 많은데 쉬는 날 쇼핑몰에 가보면 ‘여기가 유럽인가’하는 착각이 들 정도예요. 날씨가 예상대로 덥다는 걸 빼면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웃음).

축구 수준은 어떤가요.

처음 UAE 리그에 진출하기 전엔 ‘수준이 높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어요. 하지만, 뛰어보니 아니었습니다. UAE 축구 대표팀 에이스 오마르 압둘라흐만처럼 기술이 뛰어난 선수가 많았어요. 스피드와 결정력을 두루 갖춘 선수도 수두룩했죠. 무엇보다 가나 축구 대표팀 전설 아사모아 기안처럼 수준급 외국인 선수도 많았고요. 중동 진출을 꿈꾸는 후배가 있다면 ‘쉽게 생각해선 안 된다’는 걸 조언하고 싶어요.

선수 김정우를 조금 더 오래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2016년 돌연 유니폼을 벗었습니다.

2016년 2월 태국 BEC 테로 사사나란 팀으로 이적해 유종의 미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큰 부상을 당했어요. 고민 끝에 팀과 계약을 해지하고 유니폼을 벗기로 했죠.

부상이 아니었다면 선수 생활을 연장할 수도 있었습니까.

재활 후 선수 생활을 이어갈까도 고민했지만, 은퇴 결심을 굳혔어요. 평생 해온 축구인데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후회는 없었습니다. 훈련장에서나 실전에서나 매 순간 온 힘을 다했습니다. 한국 축구 선수들의 꿈이란 월드컵 무대는 물론 두 차례의 올림픽과 아시아경기대회도 경험했고요. 이제 제2의 인생을 살기 시작한 만큼 좋은 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몰두할 계획입니다.

제2의 삶을 살기 시작한 김정우 감독이 그리는 지도자는 어떤 모습입니까.

꿈을 키워줄 수 있는 지도자입니다. 지금도 아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걸 볼 때면 미소가 떠나질 않습니다. 언젠가는 이 학생선수들이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걸 보고 싶어요. 내 제자가 박지성, 손흥민의 뒤를 잇는 선수가 된다면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16강 진출 때 못잖은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런 날이 올 수 있도록 선수 시절처럼 후회 없는 하루를 보내야죠(웃음).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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