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히어로즈의 새로운 강자, 조재영 코치(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사연 히어로즈의 새로운 강자, 조재영 코치(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엠스플뉴스]

| 신일고 시절 고교 정상급 유망주였던 조재영, LG에 신인 2차 2번 지명으로 입단할 만큼 기대를 모았지만 4년 만에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필리핀으로 떠난 이유는? 11년간의 국외 생활을 접고 한국에 돌아온 이유와, 넥센 1군 코치로서 새 시즌을 맞이하는 각오를 엠스플뉴스가 들어 봤다.

넥센은 이번 시즌을 앞두고 코칭스태프 전면 개편을 단행했다. 장정석 운영팀장을 신임 사령탑에 앉힌 것을 시작으로 김동우 전력분석팀장을 배터리 코치에 앉혀 파격 인사라는 평가를 들었다. 여기에 고교 코치로 오래 활동한 오규택 코치, 퓨처스 코치 1년 경력이 전부인 조재영 코치를 새로 선임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스타 플레이어 출신 코치가 즐비한 다른 구단과 뚜렷한 대비를 이루는 코칭스태프 진용이다.

새로운 넥센 코치진은 일반 야구 팬에겐 베일에 싸인 존재다. 프로 선수 경력이 길지 않고 프로에서 지도자 경력도 길지 않다. 이 때문에 시즌이 시작하기도 전에 '경험이 부족하다' '1군 기술지도가 불가능하다'는 부당한 평가절하에 시달리기도 했다. 물론 한편으론 새로운 얼굴들이기에 기존의 관성을 벗어나 새로운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기대 섞인 시선도 적지 않다.

과연 넥센은 왜 이들을 새 1군 코치로 선임했을까. 넥센의 새 코치진은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엠스플뉴스는 넥센의 새 코치 3인(조재영, 오규택, 김동우)을 직접 만나 이들의 야구 인생과 코치로서 철학에 대해 들어 봤다. 이름하여 '넥.코.소(넥센 코치를 소개합니다)', 첫 번째로 주루코치를 맡은 조재영 코치를 소개한다.

고교 최강 신일고 톱타자, '포스트 유지현'으로 LG 입단

젊은 선수들과 함께 호흡하는 조재영 코치(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젊은 선수들과 함께 호흡하는 조재영 코치(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반갑습니다. 우선 조재영 코치를 잘 모를 수도 있는 야구 팬들에게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넥센 히어로즈 주루코치를 맡은 조재영입니다. 미성초등학교, 신일중, 신일고등학교를 거쳐 1999년 신인 2차 2번으로 LG 트윈스에서 4년간 선수 생활을 했습니다. 2016년 넥센 히어로즈 육성팀에서 수비코치로 코치 경력을 시작했고, 올해부터 1군에서 주루를 담당하게 됐습니다.

코치 임명 소식을 접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정규시즌 시작할 때가 다 되어 가네요.

11월 마무리 훈련부터 시작했으니까, 이제 다섯 달이 됐네요. 비활동기간을 포함하면 실제 기간은 그보다 짧구요. (웃음)

젊은 야구 팬들은 잘 모를 수도 있지만, 1990년대까지 고교야구를 잘 아는 분들께는 조재영이란 이름이 친숙하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아마추어 시절 최고의 호타준족으로 이름을 날렸고, 청소년대표까지 지냈잖아요. 야구는 어떻게 처음 시작하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아주 어릴 때 아버지께서 MBC 청룡(현 LG 트윈스) 어린이 회원에 가입을 시켜주셔서 야구를 좋아하게 됐고, 10살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어요. 그래서 야구부가 없는 초등학교에 다니다 미성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죠. 거기서 안치용 형과 처음 만나게 됐어요. 제가 1980년생인데, 치용이 형은 저보다 한 살 위 선배였죠.

안치용 해설위원(KBSN)과는 이후 신일고까지 쭉 같은 학교에 다녔죠.

신일중 신일고까지 계속 같이 다녔죠. 중학교 때부터 함께 한 멤버가 꽤 화려해요. 봉중근, 김광삼, 현재윤, 한상훈, 이런 선수들과 함께 야구를 했어요.

그 당시 신일고 멤버가 참 좋았습니다. 고교야구 최강팀 가운데 하나였죠.

저희 멤버가 신일중 때부터 성적이 굉장히 좋았어요. 그 멤버가 그대로 고등학교 올라갔으니 당연히 성적이 좋았고, 2학년 때는 전국대회 3연패까지 차지하면서 황금기였죠. 그런데 3학년 땐 봉중근이 미국에 가는 바람에 성적이 그렇게 좋진 않았어요. (웃음)

1998년엔 제3회 아시아 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대표팀에서도 활약했습니다.

그때 (이)택근이와 대표팀에서 함께 뛰었어요. 여기 와서 코치와 선수로 다시 만나게 될줄 생각도 못 했네요.

그렇게 강한 팀 소속으로 나갔다 하면 우승을 했으니, 야구하는 게 참 즐거웠을 것 같습니다.

근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어요. 2학년 때 전국대회 3연패를 하긴 했는데, 저 개인적으론 상을 ‘미기상’, ‘도루상’ 이런 상밖에 못 받았거든요. 중근이나 광삼이는 세 번 우승할 동안 타격상도 받고 최우수선수상도 받고 하는데 저만 못 받았거든요. 그래서 마지막 황금사자기 대회 끝난 뒤 모두가 즐거워할 때 저만 혼자 거기서 빠져나왔어요.

어딜 갔나요.

당시 동대문야구장 옆에 종합운동장이 있었는데, 거길 갔더니 치용이 형도 와 있더라구요.

상 못 탄 두 남자가 만났군요. (웃음)

다들 즐거워하는데 우리 둘만 거기서 앉아 있었죠. 더 잘하지 못한 게 분했다고 할까요. 그 멤버들 속에서 나름대로 선의의 경쟁이 있었어요.

워낙 다들 잘했으니까 상 하나 받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 아쉬움을 3학년 때 봉황대기에서 타격상을 받아서 만회했죠.

고교에서 뛰어난 타격 능력에 100미터를 11초에 뛰는 준족으로 유명했습니다. 신인드래프트에서도 LG 트윈스 2차 2번에 지명되어 계약금 1억 3천만 원을 받고 입단했습니다. 당시 언론 보도에는 '차세대 유지현'이란 평가까지 나왔는데요. 굉장한 유망주였단 얘깁니다.

막상 입단해서 첫해에는 시즌 막판 1군 엔트리 늘어났을 때 한번 올라간 게 다였어요. 2년 차 때는 만성 간염 때문에 군 면제 판정을 받고, 1군에도 거의 못 올라갔구요. 그렇게 있다가 2군 감독으로 오신 김성근 감독(한화 이글스)을 만났습니다. 운동량이 많다고 좋은 건 아니지만, 그 당시엔 많은 훈련 속에서 나름대로 느끼는 바가 있었고 덕분에 많은 성장을 할 수 있었어요.

젊은 선수라면 그럴 수 있죠.

3년 차에 1군을 왔다 갔다 하면서, 저 스스로는 야구가 좀 많이 늘었다고 느꼈어요. 이제는 스스로 생각해도 야구가 늘고 있구나. 그런 느낌을 받을 때인데, 막상 LG 내야진이 워낙 강하다 보니 별다른 기회는 없었죠. 유지현, 이종열, 신국환 등 내야수들이 빵빵했거든요. 주전들이 줄부상을 당해 한 번 정도 기회가 있긴 했는데, 그때는 하필 저도 경기 중에 부상을 입는 바람에 기회를 잡지 못했죠.

야구와 한국을 떠나 필리핀으로 향하다

찰떡호흡을 자랑하는 넥센 코칭스태프(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찰떡호흡을 자랑하는 넥센 코칭스태프(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하지만 2001년을 끝으로 1군 무대에서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연봉 문제가 시발점이 됐어요.

음.

첫 시즌에 신인 연봉이 2천만 원이었어요. 그런데 첫해가 1군도 뛰면서 나름 괜찮았다고 생각했는데 연봉은 2백만 원이 깎인 1천 8백만 원이 됐어요. 2년 차에는 거의 2군에 머물러서 어쩔 수 없다 하지만, 3년 차 때는 꽤 내부 평가도 괜찮았는데 계속 동결돼서 1천 8백만 원에 계속 머물렀죠. 3년 차 끝나고 협상하는데 구단 측 담당자가 선심 쓰듯이 동결해 준다고 얘기를 하더라구요. 어린 마음에 순간 욱해서는 그만.

설마 그 말을…

계속 이러실 거냐, 저를 쓸 생각이 없으신 것 같은데 차라리 다른 데 보내 달라고 말해 버렸죠.

폭탄을 투척하셨군요. 뭐라고 하던가요.

‘내가 책임지고 너 딴 팀 보낼 테니까, 나가고 싶으면 임의탈퇴서를 쓰라’고 하더군요. 그거 쓰면 풀어주겠다고요. 옥신각신하다 결국 욱해서 쓰고 나와버렸죠. 꼭 풀어줄 테니까,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라는 당부를 받았어요.

그 이후엔 어떻게 됐나요.

그렇게 사무실을 나온 뒤에 제 나름대로는 이런저런 노력을 했어요. 선수협에도 도움을 청했는데, 그땐 선수협이 생긴 지 얼마 안 될 때라 큰 도움이 안 됐어요. 계속해서 ‘언제 풀어줄 거냐’고 문의를 했는데, 기다리라는 답만 돌아오더군요.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걱정은 되고, 이런저런 후회가 밀려왔어요. 한순간 욱해서 자존심이 상해 나온 건데, 조금만 참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누군가 날 잡아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그러다 한참 지나서 더는 선수 등록이 안 될 때가 돼서야 전화가 왔어요.

다른 팀으로 보내주겠단 연락이었나요.

그게 아니라, ‘다시 야구 하고 싶어? 그럼 연습생으로 들어와’라고 통보하는 전화였어요. 야구는 하고 싶은데 다른 팀엔 갈 수가 없으니, 방법이 없었죠. 다시 들어갈 수밖에요.

상위 지명 유망주가 연습생 신세가 됐군요. 다시 돌아가서 생활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막상 가니 선수등록이 안돼서 2군 경기에도 나갈 수 없는 처지였어요. 2군 선수들 경기할 때 구리 야구장 뒤편 비닐하우스에서 혼자 티배팅을 치거나, 가끔 대학팀과 연습 경기에 나가면서 시간을 보냈죠. 스트레스가 많았어요. 아무래도 팀에서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요. ‘쟤 하기 싫다고 나갔던 애잖아’ ‘왜 다시 들어왔대?’라고 바라보는 것만 같았죠. 스트레스가 워낙 심해서, 자다가 응급실에 다녀오기도 했었죠. 그 때 생긴 편두통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유니폼을 벗어야 했습니다.

전반기 끝난 뒤 정식선수 등록 마감 시한이 있잖아요. 마지막 날 반나절을 남기고 절 풀어주더군요. 다시 반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됐어요. 상처가 컸죠. 어린 마음에 다시는 야구 쪽은 쳐다도 안 보겠다고 생각했어요. 반년 정도 아무것도 안 하며 보내다 야구를 떠나고, 한국을 떠났죠.

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했다는 얘긴 들었습니다.

한국이 싫다, 외국 나가서 남부럽지 않게 성공하겠다는 오기가 생겼어요. 차를 팔아서 손에 쥔 천만 원을 들고 필리핀 보라카이에 갔죠. 처음엔 잠깐 머물 생각으로 갔는데, 11년이나 거기서 살게 됐네요.

야구선수와 보라카이라, 서로 잘 연결이 되지 않는데요. 어떻게 거기서 살 생각을 하게 됐는지 궁금하네요.

외국에 가야겠다는 결심만 했지 제가 직장 생활을 해본 것도 아니고, 공부를 따로 한 것도 아닌데 물정을 잘 모르잖아요. 그저 천만 원이 있으니까 스킨 스쿠버 강사 자격증을 따고, 장비를 사면 세계 어딜 가도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자격증을 땄어요. 그런데 마침 스킨 스쿠버 샵을 운영하는 사장님이 여행사도 함께 운영하는 분이었거든요. 관광 가이드를 해보지 않겠냐고 제의하셔서, 마침 필리핀 관광청에서 주관하는 가이드 시험을 봤어요. 운 좋게도 합격해서 그때부터 가이드 생활을 하게 됐죠.

관광 가이드를 하신 줄은 몰랐네요.

이건 다른 얘긴데, 제가 고교 1학년 때부터 가세가 기울어서 가정 형편이 아주 어려웠습니다. 집 없이 단칸방에 혼자 지내면서 운동을 했어요. 저녁밥은 후배네 집에서 얻어먹는 생활을 했고, 그러다 보니 성격이 조용하고 어두운 편이었어요. 요즘에 옛날 알던 사람들 만나면, 제 표정이나 성격이 정말 많이 바뀌었다고 하세요.

가이드 경험이 성격을 바꾼 건가요?

그렇죠. 가이드를 해서 먹고 살려다 보니까 그렇게 성격이 바뀐 거예요. 일주일에 거의 5, 60명을 상대해야 하거든요. 그중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고, 그 사람들과 일일이 대화를 해야 하구요. 그러다 보니 얼굴도 점차 밝아지고, 남의 말을 들어주는 법도 익히게 됐구요. 제가 가이드를 꽤 잘하는 편이었어요. 여행사에서 매달 여행객 후기로 선정하는 베스트 가이드도 두 번이나 뽑혔습니다. (웃음) 아마 야구만 했다면 이런 경험들은 결코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정말 좋은 경험을 많이 했어요.

그 정도면 필리핀에서 꽤 안정된 생활이 가능했을 것 같습니다.

예. 가이드 하면서 모은 돈으로 식당도 하나 차렸고, 다른 사업도 시작했어요. 흔히 한국에서 필리핀 산다면 생각하는 생활 있잖아요. 집에 일해주는 아주머니, 밥해주는 아주머니 두고 편하게 살 수 있었죠.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강해서 거의 쉬지 않고 일만 했어요. 안 쉬고 일해도 힘든 줄을 몰랐어요. 야구 하던 시절에 비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몸도 쉴 새가 없었지만, 전혀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더군요. 야구는 쳐다도 보지 말아야지 굳게 결심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정신을 차려 보니, 언제부턴가 저도 모르게 하루도 빠짐없이 야구 기사를 챙겨 보고 있더라구요. 그 인터넷 느린 동네에서요.

바쁘고 풍족한 생활이지만 어딘가 허전함을 느끼셨던 모양입니다.

제 나이 서른다섯이 됐을 때쯤에 그걸 느꼈어요. 기사를 통해 친구들이 FA(자유계약선수) 하는 것도 보고, 내가 계속 야구를 했으면 어땠을까, 잘했을까, 나도 FA까지 했을까? 온갖 생각이 끊이지 않는 거예요. 그냥 필리핀에서 가이드 하면서 살면 나중에 죽을 때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죠.

그래서 한국 귀국을 결심하셨군요.

거기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는데, 어느 날 솔직하게 얘길 했죠. “나 이제 선수는 힘들 것 같지만, 늦기 전에 코치 한번 해보고 싶다”고요. 막연한 얘긴지 몰라도 나 같은 선수들, 2군에 있는 선수들에게 좋은 코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진짜로 코치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 몰라도 한국에 가고 싶다고. 그렇게 와이프에게 얘길 했어요.

저 같으면 반대할 겁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흔쾌히 좋다고 했어요. (웃음) 여기서 모은 돈 갖고 가서, 2년 동안 당신 하고 싶은 거 한 번 해보라고 응원해 줬어요. 덕분에 2014년 2월에 한국에 돌아와 방을 얻었죠.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한 코치 생활

조재영 코치에게 넥센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팀이다(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조재영 코치에게 넥센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팀이다(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10년 이상 공백기가 있는데 바로 코치를 받아주는 곳이 있을까 싶은데, 첫 출발은 어디였나요.

지도자를 하려면 자격이 있어야 하는데, 당시 서울대학교 베이스볼 아카데미를 수료해서 자격증을 따야 했어요. 그래서 서울대 앞에 오피스텔을 얻어서 봄과 가을 학기를 들었죠. 현장 경험을 쌓기 위해 모교인 신일고에서 인스트럭터도 3개월 정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손혁 코치님(현 MBC SPORTS+ 해설위원)과 처음 만난 것도 베이스볼 아카데미에서였네요.

넥센에는 어떻게 오시게 됐나요.

베이스볼 아카데미를 마친 뒤 처음엔 미국에 야구 유학을 가려 했어요. 모아놓은 돈 들고 일 년 정도는 버틸 것 같은데, 미국 쪽에 연결해줄 만한 다리가 없더라구요. 야구판 떠난 동안 누구와도 연락하질 않았고, 그러다 보니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겠더군요. 그러다 신일고 동문회에서 강병식 코치님을 만나게 됐어요.

뭐라고 얘길 하셨나요.

코치님, 제가 야구 코칭을 배우고 싶습니다. 혹시 팀에서 전지훈련이나 마무리훈련을 갈 때 제 사비로라도 따라가서 보조 역할을 하면서 배울 수 있을까요, 하고 여쭤봤어요. 그걸 강 코치님이 설종진 운영3팀장님께 전해주셨고, 설 팀장께서 제가 지나온 과정을 물어보시더니 이장석 대표께 말씀을 드렸더군요. 그런데 그때가 마침 저희 집 계약이 끝날 때였어요. 이사를 해야 하는데 어디로 갈지 정하지 못한 상태였죠. 그래서 고민한 끝에, 정 안 되면 다른 공부를 더 하면 된다는 생각에 화성 히어로즈와 가까운 안산으로 이사했어요.

설마.

이사하고 한 열흘 지났을까, 구단에서 연락이 왔어요. 이장석 대표께서 ‘사비로라도 배우고 싶다’는 열의를 높게 사셨는지, 육성팀의 인턴 코치로 받아 주셨어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진짜였군요.

넥센이 아니었으면 이뤄질 수 없는 일일 거예요. 아마 이런 팀은 여기 하나밖에 없을 겁니다.

육성군에서 생활은 어땠습니까.

일 년간 2군과 육성팀을 오가며 많은 걸 배웠어요. 모든 코치님의 말씀을 다 들을 수 있었고, 선수와 코치의 중간에서 모든 걸 다 듣고 볼 수 있었죠. 제게는 너무나 중요한 시간이었고, 앞으로 꼭 필요한 것들을 얻은 시간이었어요. 저 나름대로도 열심히 했습니다. 아침 7시에 나가서 밤 10시에 들어오는 생활을 계속했으니까요. 그러다 1년이 지나고, 구단에서 육성군 정식 코치로 계약을 해주셨습니다.

아내분도 많이 기뻐하셨겠습니다.

아내는 원래 야구의 '야'자도 몰랐어요. 외국에 산 지 오래됐기 때문에 한국에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집에서 저를 기다리는 동안 TV로 넥센 경기 중계방송을 엄청 열심히 봤어요. 첨엔 저를 받아준 팀이라고 충성심에서 보기 시작했는데, 계속 보면서 어느새 야구에 완전히 빠진 거예요. (웃음)

다들 그렇게 야빠가 되는 겁니다. (웃음)

나중엔 아내를 야구장에 데려오기 시작했어요. 집에만 있다 보니 스트레스받는 것 같아서, 1군 경기를 보러 야구장에 같이 나오곤 했어요. TV로만 보다가 경기장에서 실제로 보니까 더 좋아하던데요. 관중석에 앉아서 아내는 야구를 보고, 저는 저 나름대로 1군 코치와 선수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유심히 눈여겨봤죠.

그랬군요.

가장 관심 있는 게 주루 파트였거든요. 그래서 주루코치와 주자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부족한 현장감을 만회하려 했어요. 1루에서 주자들이 어떻게 리드하는지, 저 선수는 왜 뒤로 리드해서 한 발을 더 가는지, 이런 것들을 캐치하면서 나름대로 메모를 하고 생각을 정리했죠.

낮에는 육성군을 지도하고, 저녁엔 고척돔에서 야구를 보셨군요.

2년 동안 팀의 144경기를 다 챙겨봤고, 작년에도 여기 고척스카이돔에만 서른 번은 왔을 거예요. 팬들 사이에 섞여서 야구를 봤죠.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어떤?

(3루 쪽을 가리키며) 언젠가 나도 저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을까, 생각했죠. 전 저 3루 자리에 서고 싶었거든요. 지금의 제 자리에. 제겐 선수 생활을 제대로 못 해본 게 한이잖아요. 그런데 주루코치가 그라운드에서 선수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자리라서 하고 싶고, 자신도 있었죠.

그게 현실이 됐군요.

맞아요. 지난해 말에 구단에서 재계약 전화가 왔어요. 그런데 그냥 재계약 얘기가 아니라, ‘윗분들과 만날 일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제 딴에는 ‘어떤 생각을 갖고 코치를 하느냐’ 이런 걸 물어보려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틀 뒤에 다시 연락이 와서, 1군에서 코치를 하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어떤 기분이었을지 궁금합니다.

너무 좋은데, 한편으로는 또 머리가 복잡하더군요. 저쪽에선 ‘1군에서 하게 됐다, 축하한다’고 하는데, 저는 ‘예? 왜요?’라고 되물었어요. 그 ‘왜요?’에 여러 의미가 담겨 있는데요. 왜 나를 쓸까, 뭘 믿고 날 쓰겠단 걸까, 하는 생각에서 그렇게 반문한 건지도 몰라요. 저에겐 좋은 기회지만, 한편으론 걱정도 되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 그때부터 불면의 밤이 시작됐어요. 생각이 많아지고, 너무 설레기도 하고요.

혹시 이번에도 또 이사하셨나요?

안산에서 2년 계약으로 살다가 1군에 오면서 고척돔 바로 앞으로 이사했어요. (웃음) 저희 집 작은방에서 보면 바로 고척돔이 보입니다.

코치님이 의지를 갖고 뭔가를 실행할 때마다 현실로 이뤄졌단 게 참 신기합니다.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한편으론 제가 보낸 시간이 다 좋은 코치가 되라고 주어진 시간이 아니었나 싶기도 해요. 필리핀에서 많은 사람을 상대해보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선수들에게 가깝게 다가가지 못했을 것 같거든요. 가이드 경험 덕분에, 선수들을 오랫동안 참을성 있게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어요.

온갖 사람들과 상대하면서 스킬을 얻으셨군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이 선수가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소통, 소통하면서 제대로 소통 못 하는 분들도 많거든요. 저는 스킨십이 마음의 문을 연다고 생각해요. 아침에 만나면 먼저 인사도 해주고, 하이파이브 나누고 선수들과 가까워진 뒤에 마음의 문이 열리는 거죠. 물론 어느 정도 선은 지켜야 하지만요.

"코치가 만드는 선수는 없다, 선수를 믿는다"

조재영 코치는 국외에서 보낸 11년을 헛된 시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선수들과 호흡하는 방법을 배운 소중한 시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조재영 코치는 국외에서 보낸 11년을 헛된 시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선수들과 호흡하는 방법을 배운 소중한 시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일각에서는 신임 코칭스태프가 코치 경험이 많지 않다는 이유로 우려하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코치가 선수를 ‘키운다’는 관념이 강한 탓이기도 한데, 조 코치님 생각은 어떤가요.

일단 저는 코치가 선수를 키운다는 말에 절대 동의하지 않아요. 그건 자신이 좋은 코치로 인정받기 위해 자기를 내세워서 하는 말이라고 보거든요. 물론 선수가 ‘코치님 도움을 받았다’고 말할 순 있지만, 그런 식이라면 2군 선수들도 다 좋은 코치가 가르쳐서 다 성공해야 하는데 그렇지는 않으니까요. 선수를 자기식으로 고치기 보다는, 선수가 발전할 부분이 있으면 선수 자신도 느끼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바꿀 수 있는 훈련 방법을 가진 코치가 좋은 코치라고 생각해요. 저도 그렇게 하려고 많이 공부하고 있고요.

선수 본인이 단점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인가요.

단점을 선수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게 코치 나름의 드릴(drills)을 써서 선수 본인도 모르게 바꾸는 건데요. 예를 들자면 오른손으로 밥을 먹다가 왼손으로 먹으려면 불편하잖아요. 그런데 이 불편한 걸 느끼지 못하게,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왼손으로도 잘 먹을 수 있게 하는 거죠. 단점을 자꾸 이야기하고 지적하면 선수가 거기에 빠지게 되거든요. 그보다는 장점에 초점을 맞춰서 단점을 신경 쓰지 않게 한다는 겁니다.

처음엔 ‘넥센 새 코칭스태프가 1군에서 기술 훈련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1군에 있는 선수들은 다 자기만의 것이 있고, 노하우가 있는 선수들이죠. 선수가 뭔가 고민이 있어 다가올 때 그에 대한 답만 주면 되고, 그 답을 계속 지켜보면서 준비하고 있어야 좋은 코치 아닐까요. 내가 먼저 다가가서 뭔가 해보려고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보통 코치가 먼저 뭔가 해보려고 하면, 그러다 문제가 생기거든요. 실전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선수를 못 믿어서 뭔가 연습 때보다 더 많은 걸 해보려다 역효과가 납니다. 꾸준히 1군에서 야구를 해왔고, 자기 것이 있는 선수들이니까 믿어야죠.

그 욕구를 참는다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

당연히 하고 싶은 말이 많죠. 먼저 한마디 하고 싶고, 도움을 주고 싶죠. 그런데 이걸 기다릴 줄 아는 코치가 되고 싶고, 선수가 다가오게끔 하고 싶어요. 다가왔을 때 내가 줄 수 있는 걸 주기 위해서 선수가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려야죠. 또 선수가 다가와서 답을 줬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다음엔 제가 물어봐야죠. 이렇게 해보니 어떠냐. 이 친구가 별로 맞지 않는 것 같으면, 다시 다른 방법을 찾아보거나 준비해둔 다른 답을 제시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맡은 보직이 주루 코치인데, 어떤 방식으로 코칭을 하는지도 궁금한데요.

사실 주루에 대한 자료나 서적이 그다지 많지가 않아요. 그러다 보니 직접 몸으로 해보기도 하고, 잘 뛰는 선수들에게 ‘이렇게 해본 뒤에 어떤 느낌인지 알려달라’고 해서 방법을 찾기도 하죠.

이제 정규시즌을 앞두고 있는데, 올 시즌 넥센이 어떤 야구를 보여줄지 기대가 큽니다.

제가 있는 동안 잘했으면 좋겠어요. (웃음) 지금 감독님 코치님들과 함께 우승 한 번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전 넥센 팬들과 선수들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연 있는 선수도 많고, 팬들은 그런 사연을 좋아하고, 저도 마찬가지구요. (웃음) 이런 스토리의 정점을 찍을 수 있을 때, 함께 우승하면 더 좋지 않을까. 참, 제가 작년 포스트시즌 때도 경기장에 와서 관중석에서 봤거든요.

관중들 사이에 계셨군요.

예, 마지막 탈락하는 경기도 봤는데. 세상에 관중석에 우는 분들이 그렇게 많더라구요. 그 모습을 보면서, 넥센이 우승한다면 이분들이 그때는 기뻐서 울게 될텐데, 생각했죠. 그때 함께할 수 있을까, 꼭 그렇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신이 있으신 건 같아요.

즐기는 사람에겐 못 당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저는 지금 너무 즐겁습니다. 부담이나 스트레스보다는 열심히, 재미있게 하면서 이겨내자는 생각이에요. 지금처럼 즐겁게 야구하면 잘할수 있다고 믿어요. 그리고 믿음이 있을 때,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배지헌 기자 jhpae117@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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