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야구의 한 부분인 치어리더. 야구계가 이들의 안전과 처우 개선을 위해 머릴 맞대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이제는 야구의 한 부분인 치어리더. 야구계가 이들의 안전과 처우 개선을 위해 머릴 맞대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엠스플뉴스]

| KBO리그 전 구장에 '원정팀 치어리더실'이 생긴다. 지난해 10월 1일 터진 '잠실구장 SK 치어리더 성추행 사건'의 후속 조치다.

2016년 10월 1일 잠실구장에서 벌어진 ‘SK 와이번스 치어리더 성추행 사건’은 많은 이에게 큰 충격을 줬다. 특히나 관중에게 성추행을 당한 치어리더의 눈물과 프로구단 관계자의 ‘안전 불감증’이 알려지며 많은 이가 공분했다.

당시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경기 종료 후, 3루 응원단상에서 여자 화장실로 이동하던 SK 치어리더 A 씨는 구장 통로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LG 트윈스 유니폼을 입은 30대 남성으로부터 기습 성추행을 당한 것. A 씨는 큰 충격을 호소하며 수치심에 눈물을 쏟아냈다.

다음날 ‘엠스플뉴스’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진 이 사건은 그간 ‘안전과 인권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치어리더들의 엄혹한 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데 큰 계기가 됐다.

사건이 벌어진 일차적인 책임은 '추행 관중'에 있었다. 하지만, 당시 야구계와 치어리더들은 "추행 관중도 문제지만, 그런 사건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에도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목소릴 높였다.

실제로 A 씨가 경기 종료 후 화장실로 향한 건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였다. 그간 원정팀 치어리더들은 잠실구장 내 별도로 마련된 장소가 없어 일반 관중이 사용하는 화장실에서 의상을 갈아입었다. 여기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식사할 곳조차 없어 치어리더들이 화장실에서 끼니를 떼우기도 했다는 것.

선수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는 치어리더들의 처우와 현실이 알려지자 야구계와 팬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치어리더에 대한 대중의 높은 관심도에 비해 팬 의식과 구단 관계자들의 안전 문제에 대한 경각심은 여전히 낮다는 것이었다.

엠스플뉴스 치어리더 인권 문제 보도 뒤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한 치어리더실

KBO가 각 구단에 보낸 공문(사진=엠스플뉴스)
KBO가 각 구단에 보낸 공문(사진=엠스플뉴스)

지난해 10월 2일 '엠스플뉴스'의 보도가 나간 뒤 KBO(한국야구위원회)는 치어리더 안전 문제와 관련한 논의에 들어갔다. 그리고 해를 넘긴 4월 관련 회의를 열고, 각 구단 마케팅 관계자와 만나 치어리더 안전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종 검토 끝에 KBO는 구장 내 원정 치어리더실을 설치하기로 정한 것으로 확인됐다.

문정균 KBO 홍보팀장은 “지난해 잠실구장 사건을 통해 치어리더 안전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했고, 후속 조치의 일환으로 올 시즌 전 구장에 원정 치어리더실을 설치하기로 했다"며 "이와 관련해 10개 구단에 업무 협조 공문을 보낸 상태"라고 알렸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원정 치어리더를 전담하는 여성 경호원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올 시즌엔 어느 구장에서도 볼 수 없었다(사진=kia)
지난해까지만 해도 원정 치어리더를 전담하는 여성 경호원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올 시즌엔 어느 구장에서도 볼 수 없었다(사진=kia)

지난해 치어리더 성추행 사건 직후, 구단들은 저마다 안전 문제 예방을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이는 듯 했다. 몇몇 구단은 치어리더가 이동할 때마다 여성 경호원이 동행하도록 했고, 치어리더들의 귀갓길 안전 관리까지 책임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금은 과거로 회귀한 구장이 많다. 대부분의 구장에서 치어리더들을 지키던 여성 경호원은 온데간데없고, 여전히 치어리더들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기 일쑤다. 귀갓길에도 수많은 팬 사이를 지나쳐야 한다.

구단들의 입장은 제각각이다. 한 구단 관계자는 사견을 전제로 "왜 우리가 원정팀 치어리더까지 신경 써야 하느냐. 우리 치어리더들도 그렇게 보호하지 않는다. 원정팀 치어리더 안전은 본인들이 알아서 할 문제"라며 "원정팀 치어리더만 여자인가. 그런 식으로 따지면 구장에 오는 모든 여자에게 보안 요원을 한 명씩 붙여야 한다"는 말로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구단 마케팅 책임자는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치어리더들에게 보안 요원을 투입하면 관중 안전에 투입해야 하는 보안 요원의 수가 줄어든다. 이는 자칫 더 큰 사고를 불러올 수 있는 일"이라며 "원정팀 치어리더 안전 문제까지 신경 쓰기엔 비용 부담이 만만치 않다"고 전했다.

하지만, 수도권 구단의 한 관계자는 "원정팀 치어리더실만 마련해도 안전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다. 게다가 요즘 생긴 구장 대부분은 일반 관중과 선수, 야구 관계자들이 따로 이용하게끔 주차장을 분리 운영해 치어리더들이 팬들 사이를 지나쳐 퇴근하는 일이 없다"며 "추가 비용 문제가 생길 여지가 상당히 적다"고 설명했다.

원정팀 치어리더는 해당 구장을 찾는 관중에겐 ‘반가운 이들’이다. 관중 동원의 또 다른 힘이다. 하지만, 이를 귀찮게 생각하는 구단들은 여전히 치어리더를 '불청객'쯤으로 생각한다.

한 응원단 관계자는 “원정 응원 시에 불편한 게 있어도 홈 구단에 뭔가를 말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 구단에서 '앞으로 원정 응원 오지 마세요' 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되면 손해를 보는 쪽은 우리다. 그래서 작은 요청도 할 수 없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응원단 관계자의 미소 "이젠 대기실에 에어컨까지 생겼습니다."

고척 스카이돔에 설치된 원정팀 응원단실(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고척 스카이돔에 설치된 원정팀 응원단실(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원정 치어리더 안전과 인권 문제에 가장 발 빠르게 대응한 구단이 있다면 단연 넥센 히어로즈다. 넥센은 지난해 10월부터 원정 응원단상과 가장 가까운 곳에 원정 치어리더실을 마련했다. 지방 구단 응원팀 실장은 “넥센은 '힘없는 사람들'의 요청을 가장 잘 들어주는 구단”이라며 “무엇이든 말하면 최대한 빨리 조치를 취해준다”고 밝혔다.

KBO가 원정 치어리더실 설치 협조 공문을 보내자 가장 발 빠르게 이를 수용해 행동으로 옮긴 구단도 넥센이다.

잠실구장에도 원정 치어리더실이 만들어졌다. 한 치어리더는 “잠실구장에 원정 치어리더 대기실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야 사람다운 대접을 받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kt 위즈는 3루 내야 끝쪽에 있던 흡연실을 치어리더 대기실로 단장 중이다. 말이 '흡연실'이지 실제론 담배를 피웠던 곳이 아니기에 치어리더 대기실로 쓰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는 게 kt의 설명이다.

kt 관계자는 “응원단상과 가장 가깝고, 이동 동선이 짧은 곳을 찾다가 흡연실로 지정됐던 곳에 치어리더실을 마련하기로 했다"며 "kt위즈파크는 구장을 새로 증축한 상태라, 노후된 구장들보단 시설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KBO는 구장이 노후돼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하는 구단의 경우 컨테이너를 이용한 공간 확충을 지원하겠다는 입장이다.

10년 넘게 지방 응원단을 이끌어 온 한 응원단장은 “최근 잠실에 가보니 원정 치어리더 대기실에 에어컨까지 설치돼 있었다. 이 정도면 정말 달라진 것이다. 불과 지난해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며 "이젠 대기실도 생긴 만큼 더 공을 들여 팬들께 좋은 응원을 선보이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구단마다 나름의 사정이 있게 마련이다. 시설과 인력 문제로 치어리더 안전에 최선을 다할 수 없는 몇몇 구단의 현실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그 모든 사정에도 고척돔, 잠실구장, kt위즈파크엔 치어리더 대기실이 생겼다. 그리고 이 구장을 홈으로 쓰는 구단들은 안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특히나 '노후의 대명사'인 잠실구장에 치어리더 대기실이 생겼다는 걸 주목해야 한다. 시설의 문제가 아니라 관심과 노력의 문제일 수 있다는 뜻이다.

6월 15일 부산 사직구장에선 또다시 치어리더 성추행 사건이 벌어졌다. 지난해 잠실구장 성추행 사건과 동일한 방식의 범행이었다. '지난해 10월 성추행 사건이 터졌을 때 야구계가 더 기민하게 움직였다면 15일 성추행 사건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 건 그래서다.

치어리더 대기실 설치를 시작으로 야구장을 일터 삼아 살아가는 약자와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관심이 기울여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수은 기자 gurajeny@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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