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 그리피 주니어(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켄 그리피 주니어(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엠스플뉴스]

"1996년 5월 22일(한국시간) 켄 그리피 주니어가 만 26세의 나이로 커리어 200홈런을 달성했다. 그리피보다 빠른 나이에 200홈런 고지를 돌파한 타자는 역사상 7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6명이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더 키드The Kid' 켄 그리피 주니어는 1990년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스타였다. 전성기 시절 공격과 수비에서 모두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그는,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스윙과 겸손한 인품, 환한 미소로 수많은 메이저리그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리피의 야구 재능은 아버지 켄 그리피 시니어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통산 2143안타 타율 .296을 기록한 시니어는 '빅 레드머신(신시내티 레즈의 전성기 무렵 타선을 일컫는 별명)'의 주축으로서 통산 3차례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다. 한편, 시니어는 은퇴 후 타격코치를 지냈을 만큼 타격이론과 코칭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리피의 완벽한 스윙 역시 아버지의 지도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그리피의 성공은 어떤 측면에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능보다는, 어머니 발레리 그리피의 섬세한 보살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피는 1987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1위로 지명될 만큼 재능있는 유망주이자, 아마추어 시절부터 팀 내 분위기 메이커였을 정도로 활발한 성격이었지만, 1988년 자살시도(아스피린 277알을 삼킴)를 했을 만큼 감정 기복이 컸다.

이는 주변으로부터 받는 지나친 기대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그리피를 다잡아준 것은 어머니 발레리의 헌신적인 사랑이었다.

그리피는 우여곡절 끝에 1989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127경기 16홈런 61타점 16도루 타율 .264로 만 19세의 신인치곤 꽤 준수한 성적을 남겼다(AL 올해의 신인 3위). 그리고 1990시즌에는 아버지 시니어가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하면서, 그리피 부자는 한 팀에서 뛰게 됐다. 같은 해 9월 14일에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전무후무한 '한 경기 부자父子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천재 타자

켄 그리피 주니어(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켄 그리피 주니어(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커리어 초기 그리피는 3할이 넘는 타율에 20개 이상의 홈런을 기대할 수 있는 중장거리 타자였다. 하지만 신체적으로 완성된 1993년부터 그리피는 8경기 연속 홈런(역대 공동 1위)을 포함해 45홈런을 쳐내며 리그를 대표하는 홈런 타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해 그리피는 역대 3번째로 어린 나이에 통산 100홈런을 달성했다. 그의 나이 불과 만 23세 때의 일이다.

그리고 파업으로 인해 단축 시즌을 치렀던 1994년에도 40홈런을 기록하며 1993년 성적이 우연이 아님을 입증해냈다. 하지만 1995년 그리피는 다이빙 캐치를 하다 손목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으며 17홈런에 그쳤다. 그의 커리어에 악영향을 미친, 수비 중 부상의 시작이다. 그리피는 1996년에도 전 시즌에 이어 같은 부상을 입었지만, 22경기 결장에 그친 덕분에 49홈런 140타점을 기록했다.

모처럼 부상이 없었던 1997년, 그리피는 타율 .304에 56홈런 147타점을 기록했다. 그리피가 쳐낸 56개의 홈런은 1961년 로저 매리스(61홈런) 이후 아메리칸리그(AL) 최다 기록이었다. 마침내 천재 타자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1996년 역대 8번째로 어린 나이에 200홈런 고지에 올라서다

그리피에게 1996년은 그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었던 지명타자 에드가 마르티네스에 이어, 또 다른 지원군이 가세한 해였다. 1996년 당시 만 20세였던 유격수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마침내 첫 풀타임 시즌을 맞아 타율 .358, 36홈런, 123타점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로드리게스가 2번 타자로 나서게 되면서, 상대 투수들이 그리피를 거르는 일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그리피는 한층 가벼운 마음으로 배트를 휘두를 수 있었다. 5월 22일은 이런 타선의 시너지 효과가 발휘된 전형적인 경기였다. 이날 시애틀의 3인방은 팀 안타 19개 가운데 10개, 타점 13개 가운데 9개를 합작해냈다. 그중 백미는 그리피의 활약이었다. 그리피는 6타수 3안타(1홈런) 2득점 5타점으로 맹타를 휘둘렀는데, 이날 쳐낸 홈런은 통산 200번째 홈런이었다.

당시 그리피의 나이는 만 26세 181일. 이는 역대 8번째로 어린 나이에 200홈런 고지에 올라선 기록이다. 이해 그리피는 49홈런을 추가하며 통산 238홈런으로 시즌을 끝마쳤는데, 만약 1995년에 입었던 손목 골절 부상이 아니었다면 만 26세 기준 역대 홈런 1위(지미 팍스 266개)마저도 노릴 수 있었던 페이스였다. 메이저리그 팬들의 관심이 그리피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스테로이드에 묻힌 청정타자의 활약

켄 그리피 주니어(좌)와 마크 맥과이어(우)(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켄 그리피 주니어(좌)와 마크 맥과이어(우)(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하지만 1997년까지 아메리칸리그(AL)의 그리피에게 집중되던 팬들의 관심은, 1998년이 되자 내셔널리그(NL)로 옮겨갔다. 바로 마크 맥과이어와 새미 소사 간에 벌어진 세기의 홈런 대결 때문이다. 이해 맥과이어와 소사는 각각 70홈런, 66홈런을 쳐내며 매리스의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돌파했다. 후반기엔 한국 스포츠뉴스마저 둘의 홈런 대결을 보도하기 바빴을 정도다.

그리피는 56홈런으로 AL 홈런왕에 올랐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훗날 맥과이어와 소사가 모두 금지약물선수로 밝혀진 것을 생각해보면 씁쓸한 일이다. 그리피는 1999년에도 48홈런을 치며 3년 연속 AL 홈런 1위에 올랐으나, NL에서 각각 65홈런, 63홈런을 기록한 맥과이어-소사 콤비에게 뭍혔다. 그리피가 역대 최연소로 400홈런을 돌파했다는 소식도 마찬가지.

그리고 2000시즌을 앞두곤 그리피마저 내셔널리그로 자리를 옮겼다. 바로 아버지 시니어가 전성기를 보냈던 팀, 신시내티 레즈로 트레이드된 것이다. 그런데 이쯤 해서 한 가지 오해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리피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 중 하나는 시애틀 홈구장이 홈런이 많이 나왔던 킹돔에서 세이프코필드로 바뀌면서 구단에 불만을 품고 팀을 떠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피가 고향팀 신시내티로 가길 원했던 이유는, 가장 친했던 친구인 페인 스튜어트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친구의 죽음으로 그리피는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의 소중함을 새삼 깨닳았다. 그리고 신시내티는 가족과 가까운 거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을 보낸 장소이기에 그리피에게 매우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팀이었다.

그리피는 신시내티 이적과 거의 동시에 9년간 1억 1600만 달러에 장기계약을 맺었고, 팬들은 고향으로 돌아온 그를 열렬히 환대했다.

고양으로의 귀환, 계속되는 부상

켄 그리피 주니어(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켄 그리피 주니어(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그리피는 예전의 그리피가 아니었다. 복귀 첫해 40홈런 118타점을 기록했지만, 타율은 .271에 그쳤다. 손목 부상으로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던 1995시즌에 이어 가장 낮은 타율이었다. 선수생활 내내 시달렸던 잔 부상이 누적된 결과, 그리피의 배트 스피드는 이전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피는 1990년부터 1999년까지 10년 연속 골드글러브를 수상했을 만큼 메이저리그 최고의 중견수 수비를 자랑했다. 몸을 사리지 않는 다이빙 캐치, 펜스를 밟고 도약해 홈런성 타구를 걷어내는 수비는 그의 전매 특허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역동적인 수비에 있었다. 무리해서 몸을 날리는 수비로 인해 그리피의 햄스트링과 발목에는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다.

결국 2001년 그리피는 111경기에서 22홈런을 기록하던 중 햄스트링 파열로 시즌 아웃됐다. 그리고 2005시즌에 부활하기 전까지 그리피는 다양한 종류의 부상과 싸워야 했다(2002년 70경기 출전 무릎 인대+햄스트링 파열, 2003년 53경기 출전 어깨 탈골, 발목 인대 파열, 2004년 83경기 출전 양쪽 햄스트링 완전 파열).

출전 경기가 줄어듬에 따라 그리피의 역대급 홈런 페이스도 사그라졌다. 행크 애런이 자신의 통산 홈런 기록(755홈런)을 깰 수 있는 유일한 선수로 꼽기도 했던 그는 3년간 41홈런을 치는데 그쳤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의 햄스트링이 일반적인 치료 방법으로는 회복되기 어려울 만큼 약해졌다는 것이다.

이에 신시내티 레즈 주치의 티모시 크렘첵은 그리피의 햄스트링을 치료하기 위해 훗날 '주니어 수술'로 명명된 수술법을 고안했다. 그는 그리피의 햄스트링 근육을 세 개의 티타늄 나사로 고정했다. 그리피는 몇 주간 오른쪽 다리를 90도로 유지한 채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이후 그리피는 2005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지 강도 높은 재활 과정을 거치게 된다.

부활, 은퇴

켄 그리피 주니어(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켄 그리피 주니어(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그렇게 시작된 2005시즌 그리피는 부활했다. 그는 이해 35홈런을 쳐내며 전설적인 타자들의 통산 홈런을 넘어섰다. 시즌이 끝났을 때, 그리피의 통산 홈런은 지미 폭스, 테드 윌리엄스, 윌리 맥코비, 어니 뱅키스, 에디 매튜스, 멜 오트 그리고 에디 머레이를 뛰어넘어 양키스의 전설적인 중견수 미키 맨틀과 동률을 이뤘다. 그리피는 이해 올해의 NL 컴백 플레이어 상을 받았다.

그리피는 2006, 2007시즌에도 부상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못했지만, 57홈런을 추가하며 마침내 역대 홈런 9위 프랭크 로빈슨마저 뛰어넘었다. 2008년 6월 11일에는 통산 600홈런을 달성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얼마 못가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됐고, 2008시즌이 끝나고 1600만 달러 옵션을 실행하지 않으면서 그리피는 난생처음으로 FA 신분이 됐다.

이때 은퇴 여부를 묻는 기자에게 그리피는 "저에게는 할 일이 남아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후 2009시즌을 앞두고 그는 친정팀 시애틀과 계약을 맺었다. 사실 애틀랜타와 계약 성사 직전이었지만, 윌리 메이스의 조언과 13세가 된 그의 딸이 말이 그리피의 선택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후문. 한편, 시애틀이 그의 등번호 24번을 아무에게 주지 않은 것도 그리피의 마음을 움직였다.

친정팀으로 복귀한 그리피는 그해 타율 .214, 57타점에 그쳤다. 하지만 팀 부스 기자에 따르면 "당시 그리피는 거의 혼자 힘으로 말다툼이 끊이지 않았던 시애틀의 더그아웃 분위기를 바꿔놓았다"고 한다. 특히 스즈키 이치로와 다른 선수들의 사이를 훌륭히 중재하는 클럽하우스 리더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19개의 홈런포를 추가하며 630홈런으로 역대 홈런 5위에 올라선 건 덤이다.

이듬해 33경기에 출전해 타율 .183, 0홈런, 7타점에 그치고 있던 그리피는 6월 4일 공식 은퇴 선언을 하며 위대한 경력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은퇴 후 5년이 지난 2016년 1월 7일. 그리피는 첫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99,32%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이는 탐 시버의 종전 기록(98.84%)을 넘어선 역대 최다 득표율이다.

그리피가 얼마나 많은 팬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선수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켄 그리피 주니어의 통산 성적

# 올스타 선정 13회 (1990~2000, 2004, 2007)

# AL 홈런 1위 4회 (1994, 1997, 1998, 1999)

# AL 타점 1위 (1997)

# 골드 글러브 10회 (1990~1999)

# 실버 슬러거 7회 (1991, 1993, 1994, 1996~1999)

# 아메리칸리그 MVP 1회 (1997)

# MLB 올스타 MVP 1회 (1992)

# MLB 홈런 더비 우승 3회 (1994, 1998, 1999)

# 올해의 NL 컴백 플레이어 (2005)

# 시애틀 매리너스 영구결번(24번)

# 시애틀 매리너스, 신시내티 레즈 명예의 전당

# 명예의 전당 입성(2016년, 99.32%)

# 통산 2671경기 2781안타 630홈런 1836타점 184도루 .284 .370 .538(타/출/장) fWAR 77.7

이현우 기자 hwl05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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