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시절의 이만수. 많은 팬의 사랑을 받았던 현역 시절의 이만수 전 SK 감독은 당시 받았던 사랑을 이제 야구를 통해 되갚으려 한다. 그는 자신의 봉사와 야구 재능 기부를 항구적으로 지속하기 위해 '열린 재단' 창립을 꿈꾸고 있다(사진=삼성)
삼성 시절의 이만수. 많은 팬의 사랑을 받았던 현역 시절의 이만수 전 SK 감독은 당시 받았던 사랑을 이제 야구를 통해 되갚으려 한다. 그는 자신의 봉사와 야구 재능 기부를 항구적으로 지속하기 위해 '야구재단'을 만들었다(사진=삼성)

2016년 7월 5일. 전국엔 장마 기간과 맞물려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온 세상이 비에 젖어 있을 때 전 많은 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새벽부터 기차를 타고 대구로 향했습니다. 다행히 대구는 화창한 날씨로 절 환영해줬습니다.

제가 ‘고향’ 대구를 찾은 건 감사하게도 제 이야기를 들어주실 분들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대구 소재 모 백화점 임직원분들을 대상으로 제 경험담을 들려드릴 시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처음엔 ‘얼마나 많은 분이 절 기다리고 계실까’ 싶었습니다. 다들 바쁘신 분들일 테니까요. 하지만, 그분들이 모이신 곳에 들어갔을 때 전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무려 400명의 임직원분이 절 기다리고 계신 까닭이었습니다. 지금도 귀중한 시간을 허락해주신 그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제가 그분들을 모시고 이야기한 건 제 경험담이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프로야구인으로 살았습니다. 1982년 삼성 유니폼을 입었을 때부터 2014년 SK 감독에서 물러날 때까지 한국 프로야구와 미국 메이저리그를 오가며 오직 프로야구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35년의 프로야구 인생을 살면서 전 항상 저 자신을 ‘서비스맨’이라 생각해왔습니다. 프로야구를 통해 많은 분께 즐거움과 행복을 전달해드리는, 그래서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서비스맨’이 바로 프로야구인의 인생이라 생각해온 것입니다.

그래선지 백화점 임직원분들을 만났을 때 전 속으로 무척 반가웠습니다. 그분들도 저처럼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면서 자긍심과 보람을 느끼는 ‘서비스맨’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럽게 제 이야기의 주제는 서비스맨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먼저 말씀드린 건 ‘Big Smile(큰 웃음)’이었습니다. 전 현역 선수 시절부터 항상 웃으면서 최대한 즐겁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미국 메이저리그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코치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항상 밝은 미소를 짓고, 유쾌하게 사는 절 보고 화이트삭스 동료들은 ‘Big Smile’이라는 별명을 붙여줬습니다.

물론 저라고 힘들거나 좌절할 때가 왜 없었겠습니까. 왜 저라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겠습니까. 특히나 미국에 있을 땐 언어문제나 문화 차이로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전 그럴 때일수록 더 웃고 밝아지려 노력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웃고, 비관적인 생각보다 긍정적인 생각을 더 하면 할수록 복(福)이 올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화이트삭스 동료들이 ‘Big Smile’이라는 별명이 붙인 다음부터 제겐 좋은 일이 많이 생겼습니다. 언어의 벽과 문화 차이를 넘어 화이트삭스들과 진정한 동료가 됐으니까요.

두 번째로 말씀드린 건 ‘Ambassador(대사)’였습니다. 전 삼성에서 현역 선수로 뛸 때부터 아이들의 사인을 거의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성인 야구팬들의 사인 요청은 정중히 사양할 때가 있었지만, 아이들의 사인 요청만은 늘 받아들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는 메이저리그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화이트삭스 코치 시절 전 구장에 나가면 항상 어린이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아이들과 사진을 찍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함께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많은 팬이 생겼습니다. 화이트삭스 구단이 또 하나의 별명, 즉 ‘‘Ambassador(대사)’란 별명을 제게 붙여준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구단 관계자가 “이 코치가 팀 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해줘 고맙다. 팀 이미지에 아주 좋은 영향을 준다”면서 그런 별명을 붙여주더군요^^

사소한 일이라도 가볍게 여기지 않고, 내 역할에 충실히 하자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는 계기가 됐지요.

세 번째로 말씀드린 건 ‘Never ever give up(절대 포기하지 마라)’였습니다. ‘Never ever give up’은 제 인생 신조이기도 합니다. 어떤 일이든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35년 동안 한 번도 잊지 않았습니다.

힘들었던 미국 생활 초반 때나 SK 감독이 됐을 때도 전 수없이 많은 포기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전 속으로 ‘Never ever give up’을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포기하면 그때의 마음은 홀가분했을 겁니다. 심적 부담도 줄고, 스트레스도 사라졌겠죠. 하지만, 그때 포기했다면 전 미국야구를 경험하지 못한 채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을 테고, SK처럼 좋은 팀과 그보다 좋은 팬들을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무엇보다 평생을 ‘포기자’로 살았을 겁니다.

포기하면 순간은 편합니다. 그러나 포기하면 평생 후회하게 됩니다. 전 지금도 마음속에 ‘ ‘Never ever give up’를 새겨놓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있었기에 ‘야구 불모지’ 라오스에 찾아가 야구의 씨앗을 뿌릴 수 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네 번째로 말씀드린 건 ‘Passion(열정)’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게 뭔지 아십니까? 용광로요? 무더운 여름 날씨요? 아닙니다. 열정입니다. 열정은 쇳덩이를 녹이고, 무더운 여름 날씨를 시원한 가을 바람으로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장벽과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무기가 바로 열정입니다.

전 현역 시절 항상 열정적으로 뛰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절 보고 ‘헐크’라고 불렀습니다. 제가 설렁설렁 플레이했다면 누구도 절 ‘헐크’라고 부르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그라운드에서 ‘헐크’처럼 뛸 수 있던 건 제 마음속에 야구에 대한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야구 열정이 여전히 남아 있기에 제가 지금도 프로야구인으로 사는 것인지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린 건 ‘Event(이벤트)’입니다. 아마 기억하는 분이 많으실 텐데요. 2007년 전 화이트삭스 코치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습니다. SK 수석코치 제안을 받아들인 결과였습니다. 기쁘고 들뜬 마음으로 SK 유니폼을 입었던 게 엊그제 일 같군요. 하루하루가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만, ‘딱’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었습니다. 바로 관중이었습니다.

좋은 경기력을 바탕으로 팀이 승승장구하는데도 홈 관중은 크게 늘지 않더군요. 그래서 제가 결심한 게 팬들과 작은 약속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네, 인천 문학구장이 매진되면 제가 팬티만 입고 구장을 한 바퀴 돌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당시 많은 분이 “당신이 팬티만 입고 정말 구장을 한 바퀴 돌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문학구장이 매진될지는 더 의문”이라며 “말도 안 되는 약속을 한 게 아니냐”고 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문학구장이 몇 년 만에 매진되는 경사가 벌어졌습니다^^. 전 문학구장을 찾아오신 만원 관중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팬이 선물해주신 팬티를 입고 구장을 한 바퀴 ‘빙’ 돌았습니다.

유니폼을 입었을 땐 몰랐는데 팬티만 입고 구장을 한 바퀴 돌 생각하니 좀 창피하기도 하고, 약간은 난감하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자’는 다짐으로 전 구장을 돌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잘한 결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왜냐?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면서 팬들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이벤트라도 약속을 어기지 않고, 성심성의껏 수행할 때,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큰 성취감과 행복이 밀려온다는 걸 전 ‘팬티 퍼포먼스’를 통해 깨달았습니다.

백화점 임직원분들과의 짧은 만남을 마치고 전 곧바로 모 병원을 방문해 환자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분들과의 만남 속에서 전 건강의 소중함을 재차 확인했고, 제 방문으로 즐거워하시는 분들을 보며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서 모 마트를 찾아 ‘야구 기부’를 위한 팬 사인회를 했습니다. 역시 여기서도 많은 분과 만나며 제 존재가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분들을 통해 제가 알지 못하던 인생의 지혜를 배울 수도 있었습니다.

팬들에게 사인 중인 이만수(사진=이만수)
팬들에게 사인 중인 이만수(사진=이만수)

마지막 방문지는 대구 북구 사회인야구 팀이었습니다. 사회인야구 동호인분들을 뵙고서 전 제가 그토록 사랑하는 야구가 많은 분의 참여 속에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야구는 극히 특정한 사람들만 하는 엘리트 스포츠이자, 철저하게 ‘보는 스포츠’였습니다. 일반인이 참여하기엔 야구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했죠. 하지만, 지금은 지자체에서 야구장 건설에 열심히 나서면서 과거와 비교해 야구 인프라가 상당히 좋아졌습니다. 덕분에 어느덧 야구가 ‘보는 스포츠’에서 ‘하는 스포츠’로 변모해가고 있습니다. 사회인야구 동호인분들을 뵈면서 저는 마음속으로 한가지 다짐을 했습니다. ‘내가 힘이 될 수 있다면 이분들에게 꼭 도움을 주자’고요.

저는 요즘 라오스에 야구의 씨앗을 뿌리는 것과 동시에 전국을 돌며 ‘야구 재능 기부’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필요하고, 절 불러주는 곳이 있으면 강원도, 제주도 가릴 것 없이 어디든 뛰어가고 있습니다. 여기다 ‘헐크파운데이션’이라는 장학재단을 만들어 소외된 이웃과 함께 나눔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누가 칭찬하지 않아도, 주목하지 않아도, 도움을 주지 않아도 지금 이 일들을 해나갈 수 있는 건 제가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닥쳐도 ‘Big Smile(큰 웃음)’을 잃지 않고, ‘Ambassador(대사)’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려 애쓰며, ‘Never ever give up(절대 포기하지 마라)’하는 자세와 ‘Passion(열정)’으로 똘똘 뭉쳐 작은 ‘Event(이벤트)’도 소홀히 하지말자고 저 자신과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단 하루의 대구 방문이었지만, 전 많은 분을 만나 좋은 경험을 함께 공유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 차창 밖으로 내리는 비보다 더 많은 양의 뿌듯함과 행복감에 흠뻑 젖었습니다.

항상 절 응원해주시는 많은 분께 이 지면을 빌려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저는 비록 프로야구계 밖에 있습니다만, 프로야구인의 자긍심만은 프로야구계에 있을 때보다 더 강합니다. 앞으로도 전 프로야구인의 자긍심을 가슴에 품은 채 현역 시절 야구를 통해 받은 사랑을 야구로 되갚을 생각입니다.

간혹 “프로야구판을 떠났으니 실업자가 된 게 아니냐”고 걱정하는 팬들이 계신데요. 단언코 말씀드리지만, 잠실구장이나 강원도 시골 운동장이나 야구가 행해지는 곳 모두가 제겐 ‘꿈의 구장’입니다. 야구가 계속 되는 한, 절 야구가 필요로 하는 한, 전 실업자가 아니라 여전히 ‘현역 프로야구인’입니다. 감사합니다.


'마이 스토리' 전 현직 선수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야구팬들께 전하는 ‘한국판 플레이어스 트리뷴’입니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와 한국프로야구은퇴야구선수협회(한은회)와의 독점 제휴로 연재되는 '마이 스토리'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데스킹 : 엠스플뉴스 박동희 기자(dhp1225@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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