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와이번스의 김동엽은 공황장애라는 마음의 병을 이겨내고 다시 야구장으로 돌아왔다. (사진=엠스플뉴스 김원익 기자)
SK와이번스의 김동엽은 공황장애라는 마음의 병을 이겨내고 다시 야구장으로 돌아왔다. (사진=엠스플뉴스 김원익 기자)

[엠스플뉴스]

타자가 타석에 서는 모습을 떠올려보자. 벤치에서 기다리다 차례가 돌아오기 전 대기타석에서 먼저 몸을 푼다. 앞선 타자의 내용과 경기 상황을 유심히 확인하면서 투수를 상대할 준비를 마친다. 그리고 그 타자는 천천히 배터박스 라인에 들어선다. 그리고 몇 차례의 예비 스윙.

수 천명 혹은 수 만명의 관중들은 그 모습을 뚫어져라 지켜본다. 또 TV와 스마트폰 등을 통해 그보다 훨씬 많은 이목이, 타자와 투수의 몸짓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홈플레이트에서 18.44m 거리 떨어진 투수의 손에서 공이 뿜어져 나오는 승부의 순간.

만약 마음의 병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그 압박감을 이겨낼 수 있을까? 그런데 그것을 이겨낸 이가 있다. 그것도 공황장애를 말이다.

공황장애는 현대인의 질병으로 불린다. 극단적인 불안증상, 즉 공황발작이 주요특징으로 광장 공포증이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공공장소에서 극단적인 호흡곤란이 일어나거나 급기야 실신 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 마음의 병을 떨쳐내고 수많은 인파가 군집한 광장 속에 당당히 섰기에 더욱 놀랍다.

바로 SK와이번스의 새 거포 김동엽(25)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다. ‘엠스플뉴스’와의 인터뷰서 그 마음의 병을 털어놓은 김동엽은 “이젠 극복했다”며 활짝 웃었다. 동시에 자신이 “‘마음의 병’을 안고 있는 이들에게 용기나, 작은 희망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SK 새로운 거포 김동엽, 가능성을 대폭발로!

최고의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27경기 타율 0.357, 4홈런 15타점, OPS 0.987). 타격 컨디션은 어떤가요?

김동엽(이하 김): 전반적으로 몸 상태나 타격 감각이 많이 올라온 것 같아요. 아쉬운 점도 있었는데 빨리 극복하고 정상궤도로 올라왔습니다.

8월 들어서는 4경기 무안타로 잠시 주춤했지만 이후 연일 멀티히트 행진인데요.

김: 상대가 변화구를 지나치게 많이 던지다보니 머릿속에 혼동이 왔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제 스윙을 못하고 수싸움에서도 졌었죠. 그런데 그 때 상대 투수들이 집중적으로 변화구를 자주 보여준 것이 제겐 오히려 득이 됐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김: 상대 투수들이 워낙 변화구만 던지다 보니까(웃음) 오히려 더 빨리 적응하게 됐습니다. 노림수를 가지게 됐고, 몸이 더 빨리 반응하고 조금 더 자신감 있게 치니까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아요. (8월 타율 0.438)

특히 뜬공과 라인드라이브 타구가 많이 나오고 있다는 게 가장 고무적입니다.

김: 네. 타구가 일단 내야를 벗어나니까 안타도 많이 나오게 됐죠. 의식적으로 발사 각도를 예전보다 더 높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이죠?

김: 예전에는 약간 찍어 치는 다운 스윙이었어요. 장타를 늘리기 위해선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코치님들과 상의해서 (궤적이) 퍼지는 스윙이 아닌 히팅포인트가 앞으로 집중되는 스윙을 만드는데 중점을 뒀습니다. 최대한 라인드라이브 스윙 형태를 하고 있어요. 그게 점차 성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아요.

정경배 SK 타격코치 같은 경우엔 인 앤 아웃 사이드 배팅(In&Out Side Batting)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합니다. 특히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주문하나요?

김: 팔꿈치를 끝까지 붙여서 퍼지는 스윙을 하지 말고 손목이 최대한 안쪽으로 해서 나올 수 있게 배팅하라는 말씀을 많이 해주세요.

정의윤, 최승준 선수가 SK로 이적 후 해당 스윙에 중점을 두면서 확 달라졌죠. 김동엽 선수는 어땠나요?

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코치님께서 기술적인 조언이나 정신적인 조언도 많이 해주셔서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퓨처스리그에서 줄곧 좋은 성적을 낸 것을 고려하면 1군 데뷔(7.10)가 늦은 감이 있을까요?

김: (웃음) 퓨처스에서 6월부터는 감을 찾고 있었어요. 그런데 퓨처스에서 조금 더 오래 머물면서 ‘부족한 부분들을 더 발전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던 것 같아요. 1군 승격은 아예 엄두도 안내고 있었어요.

퓨처스리그에서도 시즌을 치르면서 삼진이 줄고 안타와 홈런 숫자가 점차 늘어난 점진적 발전이 인상적이네요.

김: 거의 3년 정도 경기를 안 뛰었더니 경기 감각이 전혀 없었어요. 투수들의 공도 너무 낯설었고요. 그런데 매일 경기에 나가니까 이젠 조금씩 그 감을 찾고 있는 것 같아요. 경기 감각을 빨리 찾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요즘도 그 적응을 빨리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단계죠.

결코 늦은 데뷔는 아닙니다. 김용희 SK 감독은 “우리 팀에서 힘만큼은 김동엽이 최고다”라며 “곧 물건이 나타날 것”이라고 김동엽 선수를 비밀병기처럼 말하곤 했습니다.

김: 진짜요? 아니에요(웃음). 정말 그러셨어요?

고독한 아시아 청년, 노력으로 자신감을 얻다

환한 미소의 김동엽은 요즘 순간이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했다. 야구를 떠나 있는 순간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다.  (사진=엠스플뉴스 김원익 기자)
환한 미소의 김동엽은 요즘 순간이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했다. 야구를 떠나 있는 순간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다. (사진=엠스플뉴스 김원익 기자)

자타공인 SK 최고의 ‘힘맨’, 비결은 뭘까요?

김: 원래는 몸이 굉장히 마른 편이었는데 미국에 가서 웨이트트레이닝을 제대로 접하게 됐는데 미국 선수들이 진짜 힘이 좋은 거예요. 저보다 덩치 큰 선수들이 오히려 더 웨이트트레이닝을 많이 하는걸 보면서 그 중요성을 체감했죠. 그땐 거의 보디빌더 수준까지 했던 것 같아요. 밥만 먹으면 웨이트트레이닝 했습니다. 일주일에 6일을 했으니까요.

(웃음)

김: 그래도 제 능력과 한계에 대해서 깨달은 중요한 시기기도 했어요. ‘나는 이젠 힘에선 누구한테도 안 지겠다’는 확신이 생겼죠.

자신만의 운동법으로 장점을 찾은 셈이네요?

김: 네. 미국선수들하고 비교해서도 힘이 부족하지 않다고 느꼈어요. 미국 코치나 선수들도 ‘너는 정말 힘이 좋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었거든요. 그때부터 힘에 대해선 확실히 자신감이 생겼던 것 같아요.

미국야구 도전 자체만 놓고 보면 잘 풀리진 않았어요.

김: 실패를 했지만 정말 솔직히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아요. 사실 그땐 정말 성공할 것이라는 마음으로 갔었어요. 그런데 가서 얼마 안 돼 어깨 부위 슬랩 수술도 하고 안 좋은 상황들이 겹치니까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이 됐어요.

재활기간이 길었는데, 어깨 상태 회복이 더뎠죠?

김: 그랬어요. 너무 답답해서 좌투우타로 변신하려고 시도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심리적으로도 많이 무너졌어요. 아프고 야구가 제대로 되질 않으니까 의욕을 많이 잃었던 시기였죠. 1년 반 정도 아예 경기에 나가질 못했고 한참동안 회복에 매달렸지만 송구를 못했어요. 그러다 팀에서 좌투 전환 권유를 받고 노력해서 왼쪽으로 어설프게라도 던질 수 있게 됏죠. 그러고 나선 경기를 바로 뛰었거든요. 그런데 현지에선 더 많은 것들, 완벽한 몸상태를 원하니까 그 괴리감이 컸어요. 2013년 스프링캠프 때 감이 진짜 좋았는데 그러다 갑자기 방출 됐죠.

몸이 아파서 제대로 뛰어보지도 못했으니 좌절감이 더 컸겠네요?

김: 그땐 정말 한국에 오고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야구했던 시기가 정말 행복했던 때였던 것도 같아요.

어떤 부분에서요?

김: (아련한 표정으로) 즐기면서 야구를 했어요. 미국야구 문화 자체가 그랬으니까요. 그때는 막상 잘 몰랐는데 이제는 그런 생각들이 많이 들어요.

이제 나이가 더 들었습니다.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겠네요. 지금의 야구를 하는 마음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김: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신 그대로예요. 부담이 생겼죠. 그런데 더 솔직한 마음은 이래요. 한국 나이로 27세가 결코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퓨처스에서부터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1군에 올라가기 전까지 나의 것들을 만들어서 살아남겠다’고 마음먹고 단체훈련이나 개인 연습, 수비 훈련들을 많이 했고 그게 조금씩은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어깨 상태는 어떤가요?

김: SK에 와서는 다시 오른쪽으로 던지고 있어요. 관리를 잘 받으면서 조금씩 최상의 상태로 맞춰가고 있는 단계고요, 점차 좋아지고 있습니다.

방출, 그리고 어둠보다 컴컴했던 그 시기

불운의 부상. 그리고 한국 복귀 유예기간 2년은 어린 청년에게 큰 마음의 족쇄가 됐다.  (사진=엠스플뉴스 김원익 기자)
불운의 부상. 그리고 한국 복귀 유예기간 2년은 어린 청년에게 큰 마음의 족쇄가 됐다. (사진=엠스플뉴스 김원익 기자)

천안 북일고 재학 시절이었던 2009년. 김동엽은 별처럼 빛난 선수였다. 이미 탈 고교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김상국 전 빙그레 이글스(한화 이글스의 전신) 주전 포수의 아들이기도 한 김동엽은 ‘제 2의 김태균’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당연하게도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관심이 쏟아졌다.

프로 1차 지명도 유력했다. 그러나 김동엽의 선택은 험난한 미국이었다. 시카고 컵스와 계약, 당당히 미국무대에 도전장을 던졌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본 니치난 학원으로 야구 유학을 떠났을 정도로 도전정신이 강했던 그였다. 이번에도 안정보다는 도전을 택했다.

그러나 또 한 번 태평양을 건넌 미국엔, ‘코리안 드림’은 없었다. 약관의 청년은 고교시절 혹사 여파탓에 곧바로 어깨 슬랩수술을 받아야했다. 그렇게 제대로 뛰어보지도 못한 채 재활에만 몇 년을 허비했다. 그러나 어깨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좌투우타로까지 변신해 미국 무대를 계속 발버둥쳤지만 2013년 갑작스러운 방출 통보를 받았다.

더 이상 미국에서 야구를 할 순 없었다. 그러나 한국으로도 돌아올 수 없었다. 바로 ‘국외파 2년 유예 조항’으로 불리는 제도 때문이었다. KBO(한국야구위원회) 규약 제107조는 ‘신인 선수 중 한국에서 고등학교 이상을 재학하고 한국 프로구단 소속선수로 등록한 사실이 없이 외국 프로구단과 선수계약을 체결한 선수는 외국 프로구단과의 당해 선수계약이 종료한 날로부터 2년간 KBO 소속구단과 선수계약을 체결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내 선수들의 집단 국외 진출 시 선수 유출 방지를 목적으로 만든 조항이다.

김동엽은 미국 무대에 문을 두들긴 촉망받는 야구선수에서 결국 미아 신세가 됐다. 그러나 그보다 큰 시련은 따로 있었다.

해외파 한국 복귀 유예기간(2년)의 기다림은 족쇄가 됐다. 성공에 대한 압박감 속에 완전하지 않은 몸 상태로 외로운 땅에서 그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던 시간 속에서 느낀 상처는 켜켜이 마음에 쌓였다. 결국, 한국에 돌아오자 마음의 병이 봇물 터지듯 터졌다.

해외파 복귀 선수들이 미국 무대 진출의 실패 이후 얻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유예기간 2년 공백 동안 불안감에 시달립니다. 김동엽 선수도 그 기간 동안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김: 네... (한동안 침묵). 사실은 언론에 이런 이야기를 처음 하는데요. 쉬면서 여러 생각들을 했어요. 한국에 오자마자 아팠거든요. 공황장애 증상이 왔어요.

아...

김: 모르겠어요. 왜 갑자기 그런 증상이 왔는지. 병원에서도 특별한 이유는 못 찾았어요. 그래서 아예 야구를 못했어요.

정말 힘든 시기였을 텐데 어떻게 극복했나요?

김: 처음에는 약을 먹었어요. 숨이 안쉬어졌거든요. 의사 선생님께서 ‘완벽하게 나으려면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때부터 조금씩 밖에 나와서 걷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그리고 야구에 의지하다보니 1년 지나서부터 마음의 병이 조금씩 잊혀지더라고요. 이젠 다 나았습니다.

항상 밝은 얼굴이어서 그런 아픔이 있었을지는 몰랐는데, 정말 놀랐습니다.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가 여러 상황을 겪으면서 느낀 압박감이 컸겠네요.

김: 네. 그런 것들이 전부 갑자기 터졌던 것 같아요.

‘원하지 않으면 이 부분은 기사로 다루지 않겠다’고 먼저 이야기를 꺼내자 김동엽은 “지금은 다 나았고, 이젠 지난 일이라서 괜찮다”며 되레 씩씩하게 말하며 말을 이어갔다.

김: 야구를 정말 하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또 동시에 두려움도 있었던 것 같아요. ‘만약 야구장에 다시 복귀하게 되면 사람들이 많은 곳에 서야 되는데 갑자기 숨이 안 쉬어 지면 어떡하지’같은 공포감이 들었죠. 그런데 막상 복귀하니까 그런 건 전혀 문제가 안됐어요.

다수의 사람이 있는 공간에 들어서면 그 순간 몸과 마음이 통제가 되지 않을 때가 있잖아요. 그걸 어떻게 이겨냈나요?

김: (미소) 저도 제가 공황장애를 겪으리라고는 정말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죠. 그렇지만 오히려 이걸 이겨내면서 더 멘탈은 강해진 것 같아요. 이 순간이 정말 꿈꿔왔던 것이고 즐겁기 때문에 괜찮은 것 같아요. 오래 기다렸기 때문에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쉽지 않았을 마음의 병을 극복하고 당당하게 선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도 용기가 될 것 같습니다.

김: 제가 (그런 마음의 병을 겪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됐으면 좋겠네요.

비룡의 도약 꿈꾸는 김동엽, 가을무대를 그린다

(사진=SK)
(사진=SK)

김용희 SK 감독은 김동엽을 두고 “파워만큼은 팀 내에서 뒤따라갈 선수가 없다. 좋은 자질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감 있게 외야로 타구를 보내라고 자주 주문하고 있다. 충분히 좋은 슬러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특히 김 감독은 “젊은 선수들이 갖춰야 할 중요한 부분이 궁구함의 간절함인데 지금까지 그런 부분을 잘 따라와주고 있는 것 같다”며 김동엽의 마음가짐을 특히 높이 평가했다.

김동엽의 성공을 높게 점치는 이들은 이뿐만이 아니다. SK의 에이스 김광현도 김동엽의 성장세를 누구보다 흐뭇해하는 이다. 스프링캠프 룸메이트로 인연을 맺은 이들은 지금도 원정숙소를 함께 쓴다.

1군에서 잘 풀리고 있는 모습을 기뻐하는 이들이 많더라고요. 김광현 선수도 열렬한 지지자입니다.

김: (웃음)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오키나와 캠프에서 제가 먼저 ‘룸메이트를 해달라’고 선배에게 말했어요. 조언도 듣고 옆에서 보고 배우고 싶었고, 또 잘 맞을 것 같았거든요.

김광현 선수는 잘 챙겨주나요?

김: 네. 도움 되는 것들도 많고 잘 챙겨주세요. 워낙 대선수인만큼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죠. 숙소에서 메이저리그 경기 보면서도 자주 야구 얘기를 많이 해요. 형이 “저땐 투수들은 어떤 코스로 주로 던지려고 한다”고 얘기하면 저는 “어떻게 상대하면 좋을까요?”라고 묻는 식이에요.

야구인생이 잘 풀리고 있는 이유가 있고, 또 잘 돼야 할 이유도 있네요. 남은 시즌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나요?

김: 3위 넥센과는 차이가 조금 있지만 끝까지 팀이 추격하는데 보탬이 되고 싶어요. 제가 아직 보여준 것들이 너무 적기 때문에 꾸준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도 제일 중요한 부분이고요. 팀에 기여해서 SK의 가을야구에 모든 힘을 쏟겠습니다. 안 아프고 엔트리에 끝까지 남아서 가을야구까지 꼭 해보고 싶어요.

김동엽의 왼 팔뚝에는 유명 락그룹의 멤버가 남긴 ‘Too fast to live Too young to die’ < 살기엔 너무 타락했고 죽기엔 너무 젊다>는 문신이 있다. 김동엽은 “철없는 시절의 치기였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 김동엽은 “지금은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것 그것밖에 답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아직 젊으니까 지금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김동엽이 마음의 병을 극복하고 지금 그라운드에 선 것은 분명 큰 용기를 가져야만 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순간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그의 약속을 응원하고 싶다.

김원익 기자 one2@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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