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공작소] 새로 만난 세계 '불펜 대혁명'

세르지오 로모(사진=게티이미지 코리아)

세르지오 로모(사진=게티이미지 코리아)

 

[엠스플뉴스]

 

어느 분야건 상관없이,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그 시기를 지배하는 일종의 패러다임,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시대정신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한 때 불변의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던 이론이나 주장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더욱 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분석에 의해 무참히 타파되고 그 자리를 새로운 이론이 메우곤 한다. 사실 어느 정도 세상을 살면서 여러 경험을 쌓은 성인이라면 전혀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은 현상이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무엇이든 변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이다.

 

이제는 널리 알려진 격언처럼 ‘야구는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가정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야구만큼 패러다임이 자주 변화하고 우리에게 신선하고도 새로운 충격을 선사하는 스포츠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받아들일 수 있다.

 

실제로 최근 수년간 메이저리그 소식을 꾸준히 접하며 트렌드를 따라왔던 팬이라면, 타격 쪽에서 새로이 제시된 ‘플라이볼 레볼루션’이라는 재미있는 현상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일정 발사각을 유지하며 타구를 띄우기 시작하면 좋은 결과가 따라온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타격 방법론이다. 그 결과, 지난 2017년에는 9이닝당 홈런 개수가 프로야구가 처음 시작된 1871년 이래 최고 수준인 1.27개까지 치솟기도 했다. 트렌드의 변화로 인해 리그 역사상 전무후무했던 ‘대 홈런의 시대’가 열렸던 셈이다(물론 몇몇 연구에서는 홈런의 급작스러운 증가가 ‘플라이볼 레볼루션’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는 시각도 보여주고 있지만, 이 부분은 이 글에서 따로 다루지 않겠다). 그리고 이렇게 새로운 타격 방식을 채용해 슈퍼스타로 거듭난 여러 선수를 보며, 어려움을 겪던 많은 타자들은 ‘혹시…?’하는 생각에 자신도 변화를 자처하며 ‘혁명’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모든 타자들이 너도나도 하늘로 공을 띄우고 홈런과 장타를 양산해내는데 신경 쓰는 동안, 많은 언론들 또한 이런 현상에 주목하며 온갖 기사를 쏟아냈다. 앞서 언급한 ‘플라이볼 레볼루션’이라는 단어 역시 이러한 과정에서 만들어졌고, 야구를 사랑하는 많은 팬들은 이제 선수를 볼 때 타구의 발사각과 뜬공 비율까지 확인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이 혁명으로 인해 타자를 평가하고 바라보는 많은 팬들의 기준은 급격하게 바뀌어버렸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타자의 이러한 변화가 관심을 받는 와중에 정작 그보다 더 뚜렷하고 괄목할만한 변화가 일어난 투수들의 세계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 심지어 현장에서 수십 년 일해온 야구계 원로나 현업 종사자들도 ‘야구는 선발놀음’이라는 단어를 ‘시작이 반이다’라는 격언과 연결하여 사용하거나, 흔들리는 투수들에게 ‘윽박지르는 것보다 맞춰 잡는 투구를 펼치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조언을 스스럼없이 건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야구는 결국 기록의 스포츠이며, 기록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이제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기록지가 말하고 있는 바는 간단하다.

 

바야흐로, 지금은 ‘불펜’과 ‘삼진’의 시대

 

 

 

많은 타자들이 공을 띄우고 담장 밖으로 넘기는데 집중하기 전부터, 투수들은 이미 변화하고 있었다. 새로운 트렌드에 의해 타자들이 홈런을 노리는 스윙을 시작하게 된 이상 애초에 ‘인플레이 타구’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이야말로 실점을 최소화하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것을 많은 투수들과 코치들은 점차 깨닫고 있었다. 이는 ‘탈삼진 능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의 투구 트렌드 변화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9이닝당 삼진율이 1998년부터 2015년 사이에는 6.5부터 7.8 사이를 왔다갔다하다가 2016년에 급작스레 올라 역대 최초로 8개 이상이 된 것은 분명 의미가 크다. 이는 곧 투수들이 타자들의 변화에 맞춰 투구의 경향을 더욱 더 극단적으로 수정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보다도 더 큰 변화는 ‘선발 투수’에 대한 의존도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불펜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러한 트렌드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자면, 이 지면에 한계가 있을 정도로 길고도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 떠올릴 수 있는 변수만 하더라도 이미 한 손을 넘어 두 손의 손가락을 써가며 세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요인들을 두 가지 영역으로 간단하게 나눈다면, ‘비용의 문제’와 ‘실제 기록의 문제’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비용의 문제’는 상당히 직관적이다. 2017년 기준으로 선발 투수 상위 연봉자 20명의 평균 연봉은 무려 2326만 달러에 달하는 반면, 불펜 투수의 경우 겨우 1030만 달러에 불과하다. 상위 연봉자에 집중하지 않더라도, 2017년 기준으로 1000만 달러 이상을 받은 선발 투수는 무려 43명에 달하는데 반해 불펜 투수의 경우 겨우 12명에 불과하다. 해당 선수들이 연봉만큼 실제 활약으로 보여주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시장에서 선발 투수는 그 희소성만으로 타 포지션에 비해서 비싼 가격대가 형성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시즌 기준으로 불펜 투수들이 가장 많은 이닝을 책임진 팀들이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스몰마켓 팀들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큼을 알 수 있다.

 

 

(* CBA 보상픽: 메이저리그에서는 고유한 기준을 이용해 산정한 결과를 통해 스몰마켓으로 분류된 팀들에게 당해 신인 드랩에서 보상픽을 부여한다)

 

쉽게 말해, 날이 갈수록 치솟는 몸값을 감당하면서 양질의 선발 투수들로 로테이션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구단들은 드물며, 그렇게 하기 위한 기준선 또한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근래에 독특한 불펜 운용을 선보임과 동시에 호성적을 내며 ‘불펜 혁명’을 이끌었던 사례들인 2016-2017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댄 오테로-앤드류 밀러-코디 앨런), 2018 밀워키 브루어스(제레미 제프리스-조쉬 헤이더-코리 크네이블)가 모두 스몰마켓 팀으로 분류되는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 이들의 경우 2014-2015년의 캔자스시티 로얄스(캘빈 에레라-웨이드 데이비스-그렉 홀랜드)의 ‘파워 트리오’와는 다르게, 정석적인 7-8-9이닝 셋업-마무리 롤을 가져간 것이 아니라 밀러와 헤이더라는 가장 뛰어난 불펜 투수를 마무리가 아닌 경기 중후반 가장 중요한 상황에 2이닝 이상 기용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해나가는 방식을 택했다는 데에서 새로운 형태의 불펜 운용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트렌드의 변화는 이러한 경제적인 관점에서뿐 아니라, 세이버매트릭스로 대표되는 새로운 데이터 분석 방법론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의 감독들이 리그에 많이 등장함으로써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근래 들어 많은 세이버매트리션들은 단순히 선수 개개인의 활약을 수치화해서 데이터를 산출해내는 것을 넘어, 야구 경기를 상황별로 면밀히 쪼갠 후 각각의 상황에 따른 기록을 산출해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최근에 특히 주목할만한 데이터라 한다면 다음의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 홈 팀의 경우 경기 진행 상황에 따라 9회말 공격을 진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 유의)

 

이처럼 여러 상황별 지표를 살펴볼 경우, 경기의 진정한 고비는 8회나 9회가 아닌 오히려 경기 극초반인 1회와 6회임을 알 수 있다. 재밌게도, 6회는 선발 투수가 계속 투구할 경우 상대 타선과 3번째 만나는 순간과 거의 일치한다. 즉, 철저히 데이터에만 의존하여 투수 교체를 할 경우, 우리의 보편적인 인식과는 다르게 5회 혹은 6회 언저리에 선발을 내리고 팀에서 가장 강한 불펜 투수를 올리는 것이 나름의 근거가 있으며, 최근 몇몇 감독들이 이러한 투수 운용을 일관되게 시도하고 있는 이유 역시 알 수 있다.***

 

(*** 실제로 2018년 MLB 개막전에서 필라델피아의 새내기 감독 게이브 케플러는 팀의 에이스 애런 놀라를 5.1이닝 1실점(투구수 68개) 상황에서 내려 많은 지탄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해볼만한 시도였다고 해석할 수 있는 셈이다!)

  

 

한 가지 재밌는 점은 바로 1회의 실점률이 경기 전체를 통틀어 가장 높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상대의 선발 투수에 맞춰 최적화된 라인업이 가동되기 용이한 시기가 바로 1회라는 점(쉽게 생각하면 상위 타선과 바로 맞붙어야 한다는 점), 혹은 심리적인 영역으로 갈 경우 타자들이 가장 체력적, 심리적으로 ‘집중력’이 뛰어난 시기가 경기의 도입 부분이라는 점 등으로 그 원인을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욱 중요한 지점은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새로운 투수 운용 방법론을 도입할 수 있겠냐에 대한 논의이다. 이 부분에 대해 더 깊이 고민을 해본다면, 지금 몇몇 팀들이 보여주고 있는 독특한 불펜 운용을 뛰어넘는 아예 새로운 형태의 보직 파괴를 구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침 한 가지 사례를 찾아보자면, 올 시즌 파격적인 투수 운용으로 화제의 중심에 오른 탬파베이 레이스가 도입하고 있는 ‘4인 로테이션’을 찾아볼 수 있다. 이마저도 5월 초반 이후에는 기존 선수들의 부상 이탈로 인해 실질적인 고정 선발은 크리스 아처-블레이크 스넬-제이크 파리아(5월 23일 기준, 그마저도 부상을 당해 팀에서 이탈했다)로만 운용하고 나머지 경기에는 불펜 선수들을 내보내는 소위 ‘불펜 데이’를 치르면서 말 그대로 ‘가오리떼’ 야구를 하고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이틀 연속으로 불펜 투수인 세르지오 로모를 1회에만 등판시켜 막게 하는 기형적인 운용을 선보이며 많은 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탬파베이의 기록을 보게 되면 이런 식의 운용이 효과를 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시즌 시작 전만 해도 탬파베이는 아처와 스넬 정도를 제외하면 선발진이 마땅찮고, 불펜진 역시 양만 많을 뿐 질 면에서는 많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시즌이 약 50경기 가량 진행된 5월 25일까지는 기대 이상으로 잘 버텨주고 있다.

 

 

 

 

(**** 기록 집계 시, ‘선발’ 투수는 무조건 경기에 가장 처음으로 등판한 투수들의 기록만 반영된다. 즉, 탬파베이가 주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불펜 데이’에 출전하는 첫 투수가 1이닝만 소화하고 내려가고 이후에 등판한 2번째 투수가 5이닝을 소화하더라도, 1이닝만 투구한 투수의 기록이 선발로 집계된다. 실제로 탬파베이는 이번 시즌 선발 소화 이닝이 겨우 250.2이닝으로, 리그 전체 최하위를 기록중이며 29위인 뉴욕 메츠와는 무려 22이닝이나 차이가 난다. 불펜이 무려 225이닝을 소화했음을 감안하면, 사실상 선발과 불펜의 경계가 허물어진 팀이라고 봐도 무방한 셈이다.)

 

그러나 사실 더 주목해봐야 할 지점은 따로 있다. 다른 기록을 하나 더 살펴보자.

 

 

 

 

기존의 자료에서는 보편적으로 1회와 6회에 실점률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것과 달리, 오히려 1회와 6회에 유독 낮게 나타나고 있다. 탬파베이가 리그 평균 이하의 투수진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상당히 독특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비밀은 무엇일까? 비록 아직 통계의 표본 자체가 적긴 하지만, 탬파베이 투수 운용의 경향성을 보면 일종의 패턴을 도출해낼 수 있지 않을까?

 

올 시즌 탬파베이는 5월 30일까지 치른 52경기 중에서 23회에 걸쳐 5/6회 도중에 투수를 교체했다. 또한 1회부터 불펜 투수를 내며 사실상 ‘선발 투수’가 아닌 ‘경기의 첫번째 투수’ 개념으로 사용하면서 ‘불펜 투수’만으로 경기를 치러나가는 고정된 ‘불펜 데이’까지 이 계산에 합할 경우에는, 무려 30회에 달하는 경기에서 그 어떤 투수도 상대한 타자가 23명을 넘어서지 않았다(9명의 타자 기준 ‘두 바퀴 반’에 해당하는 수치). 굳이 ’23’이라는 애매한 수치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이 숫자를 정확히 ‘타선 2바퀴’에 해당하는 18로 줄이더라도, 탬파베이는 8번의 경기에서 어떤 투수도 같은 타자를 3번 이상 상대하지 않았는데, 이는 리그에서 가장 많은 수치에 해당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어떻게 수치를 조정해서 자르더라도, 탬파베이는 한 투수가 같은 타자를 최대한 적게 상대하는 쪽으로 운용하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이러한 상식을 파괴하는 운용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탬파베이의 ‘불펜 데이’에 첫 투수로 나서는 이들을 ‘오프너'(개시자)라는 독특한 말로 칭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을 염두에 뒀을 때, 위에 제시된 표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기록 분포는 템파베이가 투수 운용의 핵심 원칙을 통계상으로 주요 변곡점이 되는(즉, 같은 타자를 3번째로 상대하게 될 가능성이 큰) 6회를 기준으로 하여 설계하고, 투수들 역시 이를 염두에 두고 1회부터 전력투구를 펼치는 것이라고 본다면 충분히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새로운 논의가 또 하나 출발할 수 있다. ‘탬파베이보다 나은 수준급의 투수진을 갖춘 팀이 이러한 원칙을 염두에 두고 투수진을 운용한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사고 실험에 불과할 것이다. 아무리 최근에 투수 운용, 특히 불펜 운용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 해도, ‘승리’ 스탯의 존재와 경제적인 효율성의 문제 등으로 인해 곧장 파격적인 시도를 선보이기에는 한계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 야구는 경기 내외에 걸쳐 모든 면에서 지난 5년간 무서울 정도로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의외로 아주 작고 사소한 한 가지 발상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다니엘 머피가 공을 띄우기 시작하며 MVP급 선수로 거듭났을 때, 그리고 앤드류 밀러와 조쉬 헤이더라는 돌연변이가 등장해 6회와 7회를 삭제하면서 팀에 승리를 안겨주기 시작했을 때처럼, 모두가 생각은 해봤지만 차마 시도는 하지 못한 그 사소한 발상의 실현으로 성공의 단맛을 보는 이가 하나만 등장해준다면? 변화는 생각보다 빠르게, 그리고 무섭게 찾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야구공작소

송준형 칼럼니스트

 

기록 출처: fangraphs.com, baseball-referenc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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