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열린 공주고-군산상고 전에서 공주고 선발투수 허민혁이 3.2이닝 무실점을 기록한 뒤 교체되고 있다. 투구수는 72개. 공주고 오중석 감독은 나흘 뒤 예정된 경기에 허민혁을 기용하기 위해 투구수 75개가 되기 전에 교체를 단행했다(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20일 열린 공주고-군산상고 전에서 공주고 선발투수 허민혁이 3.2이닝 무실점을 기록한 뒤 교체되고 있다. 투구수는 72개. 공주고 오중석 감독은 나흘 뒤 예정된 경기에 허민혁을 기용하기 위해 투구수 75개가 되기 전에 교체를 단행했다(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 고교 감독들의 불만 “투구수 제한으로 경기 치르기 힘들어”

- 야구협회 “하루아침에 탁상공론으로 만든 제도 아니야”

- 프로구단 “유망주 대부분이 프로 오면 재활에 매달리는 현실”

- 투구수 제한과 함께 과도한 연습량도 손 볼 필요 있다

[엠스플뉴스]

5월 22일 서울 목동야구장에서 열린 황금사자기 부산고-제주고의 경기. 이날 부산고는 강력한 패스트볼을 자랑하는 3학년 우완 정이황을 선발로 기용했다. 정이황은 빠른 볼의 힘을 앞세워 제주고 타선을 4회까지 1실점으로 틀어막았다.

그러나 5회 1아웃까지 잡은 뒤 정이황은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투구수는 59개에 불과했다. 잘 던지고, 투구수도 적은 투수를 왜 갑자기 교체했을까.

올해부터 고교야구에 도입된 투구수 제한 규정 때문이었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KBSA)는 올해부터 유소년선수 부상 방지 대책의 일환으로 초등부와 중학부, 고교야구에서 투구수 제한 규정을 도입했다.

고교 투수에게 1일 최다 투구수는 105개로 제한된다. 투구수 105개를 넘기면 즉시 마운드에서 내려와야 한다(단 노히터, 퍼펙트 진행 상황은 예외). 또 76구 이상 던진 투수는 4일을, 61구에서 75구를 던진 투수는 3일을, 46구에서 60구를 던지면 2일을, 31구 이상 45구 이하를 던지면 1일을 의무적으로 쉬어야 한다.

부산고 선발 정이황은 5회 1아웃까지 59구를 던졌다. 공 2개만 더 던지면 투구수 61개 초과로, 사흘간 마운드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부산고는 제주고에 승리할 경우 사흘 뒤인 25일 16강전을 치를 예정이었다. 정이황을 16강전에서도 활용하기 위해, 다소 일찍 마운드에서 내린 셈이었다.

비슷한 상황이 다른 경기에서도 나왔다. 20일 공주고-군산상고 전에서 공주고 선발 허민혁은 3.2이닝 무실점을 기록하고 교체됐다. 투구수는 72개. 원래 24일로 예정된 2회전 등판을 위해 75구가 되기 전, 미리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18일 안산공고-충훈고 경기에선 안산공고 에이스 좌완 전용주가 투구수 제한에 걸렸다. 전용주는 4.2이닝 동안 61구를 던지며 무실점하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잠시 외야로 나갔던 전용주는 팀이 2-2 동점을 만든 9회말 다시 올라와 2이닝 동안 19구를 던졌다.

경기는 연장 10회 접전 끝에 안산공고의 4-2 승. 그러나 이날 합계 80구를 던진 전용주는 사흘 뒤 열리는 2회전에 나설 수 없게 됐다. 결국 안산공고는 21일 열린 덕수고전에서 3-8로 패해 2회전 탈락했다. 경기를 지켜본 한 프로 스카우트는 “만일 전용주가 있었다면 안산공고에게도 기회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팀만 유리, 수준 이하 경기 속출’ 투구수 제한 향한 반발

투구수 제한 제도를 놓고 일각에서 반발이 나온다(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투구수 제한 제도를 놓고 일각에서 반발이 나온다(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잘 던지던 투수를 일찌감치 교체하고, 다음 경기를 위해 아껴두는 운영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고교야구에선 보기 힘들었던 장면이었다. 예전엔 에이스 투수가 한 경기에서 120구, 130구를 던지는 경우가 흔했다. 선발로 많은 공을 던진 뒤 다음날 다시 구원으로 올라오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감독들은 팀을 위한 희생이나 '투혼'이란 말로 포장했다.

최근 가장 극단적인 사례론 충암고 좌완 김재균(현 NC 다이노스)이 있다. 지난해 김재균은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팀이 치른 7경기 가운데 6경기에 등판했다. 특히 16강전부터 결승까지 5일간 437구를 던져 ‘혹사 논란’의 주인공이 됐다. 올해 NC에 입단한 김재균은 스프링캠프 당시 투구 재능과 구위에서 호평을 받았지만, 아직 1군엔 올라오지 못하고 있다.

김재균 뿐만이 아니다. 고교 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투수 가운데 상당수가 정작 프로에선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고교 시절 무리한 등판으로 팔꿈치와 어깨가 성치 않은 게 주된 이유다. 큰 계약금을 받고 입단했지만, 프로에선 재활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입단하자마자 바로 싱싱하게 공을 던지는 투수는 좀체 보기 드물다.

고교야구 경기 전광판에 표시된 투수의 투구수. 올해부터 투구수 제한 규정 도입으로 투구수 관리가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고교야구 경기 전광판에 표시된 투수의 투구수. 올해부터 투구수 제한 규정 도입으로 투구수 관리가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한 투구수 제한 제도. 그러나 도입 이후 일부 현장 지도자 사이에선 “투구수 제한 때문에 제대로 된 경기를 펼치기 어렵다” “대도시 강팀에게만 유리한 제도”라는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한 지방 고교팀 감독은 “수도권이나 부산 등 대도시 강팀은 선수가 많고, 투수도 풍부해 투구수 제한 제도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처럼 학생선수가 적은 팀은, 주력 투수가 투구수 제한에 걸리면 이후 정상적인 경기를 펼치기 어렵다. 나중엔 야수를 투수로 써야 할지도 모른다”고 불만을 표했다.

모 구단 스카우트도 “수준 이하의 경기가 속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방 고교는 경기에 투입할 만한 수준의 투수가 많지 않다. 이 투수들이 투구수 제한에 걸리고 나면, 감독은 스트라이크도 못 던지는 투수들을 데리고 경기를 치러야 한다. 올해 한 경기 볼넷 두 자리수 나오는 졸전이 자주 나오는 게 그 증거다”란 주장이다.

올해 고교야구에서 볼넷이 예년보다 많아진 건 사실이다. 지난해 전기 주말리그에서 경기당 7.51개 나온 볼넷은 올해 8.51개로 평균 1개 가량 늘었다. 경기당 2.99개였던 몸에 맞는 공도 3.35개로 증가했고 경기당 폭투도 1.94개에서 2.01개로 늘었다. 기록상으로는 지난해보다 투수들의 제구력이 다소 떨어졌다고 볼 만한 여지가 있다.

일각에선 올해가 지난 뒤 투구수 제한 제도를 다소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 서울권 감독은 “투구수 제한 제도의 도입 취지에는 동감한다”면서도 “경기를 치르는 입장에서 투구수 30개는 너무 적다는 느낌도 든다. 41구 이상일 경우 하루를 쉬게 하는 식으로 조금만 완화했으면 하는 생각도 있다”고 했다.

야구를 바라보는 철학의 차이...투혼으로 포장된 혹사는 이제 그만

덕수고 1학년 유망주 장재영. 주말리그에서 마무리 투수로 적은 이닝만을 던졌다(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덕수고 1학년 유망주 장재영. 주말리그에서 마무리 투수로 적은 이닝만을 던졌다(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그러나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와 상당수의 야구 관계자의 생각은 다르다. 한 협회 관계자는 이미 지난해부터 KBO(한국야구위원회)와 협회, 외부 전문가들이 TF팀을 꾸려 오랜 기간 머리를 맞대고 고민 끝에 만든 게 투구수 제한 제도다. 하루아침에 탁상공론으로 만들어낸 제도가 아니다. 현장 목소리도 충분히 청취했고, 공청회도 열었다며 "이제와서 딴지를 걸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협회의 한 이사는 “항상 개혁을 추구할 때는 적폐의 반발이 있게 마련”이라고 했다. “과거 주말리그 제도 도입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물론 볼넷이 속출하는 경기가 이따금 나올 순 있지만, 그런 경기가 실제로 얼마나 되겠나. 일부 극단적인 사례를 지나치게 확대해서 투구수 제한 규정에 흠집을 내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 이사의 말이다.

한 야구 관계자는 결국 야구를 바라보는 철학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절대적인 에이스 한 명이 투혼을 발휘해 약체 팀을 우승까지 이끄는 드라마가 아름답게 여겨지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에이스 한 명이 105구 이상 던지지 못하고, 여러 투수가 번갈아 마운드에 나서는 지금의 시스템이 시시해 보일지 모른다.”

이 관계자는 “하지만 낭만적인 투혼의 어두운 면을 함께 바라봐야 한다”며 “투혼의 결과로 부상과 수술을 겪고, 프로에서 소리없이 잊힌 투수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봐야 한다. 투구수 제한이 다소 덜 낭만적으로 보일 순 있지만, 결국엔 유망주들을 보호하고 오랫동안 활약할 수 있게 만드는 더 나은 제도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올해 고교 최고 유망주로 꼽히는 동성고 김기훈. 김기훈을 비롯한 많은 유망주가 투구수 제한 제도의 보호를 받게 됐다(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올해 고교 최고 유망주로 꼽히는 동성고 김기훈. 김기훈을 비롯한 많은 유망주가 투구수 제한 제도의 보호를 받게 됐다(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투구수 제한 규정 때문에 일부 강팀만 유리해지고, 약팀이 우승할 기회가 사라졌다는 비판도 사실과 다르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야구인은 “과거 약체 팀이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사례나 몇이나 되느냐”고 반문했다. “규정 도입 이전에도 전국대회 끝까지 올라가 우승을 차지하는 건 선수층이 두터운 강팀이었다. 오히려 이번 대회 들어 상우고가 순천효천고를 꺾고, 제주고가 부산고를 꺾는 등 이변이 속출하고 있다.”

협회 관계자는 “고교 감독들로선 투구수와 등판 간격 조절 때문에 머리가 아플 것이다. 감독들의 머리 싸움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경기가 자주 나올 것이다. 또 극적인 역전 승부도 자주 연출될 것으로 본다”고 했다.

실제 서두에 언급한 22일 부산고-제주고 경기는 제주고의 극적인 역전승으로 끝났다. 제주고는 정이황이 내려간 뒤 1-4로 뒤진 6회말 3연속 볼넷으로 만루를 만든 뒤, 부산고가 뒤늦게 마운드에 올린 우완 박진을 상대로 3루타와 역전 적시타를 때려 경기를 뒤집었다. 부산고가 다시 5-5 동점을 만들었지만, 마지막에 웃은 쪽은 제주고였다.

같은날 열린 야탑고-경남고 경기에선 양팀 감독의 대조적인 투수 운용이 눈길을 끌었다. 경남고 전광렬 감독은 고교랭킹 1위 사이드암 서준원을 선발로 내세웠다. 경기 전 전 감독은 "서준원에게 투구수 제한과 관계없이 긴 이닝을 맡길 계획"이라고 밝혔다. 반면 야탑고 김성용 감독은 에이스 안인산 대신 박명현을 먼저 선발로 냈다.

경기는 의외의 방향으로 전개됐다. 서준원은 경기 초반 위력적인 투구를 펼치다 중반 이후 공략당해 5이닝 2실점하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내려갈 때 투구수는 76구. 반면 야탑고는 선발 박명현이 깜짝 호투를 펼치며 2-0으로 중반까지 리드를 잡았다. 그러나 정작 에이스 안인산이 올라와서 점수를 내주며 3-1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3-3 동점까지 허용했다.

연습경기, 훈련량, 3연투 금지규정 미비 등 보완할 점도

투구수 제한은 고교야구 정상화의 첫걸음이다(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투구수 제한은 고교야구 정상화의 첫걸음이다(사진=엠스플뉴스 배지헌 기자)

협회 관계자는 어떤 면에선 고교 레벨에서 투구수 제한을 강제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안타까운 일이라 했다. 투수 혹사로 성적을 내려는 일부 지도자 때문에 강제적 규정을 도입했다는 설명이다.

실제 규정 도입 전에도 상당수의 젊은 감독들은 투수들의 투구수를 적절히 관리하고, 여러 투수를 골고루 활용하는 마운드 운영을 펼쳤다. 야탑고 김성용 감독은 “우리 팀은 주말리그 기간에 주력 투수들을 거의 기용하지 않고 나머지 투수들로 경기를 치렀다”고 했다. “휴식을 충분히 취한 만큼 이번 대회에서 힘있는 공을 던질 것으로 기대한다.” 김 감독의 말이다. 야탑고는 고교야구에서 ‘투수혹사’와 가장 거리가 먼 팀으로 손꼽힌다.

다만 현행 투구수 제한 규정엔 보완해야 할 점도 있다. 정규 경기에서 투구수만 제한했지 연습경기까지는 규제하지 못한다는 게 단점이다. 정규 경기에서 적은 공을 던지고 등판 간격을 조절해도, 연습경기에서 많은 공을 던지며 혹사당하면 규정이 의도한 대로 효과를 보기 어렵다.

투구수 제한 규정 이전에 더 근본적인 문제를 손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 야구인은 “한국 고교야구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과도한 연습량이다. 추운 겨울에도 선수들이 기술 훈련을 하고, 실전 경기를 하느라 피로가 누적되고 부상을 입는 경우를 자주 본다”며 “협회가 과도한 훈련량을 컨트롤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31구 이상부터 의무적으로 휴식일을 갖게 했지만, ‘연투 방지’ 규정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지금 규정대로라면 30구 이하를 던진 투수는 3연투, 4연투를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전국대회의 경우 8강전 이후 사흘 연속 경기를 치르는 상황이 나올 수도 있다.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다.

배지헌 기자 jhpae117@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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