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잠실야구장 LG 트윈스 사무실 앞은 양상문 단장 퇴진을 요구하는 LG 팬의 집회 현장이 됐다. 12월 9일엔 집회 시작 이래 최다인 약 150명의 참가자가 모였다. 구단의 변화를 촉구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엠스플뉴스가 귀를 기울였다.

12월 9일 잠실야구장 앞에 모인 집회 참가자들이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12월 9일 잠실야구장 앞에 모인 집회 참가자들이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엠스플뉴스]

본격적인 겨울 추위가 시작된 12월 9일. 서울 도심엔 뼛속들이 얼어드는 찬바람이 불었다. 햇볕은 희미했고, 가만히 숨만 쉬어도 안경에 입김이 서렸다. 아무리 봐도 야구를 할 수 있는 날씨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이날 오후 잠실야구장 앞에는 유광잠바를 입은 LG 트윈스 팬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LG 응원가가 야구장에 크게 울렸고, 유광잠바를 입은 이들의 함성이 찬 공기 사이로 울렸다. 야구 경기를 보러 모인 팬들의 함성이 아니다. ‘양상문 단장 퇴진’을 주장하는 팬들의 집회에서 나온 외침이다.

그간 LG 팬들의 집단행동은 소규모로 진행됐다.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모인 2, 30명 정도의 팬이 야구장 앞에서 집회를 열고 서명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날은 그동안의 집회보다 규모가 컸다. 주최 측 추산 총 150여 명의 인원이 야구장 앞에 모여 목소리를 냈다.

“많아야 5, 60명 정도만 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많은 분이 참석해 주셨다.” 이날 집회를 주도한 표ㅇㅇ 씨의 말이다. 표 씨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강동엘지맨’이란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40대 야구팬이다.

현수막을 걸고 집회를 진행 중인 LG 팬들(사진=엠스플뉴스)
현수막을 걸고 집회를 진행 중인 LG 팬들(사진=엠스플뉴스)

집회는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집회 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유광잠바를 입거나, LG 모자를 착용한 팬들이 하나둘씩 야구장 정문 앞에 나타났다. 집회 시작 시각인 2시경에는 80명 가까운 인원이 구장 정문에 집결했다.

집회에 참여한 팬들은 각자 입은 옷과 모자에 ‘양상문 OUT’이라 쓴 스티커를 붙였다. 손에는 ‘LG 트윈스 팬은 양상문 단장의 퇴진을 원합니다’라고 적은 팻말을 들었다. ‘팬들은 구단과의 소통을 원합니다’ ‘LG는 왜 팬들을 사랑하지 않습니까’라고 적은 플래카드도 걸었다.

횡대로 늘어선 참가자들 앞에 집회를 주최한 표 씨를 비롯한 이들이 대표로 나서서 마이크를 잡았다. 이들은 미리 준비한 성명서를 큰 목소리로 읽었다. “이 자리에 모인 건 양상문 단장의 퇴진을 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지난 11월 정성훈 선수의 방출과 손주인 선수의 40인 보호 선수 제외는 그동안 참아온 트윈스 팬들의 분노를 폭발시켰습니다.” 성명서를 읽는 여성 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성명에서 이들은 양 단장의 감독 재임 3년을 실패로 규정했다. 실패한 감독의 단장 취임을 이해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양 단장이 감독 시절부터 ‘리빌딩’을 이유로 베테랑 선수를 내친 사실을 언급했다.

LG 구단의 부실한 팬 서비스를 비롯해, 팬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불통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양 단장은 구단의 불통을 상징하는 인물이란 게 집회에 참여한 이들의 주장이다. 이들이 ‘양상문 단장의 퇴진’을 첫번째 요구조건으로 내세운 이유다.

성명서 낭독이 끝나자, 참가자들은 LG 응원가를 큰 소리로 제창했다. “관중석에서 매일 즐겁게 부르던 응원가인데, 기분 탓인지 구슬프게 들린다.” 집회 참가자 김ㅇㅇ 씨의 말이다.

집회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인간 띠 잇기'를 하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집회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인간 띠 잇기'를 하고 있다(사진=엠스플뉴스)

참가자들은 구단 사무실 입구 앞으로 자릴 옮겼다. 일렬로 서서 ‘인간 띠’를 만들었다. 손에 손을 잡고 한 줄로 선 LG 팬들이 어느새 구단 사무실과 야구장을 에워쌌다. 구단 사무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불은 켜져 있었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두산 직원 한 사람만 이따금 구장 앞을 드나들었다.

“하필 오늘 구단 사무실 내부 수리공사를 한다고 들었다. 직원들이 사무실에 나오지 않은 것 같다. 양 단장도 나오지 않았다.” 집회 참가자 김 씨의 말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미 준비된 집회인 만큼, 우리 목소리가 어떻게든 전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인간 띠 만들기가 끝나자, 참가자들은 줄을 지어 구장 주위를 돌며 행진했다. 선두에 선 참가자가 큰 소리로 ‘양상문은 퇴진하라’고 외쳤다. 다른 참가자들도 따라서 같은 구호를 외쳤다. 시즌 때 관중석에서 ‘무적 LG’를 외치던 목소리들이, 이제는 단장의 퇴진과 구단의 사과를 외치고 있었다.

구장을 한 바퀴 돌고 난 참가자들은 다시 사무실 입구 앞에 집결했다. 현수막 앞에서 정성훈 등 팀을 떠난 선수들의 응원가를 크게 틀었다. 익숙한 응원가가 나오자 자신들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였다. 참가자들은 야구장 앞을 지나는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피켓을 높이 들었다.

이날 야구장 옆 실내체육관에선 가수 아이유의 콘서트가 예정돼 있었다. 콘서트를 보러 온 젊은 팬들이 지하철역에서 나와 집회 참가자들 앞을 지나갔다. 전세 버스에서 내려 콘서트장으로 향하는 한 무리의 외국인 팬도 보였다.

멀리 외국에서 좋아하는 가수를 보러 한국까지 찾아온 팬심과 주말 야구장에서 집회를 여는 팬심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150명 참가, 서명운동 6천 명 동참... 무슨 말이든 대답이 듣고 싶다”

야구장 주위를 행진하는 집회 참가자들(사진=엠스플뉴스)
야구장 주위를 행진하는 집회 참가자들(사진=엠스플뉴스)

LG 팬들의 집단행동은 지난 11월 23일 표 씨의 잠실구장 앞 1인 시위에서 시작됐다. 표 씨의 시위 소식이 온라인 LG 팬 모임에 널리 퍼졌다. 동참하는 팬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이들은 집회와 함께 ‘양상문 단장 퇴진’을 주장하는 서명 운동도 진행했다.

“서명 운동은 지금까지 오프라인에 약 500명이, 온라인까지 합하면 약 6천 명이 동참했다.” 이날 집회에 참여한 40대 여성 팬의 말이다.

집회를 처음 시작한 주인공인 표 씨는 지난 11월 30일부터 매일 LG그룹 여의도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병행하고 있다. LG 트윈타워 앞은 살을 베는 듯한 칼바람이 부는 자리로 악명높다. 표 씨는 찬 바람을 유광잠바 하나로 막아내며, 본사 정문 앞에서 시위를 이어가는 중이다.

“매일 점심시간부터 오후 2시까지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표 씨의 말이다. “본사 건물을 드나드는 직원 중에 신기하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지만, 가까이 와서 응원해 주는 분들도 있다. 고생한다며 ‘화이팅’을 외치고 가는 분도 있었다.”

표 씨가 시위를 시작한 지 벌써 보름이 지났다. 표 씨는 “처음 시작할 때와 비교하면 몸무게가 4kg 가까이 줄었다”고 말했다. 수염은 검게 자랐고, 양 볼은 움푹 팼다. 몇 시간째 찬 바람을 쐰 탓에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표 씨는 해마다 LG 경기를 100경기 이상 ‘직관’하는 열성 팬이다. “나는 약과다. 일 년에 120경기를 직관하고 야구 관람에만 1천만 원 이상 투자하는 친구도 있다. 하지만 LG가 지금 같은 운영을 계속한다면, 내년에 아무리 야구를 잘 해도 보러 갈 생각이 전혀 없다.” 표 씨가 단호하게 말했다.

여의도 트윈타워 앞에서 매일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표ㅇㅇ 씨(사진=엠스플뉴스)
여의도 트윈타워 앞에서 매일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표ㅇㅇ 씨(사진=엠스플뉴스)

집회에 참여한 팬 가운데 상당수는 구단의 인위적인 베테랑 선수 배제 움직임에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한 남성 참가자는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넌 체력이 안 돼’라거나 ‘뛸 수 없어’라고 판단하고 배제하는 건 부당한 대우다. 그걸 구단에서 인위적으로 정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전직 직업군인으로 최근 퇴역한 60대 남성 팬은 “장성호 해설위원도 과거 전성기 ‘스나이퍼’로 불렸을 때도 ‘좋은 타격감은 2주를 넘길 수 없다’고 했었다. 젊은 선수들이 그런 어려움을 겪을 때 베테랑들의 역할이 더 중요한 것”이라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또 다른 중년 남성 팬은 “성적이 나지 않아도, 경기력이 떨어져도 변함없이 LG를 사랑해왔다. 하지만 이번 일은 이해할 수 없는 정도의 선수단 관리이고, 강제적이고 인위적인 리빌딩이라 문제인 것”이라 주장했다.

이날 집회에 참여한 팬 가운데는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부터 36년째 LG를 응원해 왔다는 올드팬도 적지 않았다. 고교생 아들을 둔 한 여성 팬은 남편과 함께 이날 집회에 참여했다.

“프로야구 원년 때 마산에 살면서도 MBC 청룡을 응원한 팬이다. 주위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MBC를 응원하고 LG를 응원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LG에 어떤 베테랑도 남아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목소리를 내고 싶어 여기에 나왔다.”

물론 이들의 목소리가 전체 LG 팬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LG 팬 가운데 양 단장의 선수단 재편 방향에 찬성하는 이들도 분명 존재한다. 야구장 앞 집회라는 의사 표출 방식에 불만을 나타내는 팬도 있다. 야구계 일각에선 "일부 팬 여론에 따라 구단 운영 방향이 좌우되어선 안 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날 집회에 참가한 한 원년 팬은 "우리의 의도를 강요하거나, 누군가를 선동하기 위해 집단 행동을 하는 게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그저 우리의 이야기가 투명하게 전달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팬들도 많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함께 참가한 남성 팬도 “구단이 어떤 비전이나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팬들이 주말 영하 칼바람 추위에 150명이나 모인 게 그냥 이유 없이 모인 건 아니지 않겠나. 이 움직임에 뭐라고 대답이라도 들려줬으면 한다. 정말 답답하다”라고 했다.

한 팬은 “우리는 LG 팬인 동시에 ‘LG’라는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이기도 하다. LG의 다른 그룹의 제품들에 대해 소비자가 문제를 제기했을 때도 이렇게 침묵으로만 일관하는지 궁금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구단이 팬들의 목소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불만이다.

“집회를 그만하고 싶어도 명분이 있어야 한다. 이 정도로 많은 팬이 오랜 기간 목소리를 내면, 단장이든 구단이든 누군가 나와서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하거나, 대화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LG 프런트의 책임지는 자세가 없는 게 아쉽다. 떳떳하다면 왜 구단이 전면에 나서지 않는가.” 집회에 참여한 50대 남성 팬의 목소리가 커졌다.

오후 4시까지 집회를 이어간 참가자들은, 다음 모임을 기약하며 인사를 나눈 뒤 해산했다. 이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구장 앞과 본사 앞 집회를 이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표 씨는 “책임 있는 사람이 옷을 벗고, LG가 달라질 때까지 시위를 이어갈 것”이라 했다.

구단 사무실 문은 여전히 굳게 잠겨 있었다. 불은 켜져 있었지만, 드나드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두 시간 동안 집회 참가자들이 낸 목소리가 닫힌 문 안까지 전해졌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참가자들이 떠난 빈자리에는 정적만 흘렀다. 구장 앞에는 종일 찬 바람이 불었다.

배지헌 기자 jhpae117@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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