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전양호 씨(왼쪽에서 두 번째)가 야구 관람을 즐기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김근한 기자)

시각장애인 전양호 씨(왼쪽에서 두 번째)가 야구 관람을 즐기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김근한 기자)

[엠스플뉴스]

6월 27일. 시각장애인들이 잠실구장을 찾아 야구를 즐겼다. 보이지 않는 다이아몬드를 상상하는 그들의 표정엔 웃음이 가득했다. 편견은 편견일뿐이다. 두산 베어스는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야구장을 꿈꾼다.

넓고 푸른 외야와 반듯한 다이아몬드 같은 내야. 가슴 설레게 하는 야구장 풍경이다. 여기에 선수들이 흘리는 땀과 팬들의 열정적인 응원을 보고 있으면 야구란 스포츠의 매력에 절로 빠지게 된다.
이 모든 건 야구장을 직접 찾아가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소위 말하는 ‘직관’을 하는 이유는 두 눈으로 직접 생생한 현장을 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두 눈으로 볼 수 있어야 야구를 즐길 수 있단 건 편견일 수도 있다. 비록 두 눈으로 볼 수 없더라도 보이지 않는 야구장의 다이아몬드를 상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6월 27일 잠실구장. 3루 파울 그물망 앞쪽 좌석에서 한 남자가 마이크를 입에 대고 끊임없이 말을 쏟아냈다. 자세히 들어 보니 경기를 직접 중계하는 상황이었다.
“6번 타자 오재일이 우중간을 가르는 타구를 날렸습니다. SK의 중견수와 우익수가 재빨리 공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성큼성큼 달려간 오재일이 2루까지 여유 있게 들어갑니다. SK 투수 박종훈이 모자를 벗고 한숨을 내쉬고 있습니다.”
“7번 타자 닉 에반스가 공을 쳤습니다. SK 유격수 왼쪽으로 흘러간 타구가 잡혀서 1루 송구로 연결됩니다. 에반스가 1루를 먼저 밟아서 세이프 판정을 받았습니다. 유격수 나주환이 아쉬운 표정으로 고갤 흔들었습니다. 1루 코치가 열심히 뛴 에반스의 등을 두드려 주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온라인 개인 방송을 진행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바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영상해설사의 현장 중계였다. 이날 야구장을 찾은 시각장애인들은 수신기로 영상해설가의 해설을 들으면서 야구를 즐겼다.
‘6월 27일’ 잠실구장의 특별했던 하루

휴먼인러브 차해룡 간사(사진=엠스플뉴스 김근한 기자)
휴먼인러브 차해룡 간사(사진=엠스플뉴스 김근한 기자)

6월 27일 시각장애인들이 평소에 오기 힘든 야구장에 온 건 두산 베어스의 초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두산은 문화체육 활동으로부터 소외된 장애인들에게 야구 관람 기회를 제공하고자 국제구호개발 NGO 단체 ‘휴먼인러브’와 함께 시각장애인 및 발달 장애 학생을 초청하는 행사를 기획했다.
이날 행사를 진행한 ‘휴먼인러브’ 차해룡 간사는 시각장애인들의 야구장 방문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강조했다. 비록 보이지 않더라도 야구장에서 직접 야구라는 스포츠를 느끼는 건 시각장애인들에겐 정말 소중한 순간이다.
“시각장애인분들이 혼자 낯선 환경이나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긴 쉽지 않다. 이렇게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단체로 움직여야 스포츠 관람이 수월하다. 야구에 관심이 많고 나이 드신 분들도 오지만, 어린 학생들이 사람이 없고 조용한 곳이 아닌 사람이 많고 떠들썩한 곳에서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자 오는 경우도 많다. 이런 흔치 않은 기회를 주신 두산 구단에 감사드린다.” 차 간사의 말이다.
두산도 이들의 안전한 관람을 위해 좌석을 3루 측 응원 단상 밑으로 준비했다. 그물망이 바로 앞에 있어 파울 타구에 맞을 위험이 적은 구역이다.
두산 관계자는 “시각장애인은 야구장에서 야구를 즐길 수 없단 편견을 깨고 싶었다. 두루두루 문화적인 혜택을 누려야 좋지 않나. 다 같이 야구를 즐길 수 있는 문화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원래 동물을 야구장에 들여올 수 없지만, 맹인안내견 같은 경우 특별히 들어올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라고 설명했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해설에 열중한 박경환 영상해설사는 더운 날씨에 연신 땀을 훔쳤다. 하지만, 함께 즐거워하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더욱 힘이 난 박경환 해설사였다. 영상해설사를 배출하고 파견하는 영광시각장애인 모바일점자도서관에 소속된 박경환 해설사는 이날 처음 야구장 해설사로 나섰다.
“보통 문화 행사나 교육이 있을 때 시각장애인들을 돕기 위해 찾아가서 상세히 해설하는 일을 하고 있다. 야구장은 이번이 처음이다. 원래 야구를 좋아하지만, 직접 해보니 생각보다 어렵다. 특정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드려야 귀로 현장감을 느끼면서 상상을 가능하게 할지 고민이다. 그래도 즐거워하시는 걸 보니 보람을 많이 느낀다.(웃음)”
“니퍼트의 투구를 한번 보고 싶다.”

박경환 영상해설사(오른쪽)가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실시간 중계에 나섰다(사진=엠스플뉴스 김근한 기자)
박경환 영상해설사(오른쪽)가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실시간 중계에 나섰다(사진=엠스플뉴스 김근한 기자)

야구장에서 생생한 소리와 함께 야구를 상상하는 이들의 목소리도 듣고 싶었다. 이날 야구장을 찾은 전양호 씨는 13년 전 시각을 잃은 후천적 시각장애인이다. 시각을 잃기 전까진 그 누구보다도 야구에 열정적인 팬이었다.
“나는 1995년 OB 베어스가 우승했던 시절부터 경기장을 자주 찾은 열성 팬이다. 박철순과 김상호의 플레이가 기억난다. 사실 최근에 뛰는 선수들의 얼굴은 잘 모른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마지막 두산 선수는 타이론 우즈와 김동주, 그리고 심정수다. 그들과 관련한 추억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다.” 전양호 씨의 말이다.
전양호 씨의 부인인 박은숙 씨도 같이 경기장을 찾아 즐겁게 관람했다. 박은숙 씨는 “남편이 밖에 나가는 걸 좋아해서 야구장에 같이 오니 정말 좋다. 결혼하기 전 남편을 야구장에서 처음 만났다. 결혼한 뒤 이렇게 같이 온 건 처음이다. 되도록 이런 문화 행사에 같이 나오려고 노력한다”라며 미소 지었다.
인터뷰 내내 즐거운 표정을 짓던 전양호 씨가 유일하게 느끼는 아쉬움이 있다. 바로 ‘에이스’ 더스틴 니퍼트를 직접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양호 씨는 “정말 잘 던지는 투수인 니퍼트의 투구를 한번 보고 싶긴 하다. 그저 귀로만 들어도 정말 멋있는 투수라고 느껴진다. 저렇게 키 큰 투수가 던지는 공을 치는 것도 신기하다(웃음). 안 보이는 게 답답하긴 해도 머리 안에서 야구를 그려본다. 그래도 야구장에 온 자체가 즐겁다”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야구장의 다이아몬드를 상상하다

원희승 씨(가운데)가 해설과 함께 야구를 즐기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김근한 기자)
원희승 씨(가운데)가 해설과 함께 야구를 즐기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김근한 기자)

같은 날 야구장을 찾은 또 다른 시각장애인 원희승 씨는 열렬한 SK 와이번스 팬이다. 마침 3루 측 SK 원정 응원단이 있었기에 원희승 씨는 야구를 더 즐겁게 관람할 수 있었다.
“야구를 초등학교 때부터 좋아했다. 문학구장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부모님께 야구장을 가자고 졸랐다(웃음). 결과와 상관없이 야구장에 오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최정 선수를 가장 좋아한다. 얼마 전 최정 선수가 한 경기 4홈런을 칠 때도 야구장에 있었다. 가족과 친구들이 다 야구를 좋아해서 야구장에 자주 온다. 오늘도 두산 팬인 친구와 함께 왔다.” 원희승 씨의 말이다.
원희승 씨는 선천적 시각장애인이다. 태어날 때부터 시각 장애를 겪은 것. 야구를 두 눈으로 직접 본 적은 없다. 그래도 야구를 향한 열정은 남들과 다를 것이 없다. 야구 플레이 하나하나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면서 야구를 즐긴다.
“어렸을 적부터 안 보였기에 야구가 어떤 스포츠일지 계속 상상했다. 부채꼴 모양의 야구장이 있고, 홈 플레이트를 기점으로 오른쪽이 1루, 왼쪽이 3루, 정면이 2루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내야 뒤로 외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투수와 타자가 마주 보고 포수가 홈 플레이트 뒤에서 공을 받는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선을 오른쪽부터 주자가 돌아 홈으로 들어온다.” 원희승 씨가 상상하는 야구장 설명이다.
원희승 씨는 이렇게 현장 관람과 함께 TV 중계로도 야구를 빼놓지 않고 즐긴다. 각자의 매력이 있다. 원희승 씨는 “문학구장에선 홈런일 경우 뱃고동 소리가 들린다. 관중들의 반응과 응원도 들리니 더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다. 잘 맞을 때 타구 소리도 다르게 들린다. TV 중계로도 야구를 즐기는데 당연히 방송사의 음질과 마이크 소리에 예민하다”라며 웃음 지었다.
원희승 씨는 시각장애인들이 조금 더 쉽게 야구장 예매와 관람을 할 수 있는 문화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원희승 씨는 “시각장애인들이 야구장에서 야구를 더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문화가 생기면 좋겠다. 예매 같은 경우 인터넷이나 모바일로 표를 사기가 어렵다. 시스템이나 제도가 더 발전했으면 좋겠다. 만약 SK가 가을 야구에 나간다면 직접 표를 예매해서 가고 싶다(웃음)”라고 말했다.
두산의 ‘두잇포유’, 모두가 함께하는 야구장을 꿈꾼다

시각장애 청소년 김가을 양이 지난해 시구에 나선 장면(사진=두산)
시각장애 청소년 김가을 양이 지난해 시구에 나선 장면(사진=두산)

두산은 소외된 계층을 위해 2015년부터 ‘두잇포유(Doo It For You)’라는 이름으로 팬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사회 공헌 활동에 나서고 있다. 이번 시각장애인 초청 행사처럼 좌석 나눔을 비롯해 난치병 환아, 장애 청소년 초청 시구 등이 시행됐다. 지난해 두산은 시각장애 청소년인 김가을 양과 안면 장애(세르비즘 병)를 앓는 백우현 군을 초청해 시구를 진행했다.

유희관(왼쪽)과 뇌성마비 보디빌더 김민규 씨(오른쪽)가 시구 연습을 하고 있다(사진=두산)
유희관(왼쪽)과 뇌성마비 보디빌더 김민규 씨(오른쪽)가 시구 연습을 하고 있다(사진=두산)

올 시즌에도 두산은 뇌병변 장애로 거동이 불편한 뇌성마비 보디빌더 김민규 씨를 시구자로 선정해 야구장으로 초청했다. 여기에 두산 투수 유희관이 김민규 씨의 시구 연습을 돕고 사비로 휠체어까지 선물하는 선행을 펼쳤다.
이렇게 두산은 특정 장애에 상관없이 모두가 야구를 즐길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데 앞장서고 있다. 특히 보이지 않는 다이아몬드를 상상하는 이들이 더욱 즐겁고 편리하게 야구장을 찾을 수 있는 KBO리그가 되길 기원한다.
김근한 기자 kimgernhan@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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