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이글스의 새로운 희망을 꿈꾸며(사진=엠스플뉴스 전수은 기자)
한화 이글스의 새로운 희망을 꿈꾸며(사진=엠스플뉴스 전수은 기자)

[엠스플뉴스]

| '세상에 없던 말'. 한화 이글스의 야구 수어(手語) 프로젝트명이다. 한화 막내 직원의 작은 바람으로 시작된 '세상에 없던 말' 프로젝트는 야구를 넘어 한국 스포츠 전체에 큰 울림이 되고 있다.

전국의 청각장애인은 2016년 기준 250,334명이다. 이 가운데 야구를 직접 즐기는 이들은 14개 청각장애인 야구팀에 소속된 113명뿐이다.

113명의 청각장애 야구 동호인은 힘든 환경에서 야구를 한다. 우선 야구장을 구하는 게 만만치 않다. 자신들을 지도해줄 이를 찾는 것도 어렵다. 물론 여기까진 비(非)청각장애 야구 동호인들도 마찬가지 처지라, 특별할 게 없을지 모른다.

정작 비청각장애 야구 동호인들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어려움이 있다면 그건 바로 야구와 관련한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명하다. 제대로 된 '야구 수어(手語)', 즉 청각장애인들이 몸짓이나 손짓으로 표현할 수 있는 야구용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017년 기준 국립국어원에 등록된 수어는 총 24,792개. 이 가운데 야구 관련 수어는 ‘홈런, 세이프, 아웃’ 단 3개가 전부다. 이마저도 지역별로 사용하는 야구 수어가 각기 달라 경기마다 청각장애 야구 동호인들은 어려움을 호소해왔다.

이진호 대구 호크아이 감독은 “청각 장애인 야구 선수들이 모여 경기를 진행하면 항상 특정 야구 규칙이나 관련 문제들을 설명할 때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대화가 진행되더라도 서로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특히 팀마다 서로 사용하는 야구 수어가 달라 어려움이 많다”고 털어놨다.

청각장애 야구 동호인들이 그라운드에 서려면 삶의 일부분을 희생해야만 한다. 치고, 던지고, 달리기만 해도 모자란 시간이다. 하지만, 일치된 야구 수어가 없는 까닭에 경기가 몇 시간씩 지연되는 일이 다반사다.

청각 장애인들에게 희망 안긴 프로젝트, '세상에 없던 말'


'청각 장애인의 날' 시구자로 나선 성백철, 성민국 부자(사진=한화)
'청각 장애인의 날' 시구자로 나선 성백철, 성민국 부자(사진=한화)

6월 3일 대전 한화생명이글스파크. 한화 이글스와 SK 와이번스전을 앞두고 한 부자(父子)가 시구자로 마운드에 올랐다.

아버지 성백철 씨는 아들 성민국 군에게 수화로 메시지를 건넸다. 뜻은 이랬다. “(성)민국아, 포수를 향해 속구를 던져봐”.

아버지의 격려에 성 군은 “꼭 스트라이크를 던질게요. 잘 봐주세요”라는 손동작을 보였다. 비청각장애인들에겐 들리지 않았지만, 부자의 눈동자에선 서로에 대한 사랑과 행복함이 느껴졌다.

부자는 소릴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이다. 아버지 성 씨는 야구 마니아였지만, 수어로 야구를 설명할 방법이 없어 사랑하는 아들에게 야구를 가르쳐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젠 다르다. 아들에게 얼마든지 야구를 가르쳐 줄 수 있게 됐다. 야구 수어 프로젝트 ‘세상에 없던 말’이란 정식 야구 수어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한화는 지난해부터 ‘세상에 없던 말’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한화 박찬혁 마케팅 팀장은 "청각장애인들이 야구를 보고,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언어 체계가 없단 사실에 깜짝 놀랐다"며 “더 많은 계층이 야구를 즐기고, 서로 소통하며, 더욱 활기찬 일상을 누릴 수 있도록 돕자는 취지에서 ‘세상에 없던 말’ 프로젝트는 시작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간 많은 구단이 비슷한 마케팅을 기획했다. 그러나 청각장애인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성과물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한화는 이점에 초점을 맞추고, '세상에 없던 말'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형식적인 이벤트에서 벗어나 지속 가능한 사업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박 팀장은 “기존엔 홈런이나 기록에 따른 성금 기부가 사회 공헌 활동의 전부였다. 이런 활동은 다른 기업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사업이다. 그 때문에 우린 처음부터 프로야구 팀답게 좀 더 야구적인 프로젝트로 접근했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든다. 왜 하필 청각장애인이었을까. 한화 마케팅팀 서우리 씨는 자신의 대학 시절 경험을 회상했다.

“‘야구를 배우고, 즐기는데 어려움이 큰 계층이 어디일까' 고민하다 청각장애인 야구 대회를 떠올렸다. 대학 시절에 청각장애인 야구 대회를 취재한 경험이 있다. 당시 이닝마다 야구 수어가 없어 심판과 선수 사이에 의사소통이 쉽지 않음을 알게 됐다. '제대로 된 야구 수어만 있었어도 이런 불편함은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 매니저의 말이다.

정확한 지적이었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심판이자 그 자신이 청각장애인인 박대순 씨는 “그동안 공식 야구 수어가 없어 야구 관련 규칙들을 다른 청각 장애인들에게 설명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 한화에서 ‘야구 수어’를 만들어줘 정말 고마울 따름"이라며 "많은 청각장애 야구 동호인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새롭게 태어난 '야구 수어 148개’

야구 수어 제작은 지난해 10월부터 시작했다. 수어 제작팀을 구성함과 동시에 일반 야구인들이 사용하는 야구 용어를 정리하는 작업부터 돌입했다. 이후엔 제각각인 청각장애 야구인들의 야구 수어 데이터를 모았다.

수어 제작엔 ‘수화 전문가’로 통하는 이미혜 한국복지대학교 수화동역과 교수와 채태기 대한 농아인 체육연맹 회장을 비롯해 수어 연구원 10명, 청각장애인 야구선수 6명, 관련 협회 관계자가 힘을 보탰다.

순수 수어 제작 기간만 놓고 보면 4개월 정도가 소요됐다. 이 기간 총 135개의 야구 수어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이 교수는 “실제 청각장애인들이 사용하는 수어엔 독립적인 어순이 있고, 독특한 문법 체계가 존재한다. 이번 야구 수어는 제작 단계부터 수어가 가진 고유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는 데 중점을 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한화의 이번 프로젝트는 굉장히 놀라운 일이다. 민간에서 청각장애인들의 언어인 수어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라며 "그럼에도 한화가 정말 신경을 많이 써준 덕분에 청각장애 야구 동호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가 탄생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물론 제작 과정만 본다면 빛보단 그림자가 많았다. 한화 마케팅팀 서우리 씨는 “수어 만드는 시간은 비교적 길지 않았다. 하지만, 기존에 사용하던 야구 수어가 모두 제각각이라 거기서 공통적인 특징을 찾고, 의미를 일원화시키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며 "최선을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많은시행착오를 되풀이해야 했다"고 전했다.

이전 야구 수어 가운덴 사투리처럼 뜻은 같지만, 표현법은 다른 수어가 대부분이었다. 그나마도 뜻이 통한다면 다행이지만, 손동작부터 전혀 다른 경우가 적지 않았다. 수어 제작팀은 지역별 청각장애 야구인들과 일반 청각장애인을 모아 야구 수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구별하는지 테스트했다. 기존 14개 청각 장애인 야구팀의 의견도 적극 반영했다. 그들이야말로 실제 수어를 사용할 당사자들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어려움은 청각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수어 교육이었다. 한 예로 ‘볼넷’이란 단어를 모르는 청각장애인이 전체 인원의 80%가 넘었다. 수어 제작팀은 상황이 이렇자 수어 가독성 향상을 위해 고민했다. 그 결과 원안이었던 딱딱하고, 낮은 가독성의 사전 형식의 수어를 버리고, '렌티큘러(모션이 들어간 사진)'를 이용해 가독성을 높이는 수어 만들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서 매니저는 “수어 제작 시, 청각장애인 가운데 글자를 읽지 못하는 분이 있어도 쉽게 이해하시도록 영상 비중을 높였다. 여기다 인포그래픽과 영상을 첨부해, 정말 쉽게 이해하고, 쓸 수 있는 수어 개발에 초점을 맞췄다"며 "25만 청각장애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모든 이가 야구 수어를 이해했으면 하는 게 우리의 바람”이라고 힘줘 말했다.

'야구 수어'에 흠뻑 빠진 한화 선수단


대전 갈마루 지역 아동센터 어린이 30명이 수화로 애국가를 제창하고 있다(사진=한화)
대전 갈마루 지역 아동센터 어린이 30명이 수화로 애국가를 제창하고 있다(사진=한화)

개발만큼 중요한 게 바로 전달이다. 한화의 노력은 수어 개발에만 그치지 않았다. 현재 한화는 완성된 수어 보급과 교육 프로그램 개발에 힘 쓰고 있다.

1차 계획은 심판학교에 야구 관련 수어를 전달하는 일이다. 그런 다음 각 야구팀에도 수어를 전달해 보편화시킬 계획이다.

한화는 야구 수어의 공신력 강화를 위해 국립 국어원에 정식 수어 등록을 신청했다. 국립 국어원은 '야구 수어 제작에 대한 노고를 인정한다'면서도 '국립 국어원이 공식적으로 만든 수어가 아니므로 정식 등재는 어렵다'고 회신했다. 반면 대한농아인체육연맹에선 한화의 노력에 감사를 나타낸 뒤 야구 수어를 연맹 공식 홈페이지에 올렸다.

한화는 수어 홍보를 위해 청각장애인 야구단과 연예인 야구단의 친선 경기 및 청각장애인들을 구장으로 초청하는 행사 등을 계획하고 있다.

한화 박찬혁 마케팅 팀장은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더 많은 청각장애인이 야구 수어를 배울 수 있도록 교육하고, 청각장애인 야구에 대한 많은 팬의 공감을 끌어내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꾸준하고, 지속적인 한화의 '천안함 희생 장병 가족에 대한 지원'에서 보듯 한화는 말로만 그치는 구단이 아니다. 또 다른 지원 사업을 구상 중이다.

청각장애인 야구대회는 1년에 4회 정도 열린다. 물론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이마저도 제대로 열리지 못할 때가 다반사다. 한화는 수어 제작에 그치지 않고, 청각장애인들이 참가하는 야구대회 개최를 적극 도울 계획이다.

6월 3일 한화는 전국 300명의 청각 장애인을 홈구장으로 초청해 ‘청각 장애인의 날’ 행사를 가졌다. 이날은 특별히 갈마루 지역 아동센터 어린이 30명이 수화로 애국가를 제창했다. 박 팀장은 “그날 구장을 찾아주신 청각 장애인 가운데 한화 팬이 정말 많았다. 우리 홈구장을 자주 찾아주시는 분도 여럿이었다. 한 분은 응원할 때 주로 옆 사람 움직임을 보면서 박자를 맞춘다고 했다"며 한화의 수어 개발이 옆 사람의 움직임이 아닌 청각장애인 스스로 야구를 즐길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이날 홍창화 한화 응원단장이 펼친 수어 응원은 많은 감동을 불러왔다.

한화 선수들도 수어 제작에 큰 관심을 보였다. 전광판엔 한화 선수들이 직접 '수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왔다. 구단의 좋은 취지에 선수들 역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강경학과 하주석은 야구 수어를 곧 잘한다는 후문이다.

서 매니저는 “선수들이 먼저 와 내게 야구 수어를 물어볼 정도다. 그만큼 수어에 높은 관심을 보인다. 선수들이 먼저 구단 취지에 공감하고, 이후 행사에 적극 동참하겠단 뜻을 밝혔다”고 전했다.

소리 없는 어둠을 환하게 밝힌 '한화 마케팅'

대전 팬들을 발걸음을 구장으로 되돌린 한화 마케팅의 힘(사진=엠스플뉴스)
대전 팬들을 발걸음을 구장으로 되돌린 한화 마케팅의 힘(사진=엠스플뉴스)

청각 장애인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다. 서승덕 서울 빅토리 감독은 “야구 수어로 인해 야구를 좋아하는 청각 장애인들이 더욱 쉽고, 효과적으로 야구를 배울 수 있게 됐다”고 만족감을 나타냈다.

신명석 대전 농인 야구팀 단장도 “새로운 야구 수어가 만들어졌다, 우리에겐 더할 나위 없는 상황이다. 청각 장애인 야구에 큰 발전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수어 제작에 밤낮없이 매달렸던 한화 마케팅팀 직원 서우리 매니저는 이제야 한숨 놓을 수 있게 됐다. 서 매니저는 야구 수어 제작 과정에서 있었던 가슴 뭉클한 스토리를 소개했다. 한 청각 장애인 부부의 이야기였다.

“청각장애인 부부가 있었다. 남편이 평소 야구광이었다. 경기 관전은 기본이고, 직접 야구를 즐기는 분이었다. 하루는 남편이 동호인 야구경기에서 2루타를 기록했다고 한다. 너무 기쁜 마음에 집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자신의 ‘활약상’을 이야기했지만, 아무리 설명해도 야구 수어가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활약상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남편은 답답해하고, 아내는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고. 그러다 부부싸움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남편분이 그러셨다. '지금은 야구 수어 영상을 아내에게 보여주면서 함께 야구 이야길 나눌 수 있게 됐다'고. 그분의 이야기를 영원히 잊지 못할 거다.”

한화 마케팅의 본질은 '이글스'란 이름으로 모두 '한 가족'이 되는 것이다. 한화도 다른 구단처럼 크고, 화려한 마케팅을 기획하고 싶지만, KBO리그 10개 구장 가운데 가장 낙후된 구장 시설이라 그럴 수가 없다.

태생적 한계에 봉착해 있지만, 한화는 포기하지 않았다. 팬들을 위해 마케팅 활로를 열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세상에 없던 말’ 프로젝트는 한화 마케팅의 끊임없는 노력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래서 더 의미가 깊다.

최근 몇 년간 바람 잘 날 없었던 한화였지만, 마케팅은 쉬지 않고 움직이며 현장의 '내우외환'을 받아냈다. 그리고 더욱 뜨거운 열정을 한화 팬들에게 선사했다. 소리 없는 어둠을 환하게 밝힌 한화 마케팅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한화 같은 구단이 있다는 것. 우리 야구계엔 축복일지 모른다. 한화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전수은 기자 gurajeny@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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