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우의 MLB+] 루스가 야구를 바꿨다면, 로빈슨은 미국을 바꿨다

재키 로빈슨 데이(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재키 로빈슨 데이(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엠스플뉴스]

 

미국 날짜로 4월 15일은 특별한 날이다. 이날 열리는 메이저리그 경기에선 모든 선수가 등번호 42번을 달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이름하여 '재키 로빈슨 데이'다. 71년 전 오늘, 뉴욕주 브루클린에 위치한 이벳필드에서 일어난 사건이 메이저리그를 넘어 미국 사회를 바꿔놓은 것을 기념하는 행사다. 

 

1947년 4월 15일 열린 보스턴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 출전한 브루클린 다저스의 선수단 가운데는 유독 눈에 띄는 선수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재키 로빈슨. 명문 UCLA 대학을 졸업하고 2차 세계대전에서 장교로 군 복무를 마친 후 전년도 마이너리그 월드시리즈 MVP를 차지하고 막 빅리그 무대를 밟은 신인이었다. 

 

하지만 그가 주목받은 이유는 화려한 경력 때문이 아니었다. 로빈슨은 그날 경기장에 모인 선수 50명 중 유일하게 피부색이 달랐다. 메이저리그 경기에 검은 피부의 선수가 출전한 것은 1884년 시카고 화이트스타킹스의 선수 겸 감독 캡 앤슨이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였던 플릿우드 워커를 쫓아낸 이후 63년 만이었다.

 

캡 앤슨은 메이저리그 초창기의 슈퍼스타였다. 선수로서는 최초로 3000안타를 달성했고 감독으로선 팀을 3연속 지구우승으로 이끈 그가 '검둥이'와 경기를 하느니 팀을 해체하겠다고 하는 데는 상대팀인 톨레이도 블루스타킹스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이후로 메이저리그는 백인만의 무대였다. 흑인 선수들은 제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그들만의 리그에서 뛰어야 했다. 

 

이렇게 흑인 선수들로만 이뤄진 리그를 가리켜 니그로리그라고 한다. 로빈슨 역시 1945년까지 니그로리그의 수많은 흑인 선수 가운데 한 명이었다.

 

흑인 전용 좌석을 거부한 군인과 야구계의 혁명가

 

2차 세계대전 무렵 미육군 소위로 임관한 재키 로빈슨(사진=엠스플뉴스) 2차 세계대전 무렵 미육군 소위로 임관한 재키 로빈슨(사진=엠스플뉴스)

 

잠시 1947년 당시의 시대상을 짚고 넘어가 보자. 남북전쟁 이후 1863년 1월 1일 노예 해방령이 선포되면서 명목상으로 미국 내 흑인들은 해방된 상태였다. 하지만 흑인에 대한 차별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흑인들이 법적으로 완전한 평등을 획득한 것은 1965년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 of 1965)과 1968년 새 민권법(Civil Rights Act of 1968)이 통과된 다음부터다.

 

로빈슨의 데뷔는 그로부터 21년 전이었다. 그가 받았을 차별이 얼마나 심했을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로빈슨이 니그로리그에 몸을 담게 된 계기도 육군 소위 시절 흑인 전용 좌석으로 옮기라는 버스 운전사의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군법회의에 회부된 후 명예제대를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경력을 눈여겨보는 이가 있었다. 바로 조지 시슬러다.

 

시슬러는 통산 타율 .340를 기록한 전설적인 1루수다. 1930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그는 미시간 대학 시절 은사였던 단장 브랜치 리키의 부름을 받아 다저스의 타격 코치 겸 스카우트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시슬러는 리키로부터 "어떤 야유에도 흔들리지 않을 배짱을 가졌으며 백인들이 감히 무시할 수 없는 배경을 가진 흑인 선수"를 발굴해달라고 부탁받은 상태였다.

 

리키는 야구 역사를 다룰 때 빼놓을 수 없는 명단장이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재직하던 시절 현대식 스프링캠프의 틀을 다졌고 배팅 케이지와 피칭 머신, 마이너리그 팜 시스템을 고안했다. 훗날 회고에 따르면 리키는 대학코치 시절 팀 내 최고 선수인 찰스 토마스가 흑인이란 이유로 숙박 거부를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이를 반드시 바로잡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재키 로빈슨과 브랜치 리키(사진=엠스플뉴스) 재키 로빈슨과 브랜치 리키(사진=엠스플뉴스)

 

앞서 소개된 일화가 미화된 얘기인지,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리키가 1942년 다저스 단장으로 부임한 직후 흑인 선수를 영입하려고 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물론 이런 시도는 비슷한 시기 또 다른 혁신가인 빌 비크가 '전설' 사첼 페이지를 영입하려고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미디어의 보도로 인해 비밀이 누설되는 바람에 무산됐다. 그러나 리키는 포기하지 않았다.

 

1944년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던 케네소 랜디스 커미셔너가 사망하자, 그는 다시 한번 흑인 선수를 영입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시슬러의 소개로 로빈슨과 만난 리키는 그에게 "어떤 모욕을 당하더라도 참아낼 사람이 필요하다. 자네가 그걸 해낼 수 있겠나?"고 물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로빈슨은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약속드리죠"라고 대답했다.

 

이로써 마침내 역사가 이뤄졌다. 1946년 로빈슨과 계약을 맺은 리키는 그를 당장 메이저리그에 데뷔시키기보다는 산하 마이너리그팀이었던 몬트리올 로열스로 보내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리키의 기대대로 그곳에서 로빈슨은 팀의 우승을 이끌며, 단 한 시즌 만에 몬트리올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제 남은 것은 다저스 내부의 선수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1947시즌을 앞두고 과반수 이상이 남부 출신이었던 다저스 선수단은 로빈슨을 빅리그로 부르지 말 것을 서면을 통해 요청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대형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다저스 감독 리오 듀로서가 시답지도 않은 이유로 억울한 1년 출전정지 처분을 받은 것이다. 선수단과 팬들의 관심이 듀로서에게 집중된 사이 리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로빈슨을 빅리그로 불러들였다.

 

뛰어난 실력과 인품으로 인종차별의 벽을 허물다

 

재키 로빈슨과 피 위 리즈(사진=위키미디어 커먼스) 재키 로빈슨과 피 위 리즈(사진=위키미디어 커먼스)

 

우여곡절 끝에 로빈슨은 빅리그 무대에 서게 됐다. 그러나 동료들과 팬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로빈슨은 원정경기 때마다 흑인 전용숙소에서 혼자 잠을 자야 했고, 우편함은 협박편지로 가득 찼다. 상대 투수와 수비수, 주자는 위협구와 거친 플레이로 로빈슨을 괴롭혔다. 심판마저도 불리한 판정을 내리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로빈슨은 고개를 숙이고 이를 악물며 참아내야 했다.

 

1947년 5월 13일 신시내티 레즈와의 원정 경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경기장에 들어선 6688명의 관중은 로빈슨이 등장하자 야유를 퍼부으며 '검둥이'를 외쳤다. 그런데 경기장 분위기가 최악으로 치달을 무렵 다저스의 주장이자 유격수였던 피 위 리즈가 수비 위치에서 벗어나 로빈슨 옆에 섰고, 글러브를 벗더니 관중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와 어깨동무를 하고 담소를 나눴다.

 

경기는 다저스의 영봉패로 끝났지만, 이날은 흑인에 대한 야구계의 인식이 바뀐 커다란 분기점이 됐다. 이후 로빈슨은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데뷔 첫해 151경기에 출전해 타율 .297 12홈런 48타점 29도루를 기록하며, 이해 제정된 NL '올해의 신인상'의 첫 번째 수상자가 됐다. 그리고 로빈슨의 활약으로 다저스는 7년 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의 활약이 정점에 달한 해는 1949년이었다. 이해 로빈슨은 타율 .342 16홈런 124타점 37도루로 NL 타율-도루 부문 1위를 석권, MVP를 수상했다. 그는 타고난 주력을 활용하는 전천후 선수였다. 여기에 높은 타율과 빼어난 선구안은 그를 NL 최고의 1번 타자로 만들어줬다. 이런 로빈슨의 활약과 인품은 그 어떤 사회적 운동보다도 흑인에 대한 편견을 거두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다저스타디움에 세워진 재키 로빈슨 동상(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다저스타디움에 세워진 재키 로빈슨 동상(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상대적으로 많은 나이인 만 28세에 데뷔한 로빈슨은 10번째 시즌이었던 1956년 만 37세가 됐다. 그해 그는 1형 당뇨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다저스는 경기력이 떨어진 그를 뉴욕 자이언츠로 트레이드하려 했지만, 로빈슨은 이를 거절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데뷔 이듬해였던 1948년부터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한 흑인 메이저리거는 그 무렵 200여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은 투표권을 얻은 첫해 77.5%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로빈슨은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유니폼을 벗은 이후에도 흑인 인권을 위한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업가로서 흑인 일자리 창출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1972년에는 흑인 선수가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흑인 감독은 없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로빈슨은 최초의 흑인 감독 프랭크 로빈슨이 부임하는 것(1974년)을 보지 못하고 그해 향년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장례식에는 유명 야구 선수 대부분과 수만 명의 팬이 함께 했고, 그는 죽음 후에도 여전히 많은 이로부터 존경받고 있다. 이에 사무국은 1997년 4월 15일 그의 등번호 42번을 역사상 최초로 전 구단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이어 2004년 그가 데뷔한 4월 15일을 '재키 로빈슨 데이'로 지정했다. 2007년 4월 15일에는 켄 그리피 주니어가 사무국에 42번을 달고 뛰고 싶다고 건의한 것을 계기로 42번을 단 선수들이 점점 늘기 시작해, 2009년부터 메이저리그의 출장하는 모든 선수와 코치진, 심판들이 등번호 42번 저지를 입고 경기에 임하게 됐다. 이는 모두 한 위대한 야구 선수를 기리기 위해서다.

 

 

로빈슨의 이야기는 흑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로빈슨이 깬 인종의 장벽은 라틴 아메리카, 더 나아가 아시아 출신 메이저리거 배출로 이어졌다. 1994년 박찬호의 데뷔 역시 앞서 인종 차별의 벽을 허문 선배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바통은 현역 메이저리거인 류현진, 오승환, 추신수, 최지만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야구라는 스포츠가 자리 잡는 데는 홈런왕 베이브 루스의 공이 컸다. 하지만 로빈슨이 10년간 경기장에서 보여준 의연한 태도와 실력은 야구라는 종목을 넘어 프로스포츠, 더 나아가 미국 사회에 만연하던 인종 차별의 벽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다. 베이브 루스가 야구를 바꿨다면 로빈슨은 미국을 바꿨다(Ruth change baseball, Robinson change America).

 

이현우 기자 hwl05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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